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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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협회는 1896년 서재필, 이완용 등에 의해 결성된 단체로, 갑신정변과 아관파천 이후 고조된 민족적 위기 속에서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다. 청나라의 간섭에 반대하고 서구 문물을 수용하며, 독립신문 발간과 만민공동회 개최 등을 통해 백성의 권리 신장과 개혁을 주장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자주 국권 운동, 자유 민권 운동, 자강 개혁 운동 등이 있었으며, 의회 설립을 추진하고 헌의 6조를 통해 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의 견제와 보수 세력의 반발, 친일 논란 등으로 1898년 해산되었다. 독립협회는 한국 근대 민주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나, 민중 계몽의 한계와 반외세 운동의 선택적 적용 등의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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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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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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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896년 7월 2일 |
해산일 | 1898년 12월 25일 |
본부 | 서울 (만민공동회) |
주요 인물 | |
지도자 | 서재필 |
주요 관련 인물 | 윤치호 이완용 권중현 김규식 이동녕 신채호 이승만 |
정치 성향 | |
이념 | 자유주의 급진주의 한국 민족주의 입헌군주제 반청나라 반러시아 감정 |
정치적 위치 | 중도좌파에서 좌익 |
주요 주장 | 공화주의 |
기타 정보 | |
관련 신문 | 독립신문 |
중추원 의석 | 169석 / 300석 (1898년) 중추원 |
후신 | 친일파 (일부) 독립운동가 (일부) |
2. 설립 배경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4년 12월 정부의 사면령이 내려지고 1895년 박영효, 유길준 등의 권고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서재필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며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우선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896년에 독립신문을 발간한다.[4]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 외에도 백성들 스스로가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윤치호, 이상재, 유길준 등은 이에 적극 동조했다. 서재필은 정부 관료들을 상대로 태종 때의 신문고나 세조 이후의 격쟁, 영조 이후 부활된 신문고의 사례를 예로 들며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할 기관이나 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신문고는 아는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고, 지방과 산골의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음을 들어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설명하였다. 이에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독립협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지식인들과 사대부, 관료들의 사교클럽과 시사 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나, 이후 일반 백성들도 집회에 참여시켰다. 백정과 노비 등의 참여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의 적극적인 지지로 이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2. 1. 시대적 배경
갑신정변 실패와 갑오개혁의 한계는 자주적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은 민족적 위기감을 고조시켰다.[11] 이러한 배경에서, 국가의 자주독립을 바라는 서재필은 러시아의 보호국화·식민지화를 우려하여 개화 사상을 백성에게 계몽하고자 1896년 독립협회를 설립하였다.2. 2. 설립 주도 세력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이 1896년 7월 2일에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였다.[4] 안경수가 초대 회장을, 이완용이 의장을 맡았다.[4] 초기 회원들은 윤치호와 이상재가 설립한 정동구락부(한국 외교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와 고양구락부(한국과 중국의 종속 관계 종식을 상징하는 이름, 1894년 개혁의 지도자였던 유길준 등이 설립) 출신들이었다. 이 외에도 현직 정치인들과 전직 정부 관료들이 참여하였다.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인물로, 1896년 초 귀국하여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했다.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났지만,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서재필은 조선이 러시아의 보호국이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개화 사상을 통해 백성을 계몽하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독립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후 이들의 자리는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고 "동양의 도, 서양의 기계"라는 유교 개혁 사상에서 발전한 이념을 가진 새로운 지식인들이 대체했다.
3. 설립자와 참가자
1896년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이 맡았다.[4] 초기에는 '정동 구락부'라 불린 친미,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11] 점차 서구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지식인들이 참여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독립협회는 정동구락부와 고양구락부 등 비슷한 사상을 가진 단체들과 현직, 전직 관료들을 회원으로 영입하였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났지만,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서재필은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여 개화 사상을 통해 백성을 계몽하고자 독립협회를 설립하였다.
회원 자격에는 제한을 두지 않아, 한성부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면서 일반 백성, 여성, 백정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11]
서재필은 고문직을 맡아 정부 고위 지도자들과 관계를 넓혔으며,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나가면서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3. 1. 주요 설립자
- 서재필: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11]
- 윤치호: 1898년경 독립협회 회장을 맡았다.
- 안경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 이완용: 초대 독립협회 위원장이었다.[11]
- 남궁억
- 박정양
- 이상재
- 이승훈
- 안창호
- 이동녕
- 박중양
- 양기탁
- 유길준
- 이재정
- 오세창
- 김규식
- 이승만
- 윤시병
- 신채호: 1898년에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3. 2. 참여 계층
초기에는 안경수,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갑오개혁에 참여하였으며,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도 협회를 지도하였다.[9] 독립협회는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민권쟁취''', '''자주독립''', '''국권회복'''을 강령으로 삼고, 백성의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이 참여하였다.1896년 4월 출범 초기부터 회원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아, 한성부 종로에서 시작하여 수원부, 양주군 등 거점 도시를 거쳐 전국 18도에 지회가 조직되면서 점차 일반 백성, 여성, 백정 등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까지도 참여하며 전국적인 단체로 발전하였다. 지방 지회에는 지식인, 유력 계층 외에도 민간인 출신 지도자들이 등장하였다.[11]
4. 활동 과정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중 계몽과 정치 참여를 촉진했다.
출범 초기 독립협회는 백성들이 자기 주장을 하고, 참정권을 요구하려면 정부 관료나 지식인과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정치와 내정 개혁에 앞서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모아 민중 계몽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토론회와 연설회는 한성부에서 시작되어 양주목, 수원부와 조선 16도의 유력 대도시로 점차 확산되었다.
각 지방의 부패한 수령과 관찰사, 지역 토호 및 유지들의 비리, 일부 상인들의 뇌물과 밀매, 밀무역 등을 적발하고, 지역 사회 향반과 유림, 토호들의 폐단을 집회를 통해 시위하여 철회시키거나 처벌하게 했다.
외국 세력에 의한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 부설권 허용은 조선 경제를 외세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비판하고, 고종에게 이를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정부는 조선인 군대에서 교관과 조교로 훈련을 담당하던 일본인, 러시아인 군사고문관을 해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260&ganada=&pageUnit=10 한러은행]도 폐쇄했으며, 외국인에 의한 금광 개발 허가 규정 또한 제한하기 시작했다.
1898년 11월 2일, 대한민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인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25명)은 정부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추천하고, 나머지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사람을 투표로 선거하는 방식이었다.[15] 독립협회와 서울 시민들은 이에 환호했으나, 11월 5일 새벽,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고 회장 윤치호는 피신했다.[15]
1898년 10월, 독립협회는 고종 황제에게 여섯 가지 요구 사항(헌의 6조)을 발표했다.
1898년 11월, 민중들의 정부 대신 탄핵에 고종은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며 해산을 명했다. 그러나 협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조정 중신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했다. 정부 외곽 단체인 황국협회 역시 같은 주장을 퍼뜨리며 이상재, 윤치호 등을 탄핵하여 독립협회를 와해시켰다.[11]
1898년 12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다.[11]
4. 1. 설립 초기
서재필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계몽운동에 나섰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대조선 독립협회보> 못지않게 협회의 대변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11]1896년 2월 김윤식 외 갑오경장 주도세력 50여 인에 의해 결성되었다가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건양협회를 흡수하여 규모를 확대했다. 설립 초기 독립협회는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명하여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6년 11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을 주간으로 발간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입장과 토론 내용, 협회에 온 백성들의 주장을 기사로 실어 점차 독립협회의 기관지가 되어 계몽과 여론 환기를 꾀하였다.
1897년 2월에는 아관파천 이후 계속 주조선러시아 총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1897년 중반부터 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 주관하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토론과 웅변, 연설에 대한 것이 일반인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과 협회의 활동을 위험 요소로 여긴 척신과 황제파 대신들이 서재필을 공격하게 되면서 궁지에 몰렸고, 자객까지 침투하게 되자 결국 그는 떠나게 된다. 1898년 5월 서재필은 협회를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등에게 인수하고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서 떠나게 되었다.
1897년 중반 독립협회는 러시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모했다. 이완용 등 친러파는 대거 협회를 떠났다. 1898년 3월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을 격렬히 성토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누구나 참여해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인 만민공동회는 조선 민중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11] 이후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11]
독립협회를 이끈 사람들은 시장개방을 통해 상업을 진흥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공업과 농업을 발달시킨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11] 이는 박지원과 박제가,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의 중상주의 사상의 영향을 계승한 것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과 이상재, 윤치호는 공식적으로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전쟁부 장관 안경수가 초대 회장을, 외무부 장관 이완용이 의장을 맡았다.[4]
독립협회는 초기 회원 약 30명을 유사한 사상을 가진 다른 단체들, 현직 정치인들과 전직 정부 관료들로부터 영입하였다. 회원들은 윤치호와 이상재가 설립한 정동구락부(한국 외교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와 고양구락부(한국과 중국의 종속 관계 종식을 상징하는 이름) (1894년 개혁의 지도자였던 유길준 등이 설립) 출신들이었다.
서재필은 오랫동안 한국의 중국에 대한 굴종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영은문을 철거하고 새로운 문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중국 사절단이 머물렀던 숙소인 모화관을 개조하고 그곳에 독립관과 서대문독립공원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1896년 8월, 제안 며칠 만에 독립협회가 설립되었다. 시민들은 지지뿐만 아니라 상당한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왕실과 정부 고위 관료들조차 독립협회 사업에 기여했다. 이척 왕세자는 협조의 표시로 독립협회에 기부했다. 석 달 만에 협회 회원 수는 만 명에 육박했다. 11월에 기공식과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4. 2. 사회 개혁, 계몽 운동
1897년 중반부터 독립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 주관하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토론과 웅변, 연설에 대한 것이 일반인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11] 이후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11]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였고,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한다.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는 토론회를 통해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에는 약 500명의 회중이 참석했으며, 지난 회의 토론회 기록 확인, 내빈 및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12] 서재필은 독립협회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여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되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는 것이 의리상 대단히 불가하다'는 주제가 선언되었다. 찬성편은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반대편은 토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회중은 자유롭게 토론하였다.[12]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奴婢制度)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다른 회중이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고,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13]
이후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는 동의가 가결되었다.[13]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참관자에 의하면 토론은 매우 진지하였으며, 토론회 결과 100명 이상의 노비들이 자발적으로 해방되었다.[14] 윤치호와 서재필은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되고,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당시에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하고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궤변으로 취급하였으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 확산되었다.
4. 3. 반러 개방, 자유주의 운동
서재필은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에 반대하며,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11] 시장 개방과 상업 진흥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개혁 노선을 추구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주조선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정무를 보았다.[11] 지식인층과 일부 대신들은 외국 공사관은 외국의 영토나 다름없으므로 국왕의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져 청나라, 일본 및 미국 세력과 정치적인 대립을 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며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체류가 문제임을 지적하고,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여 성사시켰다.[11] 조선이 중립국이고 자주독립권을 가졌음을 선언할 것을 요구하였다.협회는 외국 세력에 의한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 허용은 조선의 경제를 외세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이를 비판하고, 고종에게 이를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정부는 조선인 군대에서 교관과 조교로 훈련을 담당하던 일본인 군사고문관과 러시아인 군사고문관을 해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260&ganada=&pageUnit=10 한러은행]도 폐쇄했으며, 외국인에 의한 금광개발 허가 규정 또한 제한하기 시작했다.[11]
1897년 중반부터 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 주관하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11] 이로써 토론과 웅변, 연설에 대한 것이 일반인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과 협회의 활동을 위험 요소로 여긴 척신과 황제파 대신들이 서재필을 공격하게 되면서 궁지에 몰렸고, 자객까지 침투하게 되자 결국 그는 떠나게 된다. 서재필은 1898년 5월 협회를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등에게 인수하고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서 떠나게 되었다. 서재필이 추방되자 협회는 윤치호, 이상재 등에 의해 지도되었다.[11]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주로 청년층에 대한 토론 활동과 천부인권사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활동이 축소되었다.[11] 이어 이상재 주도로 남궁억, 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미국으로 추방된 서재필은 본회원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들과 연락하며 뒤에서 협회를 지도, 후원하였다. 이때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는 한편, 조선인 유학생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직접 배워오게 할 것을 주장하였고, 미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일본인들에 의한 지하자원 개발과 철도 사업 개입을 비판했다.[11]
4. 4. 정부, 사회의 대응
고종과 수구파는 독립협회의 활동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11] 이들은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에 맞섰다. 황국협회는 독립협회의 시위와 집회를 방해하고, 독립협회 간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려 공격했다.성리학자들 또한 독립협회의 주장을 반역으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이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독립협회가 주장하는 참정권과 백성들의 정치 참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위정척사파는 독립협회가 서구 사상과 문물을 수용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4. 5. 의회 수립운동, 수구파와의 대립
1898년 11월 2일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이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25명)은 정부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추천하고, 나머지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사람을 투표로 선거하는 방식이었다.[15] 독립협회와 서울 시민들은 이에 환호했다.그러나 11월 5일 새벽, 순검들이 들이닥쳐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했다. 회장 윤치호는 체포 직전 피신했다.[15] 관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박정양 이하 정부 관료들도 해임되고, 조병세, 조병식, 박제순, 민영기 등이 그 자리에 앉았다.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15]
이는 수구파가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를 세우려 한다는 익명서를 퍼뜨린 결과였다. 익명서에 놀란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린 것이다.
이에 격분한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인[16] 이승만은 철야 농성을 주도하고,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소집하여 사건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17] 군중들은 이승만을 만민공동회 대표자로 선정하고 체포된 독립협회원의 석방을 요구했다.[18] 그러나 경무사 김정근은 "빨리 해산하라"는 말만 반복했다.[18]
이승만은 군중을 이끌고 평리원 앞으로 몰려가 석방을 외쳤고,[20] 정부는 폭력배들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21] 결국 11월 10일 체포된 17명 전원이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다.[22][23][24]
이승만과 같은 개화세력 내 급진적인 사람들은 시위를 멈추지 않고, 고종이 머물던 러시아 공사관의 대한문 앞까지 몰려가 '헌의 6조 실시'와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이기동 등의 처벌, 독립협회 부활 등을 요구했다.[15]
1898년 10월, 독립협회는 고종 황제에게 여섯 가지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관리와 백성 모두 외국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황실 권력을 강화하고 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외국 차관, 외국 군인 고용, 양허 부여 등에 관한 모든 문서, 사실상 한국 정부와 외국 당사자 또는 회사 간에 작성된 모든 문서는 모든 국무대신과 의정부 대신의 서명과 인장이 있어야 한다.
- 중범죄자는 공개 재판을 받고 자신을 충분히 변호할 기회를 준 후에야 처벌되어야 한다.
- 장관 임명권은 폐하에게 있지만, 내각의 과반수가 황제의 후보자를 반대할 경우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
- 모든 세입원과 세금 징수 방법은 재정부의 통제하에 두어야 하며, 다른 부서, 관리 또는 기업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연간 예산과 결산은 공개되어야 한다.
- 기존 법률과 규정은 공정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독립협회는 “황제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모토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은 독립협회를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독립협회가 박영효를 일본에서 소환하여 의회에 참석하도록 투표하자, 궁중의 보수파는 독립협회가 황제를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했고, 1898년 11월 5일 17명의 협회 회원이 체포되었다.
황제는 협회가 "정부 명령을 무시하고, 궁궐을 무례하게 거부하고, 장관들을 축출했다"고 비난하며 단체 해산을 명령했다. 12월 계속되는 폭동 이후 고종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340명을 체포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인민집회를 금지했다. 여러 지도자들이 망명했다. 고종은 정치 체제를 국민 참여에 개방할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왕권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대한제국 성립 후 설립된 의회에는 독립협회 출신 의원들이 많았고, 박정양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보수 세력과 고종(광무황제)은 절대왕정을 유지하려 하여 박정양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조병식 내각을 구성하여 복고주의적 정책을 취하였다.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독립협회는 국내 보수 세력인 황국협회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1898년 11월 25일 정부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고, 1898년 12월 25일 황제 칙령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
4. 6. 정부와의 갈등과 해체
1897년부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등을 개최하여 백성의 정치 참여를 도모하고,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발표하였으며 정부의 부패한 관리들을 탄핵, 규탄하는 등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11] 백성의 참정권 주장과 정치 참여 요구, 부패 또는 무능력한 정부 관료들에 대한 탄핵이 계속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정부세력과 대신들은 독립협회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보부상 등을 통해 이러한 소문을 확산시켰다. 또한 독립협회 일각에서 제기된 입헌군주론 역시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행위로 몰고 가기 시작하였다.[11]정부 고관들은 보부상들과 지역 양반들을 중심으로 고종 황제를 지지하고 황제의 절대군주권을 주장하는 황국협회를 결성케 하여 독립협회와 대립시켰다. 황국협회 회원들은 독립협회의 시위나 집회 장소 주변에 나타나 이들의 시위를 방해하거나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테러 및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공격하였다.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을 절대적인 미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자들 역시 독립협회의 참정권 주장과 민중의 정치참여를 반역으로 규정하였고, 위정척사계열에서는 독립협회의 서구 사상과 문물의 수용론을 걸고넘어지게 되었다.[11]
1898년 11월 2일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이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반수(25명)는 정부가 국가에 공로 있는 자를 천거하고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 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서울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15]
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선거하기로 했다.[15] 그런데 11월 5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에 의해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회장 윤치호는 체포 직전 몸을 피했다.[15] 관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박정양 이하 정부 관료들도 해임되고 대신 조병식, 민영기 등이 그 자리에 앉았다.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15]
선거 전날, 수구파는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등으로 정권을 쥐려 한다는 익명서를 거리에 내다붙였고, 익명서에 놀란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렸던 것이다.[15]
격분한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인[16] 이승만은 앞장서서 철야 농성을 벌였고 날이 밝자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소집하여 사건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17] 이후 지나던 군중들은 한 사람씩 모여들어 경무청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고 군중은 이승만에게 그를 만민공동회의 대표자로 선정하고 체포된 독립협회원의 석방을 정식으로 경무사에게 요구할 것을 그에게 부탁하였다.[18] 그러나 경무사 김정근은 면회 온 이승만에게 "빨리 해산하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18]
그 날 저녁 경무청에 갇혔던 17인의 동지는 평리원[19]으로 옮기어 갔다. 이승만은 다시 군중을 이끌고 평리원 앞으로 몰려가서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밝혀가며 석방을 외쳤고,[20] 정부는 한 떼의 북을 울리는 폭력배들을 동원하였지만 저들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다.[21] 왕은 정식 칙사로 민영환을 공동회장에 보내 종로의 한구석에 차일을 치고 단(壇)을 모으게 한 다음 왕의 조서를 공포하게 하였다.[21]
결국 11월 10일 체포된 17명 전원이 석방됐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장안의 일약 스타로 데뷔하게 된다.[22][23][24] 이승만과 같은 개화세력 내에서도 급진적인 자들은 성취감에 취해 이 기세를 몰아 다른 것도 더 얻어낼 심산으로 시위를 멈추지 않고 지속하였다.[15][25] 심지어 왕이 거주하는 러시아 공사관의 대한문 앞까지 몰려가 '헌의 6조 실시'를 요구했고,[15]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등의 처벌, 독립협회 부활 등을 요구했다.[15]
1898년 10월 종로 네거리 광장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황제에게 건의하는 등 혁신운동을 전개하던 중 마침내 보수적인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종은 처음에 시국 6개조 개혁안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났으나 이행을 거부하였다. 협회에서는 정부 비판과 대신들 탄핵의 외침이 계속되었고 대신들이 탄핵되어 파면,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렀다.[11]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통해 황국협회를 지지하는 천여 명의 보부상들을 동원, 한성에 불러들여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 수천 명은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흥분한 민중은 정부 대신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에 김덕구라는 청년이 청파골에서 부상배에게 맞아 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독립협회에서는 일부러 대한문 앞에서 그의 장례식을 지내어 공동회의 군중으로 하여금 한층 더 기세를 올리는 행태까지 자행하였다.[26] 이어 정부에서는 황국협회와의 충돌을 문제 삼아 1898년 독립협회의 해산을 건의한다.[11]
1898년 11월 민중들의 정부 대신 탄핵에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황제는 칙령으로 양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협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동년 11월 조정의 중신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하였고, 정부의 외곽단체인 황국협회 역시 독립협회의 황제 폐위설과 공화정 수립설을 유포시킨 뒤 이를 근거로 이상재, 윤치호 등을 탄핵하여 독립협회를 와해시켰다.[11]
12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다.[11]
5. 내용별 주요 활동
독립협회의 활동은 크게 자주 국권 운동, 자유 민권 운동, 자강 개혁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28]
독립협회는 1896년 출범 초기부터 백성들이 참정권을 요구하고 주장하려면 정부 관료나 지식인과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치와 내정 개혁에 앞서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고, 이러한 토론회와 연설회로 민중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토론회와 연설회는 한성부에서 시작되어 점차 양주목, 수원부와 조선 16도의 주요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1896년 2월에는 김윤식 등 갑오경장 주도세력 50여 인에 의해 결성되었다가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건양협회를 흡수하여 규모를 키웠다. 설립 초기에는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명하여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6년 11월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다.
1897년 2월에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에게 환궁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1898년 10월 종로 네거리 광장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는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부와 충돌을 일으켰고, 고종은 시국 6개조 개혁안의 실행을 약속했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행을 거부하면서 정부 비판과 대신들 탄핵 여론이 거세졌다.
정부는 황국협회를 통해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1898년 11월, 고종은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요구를 수용할 것을 약속하며 해산을 명했으나, 독립협회는 해산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정부는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하고, 황국협회 역시 같은 주장을 퍼뜨리며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을 탄핵하여 독립협회를 와해시켰다.
1898년 12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다.[11] 이후 협회는 1년여 간 더 존속하다가 1899년 12월 해산되었다. 독립협회에서 개설한 만민공동회는 1900년까지 존속하였다. 그 후 독립협회에서 추진하려던 민권 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주장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로 계승되었다.
독립협회의 첫 사업은 참정권 운동과 민권 운동으로 백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사업은 자주국권 운동으로 청나라 예속에서 탈피하는 것이었다.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며, 각종 공문과 서적에서 청나라 연호를 철폐하며,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서재필을 주간으로 1896년 4월 7일에 발간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입장과 토론 내용, 협회에 온 백성들의 주장을 기사로 싣다가 서서히 독립협회의 기관지가 되어 계몽과 여론 환기를 꾀하였다. 각 지방의 부패한 관찰사 및 지역 토호, 유지들의 행위, 일부 상인들의 뇌물과 밀매, 밀무역 등을 적발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향반과 유림, 토호들의 폐단 등을 집회를 통해 시위하여 철회시키거나 처벌하게 했다.
독립협회는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을 건립하였다.[10][27] 이때 독립문 건립에 쓰일 성금을 낸 사람들에게는 독립협회 회원의 자격이 주어졌다.[9] 그밖에 잡세 수탈 금지, 도고권 폐지, 정치 참여 기회 부여 등을 추진하였다.[9]
시민들의 모임으로서 성격이 강해짐에 따라 독립협회는 직접적인 사회·정치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에서 해방되었으나,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서재필은 러시아의 보호국화·식민지화를 우려하여 개화 사상을 백성에게 계몽하기 위해 1896년 독립협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4월부터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협회의 주장을 알렸다.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였고, 고종은 궁궐로 돌아와 대한제국(1897년-1910년)으로 국호를 바꾸어 조선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또한 1897년 독립문을 건설하였다.
1897년 8월부터는 공개 토론회(만민공동회)를 매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정부의 러시아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가 비난받았고, 국가 개혁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근대 민주주의 사상이 성장하였고, 활발한 민주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한제국 성립 후 설립된 의회에서는 독립협회 출신 의원들이 많았고, 박정양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보수 세력과 고종은 절대왕정을 유지하려 하여 박정양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조병식 내각을 구성하여 복고주의적 정책을 취하였다.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독립협회는 국내 보수 세력인 황국협회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1898년 11월 25일 정부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고, 1898년 12월 25일 황제 칙령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활동은 일진회 등으로 이어졌다.
5. 1. 자주 국권 운동
독립협회는 외세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며,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 국권을 굳건히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9][28]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고, 일본의 석탄고 기지 반환을 이끌어냈다.[9]1898년 3월에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켰다. 같은 해 5월에는 러시아의 목포와 증남포 해역 토지 매도를 저지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막아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외세가 정부 정책에 개입하고, 금광 및 석탄 채굴권을 쉽게 허가받는 것을 비판하며 시정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권 양도에 관련된 이완용을 협회 회원에서 제명하기도 했다.[9]
1898년 10월에는 독립협회가 헌의 6조를 채택했는데, 제1조는 “외국인에 기대하지 아니하고 관민이 동심 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으로 자주 국권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실천 방안은 시장 개방과 투자 유치를 통해 열강의 조선에 대한 이해관계를 중첩시켜 세력 균형으로 조선의 주권을 유지하는 “보호중립론”이었다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9] 보호 중립 기간 동안 자강 개혁을 통해 국력을 확보하려 했기에 목포와 증남포의 매도는 반대했지만 개항에는 찬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일본에 친화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5. 2. 자유 민권 운동
독립협회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는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였다.[28] 1898년 3월에는 국민의 신체와 재산의 자유권 보호 운동을, 같은 해 10월에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쟁취 운동을 전개하였다.[9][28][29]1898년 10월에 채택된 헌의 6조 제4조는 "중대 범죄를 공판(공개 재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인권과 신체의 자유 보장을 명시하였다. 독립협회는 재판의 공개화와 재판 결과의 투명성을 요구하였고, 이는 의금부의 비공개 심문을 공개 재판으로 전환하고 기자들을 통한 보도를 가능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독립협회는 모든 사람의 완전한 평등,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개인의 안전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시민권과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5. 3. 의회 설립 운동
1898년 11월 2일 새로운 대한제국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이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반수(25명)는 정부가 국가에 공로 있는 자를 천거하고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서울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15]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선거하기로 했다.[15] 그런데 11월 5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에 의해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회장 윤치호는 체포 직전 몸을 피했다.[15] 관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박정양 이하 정부 관료들도 해임되고 대신 조병세, 조병식, 박제순, 민영기 등이 그 자리에 앉았다.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15]
선거 전날, 수구파는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외무대신 정교 등으로 정권을 쥐려 한다는 익명서를 거리에 내다붙였고, 익명서에 놀란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렸던 것이다.
격분한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인[16] 이승만은 앞장서서 철야 농성을 벌였고 날이 밝자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소집하여 사건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17]
이후 지나던 군중들은 한 사람씩 모여들어 경무청 앞은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고 군중은 이승만에게 그를 만민공동회의 대표자로 선정하고 체포된 독립협회원의 석방을 정식으로 경무사에게 요구할 것을 그에게 부탁하였다.[18] 그러나 경무사 김정근은 면회 온 이승만에게 "빨리 해산하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18]
그 날 저녁 경무청에 갇혔던 17인의 동지는 평리원[19]으로 옮겨 갔다. 이승만은 다시 군중을 이끌고 평리원 앞으로 몰려가서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밝혀가며 석방을 외쳤고,[20] 정부는 한 떼의 북을 울리는 폭력배들을 동원하였지만 저들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다.[21] 왕은 정식 칙사로 민영환을 공동회장에 보내 종로의 한구석에 차일을 치고 단을 모으게 한 다음 왕의 조서를 공포하게 하였다.[21]
결국 11월 10일 체포된 17명 전원이 석방됐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장안의 일약 스타로 데뷔하게 된다.[22][23][24] 이승만과 같은 개화세력 내에서도 급진적인 자들은 성취감에 취해 이 기세를 몰아 다른 것도 더 얻어낼 심산으로 시위를 멈추지 않고 지속하였다.[15][25] 심지어 왕이 거주하는 러시아 공사관의 대한문 앞까지 몰려가 '헌의 6조 실시'를 요구했고,[15]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이기동 등의 처벌, 독립협회 부활 등을 요구했다.[15]
5. 4. 자강 개혁 운동
1898년 10월 독립협회는 헌의 6조를 채택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했다. 헌의 6조는 재정 개혁, 산업 진흥, 교육 개혁 등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제4조는 인권과 신체의 자유(“중대 범죄를 공판(공개 재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에 관한 것이었다.[9][28][29] 독립협회는 재판의 공개화와 투명성을 요구했고, 이는 의금부의 비공개 심문을 공개 재판으로 바꾸고 기자들의 보도를 허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헌의 6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
---|---|
1 | 외국에 의지하지 않고 관민이 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
2 | 광산, 철도, 석탄, 산림 및 차관, 차병에 관한 조약은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합동 날인이 있어야 시행할 수 있을 것. |
3 | 전국의 재정은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
4 | 중대 범죄는 공개 재판을 하고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
5 | 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에 자문하여 과반수의 찬성으로 임명할 것. |
6 | 규정을 실지로 시행할 것. |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에 따라 1898년 헌의 6조를 보완하는 조칙 5조를 발표했다. 조칙 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
---|---|
1 | 중추원에서 장정을 정하여 언로를 확보하고 상하가 힘쓸 것을 권고할 것. |
2 | 각 회와 신문의 규칙 및 신문 조례를 제정하여 시행할 것. |
3 | 관찰사 이하 지방 관리와 지방 부대 장관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고 처벌할 것. |
4 | 어사나 시찰원 등의 폐단에 대해 백성들이 내부와 법부에 고소할 수 있도록 할 것. |
5 | 상공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의 산업을 장려할 것. |
고종은 상공학교 설립과 관리의 부정부패 방지 조항에 공감하여 조칙 5조를 적극 수용하였다.
독립협회는 조선이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하고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민중 계몽을 위해 신문 등 언론 활동을 장려하고, 자유 민권 운동을 위한 국민 참정권과 서구식 의회 설치를 주장했다.[9][28][29] 그러나 황제의 근신들은 독립협회가 공화정 수립을 꾀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독립협회는 모든 마을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개선하고, 한국의 상업 및 산업 인프라를 개선하며, 해군을 포함한 현대적인 국방력 강화를 추구했다.
6. 몰락과 해체
고종은 독립협회를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1] 독립협회가 박영효를 일본에서 소환하여 의회에 참석하도록 투표하자, 궁중의 보수파는 협회가 황제를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다.[1] 1898년 11월 5일, 17명의 협회 회원이 체포되면서 서울에서 시위가 발생했다.[1] 고종은 협회가 정부 명령을 무시하고, 궁궐을 무례하게 거부하며, 장관들을 축출했다고 비난하며, 협회 해산을 명령했다.[1]
입헌군주제를 원했던 독립협회는 황국협회로부터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로 이행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았다.[2] 결국 1898년 11월 25일 정부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았고, 12월 25일 황제 칙령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2] 이후 독립협회의 활동은 일진회 등으로 이어졌다.[2]
7. 주요 활동 인물
이름 | 직책 | 기타 |
---|---|---|
서재필 | 독립협회 설립 | |
안경수 | 회장 | |
이완용 | 1대 위원장 | 당시 친러파, 만민공동회 참여 |
윤치호 | 회장 | 1898년 경 독립협회 회장 |
남궁억 | ||
박정양 | ||
이상재 | ||
이승훈 | ||
안창호 | ||
이동녕 | ||
박중양 | ||
양기탁 | ||
유길준 | ||
이재정 | ||
오세창 | ||
김규식 | ||
이승만 | 만민공동회 참여 | |
윤시병 | ||
신채호 | 1898년 참여 |
8. 평가와 비판
독립협회는 조선이 청나라 등 중국에 예속되어 있던 상황과 열강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자주 독립을 주장하고, 백성들의 권리와 인권을 최초로 주장하며 정치 참여를 최초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비판과 러시아에 대한 반대는 강경했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보여 친일 논란이 있다.[9][35]
8. 1. 평가
독립협회는 조선이 청나라 등 중국에 예속되어 있던 상황과 열강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자주 독립을 주장하고, 백성들의 권리와 인권을 최초로 주장하며 정치 참여를 최초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개혁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34] 1960년대부터 민중의 참정권과 민권 사상을 고취한 점이 주목받으면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던 시기에, 독립협회가 추진한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 민주주의, 근대화 운동은 훗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국민국가 수립 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었다.[34]
8. 2. 비판
독립협회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5] 윤치호는 1899년 일기에서 대중의 무관심을 비판하며, 그들에게 노예 상태가 어울린다고까지 언급했다.[35]독립협회는 러시아에 대한 반대는 강경했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보여 친일 논란이 있다.[9]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일본이 아시아주의를 내세워 독립협회 회원들을 매수하려 했다고 회고했다.
안중근 또한 이와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한 것을 보면 일본의 치밀한 선전 공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 2. 1. 당대의 비판
이범석(李範奭, 1862~?)은 자신의 저서 경난록(經亂錄)에서 독립협회를 윤리강상을 무시하고 임금과 부모를 경시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독립협회가 밤낮으로 소란을 피우고 대신들의 가택을 부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고 주장하며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했다.[36]최익현은 독립협회의 활동이 특정 세력이나 개인에 의해 정부 고위층에게 압력을 행사하거나 이권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외국에는 자유의원(自由議員)과 민권당(民權黨)이 존재하며, 이들이 정부 대신들을 협박하고 축출한 사례가 있다고 언급했다. 최익현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진정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가졌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37] 그는 독립협회를 '아무렇게나 모여든 새들의 무리', '기율(紀律)없는 폭도'와 같다고 비판하며, 그들이 국가 통치의 올바른 길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37]
또한 최익현은 상소문에서 독립협회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모아 패거리를 만들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신들을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하며 임금을 탓하고 나라의 정승을 능욕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백정 박성춘의 연설을 두고 패거리들의 작당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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