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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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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천명은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그리고 그 이후 시대를 거치며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3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여러 신문사 기자와 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5년 시 잡지 《시원》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으며, 초기에는 고독과 향수를 주제로 한 서정시를 주로 썼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친일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57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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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 [인물]에 관한 문서
한국어 이름
한글노천명
한자盧天命
로마자 표기No Cheonmyeong
기본 정보
출생일1912년 9월 2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리
사망일1957년 12월 10일 (45세)
사망지서울특별시
직업시인, 작가, 소설가, 언론인, 대학교수
국적한국
학력
모교이화여자대학교
작품 활동
활동 기간1932년 - 1960년
장르시문학, 소설, 칼럼
기타 정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세례명: 베로니카)

2. 생애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2][6]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2]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시 창작을 시작했다.

1935년 잡지 『시원』에 시 「나의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 및 편집자로 일했다. 1938년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슴」이 수록된 첫 시집 『산호림』을 출간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일했다. 한국 전쟁 중 서울에 남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한 일로 인해, 서울 수복 후 부역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시인 김광섭, 문학평론가 이헌구 등의 구명 운동으로 6개월 만인 1951년 4월 석방되었다.[4]

석방 후에는 천주교에 귀의했으며, 서라벌예술대학, 이화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서 강의 활동을 이어갔다. 시집 《별을 처다보며》와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 등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뇌출혈로 자택에서 사망했다.[3]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7]

2. 1. 초기 생애 (1911~1934)

노천명은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8] 281번지에서 아버지 노계일과 어머니 김홍기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규모 지주이자 무역업에 종사했으며[11], 집안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오빠 노기철, 언니 노기용, 이복 남동생 노기숙이 있었다.[8] 본관풍천 노씨이다.[6]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었으나, 6세 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사경을 헤맸다.[8] 유년 시절 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그의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직접 하여, 노루의 피를 먹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8] 어머니 김홍기의 지극한 간호로 20일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하늘이 주신 명'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천명(天命)으로 바꾸어 호적에 올렸다.[8]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으나[11], 노천명 본인이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6.25 전쟁 이후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린 노천명에게 옥루몽을 읽어주기도 했다.[8]

191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8]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하고 경성부(현 서울)로 이주하여 외가가 있는 체부동 이모 집에서 잠시 머물렀고, 이후 창신동으로 옮겨 생활했다.[8] 1921년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했다.[8] 보통학교 3학년이던 1923년에는 언니 노기용이 변호사 최두환과 결혼하여 언니 부부가 학비를 지원해주었다.[8] 1926년 4월, 5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년 일찍 졸업하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8] 진명여고 시절에는 달리기 선수로 활동할 만큼 체육에 능했으며, 뛰어난 어휘력으로 '국어사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8] 1930년 3월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8] 이때부터 습작을 시작했다. 1934년 봄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8][2]

2. 2. 기자 및 문학 활동 (1934~1945)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했다. 이 신문사에서 4년간 근무했으며,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1935년 2월, 오일도가 창간한 시 전문 잡지 『시원』 창간호에 시 「나의 靑春의 배는|나의 청춘의 배는한국어」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이화여전 동문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와의 인연으로 박용철의 집을 자주 방문했으며,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류했다.

1938년 조선중앙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이직했다. 이후 4년간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며 조선일보 발행 잡지 『여성』의 편집을 1941년까지 담당했다. 같은 해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여 연극 활동에도 참여했다. 함대훈, 이헌구, 서항석, 조희순, 이시웅, 모윤숙, 최영수, 김복진 등 극예술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을 무대에 올렸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이던 시인 김기림이 구애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1938년은 노천명에게 여러모로 중요한 해였다. 1938년 1월 첫 시집 『산호림』을 발간했다. 이 시집에는 대표작 「사슴|사슴한국어」이 수록되었는데, 이 시는 노천명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이 해에 「벚꽃 동산」 공연장에서 보성전문학교 교수 김광진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김광진은 기혼자였기에 이 관계는 순탄치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소설가 유진오는 이들의 관계를 소재로 소설 『이혼』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3년 매일신보 문화부 기자로 입사했다. 1945년 광복 후 매일신보서울신문으로 개칭된 뒤에도 계속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2. 3. 광복과 한국전쟁 (1945~1953)

1945년 광복 후, 노천명은 중앙방송국에서 매주 토요일에 방송하는 주간여성뉴스에 출연하였고, 일상생활 지식이나 계절 관련 내용을 다루는 가정메모의 진행도 맡았다. 친일파로 분류되는 시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이후 우파 정치 운동에는 비교적 거리를 두었다. 해방 직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와 서라벌 예술대학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46년에는 서울신문을 그만두고 부녀신문사에 입사하여 편집부 차장을 지냈다. 또한 이화여대 출판부 활동에도 참여하여, 훗날 1956년 5월에 발간된 《이대 70년사》의 자료 수집과 정리를 담당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부녀신문사를 퇴사하였다. 1948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1949년 귀국하였다.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시인 전집》 제2권에 그의 시 여러 편을 모은 《노천명집》이 수록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노천명은 피신하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이후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당시 혐의는 모윤숙 등 우파 계열 문인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인민군에 알리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 지원을 독려하는 를 낭송했다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 20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10월 28일 국방경비법 제22조 이적행위죄가 적용되어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후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부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수감 중 노천명은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에게 "거기 있으면서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3월 2일까지 나를 구하라"는 다소 명령조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2] 이에 김광섭은 이헌구, 김상용 등 다른 문인들과 함께 노천명의 석방 운동을 벌였고[4], 그 결과 노천명은 1951년 4월 4일 사면을 받아 6개월여 만에 석방되었다.[4]

출감 직후, 노천명은 부산 중앙성당에서 정식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한국 전쟁 휴전 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인왕산 근처 서촌의 한옥에서 생활하였다.

2. 4. 석방 이후와 사망 (1953~1957)

1951년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촉탁으로 임명되어 활동을 재개했다. 동시에 서라벌예술대학교, 국민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출강했으며, 모교인 이화여대 출판부의 일도 함께 보았다. 1953년 3월 30일에는 세 번째 시집 《별을 처다보며》를 출간했다.[10] 1954년에는 수필 모음 《나의 생활백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사실상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인 1955년에는 《여성서간문독본》을 간행하였다.

1956년 『이화 70년사』를 집필하던 중 건강을 해쳤다. 1957년 2월 2일, 재생불능성 뇌빈혈 진단을 받고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입원비 마련에 곤란을 겪었다. 동료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치료비를 대신 내려 하자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며 거절하기도 했다. 친구 이용희가 문병했을 당시, 노천명은 병실 벽에 원고지를 대고 치료비를 벌기 위해 잡문을 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얼마 후 병세가 잠시 호전되자 치료비 문제로 퇴원하였다.

그러나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요양했다.[13] 서울 은평구의 시립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으나 끝내 입원하지는 못했다. 그 해 친구인 모윤숙의 부축을 받아 승용차로 시내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으며, 6월 15일에는 모윤숙의 출국을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까지 나갔다. 공항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6월 16일 새벽 1시 30분경, 누하동 자택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10] 향년 46세였다. 유해는 18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곡동(현 광진구 중곡동)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7]

3. 작품 세계

노천명은 1932년 시 〈밤의 찬미〉 발표로 등단하여 초기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개인적 정서를 담은 서정시를 주로 썼다. 대표작 〈사슴〉과 첫 시집 《산호림》(1938년)이 이 시기 작품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는 〈군신송〉,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 등 일제강점기 전쟁과 징병을 찬양하는 친일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적 변모를 보였다. 1945년 2월 25일에는 두 번째 시집 《창변》을 출간했다. 한편, 1935년 1월에는 극예술연구회가 안톤 체호프의 《벗꽃동산》을 번역하여 공연한 연극 방송극 〈앵화원〉에 모윤숙, 이헌구 등과 함께 배우로 참여하기도 했다. 사후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1958년)와 《노천명 전집》(1960년)이 간행되었다.[5]

3. 1. 초기 시 세계

1932년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시 창작을 이어갔다. 그의 초기 시 세계는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 향수의 정서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사슴〉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는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을 보여주며, 당대 현실과는 거리를 두는 비정치적인 경향을 띠었다.

1938년 1월 1일에는 첫 시집 《산호림》을 출간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이 시집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해 향수의 세계를 그려내며, 「자화상」, 「사슴」과 같은 작품에서는 고독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5]

1945년 2월 25일에는 두 번째 시집 《창변》을 발표했다. 이 시집은 첫 시집 《산호림》의 주제인 우울, 고독, 사랑, 향수 등을 계승하고 확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시집 모두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를 사용하여 고독과 향수를 서정적으로 엮어내는 특징을 공유한다. 시 속에서 노천명은 타인과의 연결이 어려운 고독한 공간을 묘사하는 동시에, 과거를 넘어서려는 희망 속에서 일종의 반(反)향수를 표현하기도 했다.[5]

3. 2. 친일 문학 논란

1932년 등단 이후 초기에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에서 볼 수 있듯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를 주로 노래했으나,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문학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찬양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 시기 노천명은 《매일신보》 등 친일 매체에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인 시들을 다수 발표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군신송>이 있으며, 특히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라는 시에서는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을 입었을 것을"이라고 노래하며, 조선 청년들이 일제 강점기 징병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하고 일제의 인적 수탈 정책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전시 체제 하에서 문학이 어떻게 동원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자, 노천명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 평가받는다.

3. 3. 광복 이후의 시 세계

한국문학번역원은 노천명의 시 세계, 특히 광복 이후 발표된 시집에 나타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5]

광복 이후 출간된 노천명의 두 번째 시집 《창변》은 첫 시집 《산호림》에서 다루었던 우울, 고독, 사랑, 향수와 같은 주제를 확장시킨다. 이 때문에 《창변》은 종종 《산호림》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산호림》이 주로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해 향수의 세계를 그렸다면, 《창변》은 이러한 정서를 이어가면서도 고독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심화시킨다. "자화상"이나 "사슴"과 같은 작품이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5]

두 시집 모두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를 사용하여 고독과 향수가 서정적으로 얽혀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특징을 지닌다. 시 속에서는 타인과의 연결이 어려운 고독한 공간이 묘사되는 동시에, 과거를 넘어서려는 희망 속에서 일종의 반(反)향수적인 정서가 표현되기도 한다.[5]

노천명 사후인 1958년에는 시집 《사슴의 노래》가 발간되었으며, 1960년에는 유족에 의해 《노천명 전집》이 출판되었다.[5]

4. 평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확인되었으며,[14]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다.

5. 저서

노천명은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여러 저서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첫 시집인 《산호림》(1938)을 비롯하여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 등의 시집과, 《산딸기》(1948), 《나의 생활백서》(1954) 등의 수필집이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섬세하고 서정적인 언어를 통해 고독향수의 정서를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5]

5. 1. 시집

주요 시집은 다음과 같다.

시집 제목출판 연도출판사비고
《산호림》1938자비 출판첫 시집
《창변》 (창가에서)1945매일신보사
《별을 쳐다보며》 (별을 헤며)1953희망출판사
《사슴의 노래》1958한림사유고 시집
《노천명 전집》1960천명사
《노천명 시집》1972



한국문학번역원은 노천명의 시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5]

첫 시집 《산호림》은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해 향수의 세계를 불러일으키며, "자화상"과 "사슴" 같은 작품에서는 고독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출판된 두 번째 시집 《창변》은 《산호림》에서 다루었던 우울, 고독, 사랑, 향수 등의 주제를 더욱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시집 모두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를 사용하여 고독과 향수를 서정적으로 엮어내는 특징을 지닌다. 그의 시는 타인과 연결되기 어려운 고독한 공간을 묘사하는 동시에, 과거를 넘어서려는 희망 속에서 일종의 반(反) 향수를 표현하기도 한다.[5]

5. 2. 기타 저서


  • ''결혼 전후''
  • ''나비''
  • ''산딸기'' (1948, 수필집)
  • ''나의 생활백서'' (1954, 수필집)
  • ''사슴과 고독의 대화'' (1973)
  • ''노천명 전집'' (1997, 전집)

6. 가족 관계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 읍내면에서 태어났다. 본관풍천 노씨[6]이다. 아버지는 노계일, 어머니는 의성 김씨의 김홍기이며, 3자매 중 둘째였다. 노계일은 마을의 소지주였으며 배 관련 사업도 했기 때문에 집은 넉넉한 편이었다. 노천명은 태어났을 때 기선으로 이름 지어졌지만, 5세 때 홍역에 걸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이 일 이후, 천명으로 이름을 고쳤다. 1920년, 노천명이 9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의 친가가 있는 서울로 이사했다.

'''노천명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한자생몰년비고
아버지노계일盧啓一? ~ 1918년마을 소지주, 배 관련 사업
어머니김홍기金鴻基1874년 ~ 1930년의성 김씨
오빠노기철
언니노기용盧基用? ~ ?1972년 무렵 생존
형부최두환崔斗煥법조인, 노기용의 남편
조카 (이질)최용정崔用貞노기용과 최두환의 딸
조카사위전OO최용정의 남편
동생이름 미상
서모이름 미상아버지 노계일의 첩
이복 남동생노기숙서모 소생


7. 기타

노천명은 국어국문학자 이희승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 작품을 보내 작품평을 듣고, 작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노천명이 이희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19]

詩集(시집) 이름을 아직 작정 못했는데 ’남사당’, ’검정나비’, ’鄕愁(향수)’ 중에서 어떤 것이 좋겠읍니까. 序文(서문)은 今週內(금주내)로만 주시면 되겠읍니다. 그럼 선생님의 건강을 비오며. 천명 드림.


노천명은 6.25 전쟁 당시 자신의 부역 문제가 거론되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 문제로 '부역 사건'을 언급하는 사람과는 절교하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에서 함께 일했던 소설가 이봉구가 서울 수복 후 조선일보에 '6.25와 부역 문화인'이라는 글을 기고하자, 노천명은 이봉구와 사이가 틀어졌다.[20]

또한 평론가 조연현과도 갈등을 겪으며 문단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조연현은 실형을 살고 나온 노천명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고자 자신이 관여하던 문예지에 글을 실어주었으나, 노천명은 "조용히 처신해야 할 사람이 설친다"는 비난을 받자 조연현에게 화를 냈다.[20] 이후 이봉구가 현대공론에 익명으로 부역 문인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을 조연현이 썼다고 오해한 노천명이 조연현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조연현이 노천명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천명은 조연현을 폭행 혐의로 고소하기까지 했다.[20]

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s://web.archive.[...] 2013-09-03
[2] 웹사이트 Naver Search http://people.search[...] Naver 2013-12-05
[3]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4]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s://web.archive.[...] 2013-09-03
[5]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s://web.archive.[...] 2013-09-03
[6] 웹사이트 노천명(盧天命) http://encykorea.aks[...] 2022-08-18
[7] 뉴스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8] 서적 노천명(세계작가탐구 한국편:5)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0-10-30
[9] 서적 노천명(세계작가탐구 한국편:5)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0-10-30
[10] 뉴스 詩人 盧天命氏 別世 경향신문 1957-06-17
[11] 문서 장연군 낙도면 두섭동본당 장연공소가 1898년 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12] 서적 한국의 여기자, 1920~1980 커뮤니케이션북스
[13] 서적 노천명(세계작가탐구 한국편:5)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0-10-30
[14] 저널 친일문학 작품 목록 https://web.archive.[...] 2007-09-03
[15] 서적 평양 기생 왕수복 10대 가수 여왕 되다 - 기생이 쓰는 기생 이야기 경덕출판사 2006-09-19
[16] 웹사이트 왕수복 http://nk.chosun.com[...] 2005-12-08
[17] 뉴스 반세기 동안 방치된 '노천명 묘역' https://web.archive.[...] 조선일보 2008-03-04
[18] 서적 한국의 여기자, 1920~1980 커뮤니케이션북스
[19] 뉴스 <애장품으로 보는 초기 여성작가의 삶과 문학> http://www.yonhapnew[...] 2012-09-05
[20] 서적 한국의 여기자, 1920~1980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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