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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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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노세키번은 1660년 센다이번의 다테 무네카쓰가 3만 석의 영지를 받아 진야를 설치하며 성립되었다. 다테 가문 시대에는 다테 소동으로 무네카쓰가 실각하고 영지가 몰수되었으나, 1682년 다무라 다쓰아키가 이치노세키 영지로 이봉되어 다무라 가문 시대가 열렸다.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하여 신정부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하여 영지가 삭감되었고, 1869년 판적봉환, 1871년 폐번치현으로 소멸되었다. 이치노세키 번은 센다이 번의 간섭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가신단과 징세 기구를 갖추어 자립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란가쿠와 와산 등 문화가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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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키번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이치노세키 번
로마자 표기Ichinoseki-han
종류
국가도쿠가와 막부 일본
존속 기간1660년–1671년, 1681년–1871년
시대에도 시대
수도이치노세키 진야
좌표40°30′53.1″N 141°29′16.3″E
역사
시작1660년
사건센다이 번에 합병 (1671년)
센다이 번에서 분리 (1681년)
종료폐지 (1871년)
현재 위치이와테현의 일부
정치
정치 체제다이묘

2. 번의 성립과 변천

1660년 센다이번의 3대 번주 다테 쓰나무네의 숙부 다테 무네카쓰가 3만 석 영지를 분할받아 이치노세키에 진야를 두면서 이치노세키 번이 성립되었다. 무네카쓰는 센다이 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중앙집권화를 꾀했으나, 1671년 다테 소동으로 실각하고 영지도 몰수되어 센다이 번에 귀속되었다.[1]

1682년, 이와누마번다무라 다쓰아키가 이치노세키 영지로 이봉되어 다시 이치노세키 번이 생겨났다. 다무라 가문은 센다이 번의 지번으로, 다쓰아키는 도자마 다이묘이면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측근으로 일하였다.[2]

보신 전쟁 때 이치노세키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하여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항복 후 영지 3천 석이 삭감되고 번주가 강제 은거당하는 처분을 받았다.[2] 1869년 판적봉환,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은 소멸하였다.[2]

2. 1. 다테 가문 시대 (1660년 ~ 1671년)

1660년, 센다이번의 3대 번주 다테 쓰나무네의 숙부 다테 무네카쓰가 3만 석 영지를 분할받아 이치노세키에 진야를 두면서 이치노세키 번이 성립되었다.[1] 무네카쓰는 쓰나무네의 은거 이후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된 다테 쓰나무라의 후견인으로 센다이 번의 실권을 장악했다.[1] 그러던 중에 무네카쓰는 센다이 번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꾀하여 와쿠야 다테 가문과 후계자 및 영지 문제로 대립했고,[1] 이것이 1671년 다테 소동으로 커지면서 결국 실각했다.[1] 이때 이치노세키 영지도 몰수, 반환되어 센다이 번에 귀속되었다.[1]

어린 다테 쓰나무라가 번주가 되자 번내에서 정권을 둘러싼 가로(오쿠야마 쓰네토키와 모니와 사다모토) 간의 항쟁이 일어났다.[2] 더 나아가 후견인인 무네카쓰와 다무라 무네나가 사이에도 갈등이 일어나면서, 다테 소동(간분 사건)의 기반이 되는 대립이 형성되어 갔다.[2]

센다이 번의 주도권은 무네카쓰에게 있었고, 무네카쓰는 자신의 전단에 반대하는 파벌을 철저하게 탄압했다.[3] 간분 11년(1671년) 다테 일문의 다테 무네시게가[3] 소령 경계 문제의 재정을 불만으로 하여 무네카쓰의 전단과 부정을 막부에 호소하여 수리됨으로써, 다테 소동이 발생했다.[4] 이 소동은 가로 하라다 무네스케가 무네시게에게 달려들어 참살하면서 무네카쓰 일파가 역신으로 몰려 일소, 실각했다.[4] 무네카쓰는 죄인으로 도사 번에 맡겨져 엔포 7년(1679년)에 사망했다.[4] 아들 다테 무네오키와 손자 센노스케도 유배되었고, 후에 사망하면서 무네카쓰 가문은 단절되었다.[4] 이치노세키 번은 개역되었고, 그 영지는 센다이 번에 수공되어 가신도 센다이 번에 귀속되었다.[4]

2. 2. 다무라 가문 시대 (1682년 ~ 1871년)

1682년, 이와누마번다무라 다쓰아키가 이치노세키 영지로 이봉되어 다시 이치노세키 번이 생겨났다.[2] 이와누마 번의 다무라 가문은 센다이 번의 2대 번주 다테 다다무네가 아내 요시히메의 친정 집안인 다무라 가문을 아들 무네요시에게 다시 일으키게 한 데서 비롯된 가문으로 센다이 번의 지번에 해당했다.[2] 다쓰아키는 도자마 다이묘이면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측근으로 일하였다.[2]

원래 다무라 가문은 미하루(현재의 후쿠시마현 타무라군)에 뿌리를 둔 센고쿠 다이묘였으나, 다무라 키요아키 때 딸 아이히메 (요토쿠인)를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로 보냄으로써 아시나 가문이나 소마 가문에 대항했다. 그러나 키요아키가 사망하자, 다무라 가문은 다테파와 소마파로 분열되어 항쟁했고, 결국 다테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오슈 오시치에서 마사무네는 총무사령 위반의 죄로 아시나령 등을 몰수당했지만, 타무라 군만은 장인인 키요아키의 소령이었던 것을 이유로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인정받아 다테령으로 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다무라 가문은 개역되었고, 키요아키의 조카 다무라 무네아키는 구령 복귀를 위해 마사무네와 대립하여 가모 우지사토에게 의지했고, 히데요시에게 소송을 걸려고 했지만 그 중간에 병사하여 다무라 가문은 단절되었다.

아이히메는 친정이 단절된 것을 슬퍼하며, 마사무네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 타다무네에게 여러 차례 다무라 가문의 재흥을 간청했다. 아이히메는 타다무네의 삼남이자 자신의 손자인 다무라 무네요시를 다무라 가문의 후계자로 원했다. 아이히메는 쇼오 2년(1653년)에 86세로 사망했지만, 타다무네는 같은 해에 그 유언을 받아들여, 무네요시에게 다무라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무네요시는 나토리 군에서 이와누마번 3만 석을 건립했고 다테 무네카츠와 함께 다테 쓰나무라의 후견인이 되었지만, 무네카츠와의 갈등으로 다테 소동에서는 주도권을 무네카츠에게 빼앗겼다.

엔포 9년(1681년) 무쓰 이와누마에서 다무라 타케아키(타무라 켄켄)가 이봉되어 이치노세키번이 건립되었다. 다무라 타케아키는 무네요시의 아들이며, 도자마 다이묘이면서도 오쿠즈메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측근으로 섬겼다. 이치노세키 번주가 된 타케아키는, 마츠노 오로카에서 칼부림 사건을 일으킨 아코번아사노 나가노리를 맡아 에도 우와야시키(번저) 내에서 할복하게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코 사건, 다무라 타케아키 등을 참조).

충신장의 이야기에서 기념되듯이, 아사노 나가노리는 에도 성의 마츠노 오로카에서 키라 요시나카를 상대로 칼을 휘두른 사건으로 다무라 씨의 에도 저택에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할복을 명령받았다.[2]

다무라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치노세키를 통치했다.[2] 그러나 그들의 지위는 다소 모호했다.[2] 도쿠가와 막부는 이치노세키를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대우했지만, 이치노세키는 막부로부터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가하는 문서를 받지 못했다.[2] 반면 센다이 번은 여전히 이치노세키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했으며, 이치노세키는 다테 씨의 가문 규칙을 따라야 했다.[2] 이는 이치노세키가 자체적인 법률과 규정을 제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2] 이치노세키의 상황은 기타카미강에 의해 분리된 두 지역과 그 사이에 있는 여러 다테 씨 소유의 영토로 구성되어, 통일된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로 더욱 복잡해졌다.[2]

막부 말기 시대 동안, 이치노세키의 한 의사는 1822년 센다이에 의학교를 설립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2]

보신 전쟁 때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하여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2] 후일 항복하였으나 영지 3천 석을 삭감당하고 번주가 강제 은거당하는 처분을 받았다.[2] 1869년 판적봉환, 1871년 폐번치현을 맞아 번은 소멸하였다.[2]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센다이 번과 함께 오우 열번 동맹에 참가하여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2] 보신 전쟁 후 메이지 2년(1869년) 3천 석을 삭감한 후 번주의 친동생 다무라 타카아키에게 가독 상속을 허락했지만, 같은 해 4월에 판적 봉환했다.[2] 타카아키는 이치노세키 번지사로 임명되었지만,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이치노세키 번은 폐지되었고, 이치노세키 현이 설치되었다.[2]

새로운 메이지 정부하에서, 이치노세키 번의 마지막 다이묘인 다무라 타카아키에게 화족 작위인 자작이 수여되었다.[2]

3. 역대 번주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직고쿠다카비고
다테 씨 (도자마 다이묘) 1660–1671
1다테 무네카쓰1660년 ~ 1671년효부노다이스케 (兵部大輔)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다테 소동으로 개역
다무라 씨 (도자마 다이묘) 1681–1871
1다무라 다쓰아키1681년 ~ 1708년우쿄노다이후 (右京大夫), 이나바노카미 (因幡守)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2다무라 노부아키1708년 ~ 1727년시모사노카미 (下総守)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3다무라 무라아키1727년 ~ 1755년오키노카미 (隠岐守), 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4다무라 무라타카1755년 ~ 1782년시모사노카미 (下総守), 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5다무라 무라스케1782년 ~ 1798년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6다무라 무네아키1798년 ~ 1827년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 우쿄노다이후 (右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7다무라 구니아키1828년 ~ 1840년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8다무라 구니미치1840년 ~ 1857년우쿄노다이후 (右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
9다무라 유키아키1857년 ~ 1863년미마사카노카미 (美作守), 지주 (侍従)종4위하 (従四位下)30,000 석
10다무라 구니요시1863년 ~ 1868년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정5위하 (五位下)30,000 석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
11다무라 다카아키1868년 ~ 1871년우쿄노다이후 (右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 석폐번치현으로 번 지사



'''다무라 다쓰아키'''|田村建顕|1656년 6월 30일 ~ 1708년 2월 18일일본어는 이와누마 번의 마지막 다이묘이자, 이치노세키 번의 초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1691년에는 임시 후다이 다이묘 지위로 승격되었고, 1693년에는 성주 칭호를 받았다. 1701년, 주신구라 사건 이후 아사노 나가노리의 감시를 맡았고, 아사노 나가노리는 이치노세키 번 저택에서 할복했다.[3] 53세로 사망했으며,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타무라 노부아키'''(田村誠顕|1670년 3월 21일 ~ 1727년 8월 23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2대 타무라 다이묘였다.[4] 1708년 타쓰아키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727년 58세로 사망했으며, 묘는 이치노세키 쇼운지에 있다.

'''타무라 무라아키'''(田村村顕|1707년 6월 23일 – 1755년 9월 8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3대 타무라 다이묘였다.[1] 우와지마 번 다이묘 다테 무네요시의 차남으로, 1726년 타무라 노부아키의 후계자가 되었고, 이듬해 노부아키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755년 49세로 사망했으며, 센다이 번 다이묘 다테 요시무라의 다섯째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무라타카'''(田村村隆|1737년 6월 21일 ~ 1782년 3월 19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4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센다이 번 다이묘 다테 요시무라의 다섯째 아들로, 1755년 무라아키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756년 조카 다테 시게무라가 센다이 번 다이묘가 되자, 무라타카는 후견인이 되었다. 잦은 흉작으로 번은 파산 직전이었고, 센다이 번에 세 차례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1782년 46세로 사망했으며,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무라스케'''(田村村資|1763년 2월 15일 ~ 1808년 12월 14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5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1782년 무라타카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다음 해, 번교 건설을 명령했다. 1796년 다테 나리무라 사망 이후 센다이 번에서 오이에소도가 발발했고, 다무라 무라스케가 고속도로를 차단하여 폭력이 이치노세키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1798년 은퇴했고, 묘는 에도 타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무네아키'''(田村宗顕|1784년 6월 19일 ~ 1827년 12월 25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6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1793년 다무라 무라스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무라스케는 1798년 은퇴했다. 흉작과 에조 변경 방어 기여 명령으로 번 재정이 악화되었다. 묘는 이치노세키 쇼운지에 있다.

'''다무라 구니아키'''(田村邦顕|1817년 2월 12일 – 1840년 9월 18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7대 다이묘였다.[1] 1827년 부친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으며, 1829년 센다이 번 하마야시키에서 다테 나리쿠니 주례로 겐푸쿠 의식을 치렀다. 흉작과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25세에 사망했으며,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구니유키'''(田村 邦行|1820년 8월 31일 – 1857년 3월 14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8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1840년 형 다무라 구니아키 사망으로 양자가 되어 다이묘가 되었다. 번 재정 개혁, 토지 개혁, 의학 강조하며 번 학원을 재건했다. 현대적 화기 도입하여 번 군대 근대화 조치를 취했다. 38세에 사망했으며, 묘는 도쿄 다마나와 도젠지에 있다.

'''타무라 유키아키'''(田村邦行|1850년 7월 16일 – 1867년 7월 17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9대 다이묘였다.[1] 1857년 아버지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863년, 센다이 번 후계자가 되기 위해 다테 요시키니에게 입적하여 '''다테 모치무라'''로 개명했다. 유키아키는 에도 저택에서 18세에 사망했고, 센다이 번 다이묘가 되지 못했다. 묘소는 센다이 다이넨지에 있다.

'''다무라 구니요시'''(田村邦栄|1852년 7월 7일 – 1887년 2월 26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10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1863년, 다무라 유키아키다테 요시쿠니 양자로 센다이 번 후계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이치노세키 번은 지도자가 없어졌다. 구니요시는 가문 원로들에 의해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1868년, 센다이 번 부름에 응하여 이치노세키 군대를 이끌고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대항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다.[5] 묘소는 도쿄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다무라 다카아키'''(田村崇顕|1858년 12월 24일 ~ 1922년 12월 11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11대이자 마지막 다이묘였다.[1] 1868년, 다무라 쿠니요시는 보신 전쟁에서 신 메이지 정부에 대항한 역할로 퇴위해야 했고, 타카아키는 10세에 다이묘가 되었지만, 이듬해 작위가 폐지되었고 번 지사가 되었다. 1887년 쿠니요시 사망으로 작위와 화족 지위인 자작을 받았다. 1922년 65세로 사망하면서 작위는 쿠니요시 아들 '''다무라 히로아키'''(1875–1945)에게 넘어갔다.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3. 1. 이치노세키 다테 가문

다테 마사무네의 열 번째 아들인 다테 무네카쓰는 1660년부터 1671년까지 이치노세키 번을 다스렸다. 무네카쓰는 센다이 번의 지번이었던 이치노세키 번을 다스렸으나, 다테 씨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오이에 소도''인 다테 소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결국 1671년, 무네카쓰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영지는 센다이 번으로 반환되었다.[1]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직고쿠다카비고
다테 씨 (도자마 다이묘) 1660–1671
1다테 무네카츠1660년 ~ 1671년효부노다이스케 (兵部大輔)종5위하 (従五位下)30,000석



씨명관위재직 기간향년비고
1다테 무네카쓰종4위하
병부소보
1660년 - 1671년59다테 소동으로 개역.


3. 2. 다무라 가문

다무라 다쓰아키1681년부터 1708년까지 이치노세키 번을 다스렸다. 다무라 노부아키1708년부터 1727년까지, 다무라 무라아키1727년부터 1755년까지 재임했다. 다무라 무라타카1755년부터 1782년까지, 다무라 무라스케1782년부터 1798년까지 통치했다. 다무라 무네아키1798년부터 1827년까지, 다무라 구니아키1828년부터 1840년까지 재임했다. 다무라 구니미치1840년부터 1857년까지, 다무라 유키아키1857년부터 1863년까지 통치했다. 다무라 구니요시1863년부터 1868년까지, 다무라 다카아키1868년부터 1871년까지 재임했다.

1681년, 이와누마 번의 2대 다이묘였던 다무라 다쓰아키는 거점을 이치노세키로 옮겼다. 다쓰아키는 다테 마사무네의 증손자였으며, 도쿠가와 쓰나요시 쇼군에게 총애를 받아 도자마 다이묘임에도 후다이 다이묘에게 부여되는 특권을 누렸다.

다무라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치노세키를 통치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이치노세키를 완전히 독립적으로 대우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가하는 문서를 받지 못했다. 반면 센다이 번은 이치노세키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했고, 다무라 씨는 다테 씨의 가문 규칙을 따라야 했다. 이치노세키는 자체적인 법률을 제정할 수 없었다. 이치노세키는 기타카미 강으로 분리된 두 지역과 그 사이의 다테 씨 소유 영토로 구성되어 통일된 영토가 아니었다.

충신장에서 아사노 나가노리는 에도 성의 마쓰노 오로카에서 키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두른 사건으로 다무라 씨의 에도 저택에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할복을 명령받았다.

막부 말기 시대, 이치노세키의 한 의사는 1822년 센다이에 의학교를 설립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2]

보신 전쟁 동안, 다무라 구니요시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지만, 센다이 번과 함께 황군에 항복했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이치노세키 번은 이치노세키 현이 되었으며, 이와테 현에 통합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치노세키 번의 마지막 다이묘인 다무라 다카아키에게 화족 작위인 자작을 수여했다.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직고쿠다카
1다무라 다쓰아키1681–1708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이나바노카미(因幡守)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2다무라 노부아키1708–1727시모사노카미(下総守)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3다무라 무라아키1727–1755오키노카미(隠岐守), 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4다무라 무라타카1755–1782시모사노카미(下総守), 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5다무라 무라스케1782–1798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6다무라 무네아키1798–1827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 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7다무라 구니아키1828–1840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8다무라 구니미치1840–1857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9다무라 유키아키1857–1863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지주(侍従)종4위하 (従四位下)30000koku
10다무라 구니요시1863–1868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정5위하 (五位下)30000koku
11다무라 다카아키1868–1871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종5위하 (従五位下)30000koku



'''다무라 다쓰아키'''|田村建顕|1656년 6월 30일 ~ 1708년 2월 18일일본어는 이와누마 번의 마지막 다이묘이자, 이치노세키 번의 초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하였다. 다쓰아키는 다무라 무네요시의 둘째 아들이었다. 1681년 5월, 이와누마 번에서 이치노세키로 이전되었다.[1] 1691년에는 임시 후다이 다이묘 지위로 승격되었다. 1693년에는 성주 칭호를 받았다. 마쓰에 번의 마쓰다이라 지카요시의 딸과 결혼했지만, 아들이 없어 하타모토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1701년, 주신구라 사건 이후 아사노 나가노리의 감시를 맡았고, 아사노 나가노리는 이치노세키 번 저택에서 세푸쿠했다.[3] 1705년에는 이바노카미 관위를 받았다. 53세로 사망했으며,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타무라 노부아키'''(田村誠顕|1670년 3월 21일 ~ 1727년 8월 23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2대 타무라 다이묘였다.[4] 관직은 종5위 하급이었다. 하타모토인 타무라 아키아테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1708년 타츠아키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727년 58세로 사망했으며, 묘는 이치노세키 쇼운지에 있다. 우와지마 번의 다테 무네요시 아들인 타무라 무라아키를 양자로 삼았다.

'''타무라 무라아키'''(田村村顕|1707년 6월 23일 – 1755년 9월 8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3대 타무라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하였다.

우와지마 번 ''다이묘'' 다테 무네요시의 차남이었다. 1726년 타무라 노부아키의 후계자가 되었고, 이듬해 노부아키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매사냥과 사냥에 시간을 보냈다. 1755년 49세로 사망했으며, 센다이 번 ''다이묘'' 다테 요시무라의 다섯째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東禅寺)에 있다.

'''다무라 무라타카'''(田村村隆|1737년 6월 21일 ~ 1782년 3월 19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4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하였다. 센다이 번 다이묘 다테 요시무라의 다섯째 아들로 아오바 성에서 태어났다. 1752년 다무라 무라아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1755년 무라아키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756년 조카 다테 시게무라가 센다이 번 다이묘가 되자, 무라타카는 후견인이 되었다. 잦은 흉작으로 번은 파산 직전이었고, 센다이 번에 세 차례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1782년 46세로 사망했으며, 손자 다무라 무라스케가 뒤를 이었다.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무라스케'''(田村村資|1763년 2월 15일 ~ 1808년 12월 14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5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 하위였다. 도메-다테 씨족 족장인 다테 무라요시의 장남이었다. 1782년 무라타카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다음 해, 번교 건설을 명령했다. 1796년 다테 나리무라 사망 이후 센다이 번에서 오이에소도가 발발했고, 다무라 무라스케가 고속도로를 차단하여 폭력이 이치노세키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1798년 은퇴했고, 양자 다무라 무네아키가 뒤를 이었다. 묘는 에도 타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무네아키'''(田村宗顕|1784년 6월 19일 ~ 1827년 12월 25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6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 하위였다. 센다이 번에 출사한 하타모토인 나카무라 무라요시의 아들이자 다테 무네무라의 아들이었으며, 홋타 마사토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793년 다무라 무라스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무라스케는 1798년 은퇴했다. 이 시기 '''다무라 타카아키'''(田村敬顕)라고 불렸다. 1802년 무라스케의 딸과 결혼했으며, 1808년 무네아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흉작과 에조 변경 방어 기여 명령으로 번 재정이 악화되었다. 묘는 이치노세키 쇼운지에 있다.

'''다무라 구니아키'''(田村邦顕|1817년 2월 12일 – 1840년 9월 18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7대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였다. 다무라 무네아키의 차남으로, 에도 나카야시키에서 태어났다. 1827년 부친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으며, 1828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했다. 1829년 센다이 번 하마야시키에서 다테 나리쿠니 주례로 겐푸쿠 의식을 치렀다. 흉작과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25세에 사망했으며, 동생이 사후 양자가 되었다. 묘는 에도 다카나와 도젠지에 있다.

'''다무라 구니유키'''(田村 邦行|1820년 8월 31일 – 1857년 3월 14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8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조정 관위는 종5위하였다. 다무라 무네아키의 넷째 아들이었으며, 처음 이름은 '''아키치카'''(顕允)였다. 1840년 형 다무라 구니아키 사망으로 양자가 되어 ''다이묘''가 되었다. 1841년, 이누야마 번 ''다이묘'' 나루세 마사나가의 딸과 결혼했다. 번 재정 개혁, 토지 개혁, 의학 강조하며 번 학원을 재건했다. 현대적 화기 도입하여 번 군대 근대화 조치를 취했다. 38세에 사망했으며, 묘는 도쿄 다마나와 도젠지에 있다.

'''타무라 유키아키'''(田村邦行|1850년 7월 16일 – 1867년 7월 17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9대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4위 하위였다. 타무라 쿠니유키의 장남으로, 1857년 아버지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1863년, 센다이 번 후계자가 되기 위해 다테 요시키니에게 입적하여 '''다테 모치무라'''로 개명했다. 이로 인해 이치노세키에는 통치자가 없었다. 다테 쿠니시게가 제안되었지만, 번 지도부 반대로 타무라 쿠니요시가 선택되었다. 유키아키는 에도 저택에서 18세에 사망했고, 센다이 번 다이묘가 되지 못했다. 묘소는 센다이 다이넨지에 있다.

'''다무라 구니요시'''(田村邦栄|1852년 7월 7일 – 1887년 2월 26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10대 다무라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5위하였다. 이시카와 요시미쓰의 7남이었다. 1863년, 다무라 유키아키다테 요시쿠니 양자로 센다이 번 후계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이치노세키 번은 지도자가 없어졌다. 구니요시는 가문 원로들에 의해 다이묘로 임명되었고, 유키아키 딸과 결혼하여 양자가 되었다. '''다무라 요시아키''' (田村栄顕)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다무라 구니요시로 개명했다. 1868년, 센다이 번 부름에 응하여 이치노세키 군대를 이끌고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대항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다.[5] 몇 달 후, 동생 다무라 다카아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묘소는 도쿄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다무라 타카아키'''(田村崇顕|1858년 12월 24일 ~ 1922년 12월 11일일본어)는 이치노세키 번의 11대이자 마지막 다이묘였다.[1] 관위는 종4위 하위였다. 이시카와 요시미츠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1868년, 다무라 쿠니요시는 보신 전쟁에서 신 메이지 정부에 대항한 역할로 퇴위해야 했고, 가문 원로들은 후임자를 선택해야 했다. 타카아키는 10세에 다이묘가 되었지만, 이듬해 작위가 폐지되었고 번 지사가 되었다. 1882년, 쿠니요시에게 가문 족장 직위를 돌려주었다. 1887년 쿠니요시 사망으로 작위와 화족 지위인 '시샤쿠'(자작)를 받았다. 1922년 65세로 사망하면서 작위는 쿠니요시 아들 '''다무라 히로아키'''(1875–1945)에게 넘어갔으며, 그는 일본 제국 해군 장교이자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생이었다.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엔포 9년(1681년) 3월 무쓰 이와누마에서 다무라 타케아키(다무라 켄켄)가 이봉되어 5월 2일(5월 3일) 입봉하면서 다시 이치노세키 번이 건립되었다.

다무라 가문은 미하루(현재 후쿠시마 현 타무라 군)에 뿌리를 둔 센고쿠 다이묘였으나, 다무라 키요아키 때 딸 아이히메를 다테 마사무네 정실로 보냄으로써 아시나 가문, 소마 가문에 대항했다. 그러나 키요아키 사망 후, 다무라 가문은 다테파와 소마파로 분열되어 항쟁했고, 결국 다테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슈 오시치에서 마사무네는 총무사령 위반 죄로 아시나령 등을 몰수당했지만, 타무라 군만은 장인 키요아키 소령이었던 것을 이유로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인정받아 다테령으로 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다무라 가문은 개역되었고, 키요아키 조카 다무라 무네아키는 구령 복귀를 위해 마사무네와 대립하여 가모 우지사토에게 의지했고, 히데요시에게 소송을 걸려고 했지만 중간에 병사하여 다무라 가문은 단절되었다.

아이히메는 친정 단절을 슬퍼하며, 마사무네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 타다무네에게 다무라 가문 재흥을 간청했다. 아이히메는 타다무네 삼남이자 손자인 다무라 무네요시를 다무라 가문 후계자로 원했다. 쇼오 2년(1653년) 86세로 사망했지만, 타다무네는 유언을 받아들여, 무네요시에게 다무라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무네요시는 나토리 군에서 이와누마 번 3만 석을 건립했고 다테 무네카츠와 함께 다테 쓰나무라 후견인이 되었지만, 무네카츠와 삼촌-조카 관계 갈등, 무네요시 온후한 성격과 병약함, 무네카츠 재기 발랄함과 강압적 성격으로, 다테 소동에서 주도권을 무네카츠에게 빼앗겼다.

타케아키는 무네요시 아들이며, 토자마 다이묘면서 오쿠즈메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측근으로 섬겼다. 이치노세키 번주가 된 타케아키는, 마츠노 오로카에서 칼부림 사건을 일으킨 아코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를 맡아 에도 우와야시키(번저) 내에서 할복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자세한 내용은 아코 사건, 다무라 타케아키 등 참조).

다무라 미치아키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도 미토 낭사 중 무상이었던 모리야마 시게노스케를 취지서와 함께 맡았지만, 얼마 후 아시카가 번·토다 가문으로 옮겨졌다.[9]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센다이 번에 따라 오우 열번 동맹에 참가하여, 센다이 번과 함께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 보신 전쟁 후 메이지 2년(1869년), 3천 석을 삭감한 후 번주 친동생 다무라 타카아키에게 가독 상속을 허락했지만, 같은 해 4월 판적 봉환했다. 타카아키는 이치노세키 번지사로 임명되었지만,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이치노세키 번은 폐지되었고, 이치노세키 현이 설치되었다.

4. 통치 체제 및 재정

이치노세키 번은 1681년 이와누마 번의 2대 다이묘인 타쓰아키다테 마사무네의 증손자이자 도쿠가와 쓰나요시 쇼군의 총애를 받은 것을 배경으로 이치노세키로 거점을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타쓰아키는 도자마 다이묘임에도 후다이 다이묘에 준하는 특권을 누렸다.[1] 다무라 씨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치노세키를 통치했지만, 그 지위는 다소 모호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치노세키를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대우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가하는 문서를 받지 못했다. 반면 센다이 번은 여전히 이치노세키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하여 다테 씨의 가문 규칙을 따르게 했다. 이 때문에 이치노세키는 자체적인 법률과 규정을 제정할 수 없었다.[1]

이치노세키의 영토는 기타카미 강에 의해 분리된 두 지역과 그 사이에 있는 여러 다테 씨 소유의 영토로 구성되어 통일성이 부족했다.[1]

충신장 사건으로 유명한 아사노 나가노리는 에도 성의 마쓰노 오로카에서 키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두른 죄로 다무라 씨의 에도 저택에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할복을 명령받았다.[1]

막부 말기 시대에 이치노세키의 한 의사는 1822년 센다이에 의학교를 설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2]

보신 전쟁 동안 쿠니요시는 이 번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시켰지만, 센다이 번과 함께 몇 달 후 황군에 항복했다.[1]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이치노세키 번은 잠시 이치노세키 현이 되었다가 이와테 현에 통합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치노세키 번의 마지막 다이묘인 타카아키에게 화족 작위인 자작을 수여했다.[1]

4. 1. 통치 체제

이치노세키 번은 쇼군으로부터 다테 가문에 대대로 발급되는 문서와 영지 목록에 62만 석 중 3만 석을 타무라 가문에 주는 것이 명시되어 분할된 번이다. 따라서 쇼군의 직신으로 취급되어 막부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다. 초대 번주 타테아키는 외척 소번이면서 오쿠즈메, 소자반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막부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 외양 소번이라는 입장이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권력 집중 정책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타테아키 이후에는 막부 중추와 관련된 직책을 맡는 일은 없었지만, 칙사 어치주 역 등 후다이와 동등한 직책을 맡았다.[1]

이치노세키 번의 통치 체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1]

직책역할
가로총괄
군대
대관대간입
간입오인조두/고조두, 검단(정방)



지배는 서반, 류, 동산의 세 지역에 대관을 두고, 각 대관마다 한 명의 대간입, 마을마다 촌역인으로서 간입이 배치되었다. 마을은 오인조로 나뉘어 간입이 조두를 관리했다. 또한, 오인조와는 별도로 징세를 위해 고조가 조직되어 고조두가 배치되었으며, 이 역시 간입이 관리했다. 정방에는 검단이 배치되어 징세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1]

4. 2. 재정

이치노세키번은 대부분의 한과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 농업 수확량을 바탕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기 위해 계산된 여러 개의 분리된 영토로 구성되었다.[6][7]

다무라 무네나가의 뒤를 이은 타케아키가 이와누마에서 이치노세키로 이전했을 당시, 이미 24만 5천 냥의 빚이 있었다. 그 원인은 이와누마 지역 시대에 아부쿠마강의 다년간에 걸친 홍수로 인한 수입 감소( 참근교대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이치노세키로 이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와, 무네나가가 병을 이유로 에도에 상주하게 되면서 경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치노세키로 이전한 후에도 재정은 호전되지 않아, 막부 근무와 참근교대를 수행하기 위해 센다이 번으로부터 매번 2000JPY에서 3000JPY의 원조가 필요했다.

연공율은 에도 시대 전기에는 4할 6푼, 후기에는 5할 5푼이었다.[19] 그 외에 밭농사의 콩으로 현물 납부도 있었다.[20]

이치노세키번은 센다이 번의 기본 방침을 따라야 했으며, 증세 또한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특히 간세이 9년(1797년)에는 센다이 번에서 대규모 잇키가 발생하여,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센다이 번의 단속은 더욱 엄격해졌다. 농민에 대한 증세는 불가능했기에, 남은 수입 증대 방법으로는 부유한 백성과 상인들로부터의 기부, 어용금(御用金)과 센다이 번으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종종 있었지만, 근본적인 재정난 해소에는 이르지 못했다.

수입 증대를 기대할 수 없었던 이치노세키번이 주로 추진한 재정 재건책은 제반 경비 절감이었다. 이치노세키번은 봉록제를 채택하고, 사츠모노나리(사공육민)로 연공미와 기타 제세를 징수하여 현미를 번에서 가신단에게 지급했다. 이치노세키번은 호에이 7년(1710년)부터 감봉을 34회 실시했으며, 삭감액 또한 재정난을 반영하여 1년 한정으로 3분의 2 감액이 5회, 반액 감액이 12회에 달했다. 특히 덴포 대기근에서의 재정난은 심각하여 봉록제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녹의 고하를 무시하고 성인 1인당 1일 4홉으로 제한한 쌀을 인원수대로 지급하는 면부지제를 덴포 3년부터 5년, 덴포 7년부터 10년에 걸쳐 실시했다. 당연하게도 면부지제에서는 가문의 격이 높은 가신일수록 감봉률이 높아 불만이 고조되었고, 번정을 센다이번과 막부에 호소한 20명이나 되는 가신이 처벌받았다.

5. 문화

이치노세키번은 란가쿠에서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2대 다케베 세이안을 시작으로 3대 다케베 세이안, 오쓰키 겐타쿠, 사사키 주사와 등이 있었으며, 도호쿠 지방에서는 요네자와번에 이어 3번째로 이치노세키 번 의사 기쿠치 소토쿠 등에 의해 인체 해부가 행해졌다.[21] 또한, 번정 후기에는 세키류 와산이 널리 퍼져, 읽고 쓰는 것과 셈을 할 수 있는 무사뿐만 아니라 오히려 농민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는 와산을 알기 쉽게 해설한 『산법신서(算法新書)』(1830년)의 편자이자 와산가인 지바 타네히데가 이치노세키의 중농 출신으로, 산술 사범이 되어 농민에게 와산을 보급했기 때문이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도장(인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22]

재정난 속에서도 문화가 발달한 이유로는 초대부터 학문을 좋아하는 번주가 이어진 점과 소규모 번이었기에 학자, 의사의 영향력이 더 컸던 점이 꼽힌다. 그러나 막말이 되면서 보수 반동의 경향이 강해져 란가쿠 학자는 충분한 활동을 허용받지 못했고, 와산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새로운 경제 체제에서는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결국 서양 수학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6. 주요 시설


  • 이치노세키성(일성령 이후에는 이치노세키 요해라고 칭함)
  • * 다테씨 시대. 그림에는 "어전"이라는 명칭으로 2층의 천수대신 루(櫓)가 그려져 있다.[10]
  • 이치노세키 진야
  • * 타무라씨 입부 이후. 서쪽 끝의 이와이강과 동쪽 끝의 스이가와 사이에 지어졌으며, 중심은 츠리야마 북쪽 기슭에 번주 거관(현 지명・성내)이 있었다.
  • 교육 시설

명칭설립 시기위치비고
번교(藩校)1783년 (텐메이 3년)히로코지 오후네쿠라 남쪽한학(유학)을 가르침
번교(藩校)1818년 (분세이 원년)오테몬 내이전
문무관1862년 (분큐 2년)(오테몬 내)무관을 증설하여 개칭. 국학, 산학, 병학을 가르침
향학교(郷学校)1845년(고카 2년)스이가와코지개교


참조

[1]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2] 서적 Japan and the Dutch, 1600-1853 https://books.google[...]
[3] 서적 Seppuku: A History of Samurai Suicide https://archive.org/[...] Kodansha
[4]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5] 문서 Onodera
[6]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7]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8] 문서 一関市の歴史
[9] 서적 近世日本国民史 桜田事変
[10] 지도 一関城下絵図
[11] 간행물 やぐらの広場 설명 패널 일관시 1986
[12] 지도 江戸切絵図 芝愛宕下絵図(一部)尾張屋版 국립국회도서관
[13] 문서 장거의 유언
[14] 문서 田村家家伝文書 일관시 박물관
[15] 문서 一関藩『内匠頭御預かり一件』
[16] 간행물 大慈山 祥雲寺 ご案内図 일관시 쇼운지
[17] 뉴스 환이도로 건설공사 도쿄도 2011
[18] 서적 徳川実紀』『田村家家伝文書』
[19] 문서 田村家文書より「物成高調べ」 1837-1855
[20] 문서 물성고 조사 1851
[21] 웹사이트 豊吉之墓 https://www.city.ich[...] 이와테현
[22] 문서 滝沢村百姓持高表 일관시 박물관 외 18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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