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미쓰토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쿠가와 미쓰토모는 오와리번의 2대 번주로, 초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딸 지요히메와 결혼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1650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가독을 이어받았다. 번주로서 지샤 봉행 제도와 효조쇼를 설치하고, 재정 개혁을 단행하는 등 번정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일본 다도와 서예, 검술에도 능했으며, 특히 오와리 야규 씨족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신카게류 검술의 달인이었다. 1693년 아들 도쿠가와 쓰나나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으나, 아들이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1700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와리번주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오와리번주 - 도쿠가와 무네하루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에도 시대 오와리번의 7대 번주로, 쇼군의 규제 완화 정책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막부와의 갈등으로 은퇴 후 칩거했고,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양하게 그려진다. - 오와리 도쿠가와가 - 기요스성
기요스성은 시바 요시시게가 축성한 성으로 오다 가문의 거성이 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활동 무대이자 기요스 회의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기요스 고에시로 인해 폐성된 후 일부 유적과 복원된 천수각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오와리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1700년 사망 -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후계자 부재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야기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말을 가져온 스페인 국왕이다. - 1700년 사망 - 교황 인노첸시오 12세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1691년부터 1700년까지 재위하며 족벌주의 금지, 교황청 개혁, 자선 사업, 매관매직 근절 등을 통해 교회 개혁에 힘썼다.
도쿠가와 미쓰토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도쿠가와 미쓰토모 |
다른 이름 | 오와리-다이나곤 |
직업 | 다이묘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625년 8월 31일 |
출생지 | 나고야, 오와리국, 일본 |
사망일 | 1700년 11월 26일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지요히메 |
인물 정보 (일본어)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간에이 2년 7월 29일 (1625년 8월 31일) |
사망 | 겐로쿠 13년 10월 16일 (1700년 11월 26일) |
아명 | 고로하치/고로타 |
휘 | 미쓰요시, 미쓰토모 |
자 | 자메이 (子明) |
호 | 겐쇼코 (源正公) |
통칭 | 구란도, 이즈모 |
시호 | 없음 |
신호 | 없음 |
법명 | 즈이류인덴텐렌샤 준요 겐쇼 다이코지 (瑞龍院殿天蓮社順誉源正大居士) |
영명 | 없음 |
관위 | 종2위권대납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이에미쓰 → 이에쓰나 → 쓰나요시 |
번 | 오와리 번주 |
씨족 | 도쿠가와 씨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
아버지 | 도쿠가와 요시나오 |
어머니 | 요시다 진베의 누이 간키인 (歓喜院) |
형제자매 | 미쓰토모, 교히메 (히로하타 다다유키 정실) |
정실 | 지요히메 (영선원) |
측실 | 니와 미쓰시게의 딸, 히구치 씨, 무라오 씨, 이이오 씨 등 11명 |
자녀 | 쓰나나리 (장남), 도요히메, 마쓰다이라 요시유키 (차남), 나오히메 (차녀, 도쿠가와 이에쓰나 양녀), 마쓰다이라 요시마사 (3남), 마쓰다이라 야스나가 (4남), 다카히메 (3녀, 아사노 쓰나나가 정실), 마쓰다이라 도모시게 (6남), 마쓰다이라 도모아키라 (11남), 그 외 11남 6녀 |
양녀 | 사다히메 (아리마 요리모토 계실), 지히메 (오다 노부타케 정실), 소노히메 (아사노 나가테루 실), 기요히메 (오다 노부타케 계실) |
이미지 | |
![]() |
2. 생애
도쿠가와 미쓰토모는 오와리번 초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장남으로, 1625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1] 어릴 적 이름은 고로타(五郎太) 또는 고로하치(五郎八)였다. 1630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서 겐푸쿠를 치르고 편휘를 받아 '''미쓰요시'''(光義)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1639년 이에미쓰의 딸 지요히메와 혼인하였다.
165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오와리 번 2대 번주가 되었고, 이듬해 아버지의 보리사로 겐추지를 건립했다.[1] 1653년 정3위 권중나곤으로 승진했으며, 1672년에는 이름을 '''미쓰토모'''(光友)로 개명했다.[1] 그는 번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샤 봉행 제도와 효조쇼(評定所)를 설치하는 등 번정 정비에 힘썼으나, 사찰 건립 및 수리, 혼인 비용, 화재 복구 등으로 인해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
1690년 종2위 권대납언에 서임되었고,[1] 1693년 아들 도쿠가와 쓰나나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하여 오소네 별저(후의 도쿠가와 원)에서 지냈다.[1] 그러나 은퇴 후에도 아들이 사망하는 1699년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1] 1700년 향년 76세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나고야의 겐추지에 있다.[1]
미쓰토모는 일본 다도와 일본 서예에도 능했으며, 특히 오와리 야규 씨족에게 배운 신카게류 검술의 달인으로 알려져 6대 소케로 지명되기도 했다.[1]
2. 1. 유년 시절
1625년(간에이 2년) 7월 29일, 오와리번 초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장남으로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인 오조노 가타(於佐井の方, 간키인)이다. 어릴 적 이름은 '''고로하치'''(五郎八), '''고로타'''(五郎太)였다.1630년(간에이 7년) 5월 3일, 6세의 나이로 에도 막부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서 겐푸쿠(元服, 성인식)를 치렀다. 이때 쇼군 이에미쓰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미쓰(光)' 자를 받아 '''미쓰요시'''(光義)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아버지 요시나오로부터는 '요시(義)' 자를 받았다. 같은 날 종5위하 쿠란도(蔵人)에 서임되었다.
1633년(간에이 10년) 9월 5일에는 정4위하로 승진하여 우효에노카미(右兵衛督)에 임명되었다. 1634년(간에이 11년) 2월 21일에는 사촌이자 기슈 번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아들인 도쿠가와 미쓰사다와 함께 쇼군 이에미쓰로부터 매사냥터를 하사받았다.
1638년(간에이 15년) 2월 20일, 쇼군 이에미쓰의 장녀이자 자신의 종질녀(사촌의 딸)인 지요히메(千代姫, 후의 레이센인)와 약혼하였다. 다음 해인 1639년(간에이 16년) 9월 21일에 지요히메와 혼인했는데, 이는 미쓰요시의 할머니인 소오인(相応院)이 지요히메를 어릴 적부터 곁에 두고 양육하며 혼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1640년(간에이 17년) 3월 4일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고, 우콘에노곤노추조(右近衛権中将)를 겸하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11일에는 종3위로 승서되었다.
2. 2. 번주 시절
게이안 3년(1650년) 6월 28일, 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어받아 오와리 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1] 이때 종3위 관위와 우위문부(右衛門督)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인 게이안 4년(1651년)에는 아버지의 보리사(菩提寺, 명복을 비는 절)로 겐추지를 건립했으며,[1] 쇼오 2년(1653년) 8월 12일에는 정3위 권중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쇼오 3년(1654년)에는 미야주쿠(宮宿)에 니시하마 고텐(西浜御殿)을 건설했고, 간분 원년(1661년)에는 어머니 간키인(歓喜院)의 보리사로 다이신지(大信寺)를 건립했다.간분 12년(1672년) 11월 1일, 이름을 기존의 미쓰요시(光義)에서 '''미쓰토모'''(光友)로 공식 변경했다.[1] 그는 번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샤 봉행 제도와 효조쇼(評定所, 번의 최고 사법·행정 기관)를 설치하여 관제를 정비했다. 또한 방화 제도 정비, 군비 증강, 임업 제도 확립 등 번정의 기초를 다지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정실 지요히메(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딸) 외에도 최소 10명의 측실을 두어 17명의 자녀(아들 11명, 딸 6명)를 두었다.[1] 아들들에게 분가를 허락하여 덴나 원년(1681년)에는 차남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에게, 덴나 3년(1683년)에는 삼남 마쓰다이라 요시마사에게 각각 막부로부터 신치(新知, 새로운 영지)가 인정되어 오와리 도쿠가와 가의 연지(連枝, 분가)를 정비했다. 이러한 분가 허락 배경에는 정실 지요히메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사찰의 창건과 수리, 지요히메와의 혼인 비용, 만지 3년(1660년) 나고야성 아래 마을에서 발생한 대화재 복구 비용, 에도 번저(藩邸, 번의 에도 저택) 소실 후 수리비 등으로 인해 번의 재정은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다. 간분 6년(1666년) 번찰(藩札, 번에서 발행한 화폐)을 발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기간에 폐지되었으며, 번찰 회수를 위해 막부로부터 10만엔을 빌리기도 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덴나 원년에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구치마이(口米, 시장세의 일종)를 번 수입으로 전환하는 등 재정 기반 강화를 도모했으나, 재정난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한편, 미쓰토모의 치세 동안 막부로부터 하사받은 에도의 이치가야(市ヶ谷), 고지마치(麹町), 토야마(戸山) 저택은 주변 토지를 추가로 하사받거나 매입하여 확장되었다.
조쿄 2년(1685년)에는 아쓰타 신궁의 조영(造営, 건축 및 수리)을 맡았다. 겐로쿠 3년(1690년) 5월 4일에는 권대납언(権大納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5월 11일에는 종2위로 승진했다.[1]
겐로쿠 6년(1693년) 4월 25일, 정실 지요히메가 낳은 아들 도쿠가와 쓰나나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1] 쓰나나리가 차남임에도 적자가 된 것은 쇼군 가문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며, 서장자 요시마사(義昌)는 삼남으로 취급되었다. 은퇴 후에는 오소네 별저(大曽根御下屋敷, 후의 도쿠가와엔)를 건설하여 은거소로 삼았다.[1] 공식적으로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쓰나나리가 겐로쿠 12년(1699년) 7월 1일에 사망할 때까지 아들의 이름으로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계속 행사했다.[1]
겐로쿠 13년(1700년) 10월 16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나고야에 있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보리사인 겐추지에 있다.[1]

2. 3. 은거와 죽음
겐로쿠 3년(1690년) 5월, 종2위 권대납언에 서임되었다.[1] 겐로쿠 6년(1693년) 4월 25일, 공식적으로 은퇴하여 가독과 번주 자리를 정실 지요히메가 낳은 아들 쓰나나리에게 물려주었다.[1] 쓰나나리가 차남임에도 적자로 취급된 것은 지요히메를 통해 도쿠가와 쇼군 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1]은퇴 후에는 나고야 성 인근에 오소네 별저(후의 도쿠가와 원)라는 호화로운 저택과 정원을 건설하여 은거소로 삼았다.[1] 그는 또한 아오이 오시타야시키도 건설했다.[1] 공식적으로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겐로쿠 12년(1699년) 7월 1일 아들 쓰나나리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번의 정치적 실권을 계속 행사했다.[1]
겐로쿠 13년(1700년) 10월 16일, 향년 76세로 사망했다.[1] 그의 묘는 나고야에 있는 오와리 도쿠가와 씨족 사찰인 겐추지에 있다.[1]
3. 정책
무예나 다도, 당악, 서예 등 여러 예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검술은 야규 렌야사이(柳生利厳)에게 배워 신음류(新陰流) 제6세를 계승했으며, 서예 실력은 고사이 인(後西院), 고노에 노부히로(近衛信尋)와 함께 당대의 삼필(三筆)로 꼽힐 정도였다.
3. 1. 기독교 탄압
번주가 된 초기에는 기독교 신앙에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비 붕괴 사건 이후 막부에서 감찰관 격인 메츠케(目付)를 파견하면서 탄압이 강화되었다. 1665년(간분 4년)에는 기독교 신자(키리시탄) 200여 명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처형되고 매장되었던 센본마쓰바라(千本松原) 형장은 이후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는 세이료안(清凉庵, 후의 에이코쿠지(栄国寺))이라는 사찰이 세워져 처형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공간이 되었다.4. 문화적 업적
도쿠가와 미쓰토모는 무예뿐만 아니라 다도, 당악, 서예 등 여러 예능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검술에 능통하여, 오와리 야규 씨족의 야규 겐포(야규 렌야사이)에게 신카게류(신음류) 검술을 배웠다. 그는 야규 도시카네에 의해 신카게류 제6대 소케(종가)로 지명되었으며, 기존 유파(류)에 새로운 가르침 개념을 추가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서예 분야에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러, 당대의 명필로 꼽히던 고사이 인, 고노에 노부히로와 함께 삼필(三筆) 중 한 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5. 가족 관계
- 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나오
- 어머니: 오조노카타(於佐々の方) (또는 조(お尉), 간키인(環喜院)) - 요시다 진베에(吉田甚兵衛)의 누나
'''조상'''
관계 | 이름 |
---|---|
조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조모 | 오카메노가타 (소오인(相応院)) |
외조부 | 요시다 간베(吉田勘兵衛) |
증조부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증조모 | 오다이노가타 |
증외조부 | 시미즈 무네키요(清水宗清) |
고조부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고조모 | 아오키씨(青木氏) |
고외조부 | 미즈노 다다마사 |
고외조모 | 게요인(華陽院) |
- 정실: 지요히메(千代姫, 1637년 ~ 1698년) - 레이센인(霊仙院).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녀. 미쓰토모의 조모 소오인이 쇼군가에 청하여 어릴 때부터 곁에 두고 양육했다고 전해진다.
- 측실: 최소 10명 이상의 측실을 두었다.
- 히구치씨(樋口氏) - 칸게유코지(勘解由小路), 쇼주인(聖寿院). 히구치 노부타카(樋口信孝)의 딸.
- 무라오씨(村尾氏) - 칸시키부(勘式部), 세이신인(清心院).
- 이오씨(伊尾氏) - 신시키부(新式部), 초쇼인(超祥院).
- 후세야(伏屋氏) - 오히사노카타(お久の方)
- 이토씨(伊藤氏) - 오이토노카타(お糸の方)
- 야오씨(八尾氏) - 레이(お冷), 오테이노카타(お貞の方), 주후쿠인(寿福院).
- 쓰라지(おつらじ氏) - 오츠네노카타(お常の方), 쇼젠인(松善院).
- 오하시씨(大橋氏) - 쓰치(お土), 오후치노카타(おふちの方).
- 스즈키씨(鈴木氏) - 우메노에다(梅枝), 우메다노(梅田の), 바이코인(梅香院).
- 기무라씨(木村氏) - 이즈(お伊豆), 기무라노(木村の), 류호인(了法院).
- 자녀: 정실과 측실들을 통해 총 17명(남자 11명, 여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순서 (공식) | 이름 | 생모 | 생몰년 및 기타 정보 |
---|---|---|---|
장남 (실질적 차남) | 쓰나나리(綱誠) (초명: 쓰나요시(綱義)) | 치요히메 | 1652년 ~ 1699년. 오와리 번 3대 번주. 쇼군가의 피를 이어받아 적자로 인정됨. |
장녀 | 토요히메(豊姫) | 치요히메 | 1655년 출생. 요절. |
차남 (실질적 삼남) | 마쓰다이라 요시유키(松平義行) | 치요히메 | 1656년 ~ 1715년. 다카스 마쓰다이라 가문(高須松平家)의 시조. |
차녀 | 나오히메(直姫) | 치요히메 | 1658년 ~ 1661년. |
삼남 (실질적 장남) | 마쓰다이라 요시마사(松平義昌) | 히구치씨 | 1651년 ~ 1713년. 야나가와 마쓰다이라 가문(梁川松平家)의 시조. 서장자였으나 쓰나나리, 요시유키의 형임에도 삼남으로 취급됨. |
사남 | 마쓰다이라 야스나가(松平康永) (온스케(穏助), 토모히사(友久), 토쇼(図書)) | 무라오씨 | 1661년 ~ 1675년. 가신 마쓰다이라 야스히사(松平康久)의 양자. |
삼녀 | 키히메(喜姫) (아테히메(充姫)) | 무라오씨 | 1666년 ~ 1683년. 쓰나나리의 양녀가 되어 아사노 쓰나나가(浅野綱長)에게 시집감. |
팔남 | 센노스케(千之助) | 무라오씨 | 1676년 출생. 요절. |
오남 | 하치로타로(八郎太郎) | 이오씨 | 1668년 ~ 1669년. |
육남 | 마쓰다이라 토모시게(松平友重) (로쿠로(六郎)) | 이오씨 | 1669년 ~ 1702년. |
십일남 | 나가타카(長尊) | 이오씨 | 생몰년 미상. |
사녀 | 히데히메(秀姫) | 후세야씨 | 1673년 출생. 요절. |
오녀 | 노히메(宣姫) | 이토씨 | 1674년 출생. 요절. |
칠남 | 만노스케(万之助) | 야오씨 | 1676년 ~ 1681년. |
구남 | 반리노스케(万里之助) | 쓰라지씨 | 1677년 출생. 요절. |
십남 | 간노스케(官之助) | 오하시씨 | 1677년 출생. 요절. |
십일남 | 마쓰다이라 토모아키(松平友著) (오쿠라(大蔵), 단바노카미(丹波守) 토모치카(友親)) | 스즈키씨 | 1678년 ~ 1726년. 가와다쿠보 마쓰다이라 가문(川田久保松平家)의 시조. |
육녀 | 모토히메(元姫) | 기무라씨 | 1679년 ~ 1690년. |
- 양녀: 여동생 쿄히메(京姫, 후호인(普峯院), 히로하타 타다유키(広幡忠幸)의 처)의 딸들을 양녀로 삼았다.
- 사다히메(定姫, 1655년 ~ 1683년) - 아리마 요리모토(有馬頼元)의 계실.
- 지히메(智姫, 1659년 ~ 1690년) - 오다 노부타케(織田信武)의 정실.
- 소노히메(園姫, 1660년 ~ 1725년) - 아사노 나가테루(浅野長照)의 처.
- 키요히메(清姫, 1662년 ~ 1694년) - 오다 노부타케(織田信武)의 계실.
6. 미쓰토모의 휘(諱)를 받은 사람
도쿠가와 미쓰토모는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다른 사람에게 내려주는 헨기(偏諱)를 행하였다. 그는 초명인 '''미쓰요시(光義)'''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름의 '요시(義)' 자를, 이후 '''미쓰토모(光友)'''로 개명한 후에는 '토모(友)' 자를 각각 자신의 아들이나 가까운 인물들에게 주었다.
6. 1. 미쓰요시(光義) 시대
오와리번 초대 다이묘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장남으로, 첩에게서 태어났다. 아명은 고로타(五郎太)였다. 1630년 5월 3일,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쓰 앞에서 겐푸쿠(성인식)를 치렀다. 이때 쇼군의 이름에서 한 글자인 '미쓰(光)'를 받아 미쓰요시(光義)라는 성인 이름을 얻었다. 그의 정실 부인인 지요히메(후의 레이센인) 역시 쇼군 이에미쓰의 딸이었다.1650년 6월 28일 아버지 요시나오가 사망하자, 오와리 번의 2대 다이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때 종3위 관위와 우위문부(右衛門督)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인 1651년에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씨족 사찰인 겐추지를 완공했다. 1653년 8월 12일에는 정3위 관위와 중납언으로 승진했다.
미쓰요시는 자신의 이름 중 '요시(義)' 자를 여러 인물에게 헨기(偏諱, 이름 한 글자를 내려주는 것)로 주었다.
인물 | 관계 | 비고 |
---|---|---|
마쓰다이라 요시마사(松平義昌) | 미쓰요시의 서장자 | |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義) | 미쓰요시의 적장자 | 후에 쓰나나리로 개명 |
마쓰다이라 요시유키(松平義行) | 미쓰요시의 차남 (족보상) | 실제로는 삼남 |
1671년 11월 1일, 미쓰요시는 이름을 미쓰토모(光友)로 개명하였다. 이 개명 이전까지의 시기를 '미쓰요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6. 2. 미쓰토모(光友) 시대
1671년 11월 1일, 미쓰요시(光義)는 공식적으로 이름을 '''미쓰토모(光友)'''로 변경했다. 이후 1690년 5월 4일에는 대납언 칭호를 받았고, 일주일 뒤 종2위 관위를 받았다.1693년 4월 25일,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하여 그의 관직과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수장 자리를 아들 도쿠가와 쓰나나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699년 7월 1일 아들 쓰나나리가 사망할 때까지 아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모든 정치적 권력을 계속 행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나고야 성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오조네 오시타야시키라는 호화로운 저택과 광대한 정원에서 살았다. 그는 또한 아오이 오시타야시키를 건설했다.[1]
정실 부인인 지요히메(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딸) 외에도 미쓰토모는 최소 10명의 공식 측실을 두었으며, 이들을 통해 17명의 자녀(남자 11명, 여자 6명)를 두었다.
미쓰토모는 일본 다도와 일본 서예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오와리 야규 씨족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신카게류 스타일의 일본 검술의 달인으로 유명했다. 그는 야규 도시카네에 의해 신카게류 6대 소케(종가 당주)로 지명되었으며, 이 유파(류)에 여러 가르침 개념을 추가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묘는 나고야에 있는 오와리 도쿠가와 씨족 사찰인 겐추지에 있다.
미쓰토모가 '미쓰토모(光'''友''')'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기에 그의 이름 중 '友(토모)' 자를 받아 이름을 지은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원문 이름 | 관계 | 비고 |
---|---|---|---|
마쓰다이라 도모히사 | 松平友久 | 사남 | 후에 야스나가(康永)로 개명 |
마쓰다이라 도모시게 | 松平友重 | 육남 | |
마쓰다이라 도모치카 | 松平友著 | 십일남 | |
다케코시 도모마사 | 竹腰友正 | 다케코시 마사하루의 아들 | 미쓰토모의 사촌의 아들 |
7. 족보
- '''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나오
- '''어머니''': 조 (칸키인(歓喜院), 요시다씨)
-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 '''조모''': 오카메노가타 (お亀の方)
- '''외조부''': 요시다 간베 (吉田勘兵衛)
- '''증조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증조모''': 오다이노가타 (於大の方)
- '''증외조부''': 시미즈 무네키요 (清水宗清)
- '''고조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고조모''': 아오키씨 (青木氏)
- '''고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
- '''고외조모''': 게요인 (華陽院)
- '''정실''': 치요히메 (霊仙院, 1637년 ~ 1698년) -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녀
- '''측실'''
- * 칸게유코지 (歓解院, 생년 미상 ~ 1686년) - 히구치 노부타카의 딸
- * 칸시키부 (誠心院, 생년 미상 ~ 1709년) - 무라오씨(村尾氏)
- * 신시키부 (조쇼인(長昌院)|조쇼인]] (長昌院), 생년 미상 ~ 1709년) - 이오씨(伊尾氏)
- * 후세야 (伏屋)
- * 이토 (伊藤)
- * 레이 (寿福院, 생년 미상 ~ 1738년) - 야오씨(八尾氏)
- * 쓰라지 (祥善院, 생년 미상 ~ 1704년)
- * 쓰치 (土, 생년 미상 ~ 1704년) - 오하시씨(大橋氏)
- * 우메노에다 (梅枝, 바이코인(梅香院), 생년 미상 ~ 1704년) - 스즈키씨(鈴木氏)
- * 이즈 (伊津, 료호인(竜峰院), 생년 미상 ~ 1706년) - 기무라씨(木村氏)
- '''자녀'''
순서 | 이름 | 생모 | 생몰년 | 비고 |
---|---|---|---|---|
서장자 (실질적 장남) | 마쓰다이라 요시마사 | 칸게유코지 | 1651년 ~ 1713년 | 야나가와 마쓰다이라가(梁川松平家) 시조 |
장남 (실질적 차남) | 쓰나노부 (綱誠) | 치요히메 | 1652년 ~ 1699년 | 오와리 도쿠가와가 제3대 당주. 초명 쓰나요시(綱義) |
장녀 | 토요히메 (豊姫) | 치요히메 | 1655년 | 요절 |
차남 (실질적 삼남) | 마쓰다이라 요시유키 | 치요히메 | 1656년 ~ 1715년 | 다카스 마쓰다이라가(高須松平家) 시조 |
차녀 | 나오히메 (直姫) | 치요히메 | 1658년 ~ 1661년 | 요절 |
삼남 (실질적 사남) | 마쓰다이라 야스나가 | 칸시키부 | 1661년 ~ 1675년 | 통칭 온스케(穏之助), 토모히사(友久), 토쇼(友将). 가신 마쓰다이라 야스히사의 양자. 요절 |
삼녀 | 키히메 (喜姫) | 칸시키부 | 1666년 ~ 1683년 | 도쿠가와 쓰나노부의 양녀, 아사노 쓰나나가의 정실 |
사남 (실질적 오남) | 하치로타로 (八郎太郎) | 신시키부 | 1668년 ~ 1669년 | 요절 |
오남 (실질적 육남) | 마쓰다이라 토모시게 | 신시키부 | 1669년 ~ 1702년 | 통칭 로쿠로(六郎). 오와리번 지번 가와다쿠보번(川田窪藩) 번주 |
사녀 | 히데히메 (秀姫) | 후세야 | 1673년 | 요절 |
오녀 | 노히메 (能姫) | 이토 | 1674년 | 요절 |
육남 (실질적 칠남) | 만노스케 (万之助) | 레이 | 1676년 ~ 1681년 | 요절 |
칠남 (실질적 팔남) | 센노스케 (千之助) | 칸시키부 | 1676년 | 요절 |
팔남 (실질적 구남) | 반리노스케 (万里之助) | 쓰라지 | 1677년 | 요절 |
구남 (실질적 십남) | 간노스케 (官之助) | 쓰치 | 1677년 | 요절 |
십남 (실질적 십일남) | 마쓰다이라 토모아키 | 우메노에다 | 1678년 ~ 1726년 | 통칭 오쿠라(大蔵), 단바노카미 토모치카(友親). 가와다쿠보 마쓰다이라가(川田窪松平家) 시조 |
육녀 | 모토히메 (元姫) | 이즈 | 1679년 ~ 1690년 | 요절 |
십일남 | 나가타카 (長隆) | 신시키부 | ? ~ ? |
- '''양녀''' (여동생 쿄히메(京姫, 후호인(普峯院), 히로하타 타다유키의 처)의 딸들)
- * 사다히메 (定姫, 1655년 ~ 1683년) - 아리마 요리모토의 계실
- * 지히메 (知姫, 1659년 ~ 1690년) - 오다 노부타케의 정실
- * 소노히메 (園姫, 1660년 ~ 1725년) - 아사노 나가테루의 처
- * 키요히메 (清姫, 1662년 ~ 1694년) - 오다 노부타케의 계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