나가사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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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사키 사건은 1886년, 청나라 북양 함대가 일본 나가사키에 기항했을 때 발생한 사건으로, 청나라 수병들의 난동과 일본 경찰과의 충돌로 이어진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양국 간의 협상과 중재를 통해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일본 내 반청 감정을 고조시키고 청일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일본은 이 사건을 통해 청나라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무장 변화가 있었으며, 이는 사건의 조기 진압 실패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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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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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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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발생일 | 1886년 8월 13일 - 1886년 8월 15일 |
발생 장소 | 나가사키 |
원인 | 북양함대의 나가사키 입항 |
목표 | 없음 |
방법 | 폭동 |
결과 | 일본 내 반청 감정 고조 |
교전 세력 | |
교전 1 | 청나라 해군 |
교전 2 | 나가사키현 경찰 |
지휘관 및 지도자 | |
청나라 해군 | 불명 |
나가사키현 경찰 | 불명 |
병력 규모 | |
청나라 해군 | 500명 |
나가사키현 경찰 | 불명 |
피해 규모 | |
총 사상자 | 57명 |
부상자 | 21명 이상 |
사망자 | 3명 |
체포 | 불명 |
기소 | 불명 |
벌금 | 불명 |
영향 | |
영향 | 청일 전쟁 |
2. 역사적 배경
1886년 7월, 청나라의 북양 함대는 조선 문제로 러시아와 대립하던 중,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 동해안의 원산에 출동했다. 이후 나가사키에 기항했는데, 주된 목적은 연료 보급과 정원급 전함의 수리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정원급 전함을 수용할 수 있는 도크는 나가사키에만 있었다.[10]
1886년 8월 1일, 정원, 진원, 제원, 위원 4척이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1]
이후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북양 함대의 나가사키 기항" 하위 섹션을 참고하면 된다.
2. 1. 청나라 북양 함대의 나가사키 기항
1886년 7월, 청나라의 북양 함대는 조선 동해안의 원산에 출동했다. 이는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청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를 위협하기 위함이었다. 이 출동 후 함대는 나가사키에 기항했는데, 그 목적은 연료 보급과 북양 함대의 주력인 정원급 전함의 수리에 있었다. 특히 정원급은 당시 수리가 필요한 단계였지만, 당시 동아시아에는 거대한 정원급을 수용할 수 있는 도크가 나가사키에 밖에 없었던 것이다.[10]1886년 8월 1일, 청나라 해군 북양 함대 소속 정원, 진원, 제원, 위원 4척의 군함이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1]
8월 13일, 청나라 수병 500명이 상륙했다. 이들은 유곽에서 등루 순서를 둘러싼 오해로 비품을 부수거나 폭행을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또한 나가사키 시내를 몰려다니며 상점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하고, 일부는 만취 상태로 시내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부녀자를 쫓아다니는 등 행패가 극에 달했다. 결국 나가사키현 경찰부 경찰이 진압을 위해 출동했고, 경찰과 청나라 수병이 칼을 빼들고 시가전을 벌여 양측 모두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수병들은 체포되었다.[3] 수병들은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한 일본도를 무기로 사용했으며, 이 사건으로 양국 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8월 14일, 나가사키현 지사 쿠사카 요시오와 청국 영사 채헌의 회담에서 청나라 측은 선원의 집단 상륙을 금지하고, 상륙을 허용할 때는 감독 장교를 동반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8월 15일, 전날의 합의를 어기고 오후 1시경부터 300명의 선원이 상륙했다. 이들 중에는 곤봉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도검을 구입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청나라 수병 몇 명이 파출소 앞에서 고의로 방뇨를 했고, 파출소 순경이 주의를 주자 이들은 순사에게 뭇매를 가했다. 300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순경 3명을 폭행하여 1명이 사망했다.[4] 이를 보고 있던 인력거꾼들이 격분하여 청나라 수병에게 덤벼들었고, 청나라 수병 패거리가 가세하면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통제에 나선 경찰관과 청나라 수병이 다시 칼을 들고 싸우는 사태로 번져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청나라 측은 장교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병 3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 측도 경감 3명이 부상당하고 순사 2명이 사망했으며,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인 민간인도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사건이었다.
2. 2. 조선 정세와 열강들의 각축
1886년 7월, 청나라 북양 함대는 조선 동해안의 원산에 출동했다. 이는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청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8] 출동 후 귀환하는 길에 함대는 나가사키에 기항했는데, 이는 연료 보급과 정원급 전함의 수리를 위한 목적이었다.[10] 특히 정원급 전함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나가사키에만 있는 도크에서만 수리가 가능했다.[10]1886년 8월 1일, 청나라 해군 북양 함대 소속 정원, 진원, 제원, 위원 4척의 군함이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9]
3. 사건 발생
1886년 7월, 청나라의 북양 함대는 조선 동해안의 원산에 출동했다. 이는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청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함대는 나가사키에 기항했는데, 주된 목적은 연료 보급과 정원급 전함의 수리였다. 특히 정원급은 당시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고, 동아시아에서 정원급을 수용할 수 있는 도크는 나가사키에만 있었다.
1886년 8월 1일, 청나라 해군 북양 함대 소속 정원, 진원, 제원, 위원 4척의 군함이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1]
3. 1. 8월 13일: 수병들의 무단 상륙과 난동
1886년 8월 13일, 청나라 수병 500명이 무단으로 상륙했다.[12] 이들은 유곽에서 등루 순서를 둘러싼 오해로 비품을 부수고 폭행을 일삼았으며, 나가사키시 내를 몰려다니며 상점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했다.[12] 일부는 만취하여 시내에서 난동을 부리고 부녀자를 쫓아다니는 등 행패가 극에 달했다.[12]이에 나가사키현 경찰부 경찰이 진압을 위해 출동했고, 경찰과 청나라 수병들은 칼을 빼들고 시가전을 벌였다.[3]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수병들은 체포되었다.[3] 청나라 수병들은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한 일본도를 무기로 사용했다.[12]
3. 2. 8월 14일: 양국 간 협상
1886년 8월 14일, 나가사키현 지사 구사카 요시오와 청국 영사관 채헌의 회담에서 청나라 측은 수병들의 집단 상륙을 금지하고, 상륙을 허가할 때에는 감독사관을 동반할 것을 합의했다.[12]3. 3. 8월 15일: 협정 위반과 재충돌
1886년 8월 14일, 나가사키현 지사 쿠사카 요시오와 청국 영사관은 회담을 갖고, 청나라 선원들의 집단 상륙을 금지하고 상륙 허가 시에는 감독 장교를 동반하기로 합의했다.그러나 다음 날인 8월 15일, 이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오후 1시경부터 300명의 청나라 선원들이 상륙했는데, 이들 중에는 곤봉을 소지하거나 도검을 구입한 자들도 있었다. 일부 청나라 수병들은 파출소 앞에서 고의로 방뇨를 했고, 이를 제지하는 순경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300명의 청나라 병사들은 3명의 순경을 공격하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격분한 인력거꾼들이 청나라 수병들에게 맞섰고, 여기에 다른 청나라 수병들이 가세하면서 큰 싸움으로 번졌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과 청나라 수병들은 또다시 칼을 들고 충돌하여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 측에서는 장교 1명과 수병 3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일본 측에서는 경감 3명이 부상, 순사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민간인도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4. 사건 처리
사건 이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은 나가사키에서 영국, 프랑스인 변호사가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도쿄에서는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 장관과 서승조 청나라 주일 공사가 협상을 진행하였고, 영국, 독일 등의 중재를 거쳐 타결되었다.[22] 사건 당사자는 소속 국가의 법률에 따라 처분하고, 일본은 52500JPY, 청나라는 15500JPY을 위로금으로 지출하기로 하였다.[15]
당시 일본의 개항 지역에는 치외법권이 있었기 때문에, 나가사키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청일 양국은 상호 군함 왕래에 관한 규칙을 정하고, 양국 군함이 상대국을 방문할 때는 상대국 측의 규칙에 따르고, 상륙하는 사병을 제한하기로 합의했다.[16]
4. 1. 양국 간 협상과 중재
사건 이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은 나가사키에서 영국, 프랑스인 변호사가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또한 도쿄에서는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 장관과 서승조 청나라 주일 공사가 협상을 진행하였으며, 결국 영국, 독일 등의 중재를 거쳐 타결되었다.[22] 그 내용은 사건 당사자를 소속 국가의 법률에 따라 처분하고, 일본은 52500JPY, 청나라는 15500JPY을 보상금으로 지출한다는 것이었다.[22]당시 일본의 개항 지역에서는 치외법권이 있었기 때문에, 나가사키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청일 양국은 상호 군함 왕래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양국 군함이 상대국을 방문할 때 상대국 측의 규칙을 지키고, 상륙하는 사병을 제한하도록 합의했다.[23]
4. 2. 치외법권 문제와 상호 합의
사건 이후 청과 일본 양국은 나가사키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인 변호사가 참여한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또 도쿄에서는 이노우에 외무 대신과 서승조 청나라 주일 공사가 협상을 진행하였으며, 결국 영국, 독일 등의 중재를 거쳐 타결되었다.[22] 이 사건의 당사자는 소속 국가의 법률에 의해 처분하고, 일본은 52500JPY, 청나라는 15500JPY을 위로금으로 지출하기로 하였다.[22]당시 일본의 개항 지역에서는 치외법권이 있었기 때문에, 나가사키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청일 양국은 군함 왕래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양국 군함이 상대국을 방문할 때 상대국 측의 규칙을 지키며, 상륙하는 사병을 제한하도록 합의했다.[23]
5. 사건의 영향
나가사키 사건은 단순한 청나라와 일본 간의 갈등을 넘어,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내에서 대대적인 군비 확장과 더불어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특히, 나가사키 사건은 일본이 청나라의 정보 암호를 해독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우연히 입수한 북양 해군 수병의 사전을 통해 암호 해독의 실마리를 찾은 일본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주도 하에 치밀한 작전을 통해 청나라의 암호를 완전히 해독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훗날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6][7]
5. 1. 일본 내 반청 감정 고조와 군비 확장
나가사키 사건 이후 청나라는 일본에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청나라는 정원을 비롯한 최신식 전함을 보유하여 일본 해군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서도 일본이 청나라에 패배했기 때문에, 당시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 관계는 청나라가 우위에 있었다.[5]이 사건은 1884년 갑신정변과 함께 일본 내 반청 감정을 자극하여, 훗날 청일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4] 또한 도야마 미쓰루 등이 결성한 정치 결사 현양사가 '민권론'에서 '국권론'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양 함대는 이후 1891년과 1892년에 두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두 차례 모두 일본 정부의 사전 양해를 얻어, 표면적으로는 양국 간의 친선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1891년 방문에서 북양 함대 수행원은 조선소와 관공서를 방문했고, 주력함인 정원에는 일본 황족, 장관, 해군 군인을 초청하여 내부를 공개했다. 그러나 이는 정원의 함내 구조와 북양 함대 사병의 낮은 숙련도를 일본 해군에 노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청일 전쟁 발발 이후 황해 해전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24]
나가사키 사건은 일본 측에 청나라에 대한 위협과 적개심을 느끼게 했고, 일본은 청나라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해군 확장을 추진하게 되었다.[18]
5. 2. 청일 전쟁의 원인 중 하나
나가사키 사건 이후 청나라는 일본에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청나라는 정원을 비롯한 최신식 전함을 보유하여 일본 해군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서도 일본은 청나라에 패퇴했기 때문에, 당시 청일 관계는 청나라가 우위에 있었다.[5]이 사건은 1884년 갑신정변과 함께 일본의 반청 감정을 자극했고, 훗날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4] 또한 도야마 미쓰루 등이 결성한 정치 결사인 현양사가 당초의 ‘민권론’에서 ‘국권론’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청나라 정보 암호의 암호 해독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우 오고로라는 일본인이 한자 사이에 0-9가 표시된 북양 해군 수병의 사전을 입수했다. 일본 정보부는 이 문자와 숫자를 분석하여 청나라 암호를 해독하는 지침임을 확인했다. 암호를 완전히 해독하기 위해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문서를 청나라 대사 왕펑차오에게 제공했다. 다음 날 일본 텔레콤 공관은 대사관에서 총리아문으로 보낸 전보를 가로채 해독했다. 이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6][7]
북양 함대는 1891년과 1892년에 일본을 방문했다. 두 차례 모두 사전에 일본 정부의 양해를 얻었고,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친선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였다. 1891년 방문에서 북양 함대 수행원은 조선소와 관공서를 방문했고, 정원에 일본의 황족, 장관, 해군 군인을 초청해 내부를 공개했다. 이는 정원의 함내 구조와 북양 함대 사병의 낮은 숙련도를 일본 해군에 노출시켜, 황해 해전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7]
5. 3. 청나라 정보 암호 해독
이 사건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는데, 그것은 바로 청나라 정보 암호의 암호 해독이었다. 우 오고로라는 일본인은 중국 문자(한자) 사이에 0-9가 표시된 북양 해군 수병의 사전을 입수했다. 일본 정보부는 이후 이 문자들과 숫자를 분석하여 청나라 암호를 해독하는 지침임을 확인했다. 암호를 완전히 해독하기 위해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의도적으로 중국어를 사용하는 적당한 길이의 문서를 청나라 대사 왕펑차오에게 제공했다. 다음 날 일본 텔레콤 공관은 대사관에서 총리아문으로 보낸 전보를 성공적으로 가로챘다. 텔레콤 공관의 관료인 사토 요시마로는 이 알려진 내용을 가진 한자 텍스트를 사용하여 청나라 암호를 해독했다. 이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유리함을 제공했다.[6][7]6. 일본 경찰의 무장 변화
오카자키 히사히코는 나가사키 사건 해결에 있어 청국이 일본 정부에 일본 경찰관이 앞으로 칼을 소지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여 이를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다.[19]
『나가사키현 경찰사』는 다른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1883년(메이지 16년) 이후, 경부 이상이 검을 차고 일반 순경은 "수방(手棒)"을 휴대하고 있었으나 이를 개정하여 순경 전원이 검을 차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청국인의 아편 흡입 검거 사건을 계기로 다음 해 11월, 외국인 거류지를 소관하는 경찰서에 한해 순경의 검 착용을 폐지하고 대신 다시 "관봉(官棒)"을 휴대하도록 통지가 내려졌다. 나가사키・매향기(梅香崎)・나가사키 수상(長崎水上)의 3개 경찰서에 순경의 검 착용이 부활한 것은, 청일 전쟁 개전 후인 1894년(메이지 27년) 8월이었다. 나가사키 사건 발생 당시, 일반 순경은 검을 차고 있지 않았다.[20]
1886년 8월 15일 밤, 급보를 접한 매향기 경찰서장 오노키 겐지로는 즉시 청국 영사관에 보고하고 진무 방안을 요구하는 동시에 순경 수 명을 현장에 급파했지만, 광마장(広馬場) 네거리에서 수백 명의 수병에게 포위 공격을 받아 구타당하고 발로 차이며 칼에 찔려 모두 부상당했다. 청국 영사관에서도 관원 2명이 달려와 제지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요시다 경부보는 순경들을 모아 일단 본서로 철수시키고 순경 전원에게 검 착용을 허가했다. 검 착용에 관해서는, 수년 전 외국 수병과 경찰관 사이에 말다툼으로 인해 싸움이 벌어져 순경이 검을 뽑은 적이 있었기에, 외국 측으로부터 항의를 받아 검 착용을 폐지하고 경봉을 휴대하도록 했던 것이다.[21]
일반 경찰관의 경무장이 사건 발생과 조기 진압이 이루어지지 못한 요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21]
참조
[1]
웹사이트
Defining Conflicts
https://fanningthefl[...]
[2]
문서
帝国造船所二於テ外国船艦修理方請願雑件第3巻「清国軍艦長崎ニ来航修繕スル様李鴻章ヘ勧告ノ儀ニ付在天津領事ヨリ申出ノ件」(外務省外交史料館)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3]
문서
長崎事件第三報
伊藤博文 文書 第34巻 秘書類纂 長崎港清艦水兵喧闘事件
[4]
서적
Grounds of Judgment: Extraterritoriality and Imperial Power in Nineteenth Century
[5]
서적
明治の外交力 陸奥宗光の蹇蹇録に学ぶ
海竜社
2011
[6]
웹사이트
Qing Dynasty Before the fight prostitution in Japan leaked telegram password (Figure)
http://blog.dianlak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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马关议和清政府密电问题考证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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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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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87
[12]
문서
長崎事件第三報
伊藤博文文書 第34巻 秘書類纂 長崎港清艦水兵喧闘事件
[13]
문서
中国人を指す方言
[14]
서적
中国海軍と近代日中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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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馮青
[17]
문서
馮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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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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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長崎県警察史 上巻
長崎県警察本部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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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長崎県警察史 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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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馮青
[23]
문서
馮青
[24]
문서
馮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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