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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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은 1901년 배재학당YMCA 창립,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을 시작으로, 1914년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 결성을 거쳐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된 단체이다. 1965년 종로에 새 건물을 완공했고, 1990년 제1회 지구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1994년 한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맹으로 개칭되었으며, 서울YMCA 창립 100주년 행사를 열었다.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은 교육, 선교, 체육, 출판, 농촌 운동, 소비자 운동, 국제 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2. 역사
연도 사건 1901년 배재학당YMCA 창립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1908년 서울 종로구에 현대식 건물 설립 1914년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 결성- 1개 지역 시청년회(황성기독교청년회)와 9개의 학생YMCA. 3년에 1회 정기 연회 개최 1921년 기관지 《청년》 발간 1925년 농촌부 설치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 1965년 종로에 새 건물 완공(구 건물은 한국전쟁 중 파괴) 1971년 사회개발특별위원회 설치 1974년 목적과 사업연구 위원회 설치 1976년 목적문 제정 1990년 제1회 지구의 날 행사 개최 1994년 한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맹으로 개칭 2000년 총선시민운동본부 구성 2003년 서울YMCA(전신 -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100주년 행사 2. 1. 한국 YMCA 설립 이전
기독교청년회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에 결성하였으며, 지역 기독교청년회가 세계 각국에 설치되면서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1899년부터 시작된 청원 운동을 통해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이상재, 윤치호 등이 가입하여 지도자 역할을 했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 L. Gillett)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한국 야구의 시초이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과 덕어[2]학교팀 사이에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렸다.[3]
2. 2.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1903년 ~ 1945년)
기독교청년회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에 결성하였으며, 지역 기독교청년회가 세계 각국에 설치되면서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1899년부터 시작된 청원 운동을 통해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이상재, 윤치호 등이 가입하여 지도자 역할을 했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 L. Gillett)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한국 야구의 시초이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과 덕어[2]학교팀 사이에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렸다.[3]
1911년 105인 사건에 기독교청년회 지도자들이 연루되어 주요 간부들은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에는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농촌 계몽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전개하며 중일 전쟁 이전까지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사회운동 세력 중 하나로 활동했다.
1908년에는 서울 종로구에 현대식 건물이 설립되었다. 1914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가 결성되었는데, 1개 지역 시청년회(황성기독교청년회)와 9개의 학생YMCA로 구성되었다. 이후 3년에 1회 정기 연회를 열고 모든 사무의 발전을 도모하기로 하여 1917년 제2회, 1920년 9월에는 서울 성북동의 민영찬, 이근상 두 명의 정자에서 이상재의 사회로 연회를 개최하였다.[4] 1921년에는 기관지 《청년》을 발간했고, 1925년에는 농촌부를 설치했다.
2. 3. 해방 이후 ~ 현재 (1945년 ~ 현재)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되었다.[4] 1965년 종로에 새 건물을 완공했는데, 구 건물은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다.[4] 1971년 사회개발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1974년 목적과 사업연구 위원회를 설치하였다.[4] 1976년 목적문을 제정하였다.[4]
1990년 제1회 지구의 날 행사를 개최하였고,[4] 1994년 한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맹으로 개칭하였다.[4] 2000년 총선시민운동본부를 구성하였으며,[4] 2003년 서울YMCA(전신 -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100주년 행사를 개최하였다.[4]
세계 YMCA 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의 기독교청년회를 대표하며, 교육과 선교, 체육사업, 출판사업, 농촌운동, 소비자운동, 국제교류 등이 주요 활동 사업이다.[4] 대한민국 제16대 총선부터 자체 심사에 따른 낙선대상 후보를 지정하여 낙선 운동을 벌이는 등 대한민국에서도 규모와 영향력이 큰 시민운동 단체로 남아 있다.[4]
3. 주요 활동
연도 주요 활동 1901년 배재학당 YMCA 창립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1908년 서울 종로구에 현대식 건물 설립 195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개칭 1965년 종로에 새 건물 완공 (구 건물은 한국전쟁 중 파괴) 1971년 사회개발특별위원회 설치 1974년 목적과 사업연구 위원회 설치 1976년 목적문 제정 1990년 제1회 지구의 날 행사 개최 1994년 한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맹으로 개칭 2000년 총선시민운동본부 구성 2003년 서울 YMCA (전신 -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100주년 행사
3. 1. 일제강점기 이전
기독교청년회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에 결성하였으며, 지역 기독교청년회가 세계 각국에 설치되면서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1899년부터 시작된 청원 운동을 통해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발족하였으나, 곧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이상재, 윤치호 등이 가입하여 지도자 역할을 했다.
한국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것도 1905년으로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P. L. Gillett)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이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과 덕어[2]학교팀 사이에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렸다.[3]
3. 2. 일제강점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청년회 지도자들이 연루되어 주요 간부들이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2] 1919년 3·1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에는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농촌 계몽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전개하며 중일 전쟁 이전까지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사회운동 세력 중 하나로 활동했다.
연도 | 사건 |
---|---|
1914년 |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 결성- 1개 지역 시 청년회(황성기독교청년회)와 9개의 학생YMCA. 이후 3년에 1회 정기 연회를 열고 모든 사무의 발전을 도모하기로 되어 1917년 제2회에 개최에 이어, 1920년 9월에는 서울 성북동의 민영찬, 이근상 두 명의 정자에서 이상재의 사회로 연회를 개최하였다.[4] |
1921년 | 기관지 《청년》 발간 |
1925년 | 농촌부 설치 |
3.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은 1994년에 한국기독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세계 YMCA 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의 기독교청년회를 대표하며, 교육과 선교, 체육사업, 출판사업, 농촌운동, 소비자운동, 국제교류 등을 주요 활동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 제16대 총선부터는 자체 심사에 따라 낙선 대상 후보를 지정하여 낙선 운동을 벌이는 등 대한민국에서 규모와 영향력이 큰 시민운동 단체로 남아 있다.[2][3]4. 조직
대한기독교청년회는 세계 YMCA 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의 기독교청년회를 대표하며, 교육, 선교, 체육, 출판, 농촌 운동, 소비자 운동, 국제 교류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한다. 대한민국 제16대 총선부터 자체 심사에 따른 낙선 대상 후보를 지정하여 낙선 운동을 벌이는 등 대한민국에서도 규모와 영향력이 큰 시민운동 단체로 남아 있다.[3]
5. 이념 및 성향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은 1844년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결성한 기독교청년회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이상재, 윤치호 등이 참여하면서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3·1 운동에 YMCA 지도자들이 연루되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YMCA는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사회운동 세력 중 하나로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해외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농촌 계몽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전개했다.
세계 YMCA 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의 기독교청년회를 대표하며, 교육, 선교, 체육, 출판, 농촌운동, 소비자운동, 국제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한민국 제16대 총선부터는 낙선 운동을 벌이는 등 시민운동 단체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회원 단체이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 한국교회연합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참조
[1]
웹사이트
황성기독교청년회
http://encykorea.aks[...]
[2]
문서
독일어
[3]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4(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인물과사상사
[4]
뉴스
기독청년연합회의 제삼년회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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