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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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댄 퀘일은 미국의 정치인으로, 인디애나주 연방 하원의원(1977-1981)과 상원의원(1981-1989)을 역임했으며,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제44대 부통령(1989-1993)을 지냈다. 퀘일은 1988년 부통령 후보 지명 이후 군 복무 논란, 말실수 등으로 언론의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1992년 대선 캠페인에서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potatoe" 철자 오류를 범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부통령 퇴임 후에는 허드슨 연구소 이사, 기업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경선에서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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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퀘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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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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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제임스 댄포스 "댄" 퀘일 |
로마자 표기 | James Danforth "Dan" Quayle |
출생일 | 1947년 2월 4일 |
출생지 |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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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위 | 미국 부통령 |
대수 | 44대 |
재임 시작 | 1989년 1월 20일 |
재임 종료 | 1993년 1월 20일 |
대통령 | 조지 H. W. 부시 |
전임자 | 조지 H. W. 부시 |
후임자 | 앨 고어 |
상원 의원 | |
선거구 | 인디애나주 |
재임 시작 | 1981년 1월 3일 |
재임 종료 | 1989년 1월 3일 |
전임자 | 버치 베이 |
후임자 | 댄 코츠 |
하원 의원 | |
선거구 | 인디애나주 4구 |
재임 시작 | 1977년 1월 3일 |
재임 종료 | 1981년 1월 3일 |
전임자 | 에드워드 루시 |
후임자 | 댄 코츠 |
개인 정보 | |
정당 | 공화당 |
배우자 | 매릴린 터커 (1972년 결혼) |
자녀 | 벤 포함 3명 |
부모 | 제임스 C. 퀘일 마사 풀럼 |
친척 | 유진 C. 풀럼 (할아버지) 유진 S. 풀럼 (삼촌) 미르타 풀럼 (사촌) |
학력 | 드포 대학교 (문학사) 인디애나 대학교, 인디애나폴리스 (법무박사) |
군 복무 | 미국 육군 복무 기간: 1969년–1975년 계급: 하사 소속: 인디애나 육군 방위군 |
2. 초기 생애와 경력
댄 퀘일은 1947년 2월 4일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마사 코린 풀리엄과 제임스 C. 퀘일 사이에서 태어났다.[3] 본명은 제임스 댄포스 퀘일이다. 그는 때때로[4] 잘못하여 "제임스 댄포스 퀘일 3세"로 불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회고록에서 출생 이름은 단순히 제임스 댄포스 퀘일이라고 밝혔다. 퀘일이라는 성은 그의 증조부가 태어난 맨섬에서 유래했다.[5]
퀘일의 외할아버지 유진 C. 풀리엄은 '애리조나 리퍼블릭'과 '인디애나폴리스 스타' 등 다수의 주요 신문을 소유한 중앙 신문사(Central Newspapers, Inc.)의 창립자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언론계 거물이었다. 아버지 제임스 C. 퀘일 역시 언론인으로, 1955년 가족과 함께 애리조나주로 이주하여 가문의 출판 사업 일부를 운영했다.
퀘일은 애리조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6] 다시 인디애나로 돌아와 1965년 헌팅턴의 헌팅턴 노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디포 대학교에 진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하고 1969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7] 대학 시절에는 골프팀 주장을 맡았고, 델타 카파 엡실론(Psi Phi 지부) 남학생 사교 클럽 회원이었다.[8][9]
대학 졸업 후, 퀘일은 인디애나 주방위군에 입대하여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복무하며 병장 계급으로 전역했다. 그의 주방위군 입대는 그가 징병 대상이 아니었음을 의미했다.[10] 주방위군 복무 중이던 1970년, 그는 인디애나 대학교 로버트 H. 매키니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성적은 정규 입학 기준에 미치지 못했으나, '특별한 요소'를 입증할 수 있는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따라 입학 자격을 얻었다. 퀘일은 1974년 법학 박사(J.D.) 학위를 취득했다.[11][12]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그는 당시 같은 법과대학에서 야간 수업을 듣고 있던 미래의 아내인 마릴린을 만났다.[13]
퀘일은 1971년 7월 인디애나주 검찰총장 사무실의 소비자 보호 부서 조사관이 되었다. 같은 해 말 그는 에드가 윗컴 주지사의 행정 보좌관이 되었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 그는 인디애나주 세입부 상속세 부서장을 역임했다. 1974년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퀘일은 가족이 소유한 신문인 "헌팅턴 헤럴드-프레스"의 부사장으로 일했다.
2. 1. 정치 경력
데이퍼 대학교(DePauw University)와 인디애나 대학교(Indiana University)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신문사를 경영하는 아버지를 도왔으며, 196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내정되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의 운전수를 맡기도 했다.정치 경력은 1976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시작되었다. 인디애나주 제4선거구에서 8선 현역 의원이던 민주당 소속 J. 에드워드 루시를 54.38% 대 45%의 득표율로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14] 1977년부터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78년 선거에서는 64.36%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15]

1978년 11월, 캘리포니아 출신의 리오 라이언 하원의원은 가이아나의 존스타운 정착촌 상황 조사를 위한 대표단에 퀘일을 초청했으나, 퀘일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퀘일의 생명을 구했는데, 라이언 의원과 그의 일행은 존스타운 활주로에서 탈출하려다 살해당했기 때문이다.[16]
1980년에는 33세의 나이로 상원의원에 도전하여, 3선 현역 민주당 의원이자 에반 베이 상원의원의 아버지인 버치 베이를 53.79%의 득표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퀘일은 인디애나주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이 되었다. 1986년에는 민주당 후보 질 롱 톰슨을 상대로 당시 인디애나주 전역 선거 사상 최고 득표율인 60.57%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상원의원 시절인 1986년, 퀘일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제7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한 다니엘 앤서니 매니언을 지지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매니언은 퀘일의 로스쿨 동문이었으나, 미국 변호사 협회(ABA)로부터 최저 등급인 "자격 충족/자격 미충족" 평가를 받았다.[17] 매니언은 결국 1986년 6월 26일 상원에서 인준되었다.[18]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선거인단)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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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 | 하원의원 (인디애나 제4선거구) | 95대 | 공화당 | 54.38% | 107,762표 | 1위 | 당선 |
1978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 | 하원의원 (인디애나 제4선거구) | 96대 | 공화당 | 64.36% | 80,527표 | 1위 | 당선 |
1980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 | 상원의원 (인디애나 제3부) | 97대 | 공화당 | 53.79% | 1,182,414표 | 1위 | 당선 |
1986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 | 상원의원 (인디애나 제3부) | 100대 | 공화당 | 60.57% | 936,143표 | 1위 | 당선 |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44대 | 공화당 | 53.37% | 48,886,597표 (426명) | 1위 | 당선 |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45대 | 공화당 | 37.45% | 39,104,550표 (168명) | 2위 | 낙선 |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H. W.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승리했다. 이에 따라 1989년 1월 20일부터 1993년 1월 20일까지 미국 제44대 부통령으로 재임했다.
3. 미국 부통령 (1989-1993)
3. 1. 1988년 대선 캠페인
1988년 8월 16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조지 H. W. 부시는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러닝메이트로 댄 퀘일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즉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1] 당시 퇴임하던 레이건 대통령은 퀘일의 "에너지와 열정"을 칭찬했지만,[19] 언론 보도는 소위 "세 가지 퀘일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찼다.[22] 이 문제들은 그의 군 복무 기록, 로비스트 폴라 파킨슨(Paula Parkinson) 및 다른 정치인들과 플로리다에서 가졌던 골프 휴가,[20][10] 그리고 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경험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퀘일은 이러한 질문에 때때로 당황하거나 불확실하고 회피적인 태도를 보였다.[22]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언론이 퀘일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부시 측 참모들은 퀘일이 군 복무 기록에 대한 질문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의혹을 남겼다고 평가했다.[21][22][23] 부시는 전당대회 전 여론 조사에서 최대 15% 포인트까지 뒤처졌으나, 8월에 부시-퀘일 후보는 선두로 올라섰고 선거 운동 기간 내내 그 우위를 유지했다.[24]
1988년 10월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퀘일은 민주당 후보 로이드 벤츠엔과 맞붙었다. 퀘일은 토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두카키스를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토론 주제가 퀘일의 상대적으로 짧은 공직 경험으로 옮겨가자, 그는 자신의 의회 경력(12년)을 존 F. 케네디 대통령(14년)의 경력과 비교했다. 이는 사실에 기반한 비교였지만, 퀘일의 고문들은 사전에 이것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었다. 이에 대해 벤츠엔은 "저는 잭 케네디와 함께 일했습니다. 잭 케네디를 알았습니다. 잭 케네디는 제 친구였습니다. 상원의원님, 당신은 잭 케네디가 아닙니다"라고 응수했고, 이는 이후 미국 정치사에서 유명한 말이 되었다.[25] 퀘일이 이에 대해 "상원의원님, 그건 정말 실례되는 말씀입니다!(That was really uncalled for, Senator.eng)"라고 대응했지만 비판을 받았다.
부시-퀘일 후보는 11월 선거에서 53% 대 46%의 득표율로 승리하며 40개 주를 확보하고 426명의 선거인단 표를 얻었다.
3. 2. 부통령 재임 기간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퀘일은 47개국을 공식 방문하는 등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6][80] 국내 정책에서는 부시 대통령에 의해 경쟁력 위원회 위원장과 국가 우주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임명되었다.[6][80] 국가 우주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는 우주 개발 및 산업 정책을 지휘했으며,[80] 잠재적인 소행성 충돌 위험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더 큰 노력을 촉구했다.[26] 또한 다니엘 오. 그레이엄 소장, 맥스 헌터, 제리 푸르넬의 브리핑을 받은 후, 단일 단계 궤도 진입 X 프로그램(SSO X-Program) 개발을 후원하여 맥도넬 더글러스 DC-X 건설로 이어지게 했다.
퀘일은 부통령직을 "어색한 직책"이라고 묘사하며, 상원 의장이지만 행정부나 입법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위치이며 대통령의 의제를 따라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27]
퀘일은 부통령 재임 중 잦은 말실수와 부적절한 언행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직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다고 평가했으며, 그의 발언들은 사실 및 문법 오류 여부에 대해 면밀히 조사되었다.
1992년 5월 19일, 캘리포니아 공동체 클럽 연설에서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원인으로 미국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가족 구조 붕괴를 지목했다.[28] 특히 텔레비전 프로그램 "머피 브라운"의 미혼모 주인공을 예로 들며, 대중문화가 아버지의 중요성을 조롱하고 혼외 출산을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선택'으로 묘사하며 "가치관의 빈곤"에 기여한다고 비판했다.[28][29] 이 "머피 브라운 연설"은 1992년 선거 운동 기간 중 큰 논란을 일으켰고, 이후 미국 정치 담론에서 가족 가치 논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족사 교수 스테파니 쿤츠는 이 발언이 '가족 붕괴'에 대한 10년 이상의 비난을 촉발했다고 평가했으며,[30] 가수 타냐 터커는 퀘일이 미혼모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31] 반면, 머피 브라운 역의 배우 캔디스 버건은 훗날 연설 자체는 아버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적인 내용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31]
퀘일의 발언 중에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혼란스러운 내용이 많아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나는 과거에 좋은 판단을 해왔습니다. 나는 미래에도 좋은 판단을 할 것입니다"[32], "나는 우리가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로의 불가역적인 추세에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바뀔 수 있습니다"[33], "홀로코스트는 우리 국가 역사상 끔찍한 시기였습니다. … 아니, 우리 국가가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였습니다. 제 말은, 우리 모두 이 세기에 살았다는 겁니다. 저는 이 세기에 살지는 않았지만, 이 세기의 역사에서였습니다"[34] 등의 발언이 있었다. 또한 유나이티드 네그로 칼리지 펀드(UNCF)의 슬로건 "마음은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귀한 것이다(a mind is a terrible thing to waste)"를 인용하며 "정신을 잃거나 정신이 없는 것은 매우 낭비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실인가"라고 말해 혼란을 주기도 했다.[35][36]
가장 널리 알려진 실수는 1992년 6월 15일, 뉴저지주 트렌턴의 무뇨스 리베라 초등학교(Muñoz Rivera Elementary School) 철자 대회 방문 시 발생했다. 퀘일은 12세 학생 윌리엄 피게로아(William Figueroa)가 "potato"(감자)를 정확하게 철자한 것을 "potatoe"로 고쳐주었다.[37][38][79] 이 사건은 대중적인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퀘일은 학교 측에서 제공한 카드에 잘못된 철자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해명했다.[39] 이 외에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된다"는 등의 발언으로[79] 구설수에 올랐으며, 이러한 이유로 1991년 이그노벨상 교육 분야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79]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고,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는 예상외로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빌 클린턴-앨 고어 민주당 후보 조에 패배하여 재선에 실패했다.
3. 3. 1992년 대선 캠페인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와 퀘일은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과 테네시 상원의원 앨 고어의 민주당 후보 조합, 그리고 텍사스 사업가 로스 페로와 예비역 해군 중장 제임스 스톡데일의 무소속 후보 조합의 도전을 받았다.
8월 공화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부시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를 포함한 일부 공화당 전략가들은 퀘일이 후보 지명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를 교체하려 시도했다.[40] 그러나 퀘일은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결국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41]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퀘일은 언론 인터뷰에서 동성애는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며 "잘못된 선택"이라고 믿는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42]
퀘일은 1992년 10월 13일에 열린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고어와 스톡데일과 맞붙었다.[43] 그는 4년 전 벤슨과의 토론에서 일방적인 결과를 피하고자 공세적인 태도를 취했다.[44] 퀘일은 고어의 저서 『지구의 균형』(Earth in the Balance영어)의 특정 페이지를 언급하며 비판했지만, 그의 주장은 이후 진보 성향 단체인 공정성과 정확성 보고 (FAIR)로부터 부정확하다는 지적을 받았다.[45] 퀘일은 마무리 발언에서 유권자들에게 "빌 클린턴이 정말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빌 클린턴을 여러분의 대통령으로 신뢰하십니까?"라고 날카롭게 질문하며 상대 후보의 신뢰성을 공격했다. 반면 고어와 스톡데일은 주로 자신들의 정책과 철학을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46] 공화당 지지자들은 퀘일의 토론 내용에 안도하고 만족했으며, 그의 측근들은 베테랑 토론가인 고어를 상대로 한 승리라고 평가하려 했지만, 토론 후 여론조사에서는 고어와 퀘일 중 누가 더 잘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47] 결국 이 토론은 부시와 퀘일이 선거인단 표 168 대 370으로 패배한 선거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4. 부통령 퇴임 이후
1993년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퀘일은 허드슨 연구소의 이사가 되었다.[51] 1993년부터 1999년 1월까지는 센트럴 뉴스페이퍼스(Central Newspapers, Inc.) 이사회에서 활동했으며,[51][60] 1995년부터 1999년 1월까지는 정치 행동 위원회인 캠페인 아메리카(Campaign America)를 이끌었다.[51]
1994년에는 회고록 Standing Firm|굳건히 서서eng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후 1996년에는 다이앤 메드베드(Diane Medved)와 함께 The American Family: Discovering the Values That Make Us Strong|미국 가족: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가치 발견eng을,[51] 1999년에는 Worth Fighting For|싸울 가치가 있는 것eng을 출판했다.[51]
퀘일은 1996년 애리조나로 이주했다.[48] 같은 해 정맥염 관련 건강 문제를 이유로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와 199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49] 1997년부터 1998년까지는 선더버드 글로벌 경영대학원에서 "국제학문 방문 교수"로 활동했다.[51]
1999년 1월, 퀘일은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하여 2000년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50] 같은 달 28일 탐색 위원회를 구성했고,[51] 4월 14일 모교인 헌팅턴 노스 고등학교에서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선거 운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51]
피닉스에서 투자은행가로 활동하던[53] 퀘일은 2002년 애리조나 주지사 선거 출마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53] 1999년에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모펀드 회사인 세르베루스 캐피털 매니지먼트에 합류하여 글로벌 투자 부문 의장을 맡았다.[66][81] 그는 세르베루스의 국제 자문 위원회 의장으로서 전 캐나다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를 영입하려 시도하기도 했다.[67] 2014년에는 세르베루스가 아일랜드 국가자산관리청(NAMA)으로부터 북아일랜드 대출 약 13억파운드를 인수하는 거래 승인을 위해 벨파스트를 방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부통령직 남용 의혹으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미 연방수사국(FBI), 뉴욕 남부 연방 검찰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68] 2018년 12월까지 그는 세르베루스의 글로벌 투자 부문 의장직을 유지했다.[69]
퀘일은 허드슨 연구소의 명예 이사이며, 퀘일 앤 어소시에이츠(Quayle & Associates)의 회장이다. 또한 수자원 회사인 헥크만 코퍼레이션(Heckmann Corporation) 이사회의 이사 및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아오조라 은행의 이사로도 활동했다.[59][81] 그 외에도 K2 스포츠, 암트랜(AmTran Inc.),[60] BTC Inc.,[61] 카바나(Carvana Co.)[62] 등 여러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했다.
2010년에는 그의 아들 벤 퀘일이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81] 2011년 1월, 퀘일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조나단 폴라드의 형기 감형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54] 그는 2012년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밋 롬니를,[55] 2016년 대선에서는 젭 부시를 지지했으며,[56] 부시가 경선에서 탈락한 후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57] 트럼프 취임 전에는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에서 트럼프와 만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58]
밥 우드워드와 로버트 코스타의 저서 Peril|페릴eng에 따르면, 퀘일은 2021년 미국 선거인단 투표 집계 당시 부통령 마이크 펜스에게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결과 뒤집기 시도에 동조하지 말고 헌법적 의무에 따라 선거 결과를 인증하라고 조언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63][64] 퀘일은 2021년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65]
인디애나주 헌팅턴에는 댄 퀘일 센터 앤 뮤지엄이 있어 퀘일과 역대 미국 부통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5. 논란
댄 퀘일은 부통령 재임 기간 및 그 이후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주요 논란으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인디애나 주방위군 복무를 통한 징집 회피 의혹, 공개 석상에서의 잦은 말실수와 부적절한 언행, 그리고 사모펀드 회사 세르베루스 캐피털 매니지먼트 활동과 관련된 의혹 등이 있다.[74][32][68] 특히 그의 발언들은 언론과 대중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으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이미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37][38]
5. 1. 베트남전 징집 회피 의혹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댄 퀘일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인디애나 주방위군에 복무한 것이 베트남 전쟁 징집을 회피하거나 베트남 파병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74] 당시 많은 정치적 경쟁자, 언론, 그리고 일부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이러한 의혹을 제기했다. 퀘일은 1988년 8월, 이 같은 주장을 부인했다.[74]이 논란은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 역시 비슷한 징집 회피 의혹에 직면했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다시 불거졌다.[75] 1992년 9월, 퀘일은 NBC의 미트 더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주방위군 입대가 베트남 파병 가능성을 줄였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자신의 결정을 옹호하며 특혜를 받은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76][75] 그는 베트남전 참전을 피하는 것이 주된 동기였는지에 대한 질문에 예비군 입대를 선호했다고 답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물론 베트남에 갈 가능성은 훨씬 적었지만, 제 부대가 소집되어 베트남에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집되었다면, 저는 갔을 것입니다.[77]
한편, 영화감독이자 베트남 참전 용사인 올리버 스톤은 1989년 데이비드 호프만과의 인터뷰에서 퀘일을 비판하며, 베트남전에서 다리를 잃은 당시 네브래스카 주지사 밥 케리와 대조했다. 스톤은 퀘일을 "고통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 "베트남을 피하기 위해 주방위군에 입대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다른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군사 개입을 주장하는 그의 태도를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78]
예를 들어, 네브래스카 주지사인 밥 케리 같은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약 42세이며 베트남에서 다리를 잃었습니다. 매우 똑똑하고 동정심 많은 사람이며,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대조적인 인물은 댄 퀘일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40대 초반으로 대통령직에 한 발짝 다가섰지만,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베트남을 피하기 위해 주 방위군에 입대했지만, 항상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군사 개입을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위선이 작용하고 있습니다.[78]
5. 2. 잦은 말실수와 부적절한 언행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퀘일은 잦은 말실수와 부적절한 언행으로 일부 언론 매체와 대중에게서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그의 발언들은 사실 관계나 문법적 오류 여부에 대해 면밀히 검토되었고, 이는 그의 자질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퀘일은 자신의 정치 경력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비교하며 "케네디도 젊었다. 젊음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케네디와 같은 기간의 정치 경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상대 후보였던 로이드 벤츠센 상원의원은 "나는 케네디를 알고 있다. 잭과 함께 일했고, 그는 나의 친구였다.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다"라고 응수하며 퀘일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퀘일이 이에 대해 "That was really uncalled for, Senator,|그건 정말 실례되는 말씀입니다, 상원의원님!eng"라고 대응한 것은 미숙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퀘일은 공개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혼란스러운 발언을 하기도 했다.
- "나는 과거에 좋은 판단을 해왔습니다. 나는 미래에도 좋은 판단을 할 것입니다"[32]
- "나는 우리가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로의 불가역적인 추세에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바뀔 수 있습니다"[33]
- "홀로코스트는 우리 국가 역사상 끔찍한 시기였습니다. … 아니, 우리 국가가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였습니다. 제 말은, 우리 모두 이 세기에 살았다는 겁니다. 저는 이 세기에 살지는 않았지만, 이 세기의 역사에서였습니다"[34]
- 1989년 5월 유나이티드 네그로 칼리지 펀드(UNCF) 연설에서, UNCF의 슬로건인 "마음은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귀한 것이다(a mind is a terrible thing to wasteeng)"에 대해 논평하며 "여러분은 UNCF 모델을 통해 정신을 잃거나 정신이 없는 것은 매우 낭비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실인가"[35][36]라고 말했다.
-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된다"는 발언도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발언들로 인해 퀘일은 1991년 이그노벨상 교육 분야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 5월 19일, 퀘일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관련하여 "도시 미국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28] 그는 이 연설에서 폭력의 원인을 미국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가족 구조의 붕괴로 지목하며, 텔레비전 드라마 "Murphy Brown|머피 브라운eng"의 미혼모 주인공을 그 예로 들었다.[28] 그는 "프라임타임 TV에서 머피 브라운, 즉 오늘날 지적이고 고소득의 전문직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혼자 아이를 낳는 것을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선택'이라고 부르며 아버지의 중요성을 조롱하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말했다.[29] 이른바 "머피 브라운 연설"은 1992년 선거 운동 기간 중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후 미국 사회에서 '가족 가치'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30] 당시 머피 브라운 역을 맡았던 배우 캔디스 버건은 훗날 퀘일의 연설 중 아버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에는 동의한다고 밝혔으나, 가수 타냐 터커와 같은 일부 인사들은 퀘일이 미혼모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31]
1992년 6월 15일, 퀘일은 뉴저지주 트렌턴의 무뇨스 리베라 초등학교 철자 벌에서 12세 학생인 윌리엄 피게로아가 "potato"(감자)를 정확하게 철자한 것을 "potatoe"로 고쳤다.[37][38]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널리 조롱거리가 되었다. ''뉴욕 타임스''[39]와 퀘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학교에서 제공한 카드에 의존했는데, 퀘일은 그 카드에 잘못된 철자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퀘일은 자신이 제시한 철자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자신의 판단 대신 학교의 잘못된 서면 자료를 신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5. 3. 서버러스 캐피털 매니지먼트 관련 논란
1999년, 퀘일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모펀드 회사인 세르베루스 캐피털 매니지먼트에 합류하여 글로벌 투자 부문 의장을 맡았다.[66]2014년 초, 퀘일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방문하여 세르베루스가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가자산관리청(National Asset Management Agency)으로부터 북아일랜드 관련 대출 13억파운드 가까이를 인수하는 거래의 승인을 가속화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거래와 관련하여 아일랜드 정부가 조사를 진행했으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미 연방수사국, 그리고 뉴욕 남부 연방 검찰청은 퀘일이 부통령직을 "매우 심각하게" 오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68] 2018년 12월 기준으로 퀘일은 세르베루스의 글로벌 투자 부문 의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69]
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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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선거인단) | 결과 | 당락 |
---|---|---|---|---|---|---|---|
1976년 선거 | 하원의원 (인디애나 제4선거구) | 95대 | 공화당 | 54.38% | 107,762표 | 1위 | 당선 |
1978년 선거 | 하원의원 (인디애나 제4선거구) | 96대 | 공화당 | 64.36% | 80,527표 | 1위 | 당선 |
1980년 선거 | 상원의원 (인디애나 제3부) | 97대 | 공화당 | 53.79% | 1,182,414표 | 1위 | 당선 |
1986년 선거 | 상원의원 (인디애나 제3부) | 100대 | 공화당 | 60.57% | 936,143표 | 1위 | 당선 |
1988년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44대 | 공화당 | 53.37% | 48,886,597표 (426명) | 1위 | 당선 |
1992년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45대 | 공화당 | 37.45% | 39,104,550표 (168명) | 2위 | 낙선 |
1976년 퀘일은 인디애나주 제4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8선 현역 의원이었던 민주당 소속 J. 에드워드 루시를 54.38% 대 45%의 득표율로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14] 1978년에는 64.36%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15]
1980년에는 33세의 나이로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3선 현역이었던 민주당의 버치 베이 의원을 53.79%의 득표율로 꺾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퀘일은 인디애나주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이 되었다. 1986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 질 롱 톰슨을 상대로 60.57%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는 당시 인디애나주 전체 선거 역사상 최고 득표율이었다.
7. 개인사
1947년 2월 4일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마사 코린(옛 성씨 풀리엄)과 제임스 C. 퀘일 사이에서 태어났다.[3] 본명은 제임스 댄포스 퀘일이며, 간혹 "제임스 댄포스 퀘일 3세"로 잘못 불리기도 한다.[4] 퀘일이라는 성은 그의 증조부가 태어난 맨섬에서 유래했다.[5] 4남매(남동생 마이크, 여동생 크리스, 마사) 중 장남이다.
외할아버지 유진 C. 풀리엄은 중앙 신문사(Central Newspapers, Inc.)를 설립하고 애리조나 리퍼블릭, 인디애나폴리스 스타 등 12개 이상의 주요 신문을 소유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언론계 거물이었다. 아버지 제임스 C. 퀘일은 1955년 가족과 함께 애리조나주로 이주하여 가문의 출판 사업 일부를 운영했다.
퀘일은 애리조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6] 고향 인디애나로 돌아와 1965년 헌팅턴의 헌팅턴 노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디포 대학교에 진학하여 1969년 정치학 학사(B.A.) 학위를 받았다.[7] 대학 시절 골프팀 주장이었고 델타 카파 엡실론 (Psi Phi 지부) 회원이었다.[8][9]
대학 졸업 후 인디애나 주방위군에 입대하여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복무하며 병장 계급까지 올랐다. 주방위군 복무로 징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0] 주방위군 복무 중이던 1970년, 인디애나 대학교 로버트 H. 매키니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정규 입학 기준에는 미달했으나, "특별한 요소"를 증명하는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입학 허가를 받았다. 1974년 법학 박사(J.D.) 학위를 취득했다.[11][12] 법과대학 재학 중 야간 수업에서 미래의 아내가 될 마릴린 터커를 만났다.[13]
1971년 7월 인디애나주 검찰총장실 소비자 보호 부서 조사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같은 해 말 에드가 윗컴 주지사의 행정 보좌관이 되었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는 인디애나주 세입부 상속세과 과장을 지냈다. 1974년 법과대학 졸업 후에는 가족 소유 신문사인 헌팅턴 헤럴드-프레스의 부사장으로 일했다.
1972년 11월 마릴린 터커와 결혼했으며,[70] 슬하에 터커, 벤저민(벤), 코린느 세 자녀를 두었다.[71] 장남 벤 퀘일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공화당 소속으로 애리조나주 제3선거구를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72] [73] 퀘일 부부는 현재 애리조나주 패러다이스 밸리에 거주하고 있다.[69]
취미는 골프, 테니스, 농구, 승마, 플라이 낚시, 독서 등 다양하며, 특히 자녀들의 스포츠 활동 관람을 즐긴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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