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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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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영수 저격 사건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사건이다. 문세광은 조선로동당의 지령을 받고 권총을 훔쳐 한국에 잠입, 대통령을 저격했으나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고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일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은 더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사건 이후 문세광의 진범 논란, 배후 및 조작 의혹 등이 제기되었으며, 관련 소설이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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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저격 사건
사건 개요
명칭문세광 사건 (육영수 저격 사건)
발생 장소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발생 날짜1974년 8월 15일
발생 시간10시 20분 (UTC+9) 경
사건 종류암살, 테러
주요 내용북한 스파이인 재일 한국인 남성이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를 총으로 쏘아 살해한 사건 (문세광)
추가 정보여권 위조 (지인 여성)
원인 및 수단
원인조선총련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지시, "인민 봉기의 기폭제"로서 한국에서 혁명 시도
수단권총 사용
사용된 무기오사카부 경찰 고츠 파출소(현재: 고츠 교번)에서 훔친 권총
인명 피해
사망자2명 (육영수, 여고생)
범인문세광, 지인 여성
범인 및 관계자 처리
범인 동기박정희 대통령 암살 및 한국 내 혁명 시도
범인 사죄있음 (문세광)
문세광 처리한국 당국에 체포 및 기소 후 사형 집행
지인 여성 처리오사카부 경찰에 체포 후 징역 3년 (집행유예 1년)
사법 처리
관할대한민국 (문세광), 오사카부 경찰 (지인 여성)
관련 이미지
육영수 저격 직후 모습. 연단 앞에 권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훗날 제9대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박상범.
육영수 저격 직후의 모습. 연단 앞에 권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훗날 제9대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박상범.

2. 시대적 배경

1970년대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였다. 1960년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한일 조약 체결을 통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했지만, 이는 6.3 항쟁으로 불리는 격렬한 반대 시위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1965년 한일 조약이 체결되었고, 민주공화당이 단독으로 국회 비준을 처리하였다.

1972년 박정희유신을 선포하여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이에 반발한 김대중은 해외에서 반정부 투쟁을 벌였고,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윤필용 사건으로 실각 위기에 몰리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악화되었다. 일본 국민들의 반한 감정은 고조되었으며, 한국은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2. 1.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와 그 이면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민주공화당을 조직하여 민정 이양 후 집권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하여 직접선거와 대통령 중심제 정부 체제를 만들고,[16] 1963년 10월 대선에서 승리, 같은 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17]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복원을 통한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1964년 3월, 이러한 방침과 졸속 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6.3 항쟁으로 불리는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박정희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내려 무력으로 강경 진압했다.[18] 1965년 6월 22일, 한일 조약이 체결되어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19] 야당은 굴욕 외교라며 반대했고, 1965년 8월 14일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단독으로 국회 비준을 처리하였다.

2. 2. 1970년대 초: 유신 체제와 권위주의 강화

1972년 10월 박정희유신을 선포하자, 신병 치료차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27] 김대중한민통을 결성하자 유신 정부는 이 단체가 망명정부로 변신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였다.[28] 그러던 중 1973년 8월 8일,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9] 5일 만에 풀려났지만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유신의 일등공신으로 승승장구하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윤필용 사건으로 박정희의 신임을 잃자 이를 만회하려 저지른 사건이었다.[29]

한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관여 사실을 부인했지만, 일본 도쿄 경시청은 현장에서 채취한 주일 한국대사관 1급 서기관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근거로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곧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30] 결국 김종필 총리가 11월에 대통령 친서를 들고 방일하며 사건이 무마되었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의 반한 감정은 고조되었고, 외교 관계는 공세적인 일본에 반해 한국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사건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오사카부 경찰 본부는 일본인 여성을 여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하는 동시에, 문세광의 자택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 암살 선언과 한국 혁명을 주장하는 "전투 선언"이라는 제목의 논문과, 도난당한 권총 2정 중 1정과 탄환 등의 증거품을 발견, 압수했지만,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재외공관이 아닌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것으로 여겨지는 조총련 관련 시설에 대한 수사는 비엔나 협약에 근거한 치외법권을 이유로 실시하지 않았다.

1974년 8월 17일, 수사 당국은 이 사건이 조선총련의 지령과 원조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체포된 일본인 여성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김호룡이 공범이라고 발표하고, 일본 정부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사건과 조선총련의 관계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국내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수사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3. 사건의 진행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문세광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범행을 계획했으며, 1973년 10월경 암살 계획을 세우고, 1974년 5월에는 북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았다.[1]

문세광은 일본에서 훔친 권총과 위조 여권을 사용하여 한국에 잠입했다. 사건 당일, 일본 정부 고관으로 위장하여 국립극장에 잠입, 박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자 총을 쏘았다. 박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나, 육영수 여사는 머리에 총을 맞고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으나[13], 같은 날 오후 7시경 사망했다.[14]

범인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15] 일본인 공범이 있었던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했고, 양국 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었다.[15] 이후 시나 에쓰사부로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친서를 가지고 방한하여 사과한 후에야 양국 관계는 정상화되었으나[15],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박 대통령은 육영수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음에도 연설을 끝까지 이어갔고, 관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3. 1. 암살 시도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경,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 도중, 객석에 앉아 있던 문세광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31] 문세광은 첫 발을 오발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으나, 곧 연단을 향해 달려나가며 총격을 가했다. 경호실장 박종규가 즉각 응사하고[32], 박정희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하여 목숨을 건졌다.

문세광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이쿠노 지부 정치부장 김호룡의 지시를 받고 범행을 계획했다.[3][4] 1973년 10월경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계획을 세우고, 1974년 5월에는 북한 만경봉호 선상에서 조선로동당 대외련락부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았다.[1] 같은 해 7월 18일, 오사카시 주오구의 다카츠 파출소에서 권총 2정 (S&W M36, 뉴난부 M60)을 훔치고[2], 일본인 지인의 도움을 받아 위조 비자 및 위조 여권을 만들어 8월 6일 한국에 밀입국했다.[3][4]

사건 당일, 문세광은 일본 정부 고관으로 위장하여 고급 승용차를 타고 국립극장에 잠입했다. 극장 입구의 경찰관은 일본어를 사용하는 문세광을 외국인 VIP로 오인하여 초대장 없이 들여보냈다. 문세광은 박 대통령 부부가 극장에 입장할 때 저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박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자 객석에서 일어나 총을 쏘았다.

문세광과 경호원 간의 총격전으로 기념식에 참석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이 경호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33][34] 문세광은 객석에 있던 세무 공무원 이대산에 의해 저지되었고,[35] 10시 30분경 경호원들에게 체포되었다.[36]

3. 2. 육영수 여사 피격과 사망

문세광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은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13] 응급실장 김진복 박사의 지휘 아래 지혈제 투여, 산소호흡, 항쇼크 처치 등 응급조치가 이루어졌고,[36] 신경외과 전문의 최길수의 집도로 5시간 넘게 뇌수술이 진행되었다.[37][38] 근처 병원과 적십자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이 동원되어 400mL 혈액 148팩이 수혈될 정도로 큰 수술이었다.[36] 그러나 총알이 좌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켜[36] 회복하지 못하고, 같은 날 오후 7시경 향년 49세로 사망했다.[39] 집도의는 다음 날 "꼭 살렸어야 했는데… 5mm만 비켜 갔어도…"라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36] 수술 후, 박정희 대통령이 회복실에서 20~30분간 육영수 여사와 마지막 시간을 가졌다.[39]

3. 3. 범인 체포와 수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된 후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15] 수사 결과, 문세광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이쿠노 지부 정치부장 김호룡의 지시를 받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3][4] 문세광은 1973년 5월 오사카만에 정박 중인 북한 만경봉호에서 조선로동당 대외련락부 공작지도원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사살 지령을 받았다.[1]

문세광은 1974년 7월 18일 오사카시 미나미구(현 주오구) 다카츠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 2정 (S&W M36, 뉴난부 M60) 중 하나를 범행에 사용했다.[2] 또한, 고등학교 시절 지인의 남편 명의로 위조 비자 및 위조 여권을 만들어 8월 6일 권총을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스에 숨겨 한국에 입국했다.[3]

1974년 8월 17일 대한민국 수사 당국은 이 사건이 조총련의 지령과 원조에 의해 실행되었다고 발표하고 일본 정부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사건과 조선총련의 관계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15]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경찰의 수사 협조가 미흡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15]

4. 사건의 여파

육영수 저격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건 당일 저녁 8시 10분,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은 육영수 여사의 서거를 공식 발표했다.[40]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박근혜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41] 귀국 후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육영수의 유해는 5일간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42]

한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다.[44][45] 일본 대사관 앞에는 연일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9월 6일에는 군중이 일본 대사관에 난입하여 일장기를 불태우는 사건까지 발생했다.[6] 기무라 도시오외상의 발언은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억눌렸던 반일 감정을 폭발시켜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7]

일본은 시이나 에쓰사부로부총재를 특사로 파견해 사태 수습을 시도했으나,[44]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태도에 불만을 표했다. 한국은 조선총련 규제를 요구했고,[8]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 협조는 거부하며 정치적 결착을 시도했다.

이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과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사임하고,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이 되었다. 차지철은 권력을 남용하며 김재규 등과 갈등을 빚었고, 이는 결국 10·26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17]

4. 1. 한국 사회의 충격과 애도

저녁 8시 10분,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이 육영수 여사의 서거를 공식 발표했다.[40] 사망 당시 병원 가족실에는 남편 박정희와 여동생 육예수, 둘째 딸 박근영, 아들 박지만이 있었다. 장녀 박근혜는 당시 프랑스에 유학 중이었는데, 대사관에서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만 받고 서둘러 탑승수속을 받던 중 공항에서 신문을 보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 그 당시 심정을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41]

육영수의 유해는 8월 15일 밤에 청와대로 이송되었으며 국민장으로 5일장을 치른 후 8월 19일에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42] 장례식을 치른 후 박근혜는 유학 후 강단에 서겠다는 꿈을 접고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였다. 당시 고교 1년생이었던 장남 박지만은 방황하며 성적이 하락하였고 이로 인해 본래 목표인 서울대 진학을 접고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한다.[43]

4. 2. 한일 관계 악화와 갈등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한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다.[44][45] 연일 일본 대사관 앞에는 항의 시위대가 몰려들었고, 9월 6일에는 군중이 일본 대사관에 난입하여 일장기를 불태우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6]

8월 29일 기무라 도시오외상이 국회 답변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에는 북한에 의한 위협은 없다"라고 언급하면서,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억눌려 있던 반일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국교 단절 직전까지 이르렀다.[7]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9월 19일 자민당 친한파 중진인 시이나 에쓰사부로부총재를 정부 특사로 파견했다. 시이나는 다나카 수상의 친서를 전달하고 한일 간 우호 관계를 재확인하며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44]

박정희 대통령은 시이나와의 면담에서 "일본 정부가 우리를 우방으로 생각한다면, 상중에 있는 대통령 일가와 국민이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이 시점에…"라며, "일본이 계속해서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방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측은 이 사건 처리에 강한 불신을 품고, 일본 측에 조선총련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여 사실상 관철시켰다.[8] 또한, 일본 정부 측이 요구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용의자 인도 등 전모 해명을 거부하고, 사건 해명 요구와 맞바꿔 애매한 정치적 결착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4. 3. 정치적 영향

박정희의 장녀 박근혜는 사건 당시 프랑스 유학 중이었으나, 급히 귀국하여 교직 취업을 단념하고 사망한 육영수를 대신하여 박정희 암살 때까지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했다.[17] 이 사건으로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와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양택식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박종규의 후임으로 차지철이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취임했다.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심이 매우 높다고 여겨지는 인물이었지만, 대통령의 위세와 신임을 빌려 점차 횡포를 부리며 경호실의 본래 직역을 넘어 권력을 과시하고 남용했다. 이 때문에 훗날 중앙정보부 부장인 김재규를 비롯한 많은 중신 및 각료들과 대립이 깊어져, 결국 1979년 10월 26일에 발생한 박정희 암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17]

5. 논란과 의혹

육영수 저격 사건에는 여러 논란과 의혹이 존재한다.

문세광은 법정에서 육영수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46]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건우도 문세광이 진범이 아니라고 증언했다.[47][48] 2005년 동아일보는 경호관들이 육영수를 저격했다는 의혹을 보도하기도 했다.[49] SBS의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사격 실험을 통해 사건의 의혹을 파헤치고자 했다.

MBC은 사건 수사와 언론 발표 시점이 뒤섞인 점을 들어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기춘[50]과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김일두 중앙수사본부장의 인터뷰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내용
8월 15일문세광, 체포 후 중앙정보부로 이송되어 묵비권 행사
8월 16일김기춘 수사 투입, 문세광 오후 6시부터 자백 시작
8월 17일김일두 중앙수사 본부장, 수사 결과 발표



그러나 김일두의 발표 및 문세광의 자백 이전인 8월 16일 조간신문에 이미 8월 17일 수사본부 발표와 동일한 내용이 보도되어 의혹이 증폭되었다.[51]

이 사건은 김정일에게 "재일 한국인이 테러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 북한 공작원을 일본인으로 위장시켜 한일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책략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분석이 있다.[3][9]

2012년 7월 5일 통일신문 강창만 사장은 일본 강연회에서 북한이 이 사건 이후 대남 공작 대상을 한국인에서 일본인으로 전환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3] 그는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2인자가 된 김정일이 당시 대남 공작을 지휘했으며, 일본인 납치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3]

2002년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가 방북했을 때,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는 북한의 개입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다만, "부하가 한 일이며, 자신은 몰랐다"고 덧붙였다.

5. 1. 진범 논란

문세광은 선고 법정에서 육영수 여사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46] 이로 인해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수사본부 요원으로 현장 검증과 감식을 했던 이건우 서울시경 감식계장은 월간 《다리》 1989년 8월호에서 의문을 제기했다.[46] 이건우는 후일 노가원 국민일보 기자에게도 진범이 문세광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47][48]

2005년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관들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는 보도를 하였다.[49] SBS의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사격 실험을 통해 육영수 암살사건에 얽힌 의혹들을 풀고자 하였다.

5. 2. 사건 배후와 조작 의혹

MBC는 사건 수사와 언론 발표 시점이 뒤섞이며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기춘[50]과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김일두 중앙수사 본부장의 인터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내용
8월 15일문세광, 체포 후 중앙 정보부로 이송되어 묵비권 행사
8월 16일김기춘 수사 투입, 문세광 오후 6시부터 자백 시작
8월 17일김일두 중앙수사 본부장, 수사 결과 발표



하지만 김일두가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이자 문세광이 자백을 시작하기도 전인 8월 16일자 조간신문에, 8월 17일 수사본부 발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이미 보도되었다.[51] 보도에 따르면 중앙수사 본부가 8월 15일에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고 되어 있으나, 김일두와 김기춘은 사전에 발표한 적이 없다고 밝혀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김정일에게 "재일 한국인이 테러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 북한 공작원 두 명을 일본인으로 위장시켜 한일 관계를 무너뜨리려는 책략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분석이 있다.[3][9]

2012년 7월 5일, 통일신문 강창만 사장은 일본 강연회에서 이 사건 이후 북한이 일본에서의 대남 공작을 한국인에서 일본인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취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3] 대남 공작은 북한의 남한(대한민국) 공작으로, 한반도의 적화 통일, 공산화 통일을 위한 공작을 의미한다.[3]

강 사장은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2인자가 된 김정일이 당시 대남 공작을 지휘했으며, 일본인 납치 등도 이러한 공작 대상 전환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3]

2002년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가 방북했을 때,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북한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단, "부하가 한 일이며, 자신은 몰랐다"고 말했다.

6.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재조명

육영수 저격 사건은 냉전 시대의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 한일 관계의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역사 연구와 자료 공개를 통해 사건의 진상 규명과 역사적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6. 1. 관련 작품

양석일문세광 사건을 소재로 하여 소설 「죽음은 불꽃처럼」을 2001년에 발표했고, 이후 「여름의 불꽃」으로 제목을 바꾸어 문고판으로 출판했다. 이 소설은 문세광을 모델로 한 재일 한국인 청년 송의철을 주인공으로 한다. 소설은 1970년대 오사카를 배경으로, 정치 운동에 몸담은 송의철이 조국에 대한 생각을 키워가며 수수께끼의 인물들에게 이끌려 학창 시절의 연인과 함께 박정희 암살을 시도하는 과정을 그린다. 송의철에게 대통령 암살을 사주하는 수수께끼 그룹의 존재 등 허구적 요소를 더했지만, 오사카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박정희 습격을 감행하는 등 실제 사건의 세부 내용을 따라간다. 베트남 전쟁, 박정희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 김일성 정권 하의 북한과의 관계, 일본에서의 정치 운동이나 재일 한국인의 상황 등 당시의 국제 관계 및 정치 상황이 사건의 배경으로 묘사된다. 양석일은 문세광에게 동포로서 강한 공감을 느낀다고 밝혔다.[10]

참조

[1] 서적 拉致 国家犯罪の構図 ちくま新書 2005-00-00
[2] 뉴스 ピストル盗難 文が単独で犯行 朝日新聞 1974-10-03
[3] 웹사이트 救う会全国協議会ニュース2012.7.13、第67回東京連続集会「自由統一か独裁か ─ 朝鮮総連・北との闘い」2012年(平成24年)7月5日、文京区民センター記録 https://megalodon.jp[...] 2012-07-05
[4] 간행물 救う会全国協議会ニュース2012.7.13 統一日報
[5] 문서 演壇には鉄板が入っており、拳銃の弾丸程度は跳ね返すことができた。
[6] 서적 韓国大統領列伝 権力者の栄華と転落
[7] 문서 実際、在韓日本大使館の職員には撤収準備の指示が出されていた。
[8] 뉴스 日韓協調へ努力 椎名・朴会談で確認 補足メモも渡す 田中親書と同時に 朝日新聞 1974-09-20
[9] 간행물 救う会全国協議会ニュース2012.7.13
[10] 방송 人生の歩き方 梁石日 “血”の咆哮(ほうこう) 第4回 NHK知るを楽しむ選 2009-02-13
[11] 서적 反日革命宣言 :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の戦闘史 鹿砦社
[12]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13] 서적 자비의 향기 육영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12-15
[14] 서적 자비의 향기 육영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12-15
[15]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16] 서적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 휴머니스트 2003-04-28
[17] 백과사전 5·16 군사 정변과 제3공화국 네이버 지식백과 2011-08-08
[18]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
[19] 백과사전 한일수교 네이버 지식백과
[20] 백과사전 삼선개헌 [三選改憲] 네이버 지식백과 2011-08-08
[21]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
[22]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23]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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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적 노신영 회고록 고려서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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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48] 서적 청와대 경호실: 군사정권 30년 비사 월간 말 1994
[49] 웹사이트 《동아일보》(2005.2.11.) http://www.donga.com[...] 2007-02-17
[50] 문서 당시 김기춘은 검사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에 법률 보좌관으로 파견 근무중이었다.
[51] 뉴스 (제목 없음) 조선일보 197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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