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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이 인종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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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보이 인종청소는 보스니아 전쟁 중 세르비아 민주당이 도보이를 점령한 후 세르브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조직적인 인종 청소를 의미한다. 1992년 5월, 도보이 점령 후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무장 해제, 체포, 강제 추방되었으며, 집과 재산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부코바치케치브치예와 그랍스카 마을에서는 학살, 강간, 고문, 강제 노동이 자행되었고, 특히 여성들은 집단 강간의 피해를 입었다. 유엔 조사 결과와 전범 재판을 통해 세르비아계의 만행이 드러났으며,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은 이를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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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이 인종청소
사건 개요
도보이의 위치
도보이의 위치
관련 전쟁

2. 도보이 함락과 점령 (1992년)

보스니아 전쟁 당시 도보이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91년 전쟁 발발 직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보이에는 보스니아인 40.14%(41,164명), 세르브인 38.83%(39,820명), 크로아트인 12.93%(13,264명), 유고슬라브인 5.62%(5,765명), 기타 민족 2.48%(2,536명)가 섞여 살고 있었다.[2]

1992년 5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주당이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도보이와 인근 마을들은 세르비아계 군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점령 이후, 세르브인이 아닌 민간인, 특히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트인들은 광범위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4]

2. 1. 군사적 점령

도보이 및 인근 마을들은 1992년 5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주당이 도시 지배권을 차지하면서 세르비아군 지배하로 넘어갔다. 이후 세르브인이 아닌 모든 민간인, 특히 보스니아인크로아트인들은 대량으로 무장 해제되고 체포되었다.[4]

1992년 5월 4일, 부코바치케치브치예 마을이 점령되자 주민들은 강제로 추방당했으며, 마을의 모스크는 폭발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3] 그랍스카 마을은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민병대의 전차, 지대공 미사일,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마을이 함락된 후, 포로가 된 주민들은 코스타이니체까지 행진해야 했다. 그곳에서 어린이, 여성, 노인은 분리되어 버스로 추방되었고, 남은 남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3]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의 집과 재산은 광범위하게 약탈당하고 조직적으로 파괴되었으며, 도시 내 모스크들도 파괴되었다.[4] 살해되지 않은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마을 곳곳에 감금되어 주기적인 구타, 강간, 고문, 극심한 강제노동 등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했다.[4] 그랍스카의 학교와 도보이의 보산스카 주스 및 잼 공장은 강간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이 강간 캠프는 지역 세르브계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육군(JNA), 밀란 마르티치가 지휘하는 크닌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경찰 "마르티체브치", 그리고 흰 독수리 준군사조직 병사들이 이용했다.[4]

유엔의 조사 결과, 도보이의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에서 보스니아인 및 크로아트인 여성들에 대한 집단 강간이 자행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수천 명의 비세르브계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강간 및 학대를 당했다. 베오그라드 안팎에서 출발한 버스들은 보스니아계 및 크로아트계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강간하기 위해 마을의 강간 캠프까지 셔틀처럼 운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지역 민병대에게 돈을 지불했으며, 이 자금은 보스니아 지역 내 여러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준군사조직들은 유고 인민군(JNA)의 지휘를 받는 등 사실상 인민군의 하위 부대였다. 강간 캠프에서의 학대로 인해 도보이 수용소에서 여러 여성이 사망하기도 했다.[4]

2. 2. 민간인 피해

보스니아 전쟁 당시 도보이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91년 전쟁 발발 직전, 도보이의 인구는 보스니아인 40.14%(41,164명), 세르브인 38.83%(39,820명), 크로아트인 12.93%(13,264명), 유고슬라브인 5.62%(5,765명), 기타 민족 2.48%(2,536명)로 구성되어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었다.[2] 그러나 1992년 5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주당이 도시를 장악하면서 도보이와 인근 마을들은 세르비아계 군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후 세르브인이 아닌 모든 민간인, 특히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트인들은 대량으로 무장 해제되고 체포되었다.[4]

1992년 5월 4일, 부코바치케치브치예 마을이 점령되자 주민들은 강제로 추방당했으며, 마을의 모스크는 폭발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3] 그랍스카 마을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브계 민병대의 전차, 지대공 미사일,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마을이 함락된 후, 포로로 잡힌 주민들은 코스타이니체까지 강제로 행진해야 했다. 그곳에서 어린이, 여성, 노인들은 분리되어 버스로 다른 마을로 추방되었고, 남은 남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3]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의 집과 재산은 광범위하게 약탈당하고 조직적으로 파괴되었으며, 도시 내 모스크들도 파괴되었다.[4] 살해되지 않고 감금된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주기적인 구타, 강간, 고문, 극심한 강제노동 등 비인간적인 환경에 놓였다.[4] 특히 그랍스카의 학교와 도보이 시내의 주스 및 잼 제조 공장이었던 보산스카 공장은 강간 캠프로 운영되었다. 이 강간 캠프는 지역 세르브계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육군, 밀란 마르티치가 지휘하는 크닌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경찰("마르티체브치"), 흰 독수리 준군사조직 병사들이 이용했다.[4]

유엔 조사 결과, 도보이의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에서 보스니아인 및 크로아트인 여성들에 대한 집단 강간이 자행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수천 명의 비세르브계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하고 학대받았다. 베오그라드 안팎에서 출발한 버스들은 보스니아계 및 크로아트계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기 위해 마을의 강간 캠프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지역 민병대에게 돈을 지불했으며, 이 자금은 보스니아 내 여러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준군사조직들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의 지휘를 받는 등 사실상 인민군의 하위 부대처럼 움직였다. 이러한 끔찍한 학대로 인해 도보이 수용소에서는 여러 여성이 사망하기도 했다.[4]

3. 세르비아계의 만행

도보이 지역은 보스니아 전쟁세르브인 세력에 의해 점령된 후, 비세르브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심각한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의 현장이 되었다. 1992년 5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주당이 도시를 장악한 이후, 세르비아 군대와 민병대는 보스니아인크로아트인을 포함한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을 체계적으로 탄압했다.[4]

이 과정에서 비세르브계 주민들은 강제로 무장 해제되고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했다. 부코바치케치브치예와 그랍스카 같은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강제 추방되고 남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마을의 모스크를 포함한 종교 및 문화 시설과 민간인 재산이 광범위하게 약탈되고 파괴되었다.[3][4]

살아남은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감금된 상태에서 주기적인 구타, 고문, 강제노동에 시달렸으며, 특히 여성들은 조직적인 강간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다.[4] 그랍스카의 학교, 도보이 시내 공장, 심지어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 등이 강간 수용소로 운영되었으며[4], 이는 유고 인민군, 지역 세르브계 민병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경찰 "마르티체브치", 흰 독수리와 같은 준군사조직 등 다양한 세르비아계 무장 세력에 의해 자행되었다.[4] 이러한 잔혹 행위는 유엔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4] 이 모든 만행은 도보이 지역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인종 청소의 일부였다.

3. 1. 조직적인 인종 청소

1992년 5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주당이 도보이의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이 지역은 세르비아군 통제 하에 들어갔다. 이후 세르브인이 아닌 모든 민간인, 특히 보스니아인크로아트인은 대량으로 무장 해제되고 체포되었다.[4]

1992년 5월 4일, 부코바치케치브치예 마을이 점령되자 주민들은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마을의 모스크는 폭발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3] 그랍스카 마을은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민병대의 전차, 지대공 미사일,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마을이 함락된 후, 포로로 잡힌 주민들은 코스타이니체까지 강제로 행진해야 했다. 그곳에서 어린이, 여성, 노인들은 분리되어 버스로 추방되었고, 남은 남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3]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의 집과 재산은 광범위하게 약탈당하고 조직적으로 파괴되었으며, 도시 내 모스크 역시 파괴 대상이 되었다.[4] 바로 살해되지 않은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마을 곳곳에 감금된 채 주기적인 구타, 강간, 고문, 극심한 강제노동 등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했다.[4]

특히, 그랍스카의 학교와 도보이 시내의 보산스카 공장(주스와 잼 제조 공장)은 강간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이 수용소는 지역 세르브계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육군, 밀란 마르티치가 지휘하는 크닌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경찰 "마르티체브치", 그리고 흰 독수리 준군사조직 병사들이 이용하였다.[4]

유엔 조사 결과, 도보이의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에서도 보스니아인 및 크로아트인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이 자행되고 있었다고 밝혀졌다. 수천 명의 비세르브계 여성이 조직적으로 강간 및 학대를 당했다. 베오그라드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강간 캠프까지 운행되며, 조직적인 집단 강간에 동원되었다. 남성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지역 민병대에게 돈을 지불했고, 이 자금은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준군사조직은 유고 인민군(JNA)의 지휘를 받는 하위 부대처럼 운영되었다. 이러한 학대로 도보이 수용소에서 여러 여성이 사망했다.[4]

3. 2. 강간 캠프 운영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주기적으로 구타, 강간, 고문, 극심한 강제노동 등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한 채 마을 곳곳에 감금되었다.[4] 그랍스카의 학교와 도보이에서 주스와 잼을 제조하는 보산스카 공장은 강간 캠프(강간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이 강간 캠프는 지역 내 세르브계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육군, 밀란 마르티치가 지휘하는 크닌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경찰 "마르티체브치", 흰 독수리 준군사 병사들이 이용하였다.[4]

유엔의 조사 결과, 도보이의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에서 보스니아인크로아트인 여성들에 대한 집단 강간이 자행되고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세르브계가 아닌 여성 수천 명은 조직적으로 강간 및 학대를 당했다. 베오그라드 내외에서 출발하는 버스들은 보스니아계, 크로아트계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강간하기 위해 마을의 강간 캠프까지 운행하는 여러 셔틀버스를 운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지역 민병대에게 돈을 지불했으며, 이 자금은 보스니아 지역의 여러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준군사조직들은 유고 인민군(JNA)의 지휘를 받는 등 사실상 인민군의 하위 부대였다. 이러한 강간 캠프에서의 학대로 인해 도보이 수용소에서 여러 여성이 사망하기도 하였다.[4]

3. 3. 집단 강간과 성폭력

바로 살해되지 않은 비세르브계 민간인들은 주기적으로 구타, 강간, 고문, 극심한 강제노동 등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한 채 마을 곳곳에 감금되었다.[4] 그랍스카의 학교와 도보이에서 주스와 잼을 제조하는 보산스카 공장은 강간 캠프로 이용되었다. 이 강간 캠프는 지역 내 세르브계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육군, 밀란 마르티치가 지휘하는 크닌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경찰 "마르티체브치", 흰 독수리 준군사 병사들이 이용하였다.[4]

유엔의 조사 결과, 도보이의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에서 보스니아인크로아트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 강간이 자행되고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세르브계가 아닌 여성 수천 명이 조직적으로 강간 및 학대를 당했다. 베오그라드 안팎의 버스들은 보스니아계, 크로아트계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강간하기 위해 마을의 강간 캠프까지 운행하는 여러 셔틀버스를 운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지역 민병대에게 돈을 지불했으며, 이 자금은 보스니아 지역의 여러 세르브계 준군사조직의 활동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이 준군사조직은 유고 인민군(JNA)의 지휘를 받는 등 사실상 인민군의 하위 부대였다. 이러한 강간 캠프에서의 학대로 인해 도보이 수용소에서 여러 여성이 사망하기도 하였다.[4]

4. 전범 재판

도보이 지역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와 관련된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 국제적으로 여러 전범 재판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ICTY)은 도보이에서 세르비아계 군대와 경찰이 보스니아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박해, 살인, 강제 추방 등을 인도에 반한 죄로 판단하고, 라도반 카라지치, 빌랴나 플라브시치, 몸칠로 크라이슈니크, 스토얀 주플랴닌, 미초 스타니시치 등 주요 책임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또한, 독일 법원에서도 니콜라 요르기치 등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져 대량살상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재판들은 도보이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한 국제사회의 사법적 대응을 보여준다.

4. 1.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 (ICTY) 재판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ICTY)은 판결문을 통해 도보이 지역에서 세르비아군이 자행한 보스니아인에 대한 박해 (고문, 잔혹한 대우, 비인간적인 행위, 불법 감금, 비인간적인 생활 환경 조성 및 강제 유지, 비세르브계 주민의 가옥 및 재산 약탈, 차별적인 행정 조치 등), 살인, 강제 추방, 고문 등이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었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도보이를 포함한 보스니아 전역에서 인도에 반한 죄와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5]

빌랴나 플라브시치몸칠로 크라이슈니크는 개별적으로 또는 타인과 공모하여 도보이 지역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보스니아인 및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의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을 파괴할 목적으로 계획, 선동, 명령, 실행하거나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플라브시치는 11년형, 크라이슈니크는 20년형을 선고받았다.[6][7][8]

수용소를 관리하는 경찰력에 대한 지휘권을 가졌던 전 경찰총장 스토얀 주플랴닌과 스릅스카 공화국의 전 내무장관 미초 스타니시치는 각각 2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ICTY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스타니시치와 주플랴닌 모두 계획된 세르비아 국가 영토 내에서 비세르브계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제거하려는 공동범죄집단(JCE)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되었다"고 판시했다.[9]

2011년, 요비차 스타니시치와 프란코 시마토비치도 도보이 지역의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10] 1심에서는 두 사람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유죄로 판결이 뒤집혔다.[11] 이 사건은 2017년 유엔 국제형사재판소로 이관되어 2020년까지 재판이 계속되었다.[12]

4. 2. 기타 재판

1997년 9월 26일, 니콜라 요르기치는 독일 뒤셀도르프 고등지방법원에서 11건의 대량살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도보이 지역에서 30명이 사망한 사건 등을 포함하며, 보스니아 학살 관련 재판 중 첫 유죄 판결이었다. 하지만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서는 대량학살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당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13]

1999년 4월 30일, 독일 연방대법원은 요르기치의 항소를 기각했다. 독일 법원은 항소심에서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인 요르기치가 세르비아 지도부의 지원 아래 현지 보스니아인 주민에 대한 테러 행위에 가담했으며, '인종 청소' 정책을 시행한 도보이 지역 준군사조직의 지도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명시했다.[14][15][16]

5. 국제사회의 대응과 노력

도보이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를 포함한 보스니아 전쟁 중 발생한 여러 전쟁 범죄에 대해 국제사회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엔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도보이 학살과 같은 참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5. 1. 유엔과 국제사회의 조사

유엔 조사에 따르면, 도보이의 구 올림픽 경기장 주택 단지에서는 보스니아인크로아트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 강간이 자행되었다.[4] 세르브계가 아닌 수천 명의 여성들이 체계적인 강간과 학대에 시달렸다. 베오그라드 등지에서 온 버스들은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트계 여성들을 마을의 강간 캠프로 이송하여 끔찍한 집단 강간을 자행하는 데 동원되었다.[4] 남성들은 강간에 가담하기 위해 지역 민병대에 돈을 지불했고, 이 자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브계 준군사조직들의 활동비로 쓰였다.[4] 이들 준군사조직은 유고 인민군(JNA)의 지휘를 받는 하부 조직처럼 운영되었다. 강간 캠프의 잔혹한 학대로 인해 도보이 수용소에서 사망한 여성들도 상당수 있었다.[4]

참조

[1] 웹인용 Pojedinačan popis broja ratnih žrtava u svim općinama BiH http://www.prometej.[...] Prometej.ba 2013-02-00
[2] 서적 Ethnic composition of Bosnia-Herzegovina population, by municipalities and settlements, 1991. census Zavod za statistiku Bosne i Hercegovine
[3] 웹사이트 "BGHSt 45, 64 - Völkermord und Weltrechtsprinzip" http://www.servat.un[...] Oberlandesgericht Düsseldorf 1999-04-30
[4] 간행물 Final report of the United Nations Commission of Experts, established pursuant to 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 780 (1992), Annex III.A — M. Cherif Bassiouni; S/1994/674/Add.2 (Vol. IV), 27 May 1994 http://www.ess.uwe.a[...] 1994-05-27
[5] 웹인용 Bosnia-Herzegovina: Karadžić life sentence sends powerful message to the world https://www.amnesty.[...] Amnesty International 2019-03-20
[6] 웹인용 Prosecutor v. Biljana Plavsic judgement. http://www.icty.org/[...]
[7] 웹인용 Prosecutor v. Momcilo Krajisnik judgement http://www.icty.org/[...]
[8] 웹인용 UN tribunal transfers former Bosnian Serb leader to UK prison https://news.un.org/[...] UN News 2009-09-08
[9] 웹인용 Former high-ranking Bosnian Serbs receive sentences for war crimes from UN tribunal https://news.un.org/[...] UN News 2013-03-27
[10] 웹인용 The Prosecutor of the Tribunal against Jovica Stanisic and Franko Simatovic http://www.icty.org/[...] ICTY 2003-12-00
[11] 웹인용 Oslobođeni Stanišić i Simatović http://www.b92.rs/in[...] B92 2013-05-30
[12] 뉴스 Станишић и Симатовић вратили се у судски притвор у Хагу http://www.politika.[...] 2016-06-01
[13] 웹인용 Prosecutor v. Biljana Plavsic judgement. http://www.icty.org/[...]
[14] 웹인용 Jorgić, Nikola http://www.haguejust[...] haguejusticeportal.net 2011-09-30
[15] 웹인용 German Court Sentences Serb To Life for Genocide in Bosnia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7-09-27
[16] 웹인용 Bosnian Serb Given Life by German Court http://articles.lati[...] Los Angeles Times 199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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