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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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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은 1974년 6월 28일, 대한민국 해양경찰 소속 경비정 863호가 동해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이다. 863호는 어로 보호 임무 수행 중 북한 경비정 3척에 포위되어 격침되었으며, 대한민국 국방부는 납북 시도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63호가 군사분계선 북쪽 해상에서 정탐 활동을 벌이다 격침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8명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대한민국 해양경찰대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충혼탑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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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사건 개요
사건 종류해난 사고, 침몰
발생 위치동해
발생 날짜1974년 6월 28일
결과경비정 침몰, 승조원 사망 및 실종
관련 선박
선박 종류해경 경비정
선박 이름제863호
소속대한민국 해양경찰청
인명 피해
사망24명
실종2명
원인
사고 원인기상 악화로 인한 침몰
여파 및 영향
영향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의 경비정 운용 및 안전 점검 강화

2. 사고 경위

1974년 6월 28일, 동해 상에서 어로보호 경비 임무를 수행 중이던 대한민국 해양경찰 소속 경비정 863호가 북한 해군 함정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이다.[5]

이날 오전, 속초 기지 소속 863호는 동쪽 군사경계선 남방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에 포위되었다. 북한 경비정은 863호를 납북하려 시도했으나, 863호 승무원들이 저항하자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6] 이 과정에서 863호에 탑승했던 승무원 28명 중 일부가 북한에 나포된 것으로 알려졌다.[7]

사건 발생 직후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가 출격하여 북한 함정을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했으며, 북한 측 미그기도 출동했으나 양측 공군기 간의 직접적인 조우는 없었다.[8]

2. 1. 해경 경비정 863호

863호는 1941년 일본에서 건조된 최대 속력 13노트의 200톤급 경무장 초계정으로, 1953년 대한민국 해양경찰에 인수되었다.[2][3][4]

2. 2. 침몰

1974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방부는 오전 8시 50분경 어로보호 경비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양 경비정 863호에 북한 인민군 경비정 2척이 접근해 왔다고 발표했다. 이어 오전 10시 30분에는 동쪽 군사경계선 남방 해상에서 인민군 경비정 3척에 둘러싸여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5]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당시 해경 속초기지대 소속 863호에는 28명의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인민군 함정 3척은 863호를 납북하려고 시도했으며, 863호 승무원들이 이에 완강히 저항하자 북쪽으로 밀고 가다가 결국 격침시켰다고 밝혔다.[6]

한편,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같은 날인 28일, 군사분계선 해상 연장선 부근 해역에서 남한 경비정 1척을 침몰시키고 여러 명의 승무원을 사로잡았다고 보도했다. 이 내용은 동경발 UPI 통신을 통해 알려졌다.[7]

2. 3. 공중 대치

대한민국 공군의 최신예기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이륙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북한군의 미그기도 출동하였으나, 짙은 구름으로 약 3.22km 거리를 두고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8]

3. 수색 및 인양

사고 당시 현장에는 낮고 짙은 구름이 끼어 있어 공군기해군 함정의 수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5]

7월 2일, 남한의 오징어잡이 어선이 시신 2구를 인양했으며, 다음 날인 7월 3일에는 해경 경비정이 시신 2구를 추가로 인양했다. 이들 시신은 모두 심한 파편상이나 총상을 입었다고 보도되었다.[9] 7월 4일에는 구명복을 입고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시신 2구가 발견되었고,[10] 이후 7월 13일과 15일에 각각 경상북도 포항 앞바다와 영덕 앞바다에서 시신 1구씩이 추가로 발견되었다.[11][12] 이를 통해 총 8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4. 논란

7월 2일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회에서는 경비정이 왜 침몰된 해역까지 갔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3]

이후 7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합동간담회에서는 국방부와 수산청의 설명이 엇갈리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국방부는 경비정이 어선을 보호하던 중이었다고 설명했지만, 수산청은 사고 당일 날씨가 좋지 않아 어선이 출어하지 않았다고 밝혀 서로 상반된 발표를 한 것이다. 정부 부처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사건 경위에 대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14]

5. 사후 처리 및 여파

사건 발생 직후 남북 관계는 경색되었고, 대한민국 내에서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사건 당시 진행 중이던 판문점 남북조절위원회 회담과 유엔 등 외교 채널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북한은 책임을 부인했다.[15][16] 이후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도 양측의 주장은 엇갈렸다.[4]

국내에서는 속초, 부산, 인천, 강릉시 등 전국 각지에서 북한을 규탄하고 희생자 보상 및 생존자 송환을 요구하는 대규모 궐기대회가 이어졌다.[17][18][19]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양경찰대장이 사퇴하는 등[20] 사회적 파장이 컸다. 해경1986년 이 사건 희생자를 포함한 순직, 전사 해경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을 건립했다.[21]

5. 1. 항의

사건 당시 판문점에서는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이 회담에서 남측 대표단은 북한 측의 명백한 무력 도발 행위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오히려 남측의 도발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했다.[15]

1974년 6월 28일,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는 북한이 대한민국 해양경찰 경비정 863호를 격침시킨 만행에 대해 항의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16]

이후 공산측의 요청으로 1974년 7월 1일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북한 측은 6월 28일 오전 8시 10분경, 중무장한 남한 경비정 1척이 짙은 안개를 틈타 군사분계선 북쪽 약 14.48km 해상까지 침투하여 정탐 활동을 벌이다가 북한 함정을 발견하고 먼저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북한 함정이 자위적 조치로 이를 격침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엔군 측은 863호는 최대 속력이 13노트에 불과하고 건조된 지 30년이 넘은 낡은 경무장 초계함이며, 본래 임무는 어선의 월선 행위를 막는 것이었다고 반박하며 북측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명확히 했다. 북한 측은 증거라며 침몰된 경비정 소속 통신장과 갑판원의 자백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공개했지만, 녹음 상태가 매우 불량했고 문화어를 사용하는 등 조작 가능성이 지적되었다.[4]

5. 2.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공산측의 요청으로 1974년 7월 1일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북한 측은 6월 28일 오전 8시 10분경, 중무장한 남한 경비정 1척이 안개가 낀 군사분계선 북쪽 약 14.48km 해상에서 정탐 활동을 하려다 북한 함정을 발견하고 먼저 포격했으며, 이에 북한 함정이 대응하여 격침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엔군 측은 해경 경비정 제863호가 최대 속력이 13노트에 불과하고, 건조된 지 30년이 지난 낡은 경무장 초계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해당 경비정은 어선의 월선을 막는 통상적인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반박했다.

북한 측은 주장의 근거로 침몰된 경비정 소속 통신장과 갑판원의 자백 내용을 담은 녹음 테이프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테이프는 녹음 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자백했다는 승조원들이 북조선 말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 증거로서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4]

5. 3. 규탄 대회

6월 29일 오전, 속초 공설운동장에서는 5만여 명의 어민이 모여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같은 날 부산에서는 희생자 유가족이 다니던 봉래국민학교(현 봉래초등학교)에서 3천여 명이 모여 규탄 대회를 가졌다.[17][18]

이어 7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33만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가운데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생존자 송환을 요구하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강릉시 주문진에서도 3만 명이 참여한 규탄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19]

5. 4. 해양경찰대장 사퇴

7월 11일, 해양경찰대장이 경비정 침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부 장관에게 사의를 표명하였다.[20]

5. 5. 충혼탑 건립

대한민국 해경에서는 1986년 12월 30일에 이 사건을 포함한 순직, 전사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했다. 이후 2002년 4월과 6월에 성역화 작업이 실시되었고, 2003년 4월에는 조경 공사가 추가로 이루어졌다.[21]

참조

[1] 뉴스 납북기도 저항하다 피침 http://newslibrary.n[...] 경향일보 1974-06-29
[2] 뉴스 國會內務委서도 "왜 老朽警備艇 배치했나" 경향신문 1974-07-02
[3] 뉴스 드러낸도발根性 10여年간 큰海上도발만 16회 동아일보 1974-06-29
[4] 뉴스 北傀 측서 通信長·甲板員 녹음틀어 경향신문 1974-07-01
[5] 뉴스 海警경비정,北傀艇과 交戰 경향신문 1974-06-28
[6] 뉴스 海警863號의 最後 拉北企圖 저항하다 被沈 경향신문 1974-06-29
[7] 뉴스 北傀 中央通信보도"警備艇침몰시켜 乘務員수명잡아" 동아일보 1974-06-29
[8] 뉴스 우리空軍機,미그機와 空中戰할뻔 동아일보 1974-06-28
[9] 뉴스 被沈 863號 승무원屍體4具引揚 경향신문 1974-07-03
[10] 뉴스 海警艇 승무원 屍體2具 더引揚 경향신문 1974-07-04
[11] 뉴스 被沈海警艇 金甲板員시체인양 매일경제 1974-07-15
[12] 뉴스 海警艇승무원 屍體 盈德앞바다서 引揚 경향신문 1974-07-16
[13] 뉴스 "솔직한 答辯에 더물어볼것도 없다"종결 경향신문 1974-07-03
[14] 뉴스 內務·國防委간담회 責任한계따져 경향신문 1974-07-12
[15] 뉴스 北傀의 武力挑發을 糾彈한다 경향신문 1974-06-29
[16] 뉴스 유엔韓國代表部 抗議聲明 발표 경향신문 1974-06-29
[17] 뉴스 "더이상 가만히 있을수없다"北傀蠻行에 치를떨어 곳곳서 憤怒 폭발 경향신문 1974-06-29
[18] 뉴스 商街철시 10萬漁民 모여 경향신문 1974-06-29
[19] 뉴스 仁川·注文津서 海警경비정 事件 北傀糾彈 궐기大會 경향신문 1974-07-02
[20] 뉴스 朴海警隊長 사표 경향신문 1974-07-11
[21] 웹사이트 해양경찰 충혼탑 http://www.kcg.go.kr[...] 해양경찰청 200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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