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하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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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전통적인 석상으로, 제주도 방언으로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을 지닌다. 1971년 제주도 문화재 위원회에 의해 공식 명칭으로 지정되었으며, 벙거지 모자를 쓰고,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다물고 두 손을 배 위에 올린 독특한 모습이 특징이다. 돌하르방은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고, 잡귀를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 제주도의 상징으로 여겨져 다양한 기념품으로 제작되고 있다.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중국 요나라 석인상과의 유사성이 제기되며 논쟁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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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하르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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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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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석상 |
지역 | 제주도 |
다른 이름 | 돌하르방 (Dol hareubang) 톨하르방 (Tol harubang) 하르방 (Hareubang / Harubang) |
상세 정보 | |
의미 | 돌 할아버지 |
재료 | 현무암 |
특징 | 눈: 툭 튀어나옴 코: 주먹코 입: 굳게 다문 모습 |
기능 | 수호신 금표 역할 주술적 기능 |
설명 | 제주도의 상징물 중 하나이며, 제주도 방언으로 '돌 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
관련 정보 | 제주도에는 돌 하르방 외에도 돌담, 돌탑 등 다양한 돌 문화가 존재함. |
2. 어원
돌하르방은 제주어로 '돌 할아버지'를 의미한다. 이 명칭은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졌으며, 주로 아이들이 사용했다고 한다.[2][3] 1971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 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현재는 이 이름이 널리 쓰인다.
돌하르방은 주로 성문 앞에 세워져 경계표지 역할을 하거나 성안의 안전을 지키는 종교적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2][3] 권력과 안보의 이미지를 나타내며,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기능도 했다고 여겨진다.[2][3] 이는 한국 본토의 장승과 유사한 역할이다.[3] 일부 사람들은 돌하르방 앞을 지날 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3]
제주특별자치도의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1754년(영조 3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은 1971년 제주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돌하르방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져 수호신, 주술종교적 기능, 경계 표시 등 장승과 유사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
웹사이트
https://news.jejunu.[...]
2024-07-13
과거에는 지역이나 특징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3] '우석목'(偶石木|우석목한국어),[2][3] '무성목'(武石木|무성목한국어),[2][3]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 등이 있었으며,[3] 이 중 '우석목'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또한 탐라 시대의 기록에는 '옹중석'(翁仲石|옹중석한국어)이라는 명칭이 보이나,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2]
3. 생김새
돌하르방은 현무암을 깎아서 만들며, 크기는 제주도의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제주시에서 발견된 돌하르방의 평균 신장은 187cm이며, 성읍 지역은 141cm, 대정 지역은 134cm이다.[2] 현존하는 가장 큰 돌하르방은 266cm, 가장 작은 것은 103cm에 달한다.
대체로 벙거지형 모자를 쓰고 입을 다문 채 싱긋 웃는 표정을 하고 있다. 동공 없이 불룩 튀어나온 눈, 크고 넓적한 주먹코가 특징이며, 양 손은 배 위에 단정히 얹어져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다리와 발 등 하반신은 표현되지 않고 상반신 위주로 묘사된다.
각 돌하르방은 서로 다른 특징과 크기를 가지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화산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둥근 모자를 쓴 형상이 많은데,[2] 이 모자는 돌하르방을 남성적 상징으로 만들어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큰 눈, 닫힌 입, 그리고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높이 솟아 있는 경향이 있다.[2] 표정은 엄격하고 위엄 있거나,[3]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어떤 돌하르방은 큰 귀를 가지고 있으며, 손의 위치는 앞으로 모으거나, 배 위에 얹거나, 등을 감싸는 등 다양하게 표현된다.[3]
돌하르방 중 일부는 나무 통나무를 걸칠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기도 한데, 이는 제주 전통의 대문인 정낭과 관련된 구조로 추정된다.[2][5]
제주의 세 조선 시대 행정 구역(제주성, 대정현성, 정의현성)의 돌하르방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지역별 차이도 존재한다. 제주성과 정의현성의 돌하르방은 '기석(基石)'이라 불리는 석재 받침돌 위에 서 있는 경우가 많지만, 대정현성의 돌하르방은 받침돌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2]조선 시대 지역 높이 (cm) 머리 길이 (cm) 석재 받침돌 높이 (cm) 제주성 181.6cm 89cm 42.2cm 대정현성 136.2cm 66.5cm 없음 정의현성 141.4cm 65.9cm 30.3cm
돌하르방의 코와 관련된 민간 신앙도 전해진다. 불임으로 고생하는 여성이 돌하르방의 코를 몰래 떼어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코 부분이 닳아 없어진 돌하르방이 많다고 한다.[3] 또한,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임신 능력이 향상된다는 속설도 있다.
4. 기능과 기원
요새 입구에 서로 마주보게 세워진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정착지의 경계를 나타냈다.[2] 돌하르방에는 종종 나무 통나무(정낭)를 걸칠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었는데, 이 정낭의 위치를 통해 행인들은 입구가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2][5]
또한 돌하르방은 다산(多産)과 관련된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돌하르방이 쓰고 있는 둥근 모자는 남근을 상징하여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이 있다. 아이를 갖기 원하는 여성이 몰래 돌하르방의 코를 떼어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코 부분이 닳아 없어진 돌하르방이 많다고 전해진다.[3]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임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믿음도 있다.
각 돌하르방은 서로 다른 특징과 크기를 가지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형태를 보인다. 재질은 화산석이며, 대부분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2] 일반적으로 눈이 크고 입은 다물고 있으며,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높이 솟아 있다.[2] 표정은 엄격하고 위엄 있거나[3] 혹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큰 귀를 가진 경우도 있으며, 손의 위치는 앞으로 모으거나 배 위에 얹거나 등을 감싸는 등 다양하다.[3]
조선 시대 제주의 세 지역(제주성, 정의현성, 대정현성)의 돌하르방은 양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제주성과 정의현성의 돌하르방은 '기석(基石)'이라 불리는 돌 받침대 위에 서 있는 경향이 있지만, 대정현성의 돌하르방은 받침대가 없다.[2] 크기에서도 지역별 차이가 나타난다.조선 시대 지역 높이 (cm) 머리 길이 (cm) 기석 높이 (cm) 제주성 181.6cm 89cm 42.2cm 대정현성 136.2cm 66.5cm 해당 없음 정의현성 141.4cm 65.9cm 30.3cm
돌하르방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며, 최소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3] 1914년 이전의 석상 수와 위치에 대한 기록은 드물다.[3] 첫 번째 설은 항해를 하던 사람들이 제주로 가져왔다는 것이고, 두 번째 설은 장승 또는 벅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다.[3]
세 번째 설은 2010년 재야사학자 우실하 교수가 제기한 요하문명 기원설이다. 그는 중국 요하 유역의 흥륭와 문화, 조보구 문화, 홍산 문화 등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인상들이 유라시아 석인상의 기원이며, 제주 돌하르방 역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8][9] 특히 중국 랴오닝성 젠핑현에서 발굴된 요나라(907~1125년) 시대 석인상이 제주 돌하르방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9][10] 이 주장은 몽골 지역 석인상과의 연관성을 통해 고대 한반도와 몽골이 같은 문화권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9] 다만, 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비교 사진 속 돌하르방은 18세기 제주목 양식으로, 16세기 이전으로 추정되는 정의현이나 대정현 돌하르방과는 형태적 차이가 크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돌하르방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과 추정이 있다. 1416년경 이미 3쌍의 돌하르방이 존재했다는 설도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돌하르방 중 가장 오래된 형태가 1754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다.[3] 1754년 당시 제주목사 김몽규가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떠도는 원혼을 달래기 위해 옹중석(翁仲石, 돌하르방의 옛 이름 중 하나)을 세우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이 현존하는 돌하르방의 직접적인 기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 1754년 기록에는 총 48기의 돌하르방이 있었으며, 이 중 24기가 제주목의 동, 서, 남쪽 성문에 각각 4쌍씩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은 제주 방언으로 "돌 할아버지"를 의미하며, 비교적 최근까지 주로 아이들이 사용하던 말이었다.[2][3] 1971년 제주도 문화재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2][3] 이전에는 지역이나 특징에 따라 우석목,[2][3] 무성목,[2][3] 옹중석,[2][3]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3] 이 중 '우석목'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현재 남아있는 돌하르방은 총 47기[1] 또는 48기로 알려져 있다. 제주시에 21기, 서귀포시 성읍리에 12기, 대정읍의 인성리, 안성리, 보성리에 걸쳐 12기가 분포한다.[2]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원래 제주시에서 옮겨온 2기가 소장되어 있다.[2] 대부분의 돌하르방은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기 어렵다.[2]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급격한 도시 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돌하르방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지거나 마모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3] 1960년대에 이르러 돌하르방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1968년에는 2기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3]
5. 역사
돌하르방의 정확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최소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3] 1914년 이전의 돌하르방 수와 위치에 대한 기록은 드물다.[3] 한 가지 설은 항해를 하던 사람들이 돌하르방을 제주도로 가져왔다는 것이고, 다른 설은 장승이나 벅수|벅수한국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선 시대인 1416년경에는 3쌍, 즉 6개의 돌하르방이 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754년에는 총 48개의 돌하르방이 있었으며, 이 중 24개는 제주목(현재의 제주시)에 있었고, 성의 서쪽, 남쪽, 동쪽 문에 각각 4쌍씩 배치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현재 형태의 가장 오래된 돌하르방이 1754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3] 실제로 1754년에 제주목에 돌하르방(당시 명칭 옹중석)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제작 동기는 숙종과 영조 시대에 흉년 이후 원한을 품은 영혼들이 떠돌며 산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제주목사가 이를 막기 위해 돌하르방 제작을 명령했다고 하나, 이것이 가장 최초의 제작 사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3]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동안 돌하르방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옮겨지는 등 방치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광복 이후 급격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도 이어졌다고 한다.[3] 1960년대에 들어서야 돌하르방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1968년에는 두 점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3]
최근 몇 년 동안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3] 최초의 돌하르방 기념품은 1963년 조각가 송종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주목 남문 앞에 있던 돌하르방을 25cm 높이로 축소하여 만들었다. 현재는 작은 모형부터 실물 크기까지 다양한 돌하르방 기념품이 관광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3]
돌하르방은 외교 선물로도 활용되었다. 1991년 한소 정상회담 당시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돌하르방이 선물로 주어졌다.[3] 또한 2002년에는 중국의 래주시에, 2003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산타로사 시청에 각각 기증되었다.[3]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은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제주도 각지에는 약 45개의 돌하르방이 남아 있으며, 그 형태와 표정은 조금씩 다르다. 공통적으로 큰 눈과 코,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있으며, 한국 전통 모자인 갓을 쓰고 양손을 배 부분에서 맞잡고 있는 모습이다. 평균 높이는 약 180cm이다.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상징이자 마을 입구 등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과 주술적인 기능을 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6. 민속문화재
현재 제주도에는 총 45기의 돌하르방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나,[2] 일부 자료에서는 47기[1] 또는 48기[2]로 보기도 한다. 제주시 지역에 21기,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12기, 대정읍의 인성리, 안성리, 보성리에 12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 외에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원래 제주시에서 옮겨온 2기가 소장되어 있다.[2] 대부분의 돌하르방이 정확히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위치에서 옮겨지고 마모되어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3]
돌하르방은 주로 화산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지만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공통적으로는 큰 눈과 코, 갓과 비슷한 둥근 모자를 쓰고 입을 다물고 있으며, 양손을 배 위에 모으고 있는 형태가 많다. 평균 신장은 약 180cm 정도이다. 돌하르방의 둥근 모자는 남성성을 상징하며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표정은 엄격하고 위엄 있거나[3] 때로는 익살스럽게 묘사되기도 한다. 양쪽 어깨의 높이가 다르거나 큰 귀를 가진 모습, 손을 배 앞이나 등 뒤로 감싼 형태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3][2]
돌하르방은 주로 성문 입구에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세워져 마을의 경계를 나타냈다. 돌하르방 사이에 나무 통나무(정낭)를 걸쳐두어 출입 가능 여부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하기도 했다.[2][5] 이는 권위와 안전을 상징하는 동시에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는 주술적인 역할도 했다.[2][3] 일부 주민들은 돌하르방 앞을 지날 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3] 또한, 아이를 갖기 원하는 여성이 돌하르방의 코를 몰래 떼어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민간 신앙이 있어, 이로 인해 코 부분이 닳아 없어진 돌하르방도 많다.[3] 코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임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믿는 속설도 있다.
조선 시대 제주의 세 지역(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제주성과 정의현성의 돌하르방은 '기석'(基石)이라 불리는 받침돌 위에 세워진 경우가 많지만, 대정현성의 돌하르방은 받침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조선 시대 지역 높이 (cm) 머리 길이 (cm) 받침돌 높이 (cm) 제주성 181.6cm 89cm 42.2cm 대정현성 136.2cm 66.5cm 해당 없음 정의현성 141.4cm 65.9cm 30.3cm
7. 현대의 돌하르방
이스터 섬의 대표 상징이 모아이라면, 제주도의 대표 상징은 돌하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3] 이에 따라 제주도는 돌하르방 관련 기념품과 돌하르방을 변형한 캐릭터 등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제주국제감귤박람회 홍보 캐릭터인 '꼬마 하루방 제돌이'를 들 수 있다. 돌하르방을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2등신 캐릭터로 변형시킨 '꼬마 하루방 제돌이'는 제주사회적경제 홍보대사, 어린이 제주어 교육책 제작, 국제감귤박람회 홍보대사 등으로 활약하며 돌하르방이 제주도의 핵심 상징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하고 있다.
최초의 돌하르방 기념품은 조각가 송종원에 의해 1963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종원은 제주목 남문 석상을 25cm 높이로 축소하여 만들었다.[3] 현재 관광 상품에는 돌하르방이 널리 활용되어, 작은 미니어처부터 실물 크기의 복제품까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3]
돌하르방은 국제 교류에서도 제주도를 상징하는 선물로 활용되었다. 1991년 한소 정상회담 당시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돌하르방이 선물로 주어졌으며,[3] 2002년에는 중국의 래주에, 2003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산타로사 시청에 각각 돌하르방 석상이 기증되었다.[3]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은 1971년 제주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이후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제주도 각지에는 약 45개의 돌하르방이 남아 있으며, 그 형태와 표정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공통적으로는 큰 눈과 코,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있으며, 한국 전통 모자인 갓을 쓰고 양손을 배 부분에서 맞잡고 있는 모습이다. 평균 높이는 약 180cm이다. 오늘날에도 돌하르방은 마을 입구 등에 세워져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하며 주술적,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참조
[2]
간행물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25
[3]
웹사이트
https://www.grandc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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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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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ルハルバ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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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川区
20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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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두산백과 - 돌하르방
http://100.naver.com[...]
[8]
뉴스
“몽골 석인상-돌하르방, 신석기 랴오허문명이 발원지일 가능성 높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3-26
[9]
뉴스
제주 돌하르방 '쌍둥이' 중국서 발견
http://www.jejusori.[...]
제주의소리
2014-10-29
[10]
뉴스
"제주 돌하르방-중국 요나라 석인상 매우 유사"…돌하르방 기원 논쟁 재점화
http://www.ihalla.co[...]
한라일보
201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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