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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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안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학자이자 현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후한의 장군 하진의 손자이며, 조조의 양자로 입양되어 조비, 조예와 함께 자랐다. 조조의 딸 금향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조비와 조예에게 중용되지 못했다. 이후 조상의 측근이 되어 이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사마의의 고평릉의 변으로 인해 조상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는 유교와 도교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논어집해》, 《도덕론》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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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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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하안 |
원어 이름 | 何晏 |
로마자 표기 | He Yan |
출생 | 195년경 |
출생지 | 허난성난양 |
사망 | 249년 2월 9일 |
사망지 | 뤄양 |
아버지 | 하현 |
어머니 | 윤부인 |
배우자 | 금향공주 |
계부 | 조조 |
이복 형제 | 조구 |
직업 | 철학자, 정치인 |
자 | 평숙 |
관직 | 이부상서 |
임관 시작 | 240년대 경 |
임관 종료 | 249년 2월 5일 |
군주 | 조방 |
2. 생애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이때부터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하였다. 이후 조조의 딸인 금향공주(金鄕公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그러나 하안은 거리낌 없고 권세에 아부하는 성격 때문에 문제와 명제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특히 문제는 그가 조조의 양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관직에 임명하지도 않았다.[18]
명제가 붕어하고 그의 양자인 조방이 8살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하자, 황족인 조상이 집권하였다. 하안은 조상의 수하로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하안은 조상을 중심으로 붕당을 조직하여 조상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결재를 먼저 심사하도록 하였다. 조상의 붕당에는 하안을 비롯하여 당시 경박재자(輕薄才子)로 불리던 사람들만 있었다.
이처럼 조상 붕당은 세력 기반이 약하고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안은 자신들의 세력에 영합하는 자는 승진시키고 거스르는 자는 파면시켰다. 또한 당시 권력의 가도를 달리던 사마의를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하여 조상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리고 태후의 궁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옮기고, 조방이 집행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상 붕당에 대한 관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249년 조방과 조상, 그리고 그의 일파가 명제의 능인 고평릉(高平陵)에 제사를 드리러 간 사이에 조상의 권력 독주에 불만을 품은 사마의가 군사를 일으켜 하안을 비롯한 조상의 일파를 죽였다(고평릉의 변).[7]
하안은 삶의 근본을 정치가 아닌 학문에 두어, 현학(玄學)과 유학, 도가 학문에 두루 깊이 연구하여 당시의 뛰어난 인재이던 왕필을 발탁하는가 하면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2. 1. 출생과 가문의 몰락
조부 하진은 십상시의 난 때 뜻밖의 죽음을 당했고, 종조부 하묘(何苗)도 조부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죽음을 당했다.[18] 이후 정권을 잡은 동탁(董卓)에 의해 고모할머니 하태후(何太后)와 그 아들인 소제가 폐위당한 뒤 독살당했고, 종조부 하묘도 조부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동탁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절단되면서 길에 버려졌다. 증조할머니 무양군(舞陽君)을 비롯한 하씨 일족들은 동탁에 의해 몰살당했다.[18] 여기서 그의 아버지가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일찍 병사했고, 어머니 윤(尹)씨는 조조에게 재가하여 하안은 조조의 양자로 들어가 위(魏)나라 궁정에서 양육되었다.하안은 허난성 난양에서 태어났다.[2] 그의 증조부는 정육점 주인이었고, 할아버지인 하진은 후한의 장군이자 섭정이었다. 그의 고모할머니는 후한 영제의 황후인 하태후였다.[3][4] 하안의 아버지 하함(何咸)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2] 군벌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을 점령하면서 하씨 가문의 정치적 권력은 붕괴되었다. 하안의 어머니는 도망쳐 유배지에서 하안을 낳았다.[5]
하안이 여섯 살쯤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군벌 조조의 첩으로 들어가 '은부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조에게 입양된 후, 하안은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재위 220-226)를 포함한 조위의 다른 왕자들과 함께 자랐다. 조비는 하안이 황태자인 척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의 실제 이름 대신 "가짜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중에 조조의 딸 중 한 명인 진상공주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하안의 이복자매 중 한 명이었을 수도 있다.[6]
2. 2. 조조의 양아들
조조의 첩이 된 어머니 윤씨를 따라 조조의 양자로 들어가 위(魏)나라 궁정에서 양육되었다.[18]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조조의 딸인 금향공주(金鄕公主)를 아내로 맞아 부마(駙馬)가 되었다.하안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군벌 조조의 첩으로 들어가 '은부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조에게 입양된 후, 하안은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재위 220-226)를 포함한 조위의 다른 왕자들과 함께 자랐다. 조비는 하안이 황태자인 척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의 실제 이름 대신 "가짜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중에 조조의 딸 중 한 명인 금향공주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하안의 이복자매 중 한 명이었을 수도 있다.[6]
조부 등이 십상시에게 살해당하자 생모인 윤씨가 조조의 첩이 되었기 때문에 그 관계로 조조의 양자로 양육되어 성장했다. 진랑이 온순한 성격이었던 것에 비해, 하안은 재기 넘치는 면모를 보였고, 태자와 같은 옷차림을 했다고 한다. 조조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딸인 금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등 극진히 대우했다.
2. 3. 정치 활동과 최후
조조의 양아들로 자란 하안은 문제와 명제 때 중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방이 즉위하고 조상이 집권하면서 이부상서로 등용되어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18] 하안은 조상을 중심으로 붕당을 조직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사마의를 정계에서 몰아냈다.249년, 조상 일파가 고평릉에 제사를 드리러 간 사이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하안을 비롯한 조상 일파를 모두 처형했다.[7]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마의는 하안에게 조상 재판의 판사 역할을 맡겼다. 하안은 사면을 받기 위해 조상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렸지만, 사마의는 마지막에 하안의 이름도 처형될 죄인 목록에 추가했다.
하안이 죽을 때 아들은 다섯 살이었는데, 하안의 어머니 윤부인이 사마의에게 자비를 구하여 손자는 살아남았다.
3. 사상
하안은 정시(正始) 연간, 왕필과 노장에 대한 논의를 거쳐 ‘천지만물은 모두 무위(無爲)를 근본으로 삼는다(以無爲爲本)’는 결론에 다다랐다.[9] 그는 “무(無)는 사물을 열고 사물의 본분을 완성시키며,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 것이다. 음양(陰陽) 또한 무에 의지하여 생긴다. 고로 무는 모든 것 중 가장 귀한 존재다.”라는 자신만의 사상을 확립하였다. 하안은 《주역(周易)》,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 삼현경(三玄經)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이 셋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았다.
하안은 철학의 방법론이 《주역》에 담겨있음을 알고 이를 높게 보았다. 《주역》이 갖고 있는 논리적 틀이 다른 경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역》의 ‘도(道)’를 갖고 경전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였다. ‘도’는 곧 도가(道家), 즉 노자와 장자의 학문과 일맥상통하므로 곧 그는 노장 사상을 유가의 경전에 대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안은 자신의 저서 《도덕론》에서 결국 공자와 노자의 주장은 일치한다는 결론을 설파한다.[10]
하안은 맹목적으로 도가 사상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주역》을 중시하였는데, 《주역》은 음양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하안은 이러한 역학 관계 때문에 음양 또한 간과하지 않고 중요시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무(無)’ 가 ‘역(易 : 변화)’이며, 역이 곧 음양이고, 음양이 만물을 낳는다는 이론을 설파한다. 여기서 하안은 ‘역(易)’을 통해 논어를 풀이한다. 하안은 이러한 사상을 통해 정치 생활을 하며 많은 제도를 교체하였다. 하안은 기본적으로 유가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과 《주역》의 음양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으며, 《노자》의 ‘무(無)’를 《주역》의 ‘역(易)’으로 해석함으로써 무와 ‘유(有)’를 동일시하였다. 곧 그는 본질과 현상을 철저히 결합시키는 입장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학계에서는 하안을 철저한 노장학자가 아닌, 인의(仁義)를 긍정하며 유가의 기본 이념에 충실하며 노장학을 연구한 유학(儒學)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11]
하안은 도교와 유교가 서로 보완적이며, 이 둘을 올바른 방식으로 연구함으로써 학자는 단일하고 통일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교와 유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양립성을 주장하면서, 그는 "노자는 [사실] 성인과 일치한다"(sic)고 주장했다.[12]
3. 1. 현학의 창시
하안은 후한이 붕괴되고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三國時代)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정치 비판과 인물 평가가 유행하였으나, 삼국시대 위(魏) 왕조의 정치적 언론 탄압과 유학의 쇠퇴로 이러한 풍조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노장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형이상학적 담론인 현학(玄學)이 발생하게 되었다.하안은 귀족 출신으로 당시 유행하던 현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정시(正始) 연간, 왕필과 노장에 대한 논의를 거쳐 ‘천지만물은 모두 무위(無爲)를 근본으로 삼는다(以無爲爲本)’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무(無)는 사물을 열고 사물의 본분을 완성시키며,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 것이다. 음양 또한 무에 의지하여 생긴다. 고로 무는 모든 것 중 가장 귀한 존재다.”라는 사상을 확립하였다. 하안은 《주역(周易)》,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 삼현경(三玄經)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동등하게 보았다. 당시 유학자들은 삼현경을 모두 중시하면서도 《주역》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안은 철학의 방법론이 《주역》에 담겨있다고 보았다. 《주역》은 음양(陰陽)을 논리적 틀로 내용을 전개하는데, 여기서 음양의 운행으로 성립되는 ‘도(道)’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했다. 하안은 《주역》의 논리적 틀이 다른 경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역》의 ‘도’로 경전을 해석하려 하였다. ‘도’는 도가(道家), 즉 노자와 장자의 학문과 일맥상통하므로, 그는 노장 사상을 유가의 경전에 대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안은 저서 《도덕론》에서 공자와 노자의 주장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어, 《논어》 〈선진〉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는 도에 가깝구나. 자주 텅 비어[空] 있도다.’”라는 구절에서, 유학자들은 '비어있다'는 것을 가난으로 해석했지만, 하안은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장자》의 “도는 허심에 머문다. 이 허심이 곧 심재(心齋 : 마음을 비운다)이다.”라는 격언을 통해 《논어》를 분석한 것이다. 이후 《논어》 주해자들은 하안의 해석을 채택하여 공자를 도가화하였다.
그러나 하안은 도가 사상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주역》을 중시하며 음양 또한 중요시했다. 그는 ‘무(無)’ 가 ‘역(易 : 변화)’이며, 역이 곧 음양이고, 음양이 만물을 낳는다는 이론을 설파했다. 하안은 ‘역(易)’을 통해 논어를 풀이하며, 유가적 정명론을 통해 제도의 완비를 추구했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정치 생활을 하며 많은 제도를 교체하였다. 노자는 음양을 언급했지만 철학적 도구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안과 차이가 있다. 하안은 《주역》과 《주역》의 음양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으며, 《노자》의 ‘무(無)’를 《주역》의 ‘역(易)’으로 해석함으로써 무와 ‘유(有)’를 동일시하였다. 그는 본질과 현상을 결합시키는 입장에 서 있었기에, 오늘날 학계에서는 하안을 철저한 노장학자가 아닌, 인의(仁義)를 긍정하며 유가의 기본 이념에 충실하며 노장학을 연구한 유학자로 본다.
하안은 도가 철학자 노자와 장자(莊子), 그리고 ''주역''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덕경 주석''(道德論)을 저술했지만, 사본은 남아 있지 않다.[9] ''도덕경''에 대한 더 자세한 주석을 쓸 계획이었으나, 왕필(王弼)의 초고와 비교 후 자신의 해석이 열등하다고 판단하여 일반적인 ''주석''을 내놓았다.[9]
하안은 유교 이론에 대한 주석인 ''논어 집해''(論語集解)를 저술한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이 주석은 이전 주석 중 가장 통찰력 있는 내용을 수집, 요약, 합리화했다. 그는 5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지만,[10] 후대 학자들은 하안을 유일한 저자로 인정했다.[10] 현대 학자들은 그 증거가 불확실하지만, 관례상 하안을 주요 저자로 인정한다.[10] ''집해''는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받아 14세기 주희의 주석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주요 텍스트로 남았다.[10]
하안은 도교와 유교가 상호 보완적이며, 이 둘을 통해 단일하고 통일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노자는 [사실] 성인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11] 도교와 유교 개념의 통합을 장려하며, 왕필과 함께 현학의 신도교 학파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12] 그는 무위의 이론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했다.[13] 그는 철학, 정치, 문학 및 역사에 관한 글을 썼으며, 그 중 일부는 남아 있다.[14]
하안은 왕필과 함께 현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논어집해』와 『노자도덕론』을 편찬하여 청담의 기풍을 열었으며, 이는 후세의 이백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2. 유학과 도가의 융합
하안은 후한이 붕괴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는 혼란기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정치 비판과 인물 평가가 유행했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적 언론 탄압과 유학의 쇠퇴로 이러한 비판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노장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형이상학적 담론인 현학(玄學)이 발생했다.하안은 귀족 출신으로 현학을 깊이 연구했다. 정시(正始) 연간에 왕필과 노장에 대한 논의를 거쳐 '천지만물은 모두 무위(無爲)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무(無)는 사물을 열고 사물의 본분을 완성시키며,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 것이다. 음양 또한 무에 의지하여 생긴다. 고로 무는 모든 것 중 가장 귀한 존재다.”라는 사상을 확립했다. 하안은 《주역(周易)》, 《노자(老子)》, 《장자(莊子)》를 중시하고 동등하게 보았다. 당시 유학자들은 《주역》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안은 《주역》에 철학의 방법론이 담겨있다고 보았다. 《주역》의 음양(陰陽)의 운행으로 성립되는 ‘도(道)’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했다. 하안은 《주역》의 논리적 틀이 다른 경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역》의 ‘도’로 경전을 해석하려 했다. ‘도’는 도가(道家)의 노자와 장자의 학문과 통하므로, 그는 노장 사상을 유가의 경전에 대입했다. 《도덕론》에서 공자와 노자의 주장이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논어》 〈선진〉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는 도에 가깝구나. 자주 텅 비어[空] 있도다.’”라는 구절에서, 유학자들은 '비어있다'는 것을 먹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하안은 '공(空)'을 마음 속이 빈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장자》의 “도는 허심에 머문다. 이 허심이 곧 심재(心齋 : 마음을 비운다)이다.”라는 격언과 연결된다. 이후 《논어》 주해자들은 하안의 해석을 채택하여 공자를 도가적으로 해석했다.
하안은 《주역》의 음양을 중시했다. 그는 ‘무(無)’ 가 ‘역(易 : 변화)’이며, 역이 곧 음양이고, 음양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다. 하안은 ‘역(易)’을 통해 논어를 풀이하며, 유가적 정명론으로 제도의 완비를 추구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으로 정치 생활을 하며 많은 제도를 바꾸었다. 노자는 음양을 언급했지만 철학적 도구로 삼지 않았는데, 여기서 하안과 노자의 차이가 나타난다. 하안은 《주역》과 음양론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노자》의 ‘무(無)’를 《주역》의 ‘역(易)’으로 해석하여 무와 ‘유(有)’를 동일시했다. 그는 본질과 현상을 결합시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하안을 노장학자가 아닌, 인의(仁義)를 긍정하며 유가의 기본 이념에 충실하며 노장학을 연구한 유학자로 본다.
하안은 도교와 유교가 상호 보완적이며, 함께 연구하면 단일하고 통일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노자는 [사실] 성인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11] 그는 왕필과 함께 현학의 신도교 학파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12] 현학 학자로서 무위 이론을 탐구했다.[13]
3. 3. 한계와 의의
하안은 후한이 붕괴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혼란한 시대적 배경은 정치 비판과 인물 평가를 유행시켰지만, 위나라의 정치적 언론 탄압과 유학의 쇠퇴로 현학(玄學)이 등장하게 되었다.[9]하안은 귀족 출신으로 당시 유행하던 현학을 깊이 연구했다. 정시(正始) 연간에 왕필과 노장에 대해 논의하며 '천지만물은 모두 무위(無爲)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사상을 확립했다. 그는 《주역》, 《노자》, 《장자》를 중시했고, 특히 《주역》의 논리적 틀을 통해 다른 경전을 해석하려 했다. 하안은 《도덕론》에서 공자와 노자의 주장이 일치한다고 주장했다.[10]
예를 들어, 《논어》 〈선진〉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는 도에 가깝구나. 자주 텅 비어[空] 있도다.’”라는 구절을, 하안은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해석하여 도가 사상과 연결 지었다. 그러나 하안은 《주역》의 음양(陰陽)론 또한 중시하여 유가적 정명론(正名論)을 통해 제도의 완비를 추구했다. 그는 '무(無)'를 '역(易 : 변화)'으로 해석하여 본질과 현상을 결합시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늘날 학계에서는 하안을 유가의 기본 이념에 충실하며 노장학을 연구한 유학자로 평가한다.[11]
하안은 유교와 도교가 양립가능하다고 믿었다. 도교와 유교 개념의 통합을 통해 현학의 신도교 학파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12] 그는 다작의 시인이었고, 철학, 정치, 문학 및 역사에 관한 수많은 잡문을 썼으며, 그중 일부가 남아 있다.[14]
하안은 『논어집해』와 『노자도덕론』을 편찬하여 청담(淸談)의 기풍을 열었고, 이는 후세의 이백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왕필과 함께 현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또한, 나르시시스트이자 호색한이었으며, '오석산'이라는 마약을 애용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4. 저서
- 《논어집해(論語集解)》
- 《주역강소(周易講疏)》
- 《도덕론(道德論)》
하안은 어릴 때부터 노자와 장자의 도가 철학과 주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대에 영향력 있는 주석인 《도덕경 주석》(道德論)을 저술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9] 그는 《도덕경》에 대한 더 자세한 주석을 쓸 계획이었으나, 동년배인 왕필의 초고와 비교한 후 자신의 해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더 일반적인 주석을 내놓았다.[9]
하안은 유교 이론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인 《논어 집해》(論語集解)를 저술한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이 주석은 당시까지 쓰여진 《논어》에 대한 모든 주석 중 가장 통찰력 있는 내용을 모아 요약하고 정리했다. 그는 손용(孫邕), 정충(鄭沖), 조희(曹羲), 손이(孫揖)를 포함한 5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지만, 후대 중국 학자들과 당나라 시대에는 하안이 《집해》의 유일한 저자로 거의 독점적으로 인정받았다.[10] 현대 학자들은 중세 중국 학자들이 하안을 유일한 저자로 믿게 된 증거가 무엇인지, 또는 그가 흥미로워서 썼는지, 아니면 위 조정의 명령에 따라 썼는지 불확실하지만, 관례상 하안을 주요 저자로 계속 인정하고 있다. 하안이 이를 황실에 제출한 후, 《집해》는 권위 있는 것으로 빠르게 인정받았고, 14세기 주희의 주석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거의 1,000년 동안 중국 독자들이 《논어》를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텍스트로 남았다.[10]
하안은 도교와 유교가 서로 보완적이며, 이 둘을 올바른 방식으로 연구함으로써 학자는 단일하고 통일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교와 유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양립성을 주장하면서, 하안은 "노자는 [사실] 성인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11]
5. 평가
하안은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다녔으며, 자신의 그림자가 으쓱대는 모습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유명한 점술가였던 관로는 하안의 외모에 대해 "얼굴이 하얗고 걷는 것이 나무와 같은 하안은 귀신의 상으로, 오래 살 수 있는 상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예언은 적중하였다.
6. 친족 관계
하안의 할아버지 하진은 십상시의 난 때 죽음을 당했고, 종조부 하묘(何苗)도 하진 암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18] 하안의 증조부는 정육점 주인이었고, 할아버지 하진은 후한의 장군이자 섭정이었다. 고모할머니는 후한 영제의 아내 하태후였다.[3][4]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
(Unspecified)
[2]
서적
三国志 一,魏帝纪第一,三国手册,曹操大事年表
中华书局,中国古籍出版社
[3]
서적
(Unspecified)
[4]
서적
闲云野鹤
四川教育出版社
[5]
서적
魏末传
(Unspecified)
[6]
서적
(Unspecified)
[7]
서적
(Unspecified)
[8]
서적
方诗铭论三国人物
上海古籍出版社
2006
[9]
서적
(Unspecified)
[10]
서적
(Unspecified)
[11]
서적
(Unspecified)
[12]
서적
闲云野鹤
四川教育出版社
[13]
서적
闲云野鹤,魏晋玄学新论
四川教育出版社,上海古籍出版社
[14]
학술지
何晏著述考
2003-10
[15]
서적
何晏叢考
(Unspecified)
[16]
웹사이트
(Unspecified)
http://kanji.zinbun.[...]
(Unspecified)
[17]
서적
三国志
(Unspecified)
[18]
서적
논어집해, 논어의소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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