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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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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소왕은 금와왕의 장자로, 주몽의 용맹함을 시기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자 이후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24년 금와왕 사후 즉위한 대소왕은 고구려에 인질을 요구하고 침략했으나 실패했으며, 붉은 까마귀를 보내 고구려를 위협하기도 했다. 21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략으로 전사했으며, 이후 부여는 혼란에 빠져 분열되었다. 대소왕 사후 그의 동생 갈사왕이 갈사국을 건국하고, 종제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낙씨 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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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해대소 (解帶素)
한국어 표기대소왕 (帶素王)
왕조
왕가해씨
왕국동부여
대수동부여 제3대 국왕
통치 기간
즉위기원전 7년 (추정)
퇴위22년 2월
재위 기간기원전 7년 (추정) ~ 22년
생애
출생기원전 60년 (추정)
사망22년 2월 (추정)
출생지동부여
아버지금와왕
어머니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기타 정보
수도가섭원
묘호미상
시호대소왕

2. 생애

금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서자였던 주몽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대소와 6형제가 모두 주몽을 시기하였다. 대소는 금와에게 주몽이 후환이 될 것이니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금와가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소는 계속 주몽을 죽이려고 모의하였고, 결국 주몽은 부여를 탈출하여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하였다.[1]

기원전 24년 이후에 금와가 죽자 대소가 즉위하여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원전 6년에 인질 교환을 통한 화친을 제의했으나 유리명왕은 부여의 국력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태자가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에 대소는 5만 명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큰 눈으로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여 성과 없이 퇴각하였다. 9년 고구려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고구려 태자 무휼이 외교적 담판을 지어 사신을 물러가게 하였다. 13년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무휼이 학반령(鶴盤嶺)에서 복병으로 공격하여 크게 패배하였다.[2]

20년 대소는 고구려에 몸통은 두 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라고 답하였다. 대소는 대무신왕의 답변에 놀라 후회했다고 한다.[4]

21년 12월 대무신왕이 부여를 침공했다. 22년 2월 대무신왕이 부여 남쪽을 침공하여 진흙 수렁 근처에 진을 치자, 대소왕은 고구려군을 기습했다. 그러나 대소왕의 말이 진흙 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고구려 괴유(怪由)에게 참수되었다. 대소 전사 이후에도 부여군은 고구려군을 포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나, 왕을 잃은 부여는 혼란에 빠져 국력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었다.[4]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대소왕 사후, 그의 종제(이름 미상)가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하여 갈씨 성을 받았고, 대소의 막내 아우(이름 미상)는 압록곡으로 탈출하여 갈사왕으로 즉위하였다.[4][5]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이 나라 전체를 고구려에 항복하여 동부여의 후예국은 소멸했다.[6]

2. 1. 초기 생애와 주몽과의 갈등

금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금와왕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서자였던 주몽의 뛰어난 능력은 대소와 그의 형제들에게 큰 시기심을 불러일으켰다.[1] 대소는 주몽이 장차 왕위를 위협할 존재가 될 것이라 여겨 금와왕에게 주몽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금와왕은 이를 거부하였다. 대소는 주몽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주몽은 기원전 37년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1]

2. 2. 즉위와 고구려와의 전쟁

기원전 24년 이후 금와왕이 죽자 대소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대소는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기원전 6년에 인질을 교환하고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유리명왕부여의 국력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태자가 거부하여 인질 교환이 결렬되었다.[2] 이에 대소는 5만 명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큰 눈으로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여 성과 없이 퇴각하였다.[2] 9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고구려의 태자 무휼이 외교적 담판을 지어 사신을 물러가게 하였다. 13년에는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무휼이 학반령(鶴盤嶺)에서 복병으로 공격하여 크게 패배하였다.[2]

2. 3. 최후와 동부여의 분열

20년 대소왕은 고구려에 머리가 하나이고 몸통이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대무신왕은 이것이 오히려 부여의 불길한 징조라며 대소왕을 조롱하였다.[4]

21년 12월, 대무신왕은 부여를 침공하였다. 22년 2월, 대무신왕이 부여 남쪽을 침공하여 진흙 수렁 근처에 진을 쳤을 때, 대소왕은 고구려군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대소왕의 말이 진흙 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서 고구려의 괴유에게 죽임을 당했다.[4] 대소왕이 전사한 이후에도 부여군은 고구려군에 맞서 싸웠으나, 왕을 잃은 부여는 혼란에 빠져 국력이 약화되고 분열되었다.[4]

3. 사후

갈사왕은 대소왕의 막내 동생으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피난하였다. 22년 음력 4월,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국왕을 죽이고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하고 갈사국(갈사부여)을 건국하였다.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22년 7월에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에게 낙씨 성을 내리고[8] 부여왕으로 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에 거주하게 하였다.[7]

3. 1. 갈사국의 건국

갈사왕은 대소왕의 막내 동생으로, 부여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피난하였다. 22년 음력 4월,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국왕을 죽이고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하고 갈사국(갈사부여)을 건국하였다.[4][5]

3. 2. 대소왕 종제의 고구려 투항

22년 7월,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부여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그는 "대소왕이 죽고 부여가 망하자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대소왕의 동생은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여를 부흥시킬 수 없다"라고 투항 이유를 밝혔다.[7] 이에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낙씨 성을 내리고[8] 부여왕으로 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掾那部)에 거주하게 하였다.

3. 3. 동부여 계통 국가의 소멸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이 나라 전체를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동부여 계통의 국가는 완전히 소멸하였다.[6] 도두왕은 고구려에서 우태의 관직을 받았다.

4. 가계

5. 대소왕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대소왕 https://terms.naver.[...] 2019-06-03
[2] 서적 Samguk sagi
[3] 문서 遅くとも[[紀元前7年]]には在位していた。
[4] 문서 実際にはずっと後でも東扶余国は存在し歴史に登場する。ここまでの話は伝説であって史実の可能性は低いが、一時的に高句麗に併合されていただけとも解釈はできる。
[5] 문서 「曷思」(かっし)という地名は不詳で、3つの説がある。鴨緑谷が鴨緑江の渓谷を意味するならば、東扶余から西南にかなり離れた山岳地帯で高句麗の勢力圏内のようである。別の説としては、曷思(かっし)は東扶余建国の地である迦葉原(かしょうげん)と同じ「カシ」という地名であり、結局同じ元の場所に国を再建したとも解釈できる。またこの新しい国とは[[東沃沮]]の地([[咸鏡南道]])のあたりと推測する説もある。
[6] 문서 [[56年]]に高句麗は東沃沮を討伐して支配下においた。この時、討たれた東沃沮の国と曷思国が同じものを指している可能性もある。
[7] 서적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2010
[8] 서적 동사 소명출판 200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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