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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닝 가 박격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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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우닝 가 박격포격은 1991년 2월 7일,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가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영국 총리의 공식 관저를 향해 감행한 박격포 공격이다. IRA는 1980년대 후반부터 영국 본토에서 활동을 강화했으며, 다우닝 가 공격은 IRA의 무장 투쟁의 일환으로, 당시 존 메이저 총리가 참석한 내각 회의를 겨냥했다. 세 발의 박격포탄이 발사되었고, 다행히 내각 구성원들은 무사했지만, 건물과 주변에 피해가 발생했다. 이 공격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불러일으켰고, 다우닝 가의 보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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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닝 가 박격포격
공격 개요
명칭다우닝 가 박격포 공격
시기1991년 2월 7일
시간오전 10시 8분 (GMT)
위치영국 잉글랜드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목표존 메이저
유형박격포 공격, 암살 시도
참여 분쟁북아일랜드 분쟁
가해자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
피해 상황
사망자0명
부상자4명
배경
포탄이 떨어진 마운트배튼 그린. 배경에는 외무성이 보이고, 왼쪽에는 다우닝 가 12번지 뒤쪽이 보인다.
포탄이 떨어진 마운트배튼 그린. 배경에는 외무성이 보이고, 왼쪽에는 다우닝 가 12번지 뒤쪽이 보인다.
좌표북위 51° 30′ 13″, 서경 0° 7′ 41″

2. 배경

더 트러블스 기간 동안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는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사제 박격포를 이용한 무장 투쟁을 전개해왔다.[1][2]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IRA는 잉글랜드 본토에서의 활동을 강화했으며, 1988년 12월 런던에서는 박격포 제작과 관련된 물품 및 기술 정보가 발견되기도 했다.[3][4]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1984년 브라이튼 호텔 폭탄 테러에서 암살 시도가 실패한 이후 IRA의 최우선 암살 대상 중 한 명이었다.[3]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1988년부터 다우닝 가 주변의 보안이 대폭 강화되었다. 거리 양 끝에는 경찰 경비 초소와 보안 게이트가 추가로 설치되었으며, 이 조치에는 80만파운드의 비용이 소요되었다.[5][6] 한편, IRA 내부에서는 대처 총리의 차량 행렬을 노려 다우닝 가 인근에 자동차 폭탄을 설치하고 원격으로 폭파하려는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민간인 사상자 발생 가능성이 높고 정치적으로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IRA 군사 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기각되었다.[3]

2. 1. 더 트러블스 시기 IRA의 무장 투쟁

더 트러블스 시기,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는 영국령 북아일랜드에 대한 무장 투쟁의 일환으로 북아일랜드 내 목표물을 대상으로 사제 박격포 공격을 반복적으로 감행했다.[1][2] 이 중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은 1985년 뉴리 박격포 공격으로, 이 공격으로 왕립 얼스터 경찰 대원 9명이 사망했다.[1][2] IRA는 잉글랜드에서도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박격포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1988년 12월, 런던 남부 배터시에서 런던 경찰청 대테러 부서의 급습 과정에서 박격포 제작에 사용되는 물품과 무기 궤적 계산에 필요한 기술적 세부 정보들이 발견되었다.[3][4]

1980년대 후반,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브라이튼 호텔 폭탄 테러에서 암살 시도가 실패한 이후 IRA의 주요 암살 대상 목록 최상위에 올라 있었다.[3] 1988년 들어 잉글랜드 내 IRA 활동이 증가하자 다우닝 가 주변의 보안이 강화되었으며, 거리 양 끝에 경찰 경비 초소와 보안 게이트가 추가로 설치되는 등 80만파운드의 비용이 투입되었다.[5][6] 한때 대처 총리의 영국 총리 차량이 지나갈 때 다우닝 가 인근 거리에 자동차 폭탄을 설치하고 원격 조종으로 폭파하려는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IRA 군사 위원회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정치적으로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이 계획을 기각했다.[3]

2. 2. 1988년 런던에서의 IRA 활동 증가

1988년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의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5], 런던 남부 배터시에서는 런던 경찰청 대테러 부서의 급습 과정에서 박격포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과 무기 궤적 관련 기술 정보가 발견되기도 했다.[3][4]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는 다우닝 가 주변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80만파운드의 예산을 투입했다. 이 비용으로 거리 양 끝에 경찰 경비 초소와 보안 게이트가 추가로 설치되었다.[5][6] 한편,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의 영국 총리 차량이 지나갈 때 다우닝 가 인근에 자동차 폭탄을 설치하여 원격으로 폭파하려던 계획은 IRA 군사 위원회 내부에서 기각되었다. 이는 민간인 사상자 발생 가능성이 높고 정치적으로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3]

3. 공격 준비

IRA 육군 평의회는 다우닝 가 공격을 승인하고, 1990년 중반부터 런던에서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했다.[3] 공격 준비가 진행되던 중 핵심 인력은 아일랜드로 복귀했으며,[3] 1990년 11월 마거릿 대처 총리가 사임하자 후임 존 메이저 총리를 새로운 공격 대상으로 정했다.[5] IRA는 내각 회의가 열리는 시점을 노려 공격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7]

3. 1. 공격 계획

IRA의 육군 평의회는 다우닝 가에 대한 박격포 공격을 승인했고, 1990년 중반 두 명의 IRA 조직원을 공격 계획 수립을 위해 런던으로 보냈다.[3] 파견된 조직원 중 한 명은 박격포 탄도 전문가였고, 다른 한 명은 IRA의 벨파스트 여단 소속으로 박격포 제조에 능숙했다.[3] IRA의 한 현역 부대는 공격에 사용할 포드 트랜짓 밴을 구입하고 차고를 임대했으며, IRA 코디네이터는 박격포 제작에 필요한 폭발물과 재료를 확보했다.[3]

부대원들은 박격포를 직접 제작하고, 밴 지붕에 구멍을 뚫어 박격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또한 화이트홀 근처에서 영국 총리의 공식 관저이자 집무실인 10 다우닝 가의 뒷부분을 타격하기에 적합한 발사 지점을 물색했다.[3][5]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두 명의 핵심 IRA 조직원은 아일랜드로 복귀했다. IRA 지도부는 이들을 중요한 인력으로 간주하여, 공격 이후 영국 보안 당국의 추적과 체포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다.[3] 1990년 11월, 마거릿 대처 총리가 갑작스럽게 사임했지만, IRA 육군 평의회는 계획된 공격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총리인 존 메이저를 다음 표적으로 삼았다.[5] IRA는 메이저 총리와 그의 장관들이 다우닝 가에서 회의를 가질 가능성이 높은 시기를 노렸으며, 내각 회의 일정이 공개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 시점을 정했다.[7]

3. 2. 차량 및 장비 준비

IRA 육군 평의회의 승인 후, 1990년 중반 두 명의 IRA 조직원이 공격 준비를 위해 런던으로 파견되었다.[3] 이들 중 한 명은 박격포 탄도 전문가였고, 다른 한 명은 벨파스트 여단 소속으로 박격포 제작 경험이 풍부했다.[3] 공격 실행을 위한 현역 부대는 포드 트랜짓 밴을 구입하고 차고를 임대했다. IRA 코디네이터는 박격포 제작에 필요한 폭발물과 재료를 확보했다.[3] 부대는 차고에서 박격포를 제작했으며, 구입한 밴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 박격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또한, 화이트홀 근처에서 10 다우닝 가의 뒷면을 타격하기에 적합한 발사 지점을 물색했다.[3][5]

3. 3. 발사 위치 선정

1990년 중반, IRA는 다우닝 가 폭격 공격을 위해 조직원 두 명을 런던으로 보냈다.[3] 이들은 박격포의 탄도 전문가와 제조 전문가로 구성되었다.[3] IRA는 공격에 사용할 포드 트랜짓 밴을 구입하고 박격포를 제작했으며, 발사를 위해 밴 지붕에 구멍을 뚫는 등 준비를 진행했다.[3] 이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최적의 발사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조직원들은 영국 총리의 공식 관저이자 집무실인 10 다우닝 가의 뒷면을 정확히 타격할 수 있도록, 화이트홀 근처에서 적합한 발사 지점을 신중하게 물색하고 정찰했다.[3][5]

4. 공격 실행

1996년 다우닝 가


1991년 2월 7일 오전, 존 메이저 총리가 주재하는 전시 내각 회의가 다우닝 가에서 열리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될 무렵, IRA 조직원은 다우닝 가에서 약 약 182.88m 떨어진 호스 가드 애비뉴와 화이트홀 교차로의 발사 지점으로 밴 차량을 몰고 갔다.[2][7][9]

밴을 주차한 운전자는 미리 준비된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빠르게 벗어났다.[7] 몇 분 후인 오전 10시 08분, 경찰관이 주차된 밴을 조사하려 다가가는 순간, 밴에 설치된 마크 10(Mark 10) 수제 박격포에서 세 발의 박격포탄이 발사되었다. 발사 직후 차량에는 미리 설치된 소이탄이 터지면서 화염에 휩싸였는데, 이는 법의학적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이었다.[4][7] 각 포탄은 약 1.37m 길이에 약 63.50kg 무게였고, 약 18.14kg의 플라스틱 폭약인 셈텍스를 탑재하고 있었다.[13]

발사된 포탄 중 두 발은 외무 영연방부 근처 잔디밭(마운트배튼 그린)에 떨어졌고, 한 발은 터졌으나 다른 한 발은 불발되었다.[2][7][9] 나머지 한 발은 회의가 열리고 있던 내각 사무국에서 약 약 27.43m 떨어진 다우닝 가 10번지의 뒷마당 정원에 떨어져 폭발했다.[7][13] 폭발로 인해 건물 일부가 손상되고 정원에 폭발구가 생겼으나, 회의 참석자들은 무사했다.[2][3][11]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내각 사무국 브리핑 룸에서 신속히 재개되었다.[2][11][12] 이 공격으로 경찰관 두 명을 포함한 네 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3][9] 사건 직후 국회의사당에서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는 정부 관청 지구가 봉쇄되었다.[9]

4. 1. 공격 당시 상황



1991년 2월 7일 아침, 메이저(Major) 총리의 전시 내각은 다른 고위 정부 및 군 관계자들과 함께 걸프 전쟁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다우닝 가에서 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에는 메이저 총리 외에도 정치인 더글러스 허드, 톰 킹, 노먼 라몬트, 피터 릴리, 패트릭 메이휴, 데이비드 멜러, 존 웨이크햄 등이 참석했다. 또한 공무원으로는 로빈 버틀러, 퍼시 크래독, 거스 오도넬, 찰스 파월 등이 있었고, 군 관계자로는 영국 국방 참모 총장인 데이비드 크레이그가 자리를 함께했다.[5][8]

회의가 시작될 무렵, IRA 조직원 한 명은 다우닝 가에서 약 약 182.88m 떨어진 호스 가드 애비뉴와 화이트홀 교차로의 발사 지점으로 밴 차량을 운전해 갔다.[2][7][9] 도착 후, 운전자는 밴을 주차하고 미리 준비된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신속히 벗어났다.[7] 몇 분 뒤인 오전 10시 8분, 한 경찰관이 주차된 밴을 수상하게 여겨 조사하려 다가가는 순간, 세 발의 박격포탄이 마크 10(Mark 10) 수제 박격포에서 발사되었다. 발사 직후 차량에는 미리 설치된 소이탄이 터지면서 화염에 휩싸였다.[4][7] 이 소이 장치는 폭발 후 차량에 불을 질러 모든 법의학적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7] 발사된 각 포탄은 길이가 약 1.37m에 달하고 무게는 약 63.50kg였으며, 탄두에는 약 18.14kg의 플라스틱 폭약인 셈텍스가 탑재되어 있었다.[13]

세 발의 포탄 중 두 발은 외무 영연방부 건물 근처의 잔디밭인 마운트배튼 그린(Mountbatten Green)에 떨어졌다.[2][7] 그중 한 발은 터졌으나 다른 한 발은 불발탄이었다.[9] 나머지 세 번째 포탄은 회의가 열리고 있던 내각 사무국 건물에서 불과 약 27.43m 떨어진 다우닝 가 10번지의 뒷마당 정원에 떨어져 폭발했다.[7][13] 만약 이 포탄이 다우닝 가 10번지 건물을 직접 타격했다면, 회의에 참석 중이던 내각 전체가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13][10] 폭발음을 들은 내각 구성원들은 즉시 테이블 아래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내각 사무실 창문에 설치된 방탄망이 폭발 충격을 일부 흡수했지만, 건물의 뒷벽이 그을리고 창문이 박살 났으며, 정원에는 수 피트 깊이의 폭발구가 생겼다.[2][3][11]

폭발음과 여진이 잦아들자 메이저 총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했다.[12] 회의실에 있던 인원들은 신속히 대피했고, 회의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각 사무국 브리핑 룸에서 재개되었다.[2][11] 내각 구성원 중 부상자는 없었으나, 총 네 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두 명은 폭발 파편에 맞은 경찰관이었다.[3][9] 공격 직후 수백 명의 경찰 병력이 국회의사당에서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는 정부 주요 시설 지구를 전면 봉쇄했다. 일반 시민들의 접근은 오후 6시까지 통제되었으며, 그동안 법의학 전문가들이 현장을 수색하고 정부 직원들은 보안 게이트 안에서 대기해야 했다.[9]

4. 2. 박격포 발사

1991년 2월 7일 오전, 메이저 총리가 주재하는 전시 내각 회의가 다우닝 가 10번지에서 진행 중일 때,[5][8] IRA 조직원은 다우닝 가에서 약 약 182.88m 떨어진 호스 가드 애비뉴와 화이트홀 교차로 지점으로 밴을 몰고 갔다.[2][7][9]

도착 후, 운전자는 미리 준비된 위치에 밴을 주차하고 대기 중인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7] 몇 분 후인 오전 10시 08분, 한 경찰관이 주차된 밴을 조사하려 접근하는 순간, 밴 안에 설치된 마크 10 수제 박격포에서 세 발의 박격포탄이 발사되었다.[4][7] 발사 직후, 미리 설치된 소이탄이 터지면서 밴에 불이 붙었다.[4][7] 소이탄은 법의학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7]

각 포탄은 길이 약 1.37m, 무게 약 63.50kg였으며, 약 18.14kg의 플라스틱 폭약인 셈텍스를 탑재하고 있었다.[13] 발사된 포탄 중 두 발은 외무 영연방부 근처 잔디밭(마운트배튼 그린)에 떨어졌는데, 한 발은 터졌으나 다른 한 발은 불발되었다.[2][7][9] 나머지 한 발은 다우닝 가 10번지의 뒷마당 정원에 떨어져 폭발했다. 낙하 지점은 내각 사무국 회의실에서 불과 약 27.43m 거리였다.[7][13]

4. 3. 피해 상황

발사된 세 발의 박격포탄 중 두 발은 외무 영연방부 근처의 잔디밭인 마운트배튼 그린에 떨어졌다.[2][7] 이 중 한 발은 폭발했으나 다른 한 발은 불발되었다.[9] 나머지 세 번째 포탄은 회의가 열리고 있던 내각 사무국에서 약 약 27.43m 떨어진 다우닝 가 10번지의 뒷마당에서 폭발했다.[7][13]

이 폭발로 인해 다우닝 가 10번지 건물 뒷벽이 그을리고 창문이 부서졌으며, 정원에는 수 피트 깊이의 폭발구가 생겼다.[2][3][11] 다행히 내각 사무실 창문에 설치된 방탄망이 폭발력을 일부 약화시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2][3][11] 폭발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내각 구성원들은 즉시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겼으며,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2][11] 폭발음과 여진이 잦아들자 존 메이저 총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며 회의실을 옮겼고, 회의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각 사무국 브리핑 룸에서 재개되었다.[12][2][11]

이 공격으로 총 네 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두 명은 파편에 맞은 경찰관이었다.[3][9] 사건 직후 수백 명의 경찰관이 국회의사당에서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는 정부 관청 지구를 봉쇄했으며, 민간인들의 접근은 당일 오후 6시까지 통제되었다.[9]

5. 공격 직후

공격 직후, IRA더블린에서 성명을 내고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11] 존 메이저 당시 영국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IRA의 행위를 강력히 비난했다.[11] 야당 대표였던 닐 키녹 역시 이번 공격을 "잔혹하고 헛된 짓"이라며 비판에 가세했다.[9]

런던 경찰청 대테러 부서 책임자는 이번 공격을 "대담하고 잘 계획되었으나 실행은 잘못되었다"고 평가했다.[11] 한편, 폭탄을 해체한 전문가는 IRA의 기술적 능력과 공격의 정확성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13] IRA는 이후에도 성명을 통해 영국의 북아일랜드 점령 정책을 비판하며 추가적인 위협을 가했다.[14]

사건의 여파로 메이저 총리는 관저의 폭탄 피해 복구가 완료될 때까지 임시로 해군성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 또한, 이번 공격을 계기로 다우닝 가의 보안 조치가 한층 강화되었다.[16]

5. 1. 영국 정부의 대응

1989년 IRA의 폭탄 테러 캠페인 이후 설치된 다우닝 가 보안 게이트


IRA는 더블린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격의 책임을 주장하며 "영국 정부는 6개 주(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이 영국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영국 내각은 벙커에서 회의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11] 당시 총리였던 존 메이저영국 하원에서 "우리의 테러리즘 척결 의지는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IRA의 기록은 모든 면에서 실패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늘 또다시 그 실패가 드러났다. 이제 그들은 민주주의가 테러리즘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는 그들을 경멸한다."라고 말했다.[11] 야당 대표 닐 키녹 역시 "오늘 화이트홀에서 벌어진 공격은 잔혹하고 헛된 짓이었다"라고 말하며 이 공격을 비난했다.[9]

런던 경찰청 대테러 부서장인 조지 처칠-콜먼 사령관은 이 공격을 "대담하고, 잘 계획되었지만, 실행은 잘못되었다"라고 평가했다.[11] 불발탄 중 하나를 해체한 대테러 부서 폭발물반 책임자인 피터 거니는 공격의 기술적 수준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3]

폭탄이 약 228.60m [화이트홀 건너편]에서 시야 확보 없이 발사된 것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명중률이 높았다. 기술적으로도 매우 훌륭했고, 비슷한 임무를 맡은 많은 군대 요원들이 이 정도로 근접하게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지키는 구역에 발사 차량을 주차해야 하고,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 나는 그 솜씨에 매우 놀랐다. 만약 발사 각도가 5~10도 정도만 바뀌었더라면, 그 폭탄들은 실제로 10번가에 떨어졌을 것이다.[13]


IRA는 이후 ''An Phoblacht''에 또 다른 성명을 게재하여 "모든 식민지배자들처럼, 영국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점령 결과가 그들 앞마당이나 뒷마당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영국 내각 구성원들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은 영국이 아일랜드에 남아 있는 동안 그 대가가 클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이 공격은 밴드 아이리시 브리게이드가 "네가 사는 거리에서"의 곡조에 맞춰 "다우닝 스트리트"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아일랜드 반란군 문화에서 기념되기도 했다. 이 노래에는 "아일랜드를 점령하는 동안에는 네가 사는 거리가 안전하지 않다"라는 가사가 포함되었다.[15]

한편, 메이저 총리는 폭탄 피해(주로 정원과 외벽) 복구가 완료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해군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공격을 계기로 거리 양쪽에 초소가 추가되었고, 다우닝 가의 보안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시행되었다.[16]

5. 2. 메이저 총리의 의회 연설

메이저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이번 공격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며, "우리의 테러리즘 척결 의지는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11] 그는 또한 "IRA의 기록은 모든 면에서 실패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늘 또다시 그 실패가 드러났다"고 언급하며, "이제 그들은 민주주의가 테러리즘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는 그들을 경멸한다"고 덧붙였다.[11]

5. 3. IRA의 성명

IRA는 더블린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격의 책임을 주장하며 "영국 정부는 6개 카운티(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이 영국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영국 내각은 벙커에서 회의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11] 이에 대해 존 메이저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우리의 테러리즘 척결 의지는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IRA의 기록은 모든 면에서 실패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늘 또다시 그 실패가 드러났다. 이제 그들은 민주주의가 테러리즘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는 그들을 경멸한다."라고 말했다.[11] 당시 야당 대표였던 닐 키녹 역시 "오늘 화이트홀에서 벌어진 공격은 잔혹하고 헛된 짓이었다"라고 말하며 이 공격을 비난했다.[9]

런던 경찰청 대테러 부서장인 조지 처칠-콜먼 사령관은 이 공격을 "대담하고, 잘 계획되었지만, 실행은 잘못되었다"라고 평가했다.[11] 불발탄 중 하나를 해체한 대테러 부서 폭발물반 책임자인 피터 거니는 공격에 대한 반응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13]

폭탄이 약 228.60m [화이트홀 건너편]에서 시야 확보 없이 발사된 것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명중률이 높았다. 기술적으로도 매우 훌륭했고, 비슷한 임무를 맡은 많은 군대 요원들이 이 정도로 근접하게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지키는 구역에 발사 차량을 주차해야 하고,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 나는 그 솜씨에 매우 놀랐다. 만약 발사 각도가 5~10도 정도만 바뀌었더라면, 그 폭탄들은 실제로 10번가에 떨어졌을 것이다.[13]


IRA는 이후 ''아 페블라흐트''에 또 다른 성명을 게재하며 대변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모든 식민지배자들처럼, 영국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점령 결과가 그들 앞마당이나 뒷마당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영국 내각 구성원들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은 영국이 아일랜드에 남아 있는 동안 그 대가가 클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14] 이 공격은 밴드 아이리시 브리게이드가 "네가 사는 거리에서"의 곡조에 맞춰 "다우닝 스트리트"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아일랜드 반란군 문화에서 기념되기도 했다. 이 노래에는 "아일랜드를 점령하는 동안에는 네가 사는 거리가 안전하지 않다"라는 가사가 포함되었다.[15]

6. 여파 및 영향

IRA는 더블린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격의 책임을 주장하며 "영국 정부는 6개 카운티[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이 영국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영국 내각은 벙커에서 회의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11] 이에 대해 존 메이저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우리의 테러리즘 척결 의지는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IRA의 기록은 모든 면에서 실패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늘 또다시 그 실패가 드러났다. 이제 그들은 민주주의가 테러리즘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는 그들을 경멸한다."라고 말했다.[11] 야당 대표 닐 키녹 역시 "오늘 화이트홀에서 벌어진 공격은 잔혹하고 헛된 짓이었다"라고 말하며 이 공격을 비난했다.[9]

런던 경찰청 대테러 부서장인 조지 처칠-콜먼 사령관은 이 공격을 "대담하고, 잘 계획되었지만, 실행은 잘못되었다"라고 평가했다.[11] 불발탄 중 하나를 해체한 대테러 부서 폭발물반 책임자인 피터 거니는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13]

폭탄이 약 228.60m [화이트홀 건너편]에서 시야 확보 없이 발사된 것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명중률이 높았다. 기술적으로도 매우 훌륭했고, 비슷한 임무를 맡은 많은 군대 요원들이 이 정도로 근접하게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지키는 구역에 발사 차량을 주차해야 하고,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 나는 그 솜씨에 매우 놀랐다. 만약 발사 각도가 5~10도 정도만 바뀌었더라면, 그 폭탄들은 실제로 10번가에 떨어졌을 것이다.[13]

6. 1. 보안 강화



메이저 총리는 폭탄 피해(주로 정원과 외벽) 복구가 완료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해군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공격으로 인해 거리 양쪽에 초소가 추가되었고, 다우닝 가의 보안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덜 눈에 띄는 조치들이 시행되었다.[16]

6. 2. 아일랜드 반란군 문화에 미친 영향

IRA는 ''아 페블라흐트''에 발표한 또 다른 성명에서 대변인을 통해 "모든 식민지배자들처럼, 영국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점령 결과가 그들 앞마당이나 뒷마당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영국 내각 구성원들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은 영국이 아일랜드에 남아 있는 동안 그 대가가 클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밝혔다.[14] 이 공격은 아일랜드 반란군 문화에서 기념되었는데, 밴드 아이리시 브리게이드는 '네가 사는 거리에서'의 곡조에 맞춰 "다우닝 스트리트"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에는 "아일랜드를 점령하는 동안에는 네가 사는 거리가 안전하지 않다"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15]

7. 한국의 관점

영국의 심장부인 다우닝 가가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의 박격포 공격을 받은 이 사건은 한국의 안보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며 상시적인 군사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과거에도 연평도 포격전과 같이 민간인 거주 지역이나 군사 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포격 도발을 감행한 전례가 있으며, 천안함 피격 사건과 같이 예측 불가능한 형태의 공격 가능성도 존재한다.

IRA의 다우닝 가 공격은 비록 제한적인 피해에 그쳤지만, 국가 중추 시설이 외부 공격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청와대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등 한국의 주요 시설 역시 테러나 군사적 공격의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대테러 역량 강화와 핵심 시설 방호 태세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IRA의 활동과 북한의 위협은 그 성격과 규모 면에서 차이가 있다. IRA는 특정 정치적 목적을 가진 무장 단체의 활동인 반면, 북한은 조선인민군이라는 정규군을 보유하고 핵무기 개발까지 추진하는 국가 단위의 위협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건은 평화적인 대화와 갈등 해결 노력이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굳건한 안보 태세 없이는 평화 역시 담보될 수 없다는 현실을 일깨워준다. 한국 사회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안보 위협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어떠한 형태의 도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참조

[1] 서적 Bandit Country Hodder & Stoughton 1999
[2] 서적 Brits https://archive.org/[...] Bloomsbury Publishing 2001
[3] 서적 25 Years of Terror: The IRA's war against the British Bantam Books 1996
[4] 서적 The Irish War: The Hidden Conflict Between the IRA and British Intelligence HarperCollins 2000
[5] 서적 The Irish Troubles: A Generation of Violence 1967–1992 Gill & Macmillan 1993
[6] 뉴스 Man held after Downing St hammer attack https://www.telegrap[...] 2004-09-10
[7] 서적 The Secret Army: The IRA https://archive.org/[...] Transaction Publishers 1997
[8] 서적 John Major HarperCollins 2000
[9] 뉴스 I.R.A. Attacks 10 Downing Street With Mortar Fire as Cabinet Meets https://www.nytimes.[...] 1991-02-08
[10] 서적 The Provisional IRA in England: The Bombing Campaign 1973–1997 Irish Academic Press 2006
[11] 뉴스 IRA shells the War Cabinet http://century.guard[...] 1991-02-08
[12] 뉴스 I think we had better start again somewhere else https://www.theguard[...] 1991-02-08
[13] 서적 Provos: The IRA & Sinn Féin Bloomsbury Publishing 1997
[14] 서적 Armed Struggle: The History of the IRA Pan Books 2003
[15] 문서 Bandit Country
[16] 서적 No 10 Downing Street: The Illustrated History HarperCollins Illust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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