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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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덕정은 조선 인종 때의 대학자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김노수가 건립한 정자이다. 김인후가 자주 찾았던 낙덕암 위에 팔모 단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김인후의 인품을 기리는 의미에서 낙덕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세기 초에 건립된 보기 드문 팔모단층 건물이며,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가 유년 시절 이곳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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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덕정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낙덕정 |
한자 표기 | 樂德亭 |
문화재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산4 |
유형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72 |
지정일 | 1984년 4월 1일 |
문화재청 ID | 31,00720000,35 |
2. 건립 배경 및 역사
1900년(고종 37) 이 지방 상송리에 거주하던 후손 소산(小山) 김노수(金魯洙)[1] 등이 선조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김인후가 자주 찾은 낙덕암 위 우거진 숲 속에 팔모 단층의 건물을 중수하고 낙덕암의 이름을 따서 낙덕정(樂德亭)이라 하였다. 현판은 1930년 7월 칠석에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2]이 쓰고, 낙덕정기(樂德亭記중국어)는 경암(敬菴) 김노수(金魯洙)[3]가 썼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후손 가인(佳人) 김병로가 유년 시절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4]
20세기 초반 건립된 정자로는 보기 드물게 팔모단층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내부 가운데에는 1칸의 방을 만들어 놓고 대청을 배치한 형태이다. 주변의 천석(泉石)은 원림(園林)과 어울려 수려한 누정 문화 경관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5]
2. 1. 하서 김인후의 은거
조선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1545년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1548년(명종 3) 부인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세상을 피해 숨어 살았다.상류에는 낙덕암(樂德巖)이 있는데 김인후는 이곳에서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채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주변에 천석(泉石) 운림(雲林)의 뛰어난 경치는 바로 김인후의 무이(武夷)였다.
2. 2. 낙덕암과 김인후
조선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1548년(명종 3) 부인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세상을 피해 숨어 살았다.상류에는 낙덕암(樂德巖)이 있는데, 김인후는 이곳에서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채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주변의 천석(泉石)과 운림(雲林)의 뛰어난 경치는 김인후의 무이(武夷)였다.
2. 3. 낙덕정 건립
조선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1545년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1548년(명종 3) 부인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세상을 피해 숨어 살았다.상류에는 낙덕암(樂德巖)이 있는데 김인후는 이곳에서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채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주변의 천석(泉石) 운림(雲林)의 뛰어난 경치는 바로 김인후의 무이(武夷)였다.
1900년(고종 37) 이 지방 상송리에 거주하던 후손 소산(小山) 김노수(金魯洙)[1] 등이 선조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김인후가 자주 찾은 낙덕암 위 우거진 숲 속에 팔모 단층의 건물을 중수하고 낙덕암의 이름을 따서 낙덕정(樂德亭)이라 하였다.
현판은 1930년 7월 칠석에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2]이 쓰고, 낙덕정기(樂德亭記)는 경암(敬菴) 김노수(金魯洙)[3]가 썼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후손 가인(佳人) 김병로가 유년 시절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4]
20세기 초반 건립된 정자로는 보기 드물게 팔모단층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내부 가운데에는 1칸의 방을 만들어 놓고 대청을 배치한 형태이다. 주변의 천석(泉石)은 원림(園林)과 어울려 수려한 누정 문화 경관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5]
3. 인물
1900년(고종 37) 이 지방 상송리에 거주하던 후손 김노수(金魯洙)[1] 등이 선조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낙덕암 위에 낙덕정(樂德亭)을 중수하였다. 현판은 1930년 7월 칠석에 김원중(金源中)[2]이 쓰고, 낙덕정기(樂德亭記)는 김노수(金魯洙)[3]가 썼다.
3. 1. 하서 김인후
조선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1545년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1548년(명종 3) 부인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세상을 피해 숨어 살았다.[1]상류에는 낙덕암(樂德巖)이 있는데 김인후는 이곳에서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채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주변에 천석(泉石) 운림(雲林)의 뛰어난 경치는 바로 김인후의 무이(武夷)였다.[1]
3. 2.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佳人) 김병로가 유년 시절 이곳에서 공부하였다.[4]참조
[1]
문서
한학자
[2]
문서
한학자
[3]
문서
한학자
[4]
문서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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