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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키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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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키진성은 류큐 왕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영주들의 거주지로, 모토부 반도의 동중국해를 향한 암석 돌출부에 위치한 구스쿠(성)이다. 12~13세기 무렵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416년 추잔의 공격으로 호쿠잔 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호쿠잔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는 1500m의 석회암 성벽이 남아있다. 나키진 성터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는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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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키진성
지도 정보
군사 시설 정보
이름나키진성
원어 이름今帰仁城
다른 이름북산성, 산북나키진성
위치나키진, 오키나와현
국가일본
2016년 나키진성 벽의 모습
나키진성
종류구스쿠
공개 여부
건설 시기14세기 초
사용 기간14세기 - 1609년
건설자한이지
재료류큐 석회암, 나무
상태유적
전투북산 침공 (1416년), 류큐 침공 (1609년)
과거 지휘관쇼 코쿠시
점유자북산의 왕, 북산의 관리, 나키진 마기리의 아지
웹사이트나키진성 유적 공식 웹사이트
유네스코 세계유산
ID972
등재 연도2000년
기준문화: ii, iii, vi
성곽 정보
종류산성
천수각 구조없음
건설자요카와 왕자 (에이소왕의 둘째 아들)
건설 연도13세기경
통치자나카호쿠잔왕:
요카와 왕자(에이소왕의 둘째 아들)
요카와 아지(요카와 왕자의 장남)
나키진 아지 1세(요카와 왕자의 장남)
나카무카시 나키진 아지(나키진 아지 1세의 장남)
나카소네와카 아지(나카무카시 나키진 아지의 장남)
후호쿠잔왕(하니지 왕통)
제1상씨(류큐 왕국)
폐성 연도1665년 (간분 5년)
유구성벽, 석벽
문화재국가 사적 (나키진성터 부속 시이나성터)
세계 유산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

2. 역사

1416년, 추잔의 군대에 의해 호쿠잔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나키진 성은 계속해서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슈리 왕부는 호쿠잔 간슈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1609년, 일본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략했을 때, 나키진 성은 다시 한번 격전의 무대가 되었다. 아마미 제도에서 전투를 벌인 사쓰마군은 운텐 항을 통해 오키나와섬에 상륙, 나키진 성을 공격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일본군이 승리하여 성은 불타버렸다.[3]

1665년(강희 4년)에는 호쿠잔 간슈가 폐지되었다. 이후 구시카와 고텐 10세인 나키진 조기와 그 계류가 류큐 처분 때까지 간슈의 자리를 관리했다.

오늘날 나키진 성터는 국가지정 사적으로 1972년 (쇼와 47년) 5월 15일에 지정되었다.[6] 2000년 (헤이세이 12년) 11월에는 슈리성 등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으로서 유네스코 세계 유산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2006년 (헤이세이 18년) 4월 6일에는 일본 100명성 (98번)에 선정되었고,[7] 2010년 (헤이세이 22년) 2월 22일에는 국사적지 지역이 추가되어 사적 명칭이 '''나키진 성터 부 시이나 성터'''로 변경되었다.[7]

관광 명소로서 나키진 성터는 동중국해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전망과 웅장한 성벽으로 유명하다.[4] 또한, 성으로 향하는 계단 좌우에는 칸히자쿠라 가로수가 있어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벚꽃(사쿠라)이 피는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4] 성내에는 시키마 오토타루 노래비와 산호쿠 나키진성 감수 내력비기 등의 비석도 있다.

2. 1. 류큐 왕국 이전

호쿠잔 왕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나키진의 영주들이 존재했었고, 따라서 그 이전에도 어떤 형태의 지배자 거주지가 이 부지 또는 그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나키진 성의 ''구스쿠'' 형태는 왕국이 건국되면서 비로소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모토부 반도의 암석 돌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중국해를 향하고 있다.

성은 동쪽으로 계곡의 가파른 경사로 인해 모토부의 주요 산괴와 분리되어 있으며, 계곡 밑에는 개울이 흐른다. 성에서 북쪽과 북동쪽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면 해안선에 닿는다. 이곳의 작은 항만 입구는 한때 성의 역할을 했으며, 운텐 항은 호쿠잔 왕국의 주요 항구로서 동쪽으로 약 약 8.05km~약 9.66km 떨어져 있었다.[1]

왕의 거처는 단지 내 가장 높고 안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샘이 있는 작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 개의 신사(''우간주'')가 절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약간 낮은 고도에 위치한 덜 안쪽의 구역에는 특정 가신들의 거처와 함께 행정 건물, 말 마구간, 공국의 전사들을 위한 주둔지가 있었다.[1] 이 당시의 ''구스쿠'' 건설의 전형적인 특징처럼, 성벽의 석조는 매우 견고했지만, 정밀한 맞춤이나 섬세한 절삭이 비교적 부족하여 상당히 거칠었다.[1] 오늘날에는 약 1500m의 석회암 성벽이 남아 있다.[2]

현지 전설에 따르면, 나키진 세의 주가 쌓았다고 전해지지만, 전설상의 왕통인 순텐 왕통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일이라고 한다. 또한 리유의 반란으로 세주는 모두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 발견된 성곽 유적은 12~13세기 무렵에 축성되었다.[5]

『추잔 세이칸』이나 『추잔 세이후』에 따르면, 전설의 왕 순텐의 형(이복 동생이라고도 함)인 '''다이슌'''과 그의 아들이 성주가 되었고, 후에 순텐 2세인 순마 준키의 아들, 나키진 세의 주(기혼왕과는 형제)가 성주가 된다. 이 대의 나키진 세의 주 2세(불상)의 양자가 되어 나키진 성주를 이은 것이 에이소 왕의 차남인 와쿠가와 왕자라고 전해진다.

와쿠가와 왕자와 자손은 대대로 성주를 이었지만, 계류의 하니지에게 토벌당해, 그 이전의 성주 계류는 멸망, 이산된다(그 자손에 고사마루가 있다). 호쿠잔 왕국의 시작이다. 하니지 이전 시대는 전기와 계보만 있을 뿐 연대는 알 수 없어 전설에 가깝다.

홍무제명태조실록』에 호쿠잔 왕국의 조공과 나키진 성에 관한 기술이 있다(현존하는 문헌상 가장 오래된 기록).

2. 2. 호쿠잔 왕국 시대

나키진 성은 호쿠잔 왕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영주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왕국 건국과 함께 ''구스쿠''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 성은 모토부 반도의 돌출부에 위치하며 동중국해를 향하고 있다.

성은 동쪽으로는 계곡의 가파른 경사면,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급경사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의 작은 항만 입구는 한때 성의 역할을 했으며, 운텐 항은 호쿠잔 왕국의 주요 항구로 동쪽으로 약 5~6마일 떨어져 있었다.[1]

왕의 거처는 단지 내 가장 높고 안쪽에 위치했으며, 샘이 있는 작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 개의 신사(''우간주'')가 절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었다. 덜 안쪽 구역에는 가신들의 거처, 행정 건물, 마구간, 전사 주둔지가 있었다.[1] 당시 ''구스쿠'' 건설의 전형적인 특징처럼, 성벽은 견고했지만 정밀함은 부족하여 거칠었다.[1] 오늘날 약 1500미터의 석회암 성벽이 남아 있다.[2]

1416년 추잔의 쇼하시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 전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통치자들이 이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슈리 왕도에 종속된 호쿠잔 영주들이 수 세기 동안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1416년, 쇼하시가 이끄는 추잔 군대에 의해 호쿠잔 왕국은 멸망하지만, 이후 호쿠잔 간슈가 설치되어 구 호쿠잔 통치는 계속되었다.

나키진 성에서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의 도자기가 많이 출토되어 당시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2. 3. 호쿠잔 멸망과 그 이후

호쿠잔 왕국이 건국되기 전과 건국된 시기에도 나키진성은 영주들의 거주지 또는 요새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토부 반도의 돌출부에 위치한 이 성은 동중국해를 바라보며, 가파른 계곡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방어 요새였다. 왕의 거처는 성 내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고, 주변에는 신사(''우간주'')와 가신들의 거처, 행정 건물, 마구간, 주둔지가 있었다.[1] 성벽은 견고했지만, 정교함은 부족했고, 오늘날 약 1500미터의 석회암 성벽이 남아있다.[2]

1416년, 추잔의 군대가 나키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슈리 왕조에 종속된 호쿠잔의 영주들이 이곳을 거처로 사용했다.[1]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략 당시, 나키진성은 다시 한번 격전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운텐 항에 상륙하여 나키진성을 공격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은 함락되어 불탔다.[3]

1416년 (오에이 23년・영락 14년. 1422년 (오에이 29년・영락 20년) 설도 있음)에 쇼하시 왕에게 멸망당한 후에도, 나키진성은 구 호쿠잔 통치의 요충지로 계속 사용되었고 호쿠잔 감수가 파견되었다.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 때에는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되었다.

현재 나키진성은 국가지정 사적 '''나키진 성터'''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6] 일본 100명성 (98번)에도 선정되었다.[7]

3. 구조

나키진 성은 모토부 반도의 암석 돌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중국해를 향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계곡의 가파른 경사로 인해 모토부의 주요 산괴와 분리되어 있고, 계곡 밑에는 개울이 흐른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면 해안선에 닿는다. 이곳의 작은 항만 입구는 한때 성의 역할을 했으며, 운텐 항은 호쿠잔 왕국의 주요 항구로서 동쪽으로 약 5~6마일 떨어져 있었다.[1]

왕의 거처는 단지 내 가장 높고 안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샘이 있는 작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절벽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세 개의 신사(''우간주'')가 세워져 있었다. 약간 낮은 곳에는 특정 가신들의 거처, 행정 건물, 말 마구간, 공국의 전사들을 위한 주둔지가 있었다.[1]

당시 ''구스쿠'' 건설의 전형적인 특징처럼, 성벽의 석조는 매우 견고했지만, 정밀한 맞춤이나 섬세한 절삭이 비교적 부족하여 상당히 거칠었다.[1] 오늘날에는 약 1500미터의 석회암 성벽이 남아 있다.[2]

1416년 추잔의 군대에 의해 공격받아 파괴되기 전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통치자들이 이곳에 거주했다. 슈리의 왕도에 종속된 호쿠잔의 영주들은 그 후 수 세기 동안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1609년, 일본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략했을 때, 아마미 제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후 운텐 항에서 오키나와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나키진 성을 공격하여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이 승리하여 성을 불태웠다.[3]

이 유적은 동중국해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전망, 인상적인 성벽, 넓은 공간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4]

3. 1. 성곽 구역

오모로소시에 따르면 나키진의 옛 이름은 "'''미야키센'''"이다.きこゑみやきせん もゝまかり つみあけて かはらよせ御くすく けらへ 又とよむみやきせん|오모로소시|권13・125번일본어 나키진성에서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에서 온 도자기가 많이 출토되어 당시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 당시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되었다.

2000년 11월 슈리성 등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등록 명칭은 나키진성터).

2006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 (98번)에 선정되었다.

2010년 2월 22일 국사적지 지역이 추가되어 사적 명칭이 '''나키진성터 부 시이나성터'''로 변경되었다[7]。 나키진성은 남북 350m, 동서 800m, 면적 37000m2로, 현 내 최대 규모의 성(구스크)이다. 복수의 성곽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왕의 저택, 성주 측근 무사의 저택 터 등이 확인된다. 성 아래도 넓으며, 미므 구스크, 타라 구스크 등의 출성도 있다.

출토품으로는 14~15세기경 중국제 도자기가 많아, 후호쿠잔의 조공 무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다양한 문물이 있다. 그 외에 고려청자, 동남아시아나 일본에서 온 구운 것도 있다. 또한 무구류, 제사품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3. 2. 출토 유물

나키진 성에서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의 도자기가 많이 출토되어 당시의 번영을 엿볼 수 있다. 출토품에는 14~15세기경의 중국제 도자기가 많아, 후호쿠잔의 조공 무역의 영향으로 보이며, 중국의 다양한 문물이 있다. 그 외에 고려청자, 동남아시아나 일본에서 온 구운 것도 있다. 또한 무구류, 제사품 등 다양한 것도 출토된다.[6]

4. 시이나 성터

시이나 성터는 나키진성터에서 남동쪽으로 6km 떨어진 나키진촌 자 고가야마 산사하라에 있으며, 13세기 중에 축성되었으나 단기간에 폐성되었다.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나키진의 축성 이전의 중심 거점으로서, 시이나성에 안지가 살았으나, 용수가 부족하여 나키진성으로 옮겨갔다는 전승이 있다.

5. 현대의 나키진 성터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 당시, 나키진 성은 첫 공격 목표 중 하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승리했고, 성은 불탔다.[3]

1972년 5월 15일 나키진 성터는 국가지정 사적 '나키진 성터'로 지정되었다.[6] 성문에서 성 중심부로 향하는 계단(전후 설치) 양옆에는 칸히자쿠라 벚나무 가로수가 있어,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꽃을 피운다. 모토부정 야에다케 등과 함께 벚꽃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성내에는 시키마 오토타루 노래비, 산호쿠 나키진성 감수 내력비기 등의 비석도 있다.

세계유산 등록 이후 성터 정비 및 복원 작업이 강화되었다. 주차장은 성터 입구 부근으로, 성내 입장권 판매소는 구스크 교류 센터로 이전되었다. 2005년 9월 1일 구스크 교류 센터와 관광 버스 주차장 등 주변 설비 정비로 입장료가 300JPY에서 400JPY으로 인상되었고, 2023년 4월부터는 600JPY이 되었다.

5. 1. 세계유산 등재

2000년 11월 슈리성 등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으로서 유네스코 세계 유산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등록 명칭은 나키진성터).[6]

2006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 (98번)에 선정되었다.

2010년 2월 22일 국사적지 지역이 추가되어 사적 명칭이 '''나키진성터 부 시이나성터'''로 변경되었다.[7]

5. 2. 관광 명소

나키진 성터는 동중국해가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전망과 웅장한 성벽, 넓은 공간으로 유명하다.[4] 호쿠잔난잔, 추잔 등 당시 섬에 존재했던 다른 왕국들보다 넓고 인구 밀도가 낮았다. 나키진은 일본에서 벚꽃(사쿠라)이 가장 먼저 피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4]

성문에서 중심부로 이어지는 계단(전후 설치) 양옆에는 칸히자쿠라 벚나무 가로수가 있어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꽃을 피운다. 모토부정의 야에다케 등과 함께 벚꽃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성 안에는 시키마 오토타루 노래비와 산호쿠 나키진성 감수 내력비기 등의 비석이 있다.

2000년 11월, 슈리성 터 등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등록 명칭: 나키진 성터).

2006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 (98번)으로 선정되었다.

5. 3. 정비 및 복원

현재도 돌담 등의 유구 정비가 진행되어 1972년 5월 15일에 국가지정 사적으로 '''나키진 성터'''로 지정되었다[6]. 문에서 성의 중심부로 향하는 계단(전후에 만들어진 것) 좌우에는 칸히자쿠라 가로수가 있으며,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개화한다. 모토부정의 야에다케 등과 함께 벚꽃 명소로 알려져 있다. 성내에는 시키마 오토타루 노래비와 산호쿠 나키진성 감수 내력비기 등의 비석도 있다.

2000년 11월, 슈리성 터 등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으로서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등록 명칭은 나키진 성터).

2006년 4월 6일에는 일본 100명성(98번)에 선정되었다.

2010년 2월 22일에는 국가지정 사적 지역이 추가되어 사적 명칭이 '''나키진 성터 부 시이나 성터'''로 변경되었다[7].

세계유산 등록 이후 성터는 점차 정비 및 복원 작업이 강화되었다. 또한 주차장이 성터 입구 부근으로, 성내 입장 시의 매표소가 구스크 교류 센터로 이전되었다. 2005년 9월 1일, 구스크 교류 센터와 관광 버스 주차장 등의 주변 설비 정비에 따라, 나키진 성터만의 입장료가 나키진 성터와 나키진 촌 역사 문화 센터의 공통 요금이 되어, 300JPY에서 400JPY으로 인상되었다. 2023년 4월부터는 600JPY이 되었다.

6. 접근성


  • 나키진성터 버스 정류장
  • 얀바루 급행 버스
  • 시마선
  • 나키진성터 입구 버스 정류장 (도보 15분 정도)
  • 65번・모토부 반도(토구치)선 (류큐 버스 교통・오키나와 버스)
  • 66번・모토부 반도(나키진)선 (류큐 버스 교통・오키나와 버스)
  • 나고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경우 66번이 더 빨리 도착하며, 운임도 저렴하다.
  • 888번・얀바루 급행 버스

7. 관람 정보

2005년 9월 1일, 구스크 교류 센터와 관광 버스 주차장 등의 주변 설비 정비에 따라, 나키진 성터만의 입장료가 나키진 촌 역사 문화 센터의 공통 요금이 되어, 300JPY에서 400JPY으로 인상되었다. 2023년 4월부터는 600JPY이 되었다.

나키진손 역사 문화 센터와 공통 요금은 다음과 같다.

구분요금
성인600JPY
중고등학생450JPY
초등학생 이하무료


참조

[1] 서적 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Tuttle Publishing 2000
[2] 뉴스 Nakijin-jô-seki http://ryukyushimpo.[...] Ryukyu Shimpo 2003-03-01
[3] 서적 The Samurai Capture a King: Okinawa 1609 Osprey Publishing 2009
[4] 서적 Nakijin-jô-seki Yamatokei Publishers 2003
[5] 서적 今帰仁村史
[6] 간행물 5月15日文部省告示第58号「記念物を史跡等に指定する件」 1972-05-15
[7] 간행물 2月22日文部科学省告示第17号「史跡に地域を追加して指定し、名称を改める件」 201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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