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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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조 유코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출생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손녀이다. 제일생명보험 근무 후 결혼으로 메이지가쿠인 대학을 중퇴하고, 고쿠시칸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보수 논객으로 활동하며, 조부 도조 히데키와 다른 A급 전범들을 옹호하고, 극동 국제 군사 재판, 야스쿠니 신사 합사, 위안부 강제 연행, 난징 대학살 등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2007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2013년 간질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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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유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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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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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도조 요시에 |
다른 이름 | 이와나미 요시에 이와나미 유코 |
출생일 | 1939년 5월 20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경성부 (현재 대한민국서울특별시) |
사망일 | 2013년 2월 13일 (73세) |
사망 장소 | 도쿄, 일본 |
국적 | 일본 |
직업 | 정치인, 보험 설계사 |
고용주 | 다이이치 보험 회사 |
학력 | 국사관 대학 문학부 교육학과 |
가족 | 도조 히데타카 (아버지) 도조 히데키 (할아버지) |
자녀 | 4명 |
2. 생애
도조 유코는 일제 식민지 조선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와나미 요시에(岩浪淑枝)이다. 도조 히데키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의 손녀로,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의 장녀이다.
제일생명보험에서 근무한 후 메이지가쿠인 대학에 진학했지만 결혼으로 중퇴했다. 4명의 아이를 낳은 후 고쿠시칸 대학 문학부 교육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저널리스트 다카다 킨이치는 1940년 장제스가 나치 독일을 중재자로 하여 타진해 온, 중국에서의 철병을 조건으로 한 평화안을 도조가 거부하며 오카와 슈메이의 설득에 "야스쿠니의 영령에 대해 죄송하다"라고 반론한 것을 두고 중국 침공을 정당화하는 것이며, 피는 속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시하라 신타로가 2005년 11월호 "정론(正論)"에서 조부 도조 히데키를 비방하자 항의했다.
2. 1. 정치 활동
2007년 5월, 도조는 68세의 나이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극우 성향의 공약을 내걸고,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 전쟁 범죄를 부인했다.[3]도조는 영화 제작자 미즈시마 사토루가 난징 대학살에 대해 선전적인 측면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폭로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 ''난징의 진실''의 후원자였다. 미즈시마는 1937년 난징 대학살이 중국과 여러 서방 목격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포함한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정치 평론가 모리타 미노루는 "도조의 민족주의적 태도는 특정 계층의 국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녀의 견해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녀는 선거에서 전혀 승산이 없다."라고 말했다.[3]
보수 논객으로 알려진 도조는 조부 도조 히데키를 유족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A급 전범을 포함하여 극동 국제 군사 재판 판결, 야스쿠니 신사에서의 분사, 위안부 강제 연행, 난징 대학살 등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원폭 신화"를 부정하고,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야만적인 행위라고 비판했다.
"A급 전범 분사는, 그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인정하게 되며, 그것은 야스쿠니의 영령에게 죄송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조부의 지도자로서의 책임에 대해서는 TV 아사히의 "선데이 프로젝트"에 출연했을 때, 다하라 소이치로에게 "조부는 패전의 책임이 있으므로, 그 책임을 지고 사형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또한 "조부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천황 폐하께서 참배하실 수 없게 된 것은, 매우 죄송한 마음으로 야스쿠니의 도리이를 통과하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지만, "분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천황의 칙사가 야스쿠니 신사에 파견된 것을 두고 A급 전범 합사가 천황의 허가를 받은 위에 행해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2006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A급 전범은 우리나라의 국내법에 근거하여 선고된 형벌은 아니지만, 도쿄 재판에서 유죄로 판결된 전쟁 범죄자인 것은 사실이며, 우리나라는 그 재판을 수용하고 있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동 재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입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고이즈미 총리에게 발언과 참배의 정합성에 대한 질문이 나왔고, "A급 전범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했지만, 도조는 이것을 "A급 전범을 위해 '만'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고이즈미의 진의는 불명).
2000년경부터 오키나와나 페렐리우 섬 등에서 전몰자 유골 수집을 여러 번 했다. 지뢰 등이 남아있는 곤란한 장소는 몬마 히로아키 등의 도움을 받아 지뢰 등을 제거했다. 오랜 숙원이던 임팔 작전지에서의 유골 수집은, 연령에 따른 체력의 쇠퇴로 인해 몬마 히로아키에게 맡기게 되었다.
2007년 7월 29일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도쿄도 선거구에서 무소속 신인 후보로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획득 득표수: 59,607표, 득표율: 1.0%, 공탁금 몰수)[6]。
2. 2. 사망
도조는 정계 입문 10년 만인 2013년 2월 13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간질성 폐렴으로 사망했다.[2]3. A급 전범 관련 입장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동아시아 전쟁 범죄인을 죄질에 따라 A급, B급, C급으로 분류하였는데, 도조 유코의 할아버지인 도조 히데키 총리는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1948년 12월 23일 사형 후 화장되었다.[3] 도조 유코는 2005년 8월 14일 KBS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일본은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인터뷰에서 "A급, B급, C급이라고 하는 것은 연합군이 마음대로 붙여 놓은 기호와 같은 것이다. 1958년에 마지막 소위 '전범'이라고 하는 분들이 세계 각국의 승인을 받아 모두 사면되었기 때문에 A, B, C 그리고 전범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졌다"며 "A급이 나쁘다거나 B급이 어떻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통해 전쟁에 대한 반성이 없음을 확인시켰다.[3]
도조 유코는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 전쟁 범죄를 부인했다. "일본은 침략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위적 차원에서 싸운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조상들이 악한 짓을 했고, 나라가 악하다고 잘못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자긍심과 자신감을 되돌려줘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3] 또한, "일본에는 전쟁 범죄자가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모든 이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으며,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3] 교우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원자 폭탄이 일본의 '침략'을 멈췄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은 침략 전쟁을 한 것이 아니며,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 할아버지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졌기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했다.[4]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선전적인 측면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폭로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 ''난징의 진실''의 후원자였다.
2006년 8월 15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후, "A급 전범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했지만, 도조 유코는 이것을 "A급 전범을 위해 '만'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도조 유코는 "A급 전범 분사는, 그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인정하게 되며, 그것은 야스쿠니의 영령에게 죄송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조부의 지도자로서의 책임에 대해서는 "조부는 패전의 책임이 있으므로, 그 책임을 지고 사형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또한, "조부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천황 폐하께서 참배하실 수 없게 된 것은, 매우 죄송한 마음으로 야스쿠니의 도리이를 통과하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지만, 동시에 "분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4. 가족
도조 히데키의 손녀이자, 도조 히데키의 장남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의 장녀이다. 본명은 이와나미 요시에(岩浪淑枝)이다.[9]
- 증조부: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教)
-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 할머니: 이토 가쓰코
- 아버지: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
- 남편: NHK OB이다. 도조가 통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도조가 옹호하는 활동에 이와나미 성을 사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남편의 의향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도조 가문에서는 이미 그렇지 않은데 "도조"를 칭하며 정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강한 비판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 히데타카가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와 소원했던 것과 본인이 당시 유아였기 때문에 친족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할아버지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버지 도조 히데타카는 도조 히데키의 장남이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군인이 되지 않았다. 취업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신세를 지지 않았지만, 취업처가 만주국 경무부였기 때문에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히데키는 그의 취업이 자신의 커넥션·비호의 결과로 여겨지는 것을 싫어하여 그를 면직시키거나 영구히 승급을 정지할 것을 인사 담당자에게 요구했다(이 지시는 결국 무시되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균열을 결정적으로 만들었고, 전후 히데키가 스가모 프리즌에서 면회를 기대한다는 연락을 히데타카에게 보냈을 때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는 말을 하는 건가"라고 말했다.
일반 사단법인 국제교양진흥협회 대표 이사이자 "데일리 뉴스 온라인"의 라이터이기도 한[9] 도조 히데토시는 조카이다.[10]
5. 저서
- 岩波由紀子|이와나미 유키코일본어 명의
- * 一切言う勿れ―東条英機一族の戦後|일절 말하지 말라 - 도조 히데키 일족의 전후일본어 (요미우리 신문사, 1992년) ISBN 4643920777
- * 祖父東条英機「一切語るなかれ」|할아버지 도조 히데키 「일절 말하지 말라」일본어 (분게이슌주・분슌 문고, 1995년) ISBN 4167449021
- 祖父東条英機「一切語るなかれ」|할아버지 도조 히데키 「일절 말하지 말라」일본어 (증보 개정판, 분슌 문고, 2000년3월) ISBN 4-16-736902-8
- 東条家の母子草|도조가의 모자초일본어 (고분샤, 2003년8월) ISBN 4-77-041100-6
- 大東亜戦争の真実 東条英機宣誓供述書|대동아 전쟁의 진실 도조 히데키 선서 진술서일본어 (WAC, 2005년 8월, ISBN 978-4898310830), 동·신서판 2009년 8월
- * 1948년 발행된 「도조 히데키 선서 진술서」를 게재. WAC판에서는 GHQ 발금 제1호로 선전되고 있으나, GHQ의 검열은 1945년 점령 직후부터 시작되었고(프레스 코드 외), GHQ에 의한 간행물 몰수 리스트(the confiscation of the propaganda publications)는 쇼와 21년(1946년) 3월 16일부터 쇼와 23(1948년) 4월 15일까지 정부에 신고되고 있다. 하나다 노리카가 선전을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후쿠토미 켄이치와 東条英機 仏教と神道、人はどう死を受け容れるのか|도조 히데키 속의 불교와 신도,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가일본어 (코단샤 +α 신서, 2010년 7월)
6. 어록
"일본은 침략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위적 차원에서 싸운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조상들이 악한 짓을 했고, 나라가 악하다고 잘못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자긍심과 자신감을 되돌려줘야 합니다."[3]
"일본에는 전쟁 범죄자가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모든 이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으며,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3]
"교우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원자 폭탄이 일본의 '침략'을 멈췄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은 침략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 할아버지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졌기 때문입니다."[4]
"사람들은 저를 매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저는 야스쿠니 신사의 ''도리이'' 위에 있는 비둘기입니다."[5]
참조
[1]
뉴스
Tojo's granddaughter, Yuko, dies at 73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13-02-15
[2]
웹사이트
Tojo's granddaughter, Yuko, dies at 73
https://www.japantim[...]
2013-02-16
[3]
뉴스
Tojo's granddaughter runs for office
https://www.nbcnews.[...]
NBC News
2007-06-11
[4]
웹사이트
Candidate Tojo seeks resolution against A-bombings
https://www.japantim[...]
2007-07-04
[5]
뉴스
Candidate Tojo seeks resolution against A-bombings
https://www.japantim[...]
2007-07-04
[6]
뉴스
選挙区 東京都:開票結果:参院選2007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7]
웹사이트
http://sorceress.rai[...]
[8]
뉴스
訃報:東条由布子さん73歳=東条英機元首相の孫
http://mainichi.jp/s[...]
毎日新聞社
2013-02-15
[9]
웹사이트
デイリーニュースオンラインとは?
http://dailynewsonli[...]
[10]
블로그
叔母東條由布子他界
https://ameblo.jp/to[...]
201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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