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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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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통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했으며, 손권 휘하에서 건충중랑장, 편장군, 유수독 등을 역임하며 활약했다. 그는 유비와의 이릉 전투, 조비의 유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으며, 손권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36세에 사망했으며, 아들 낙수는 해적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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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통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낙통
한자 표기駱統
로마자 표기Nok Tong
공서 (公緒)
생애
출생193년
출생지양주 회계군 오상현
사망228년 (향년 35세)
관직
주요 직책손권 휘하의 관리
초기 관직편장군 (偏將軍)
신양정후 (新陽亭侯)
최종 관직유수독 (濡須督)
가족 관계
아버지낙준
배우자손부인

2. 생애

낙통은 어릴 적부터 효심이 깊고 총명하여 주변의 칭찬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행정 능력과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손권의 신임을 얻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했으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손권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낙통의 아들 낙수(駱秀)는 모함을 받아 의심을 받았으나, 사연의 변호로 누명을 벗고 나중에 선비로 이름을 알렸다.[15] 그러나 영안 7년(264년) 7월, 해적에게 해염에서 살해당했다.[16]

2. 1.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화흠의 첩이 되자, 8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식객과 함께 회계군으로 돌아왔다.[14] 고향으로 와서는 적모를 공경하였으며, 기근이 들어 식객들이 굶자 양식을 줄였다. 어머니와 누나는 낙통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낙통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부터 낙통은 명성을 얻었다.[14]

2. 2. 손권 휘하

손권회계 태수를 겸임했을 때, 낙통은 20세의 나이로 오정현의 상을 맡았다. 그는 치적이 있었으므로 공조로 임명되었고 기도위를 겸했으며, 종형 손보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낙통은 항상 손권에게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받아들이며, 정치의 손익을 탐구하는데 힘쓰고, 사람마다 자기 의론을 말하게 하여 손권의 은혜를 느끼고 갚도록 하기를 진언했다.[14] 낙통은 외직으로 나가 건충중랑장이 되었고, 3천 명의 군사를 통솔했으며, 능통이 죽은 후에는 능통의 병사를 받았다.[7] 이 시기에는 노역이 빈번하고 역병까지 발생하여 백성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낙통은 이를 우려하여 상소를 올려 백성에게 노역을 부과함으로 인한 폐단을 말했고, 손권은 낙통의 말에 감동하여 그의 의견을 중시했다.[14]

221년, 육손유비를 무찌를 때 낙통은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송겸 등이 유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자고 주장했으나, 낙통은 육손, 주연과 함께 위나라의 침공 가능성을 들어 반대했다. 같은 해, 조비조인에게 유수를 공격하게 하자, 조인은 상조 등에게 중주를 지키도록 했다. 이에 낙통은 엄규와 함께 이들을 무찔렀다. 이후 낙통은 신양정후로 임명되었고, 유수독에 임명되었다.[14] 그는 자주 정치에 이로운 견해를 진언했으며, 앞뒤로 올린 글이 수십 편이었다. 황무 7년(228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4]

장온과는 사이가 나빴으나, 손권이 장온에게 죄를 물어 벌을 내리려 하자 낙통은 표를 올려 장온의 무죄를 변호했다. 그러나 손권은 이를 듣지 않고 장온을 유배보냈다.[14]

2. 3. 이릉 전투와 유수 전투

221년, 육손유비를 무찌를 때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송겸 등이 진격하여 유비를 사로잡자고 하자, 낙통은 육손, 주연)과 함께 위나라의 침공이 있을 것 같으니 불가하다고 했다.[14] 같은 해, 조비조인에게 명하여 유수를 공격하게 하자, 조인은 상조 등에게 중주를 지키도록 했는데, 낙통은 엄규와 함께 이들을 무찔렀다. 신양정후에 임명되었고, 유수독이 되었다.[14]

2. 4. 죽음

황무 7년(228년), 3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1] 아들 낙수(駱秀)는 훼방을 당해 중론이 그를 의심하였으나, 증명할 수 없었다. 사연이 낙수를 위해 변호하여, 일은 명백해졌고 다시 낙수에게 흠을 잡지 않았다. 나중에는 선비로 이름이 알려졌다.[15]

영안 7년(264년) 7월, 해적이 해염을 격파하고 해염교위(海鹽校尉) 낙수를 살해했다.[16]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나통의 전기를 저술하며 "나통은 의리를 이해하고 합리적인 조언을 제공했다. 그는 권력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13]

4. 가족 관계

뤄퉁의 아버지 뤄쥔(駱俊, 자는 샤오위안(孝遠))은 문무(文武)에 능통하여 명성이 높았다. 뤄쥔은 젊은 시절 고향의 군에서 하급 관리를 지냈으며,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이후 상서랑으로 승진했고, 훗날 진(陳)나라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후한 말 혼란기에 뤄쥔은 진나라 내에서 법과 질서를 성공적으로 유지하여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도록 했다. 190년대 어느 시점에 군벌 원술이 식량이 부족해지자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곡물을 요청했다. 뤄쥔은 원술을 역적으로 여기고 혐오했기에 보급을 거절했다. 분노한 원술은 암살자를 보내 뤄쥔을 살해했다.[12]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Houhanshu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삼국지
[15] 서적 회계전록
[16]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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