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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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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부여는 285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부여가 쇠퇴한 후, 두만강 하류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세운 나라이다. 북부여에서 기원하여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멸망했다. 삼국사기에는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동부여는 금와왕, 대소왕 등을 거치며 고구려와 대립하다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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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공식 명칭동부여
일반 명칭해당 없음
시대고대
존속 상태해당 없음
존속 상태 설명해당 없음
제국해당 없음
정치 체제군주제
건국 시기해당 없음
멸망 시기410년
시작 사건해당 없음
시작 날짜해당 없음
종료 사건해당 없음
종료 날짜해당 없음
이전 국가부여
이후 국가고구려
갈사 부여
고구려 국기
갈사 부여 국기해당 없음
동부여의 지도 (3세기)
수도두만강 유역
공용어부여어
종교해당 없음
통화해당 없음
통치자
직책군주 (왕)
초대 군주부루
초대 군주 재위 기간기원전 86년 – 기원전 48년
군주금와
금와 재위 기간기원전 48년 – 기원전 7년
마지막 군주 추정대소
대소 재위 기간기원전 7년 – 22년
현재 국가
한자 표기
병음Dōng Fūyú
한국어 표기
한글동부여
로마자 표기Dongbuyeo
매큔-라이샤워 표기법Tongpuyŏ

2. 역사

121년 고구려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했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다.

167년 부여왕 부태(夫台)는 후한 본토와 직접 무역을 시도하다 현도성과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3세기 후반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의 침략을 받아 급격히 쇠약해졌다.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왕실만 이어갔다.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2. 1. 건국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인해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원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4세기 전반에 고구려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다가 410년고구려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 2. 초기 동부여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도피하였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원래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 3. 후기 동부여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부여가 쇠약해졌을 때,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자 왕실과 주민 다수가 북옥저로 피난했다. 이듬해 의라왕이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으나, 일부는 북옥저 지역에 남아 동부여를 세웠다.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4세기 전반 고구려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였고, 410년 고구려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했다.[1]

삼국사기》에서는 동부여를 부여의 왕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

다른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동부여가 고구려의 조공국이었다고 한다. 동부여는 285년경 부여의 난민들에 의해 세워진 소국에 의해 잠시 부활했다가, 410년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정복되었다.[3]

2. 4. 멸망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부여가 쇠퇴하면서, 왕실과 주민 다수가 북옥저로 도피하였다. 이후 의라왕이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했으나, 일부는 북옥저 지역에 남아 동부여를 세웠다. 동부여는 410년 고구려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3. 전해지는 이야기와 백제와의 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21년 고구려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했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다.[1]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夫台)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1]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1]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으로 부여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으나, 옥저로 도피했던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하였다.[1]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왕실만을 이어갔다.[1] 결국 410년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고, 고구려에게 타격을 받고 494년 고구려문자명왕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1]

다른 기록에 따르면, 주몽은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 출신이었다.[1]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동부여는 고구려의 조공국이었다.[1] 동부여는 부여의 난민들에 의해 285년경 세워진 소국에 의해 잠시 부활했다.[1] 이 나라는 41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의해 정복되었다.[1]

연대기가 《삼국사기》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한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창업주이자 초대 국왕인 온조의 아버지인 우태는 해부루의 아들이었다고 한다.[1]

4. 동부여의 왕

왕호이름재위기간
해부루왕해부루? ~ 기원전 60년
금와왕해금와기원전 60년 경 ~ 기원전 20년
대소왕해대소기원전 20년 경 ~ 22년
갈사왕?22년 ~ ?
도두왕해도두? ~ 68년
부태왕부태?, 2세기
위구태왕위구태?, 2세기
간위거왕간위거?, 2세기 ~ 3세기
마여왕마여?, 3세기
의려왕의려? ~ 285년
의라왕의라286년 ~ ?
현왕부여현? ~ 346년
삼국사기》,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 의거



해부루가 죽은 후 금와가 왕이 되었다. 금와왕은 아버지의 북부여 복속을 뒤집고 스스로를 "최고 왕"으로 선포, 아버지 해부루에게 사후에 그 칭호를 내렸다. 태백산맥 남쪽 근처 우발수에서 금와는 하백의 버려진 딸 유화부인을 만났는데, 하백은 압록강의 신이거나, 다른 해석에 따르면 태양신 하백이었다.[2][3][4][5] 그는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왔고, 유화부인은 햇빛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으며, 그 알에서 주몽이 부화했다.[2]

금와의 두 아들은 주몽을 시기했고, 금와가 그를 보호하려 했음에도 주몽은 졸본으로 도망쳐 고구려를 건국했다.

금와의 장남 대소가 다음 왕이 되었다. 대소왕은 고구려의 두 번째 통치자인 유리명왕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세 번째 통치자인 대무신왕은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였다. 내분 이후 동부여는 멸망했고, 그 영토는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참조

[1] 서적 Samguk Yusa Book1
[2] 서적 Doosan Encyclopedia 유화부인 柳花夫人 http://terms.naver.c[...] Doosan Encyclopedia
[3] 서적 Doosan Encyclopedia 하백 河伯 http://terms.naver.c[...] Doosan Encyclopedia
[4] 서적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하백 河伯 http://terms.naver.c[...]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5] 웹사이트 유화부인 http://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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