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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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골주의는 샤를 드 골의 정치 사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저항하며 프랑스의 독립과 위상 강화를 목표로 시작되었다. 제4공화국 시기 의회 정부를 비판하며 강력한 대통령 중심의 정부를 옹호했고, 제5공화국 수립 후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주요 원칙으로는 강력한 국가, 국가 주도 경제 발전, 프랑스 예외주의, 자주 국방, 독자 외교가 있다. 드골주의는 프랑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정치 세력에서 그 유산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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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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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골주의(Gaullisme) |
로마자 표기 | Goljuuijeui |
유형 | 프랑스 정치 이념 |
창시자 | 샤를 드 골 |
핵심 가치 | 프랑스 민족주의, 국가 주권주의, 강력한 행정부 |
역사적 맥락 | |
시기 | 1940년대 ~ 1960년대 |
주요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제4공화국 붕괴 프랑스 제5공화국 설립 알제리 전쟁 프랑스의 핵무장 |
주요 특징 | |
국가 우선주의 | 국가 이익을 최우선으로 강조함 |
강력한 지도력 | 강력한 대통령 중심의 권력 구조 지향 |
독립적인 외교 | 강대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외교 정책 |
사회적 보수주의 | 전통적인 사회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 |
유럽 통합에 대한 신중론 | 유럽 통합에 대해 주권 침해를 우려하며 신중한 입장 |
국가 권위주의 | 강력한 국가 권위를 옹호하는 경향 |
좌우 통합 | 우파적 요소와 좌파적 요소를 결합한 특징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샤를 드 골 조르주 퐁피두 미셸 드브레 |
주요 정당 | 민주연합 공화국민주연합 대중운동연합 공화당 |
영향 | |
국내 정치 | 프랑스 제5공화국 정치 체제 형성에 큰 영향 |
외교 정책 |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기여 |
유럽 통합 | 유럽 통합 과정에 영향 |
현재 | 현대 프랑스 정치에 여전히 영향력 행사 |
현대적 계승 | 공화주의와 민족주의적 요소로 남아있음 |
기타 | |
관련 문서 | 샤를 드 골 프랑스 제5공화국 프랑스 정치 민족주의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유럽회의주의 |
2. 역사
베르슈타인은 드골주의가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 1940년~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의 휴전 협정과 비시 정권의 필리프 페탱에 반대하며, 샤를 드 골 장군과 프랑스 자유군에 합류하여 연합국 편에서 프랑스를 전쟁에 복귀시키려 했던 프랑스인들과 동일시된다.[3]
- 1946년~1958년: 제4공화국의 불안정한 의회 정부에 반대하며, "탁월한 헌법 권한을 가진 공화국 대통령"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3]
- 1958년~1969년: 샤를 드 골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직하며 자신의 정치를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다.[3]
1969년 드골의 사임 이후, 그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드골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3]
2. 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40-1945)
이 시기 드골주의는 나치 독일과의 휴전 협정과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권에 대한 저항, 그리고 프랑스 자유군에 합류하여 연합국 편에서 프랑스를 전쟁에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프랑스 자유군(1940년~1944년)이 사용했던 십자가 훈장은 이후 많은 골리스트 정당과 운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샤를 드 골 장군은 1940년 6월 18일 호소문의 저자이자 자유 프랑스군의 창설자이자 지도자였으며, 나치 점령과 비시 정부에 대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상징이었다.
2. 2. 제4공화국 시기 (1946-1958)
드골주의는 제4공화국의 불안정한 의회 정부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드골주의자들은 제4공화국의 의회 정치에 도전하며, "탁월한 헌법 권한을 가진 공화국 대통령"으로 대체할 것을 옹호했다.[3]1945년 11월, 프랑스 유권자들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수용하고, 새로운 국민의회(French National Assembly)를 선출했다. 프랑스 공산당, 사회당, 인민공화운동이 의회의 주요 세력이었다. 의회는 드골을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재선출했지만, 드골은 "정당 정치"의 부활에 반대하며 1946년 1월 사임했다.
1946년 5월, 첫 번째 헌법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이후 새로운 의회가 선출되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드골은 바이에 선언에서 자신의 제도적 구상을 밝혔으나, 보나파르트주의 정부를 재건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치 세력의 지지 없이 그는 헌법 법안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레네 카피탕이 설립한 제4공화국을 위한 골리스트 연합은 의회 제도를 부활시킨 법안의 승인을 막지 못했다.
1947년, 드골은 프랑스 국민 집회(RPF)를 통해 반공주의 야당을 결집했다. 그는 제4공화국이 "의회의 꼼수"에 좌우되어 국가를 무력화시킨다고 비판했다. RPF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며, 프랑스 공산당을 소련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했다. 또한, 제3세력 내각이 식민지를 "포기"했다고 비난하고, 유럽 경제 공동체 참여를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골리스트들은 "계급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본과 노동의 연합을 제안했다.
RPF는 창당 6개월 만에 회원 수가 100만 명에 달했고, 파리, 마르세유, 보르도 등 여러 도시의 행정부를 장악했다. 1951년 총선 이후 RPF는 국민의회에서 최대 의원단을 구성했지만, 체계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1952년, 일부 RPF 의원들이 드골의 지시에 반하여 앙투안 피네 내각에 찬성표를 던지고 다수파에 합류하면서 RPF는 분열되었다. 1953년 지방 선거에서 지지율이 크게 감소했고, 드골은 골리스트 의원들에게 "RPF"라는 이름을 버릴 것을 요청했다. 이후 일부 골리스트들은 조제프 라니엘 정부에 합류하거나, 자크 샤방델마와 같이 중도좌파 공화당 전선에 합류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제4공화국은 알제리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58년 5월 13일 위기는 군사 쿠데타의 위협을 야기했고, 자크 수스텔과 같은 드골의 특사들이 이 소동에 참여했다. 국민의회는 드골을 소환하여 내각을 이끌도록 했고, 1958년 9월 28일 국민투표를 통해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직의 권한을 강화했다.
2. 3. 제5공화국 시기 (1958-1969)
샤를 드골이 집권하면서 드골주의는 제5공화국의 핵심 이념이 되었다. 1958년 11월 총선에서 드골을 지지하는 신공화당(UNR)이 원내 다수당이 되었고, 드골은 1958년 12월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셸 드브레가 총리로 임명되었다.[3]그러나 알제리 정책을 둘러싸고 당내 분열이 발생했다. 프랑스령 알제리를 지지하는 파벌의 지도자였던 자크 수스텔은 1960년 내각을 떠났고, 이후 UNR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비밀군조직을 이끌며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이 위기 이후, UNR은 드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장화 정당"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한편, 중도좌파 정당들은 1959년에 야당으로 돌아갔고, 1962년에는 드골의 유럽 회의론과 프랑스 정치의 "대통령 중심화"를 비판한 중도우파 정당들이 뒤따랐다. 드골은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프랑스 유권자들은 이를 승인했다. 드골은 조르주 퐁피두를 총리로 임명했지만, 불신임 투표로 인해 국민의회를 해산해야 했다. 1962년 총선에서 UNR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무소속 공화당원과 연합하여 승리했고, 퐁피두는 내각을 이끌게 되었다.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UNR/UDT는 드골을 지지했지만, 그는 2차 투표에서야 승리했다. 야당이 재건되면서 대통령 다수당 내 유일한 비 드골리스트 정당인 무소속 공화당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모리스 슈만과 같은 일부 기독교 민주당원들이 드골주의 정당에 합류하면서, 당은 5공화국을 위한 민주주의자 연합(UD-Ve)으로 개명되었다. 퐁피두 총리는 1967년 총선에서 당을 이끌었고, 현직 의회 다수당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1년 후, 드골주의 정권은 1968년 5월 학생 시위에 직면했다. 당은 공화국 수호 연합(UDR)으로 이름을 바꾸고 1968년 6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드골과 퐁피두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다. 퐁피두는 드골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국가를 떠난 것을 비난했다. 드골은 자본과 노동의 연합을 통해 사회적 위기를 예방하고자 했지만, 퐁피두는 이를 폐기하길 원했다.
퐁피두는 차기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총리직을 사임했고, 드골이 사임할 경우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1969년 국민투표 실패 후 드골이 사임하면서, 퐁피두는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2. 4. 드골 사후 (1969-)
드골 사후에도 드골주의는 프랑스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러 정당들이 드골주의를 표방하며 등장했고, 드골주의의 다양한 측면을 계승, 발전시켰다.[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프랑스 자유군(1940년~1944년)이 사용했던 십자가 훈장은 프랑스 국민 집회(1947년~1955년), 신공화국을 위한 연합(1958년~1967년), 공화국을 위한 집회(1976년~2002년)를 포함한 많은 드골주의 정당과 운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3]3. 주요 원칙
드골주의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며, 사회적, 경제적 요소도 포함하는 이념이다.[7][8] 학자들은 샤를 드골의 정책과 행동에 나타난 핵심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전통 골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는 "사회 골리즘"이나 "신 골리즘"과 같은 다른 드골주의 분파와 구별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에 맞선 드골의 투쟁에서 영감을 받은 "저항 골리즘"은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부터 프랑스의 정치적, 군사적 독립을 강조한다.[9][5] 1970년대 후반 자크 시라크가 처음 주장한 "1세대 시라크 골리즘"은 포퓰리즘적 입장과 유럽 통합 및 자유 시장에 대한 반대를 고수하는 정치인들을 지칭한다. 샤를 파스카와 필리프 세갱은 1990년대 시라크의 신고리즘 전환에 반대했다.[10]
3. 1. 강력한 국가
드골주의는 "굴하지 않는 실체"이자 "역사를 통해 신비로운 대화가 이어지는 '인격체'"로서의 프랑스라는 "특정한 이상"을 추구한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드골주의는 프랑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프랑스의 목소리가 존중받도록 하며, 생존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강력한 국가 체제가 필수적이라고 본다.드골은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프랑스의 유산을 강조하며 분열적인 "당파적 다툼"을 넘어선 국민 통합을 촉구했다. 그는 루이 14세, 나폴레옹, 조르주 클레망소와 같이 강력한 국가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추구했던 인물들을 존경했다.[1]
드골은 프랑스 공화주의 전통과 대조적으로 강력한 행정부, 특히 대통령 중심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직접 선거와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라디오 연설, 기자 회견, 지방 순방 등을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하며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드골은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했지만, 그의 통치 방식에서 독재적 권력으로의 경향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나파르티즘의 부활이나 공화정 군주제를 걱정했다.[1] 그러나 프랑스는 민주주의 국가로 남았으며, 1969년 4월 헌법 국민투표 부결 후 드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가 민주주의 원칙을 단지 수사적으로만 이용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 1. 1. 국가 주도 경제 발전
드골주의는 경제 발전에 있어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자유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계획과 지도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버슈타인에 따르면 드골주의는 "국가 이익의 수호자로서 국가가 경제 성장에 자극을 주고 이를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자유주의적 견해는 계획보다 더 효율적임을 약속하는 경우에만 받아들여진다.
일부에서는 드골주의를 계획경제와 정치적 의지주의의 혼합으로 보기도 하지만, 모든 드골주의자들이 이를 필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3. 2. 프랑스 예외주의
드골주의는 프랑스가 세계 질서에서 특별한 역할과 사명을 가진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는 프랑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며,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외교 정책에서 골리스트들은 현실주의와 프랑스 예외주의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며, 드골은 세계 질서에 프랑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4] 골리스트들은 탈식민화를 지지했는데, 이는 프랑스를 식민 제국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켰다.[4] 이는 드골이 알제리 위기(1954~1962)를 해결하는 데 반영되었는데, 이는 드골의 현실 정치 또는 "정치적 편의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4] 탈식민화가 불가피하며, 지속되는 위기와 연장된 알제리 전쟁이 프랑스 경제에 피해를 주고 국가적 분열을 영속화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드골은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허용하고 군사 개입을 중단하는 것"이 프랑스의 통합과 위대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4]
골리스트들은 또한 미국의 해외 경제적 영향력과 미국 달러의 국제 통화 시스템에서의 역할을 비판했다. 드골 시대에 프랑스는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다른 서방 국가들보다 빨랐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1967)를 부과했고, 제3세계에서의 미국 제국주의를 비난했다.[4]
드골과 골리스트들은 유럽을 초국가적 단체로 지지하지 않았지만, "초강대국으로부터 자율적인 공동 정책"에 상호 참여하는 주권 국가들의 "연합" 형태로 유럽 통합을 선호했으며, 프랑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4] 그러나 드골의 이러한 연합을 발전시키려는 희망은 "다른 유럽 열강이 미국과 긴밀히 동맹을 유지하려는 열망에 직면하여" 크게 실패했다.[4]
3. 2. 1. 자주 국방
드골주의는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국방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드골 정권하의 프랑스는 독자적인 핵억지력을 구축하고, 미국에 대한 과도한 종속을 피하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군사 기구에서 탈퇴하였다.[4]1966년 드골은 프랑스군을 NATO의 통합 군사 지휘권에서 철수시켰다.(단, NATO 자체에서는 탈퇴하지 않았다. 후에 1992년에 군사 부문에 일부 복귀, 2009년에는 완전 복귀).[4] 프랑스는 NATO 가맹국 군대에 대해, 그 군대가 프랑스의 지휘하에 있지 않다면 프랑스 땅을 밟지 못하게 결정했다. 그 결과, NATO군 총사령부는 파리에서 벨기에의 브뤼셀로, NATO 방위 대학교 캠퍼스는 파리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로 각각 이전해야 했다.[4]
이 결정은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 미국의 주도권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으로부터도 큰 반발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당시 이미 프랑스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동구권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군사 정책과 외교 정책이 미국의 정책과 일치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4]
3. 2. 2. 독자 외교
드 골 정부의 대외 정책은 민족 자결에 기반한 '비동맹 외교정책'이었다. 프랑스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나 유럽 경제 공동체(ECC)와 같은 국제 연합체에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드골은 프랑스가 생존을 위해 외세에 기대는 것을 거부하고, 냉전 체제 속에서도 미합중국이나 소비에트 연방 중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4]드골 시대의 프랑스는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양극화된 세계 정치 질서를 피하고, 미국에 대한 의존을 피하려고 했다. 특히 드골은 1966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군사 작전에서 프랑스를 철수시켰고, 프랑스가 NATO 회원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가 아닌 NATO군의 프랑스 철수를 지시했다.
영국과 미합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드골주의 비판세력들은 프랑스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었다.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드 골의 나토 통합 군사 지휘부 탈퇴 결정과 나토 본부를 퐁텐블로에서 철수시킨 일이다. 드 골은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 외국군이 프랑스에 주둔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는 냉전의 기류 속에서 한 곳의 주둔지가 아쉬웠던 미합중국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4] 미국은 당시 이미 프랑스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동구권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의 군사 정책과 외교 정책이 미국의 정책과 일치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드골의 국제 정치에서 주요 주장은 '''국가 주권'''이며, 그 사상의 실천으로 NATO와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 같은 국제 기구에 대해 어느 정도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의 기본적인 신념은 “프랑스의 존속을 위해 프랑스는 외국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프랑스는 어떠한 외국의 압력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4]
4. 드골주의 정당
드골주의를 표방한 주요 정당들은 다음과 같다.
정당 | 기간 | 비고 |
---|---|---|
프랑스 인민 결집 (RPF) | 1947년–1955년 | |
사회 공화주의자 국가 중심 (RS) | 1954년–1958년 | |
신공화당 (UNR) | 1958년–1962년 | |
노동 민주 연합 (UDT) | 1958년–1962년 | |
신공화당 – 노동 민주 연합 (UNR – UDT) | 1962년–1967년 | |
공화당을 위한 민주주의자 연합 (UDR) | 1967년–1976년 | |
민주주의 운동 (MDD) | 1974년–1980년대 | |
공화당을 위한 결집 (RPR) | 1976년–2002년 | |
시민 운동 (MDC) | 1993년–2003년 | |
프랑스를 위한 운동 (MPF) | 1994년–2018년 | |
프랑스를 위한 집회 (RPF) | 1999년–2011년 | |
인민 운동을 위한 연합 (UMP) | 2002년–2015년 |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선출 (2007년) |
시민 및 공화주의 운동 (MRC) | 2003년–현재 | |
일어나라 공화국 (DLR) | 2008년–2014년 | |
프랑스 일어서기 (DLF) | 2014년–현재 | |
공화당 (LR) | 2015년–현재 | 2016년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는 예비선거에서 패배. |
애국자들 (LP) | 2017년–현재 | |
시민 운동 (MDC) | 2018년–현재 |
자크 시라크가 창당한 중도보수 계열의 공화국연합(RPR)은 드골주의 또는 신드골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시라크는 국가 주도 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동시에 프랑스 경제에 도입하려 했고, 이후 친유럽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드골주의의 기본과는 거리가 있는 정책들이었고, 샤를 파스카 등 일부 우파 드골주의자들은 시라크와 RPR을 '진짜 드골주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3]
4. 1. 드골 시대
1940년 6월 18일 호소문의 저자이자 자유 프랑스군의 창설자이자 지도자인 샤를 드골 장군은 나치 점령과 비시 프랑스에 대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런던과 알제를 거점으로 하던 그는 공산당 등 여러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인 프랑스 내무군과 타협해야 했다. 1944년 프랑스 해방 후, 드골은 공산당, 사회당, 기독교 민주당으로 구성된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드골은 비공산 레지스탕스를 통합하는 거대 정당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많은 정당들이 다시 등장했다. 기독교 민주당인 인민공화운동(MRP)이 드골과 가장 가까운 정당으로 보였다.[3]
임시 정부는 국민저항위원회의 강령에서 영감을 받은 정책들을 시행했다. 은행과 일부 산업체(예: 르노)의 국유화, 복지국가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정치 제도와 헌법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드골에게 프랑스 제3공화국을 특징지었던 "정당 정치"는 1940년 군사적 참패의 원인이었다. 그는 국가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강력한 행정부, 즉 국가 통합의 화신인 한 사람이 이끄는 행정부를 주장했다. 그의 생각에 프랑스는 단결할 때 강하고, 의회에 대표되는 정당들은 특정 이익을 대변하여 국가 분열을 표출한다.
1945년 11월, 프랑스 유권자 대다수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수용했다. 동시에 새로운 국민의회를 선출했다. 프랑스 공산당, 사회당인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 기독교 민주당인 MRP가 이 의회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 의회는 드골을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재선출했지만, 드골은 "정당 정치" 부활에 반대하여 1946년 1월 사임했다.
1946년 5월, 첫 번째 헌법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한 달 후,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해 새로운 의회가 선출되었다. 드골은 바이에 선언에서 그의 제도적 생각을 개괄했지만, 보나파르트주의 정부를 재건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치 세력의 지지 없이 그는 준비 중인 헌법 법안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레네 카피탕은 제4공화국을 위한 골리스트 연합을 설립했지만, 선출된 국민의회가 준비한 의회 제도를 부활시킨 법안 승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47년, 드골은 프랑스 국민 집회(RPF)에서 반공주의 야당을 결집했다. 그는 제4공화국이 "의회의 꼼수"에 좌우되고 국가 무력화를 조직했다고 비난했다. 강력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며, 프랑스 공산당을 소련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했다. 나아가 제3세력 내각이 식민지를 "포기했다"고 비난했고, 유럽 경제 공동체 참여를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또한, 골리스트들은 국가 통합을 저해하는 "계급 투쟁" 종식을 위해 자본과 노동의 연합을 제안했다.
창당 6개월 만에 RPF 회원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파리, 마르세유, 보르도를 포함한 많은 도시의 행정부를 장악했다. 1951년 총선 이후, 투표 제도 변경에도 불구하고 RPF는 국민의회에서 최대 의원단을 구성했지만, 체계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1952년, 일부 RPF 의원들이 드골의 지시에 반하여 앙투안 피네 내각에 찬성표를 던지고 다수파에 합류했다. 그들은 RPF 의원단을 탈퇴했다. 점점 더 분열된 RPF는 1953년 지방 선거에서 지지율이 크게 감소했다. 1953년 5월 6일, 드골은 골리스트 의원들에게 "RPF"라는 이름을 버릴 것을 요청했다. 한 달 후, 5명의 골리스트 의원이 조제프 라니엘 정부에 합류했다. 그들은 우익 다수파에 참여했고, 자크 샤방델마와 같은 일부 골리스트들은 중도좌파 공화당 전선에 국가 사회 공화당 중앙당이라는 명칭으로 합류했다.
1950년대 후반, 제4공화국은 알제리 전쟁에서 좌절했다. 1958년 5월 13일 위기는 혼란을 야기했고, 군사 쿠데타 위협이 제기되었다. 자크 수스텔과 같은 드골이 파견한 특사들이 이러한 소동에 참여했다. 프랑스 국민의회는 내각을 이끌 드골을 소환하는 데 동의했다. 9월 28일,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고 프랑스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 의회 제도는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대통령직 권한은 강화되었다.
1945~1946년처럼 적대적인 국민의회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드골은 추종자들이 신공화당(UNR)을 조직하도록 했다. 1958년 11월 총선 이후, 신공화당은 정계에서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드골을 지지하기 위해 중도좌파 및 중도우파 정당들과 연합했으며, 드골은 1958년 12월 지방 및 국가 선출 관리들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셸 드브레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알제리 정책 변화는 당을 분열시켰다. 국회의장 자크 샤방델마는 알제리가 외교 및 군사 문제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보호 영역"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당 내 친프랑스령 알제리파 지도자인 수스텔은 1960년 내각을 떠났고, 이후 UNR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비밀군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이 위기 이후, UNR은 드골의 무조건적인 지지자들의 정당으로 여겨졌고, "장화 정당"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드브레는 정부의 벨트 역할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드골이 당수가 되기를 거부함에 따라 드브레가 은밀하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한편, 중도좌파 정당들은 1959년 야당으로 돌아왔고, 1962년에는 드골의 유럽 회의론적 선언과 프랑스 정치의 "대통령 중심화"를 비판한 중도우파 정당들이 뒤따랐다. 드골은 (UNR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 도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승인했다. 드골은 드브레를 조르주 퐁피두로 총리직을 교체하려 했지만 불신임 투표로 거부되었다. 드골은 국민의회를 해산시켰다. 노동민주연합의 좌파 드골리스트와 연합하고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무소속 공화당원과 연합하여 UNR은 196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퐁피두는 내각을 이끌게 되었다.
UNR/UDT는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골의 후보 지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2차 투표 후에야 승리했고, 이를 반대 여론으로 간주했다. 야당이 재건되는 동안 대통령 다수당 내 유일한 비 드골리스트 정당인 무소속 공화당과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인민공화운동이 비판을 강화하는 동안, 모리스 슈만과 같은 일부 기독교 민주당원들이 5공화국을 위한 민주주의자 연합으로 개명된 드골리스트 당에 합류했다. 총리 퐁피두는 1967년 선거 운동 동안 당을 이끌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세대의 드골리스트 정치인 등장을 장려했다. 현직 의회 다수당은 근소한 승리를 거두었다.
1년 후, 드골리스트 정권은 1968년 5월 사태의 사회적 및 학생 시위에 직면했다. 새로 이름을 바꾼 공화국 수호 연합이 1968년 6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드골과 퐁피두 사이에 불일치가 생겼다. 퐁피두는 드골이 위기 중에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국가를 떠난 것을 비난했다. 드골에게는 자본과 노동의 연합이라는 그의 목표가 이러한 유형의 사회적 위기를 예방할 수 있었지만, 퐁피두는 그것을 폐기하기를 원했다. 드골의 측근들에게 퐁피두는 진정한 드골리스트라기보다는 고전적인 보수주의자였다.
퐁피두는 미래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내각 지도자직을 사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드골이 사임할 경우 자신의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그 해 상원 및 지역 개혁에 관한 국민투표 실패 후인 1969년에 그러한 일이 발생했고, 그는 일부 "드골리즘의 거장들"의 꺼림칙함에도 불구하고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의 총리 자크 샤방델마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는 UDR의 보수파, 그리고 퐁피두 자신으로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그가 좌파 야당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난했다. 퐁피두의 측근에서는 그가 자신을 위해 대통령 직무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위기가 발생하는 동안 당은 공화당을 위한 민주주의자 연합이 되었다. 퐁피두는 국민의회에서 샤방델마에게 신임 투표를 거부했고, 그가 어쨌든 신임 투표를 실시했을 때 퐁피두는 그를 사임시키고 피에르 메스메르를 임명했다. 무소속 공화당과 중도, 민주주의 및 진보와 연합한 UDR은 1973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좌파 연합"과 그들의 ''공동 프로그램''을 막는 데 성공했다.
4. 2. 드골 사후
자크 시라크에 의해 창당된 중도보수 계열의 공화국연합(RPR)은 드골주의 또는 신드골주의를 다시 주창하였다. 그러나 시라크는 '국가 주도 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동시에 프랑스 경제에 도입하려 하였고, 이후에는 유로회의주의를 반영한 '코친 구상'을 뒤엎으며 친유럽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는 드골주의의 기본과는 거리가 있는 정책들이었고, 샤를 파스카 등은 시라크와 RPR을 '진짜 드골주의자'라 인정하지 않았다.[3]1976년 12월, 공화국민주동맹(UDR)은 공화국을 위한 결집(RPR)로 대체되었다. RPR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 레이몽 바르 총리의 집행부를 비판했다. 1978년 12월, 코친의 호소는 "외국 정당"에 의한 프랑스의 "굴욕"을 폭로하며, 국가 이익과 국가의 독립을 희생하여 연방 유럽을 건설했다고 비난했다. RPR은 골리즘의 사회적 교리를 대통령의 시장 자유주의와 대조시켰다.
RPR은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시라크를 지지했지만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집권 이후, RPR은 점차 골리즘 교리를 버리고 프랑스 민주주의를 위한 연합(UDF)의 유럽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했다. 1992년 프랑스 마스트리흐트 조약 국민투표를 통해 분열이 다시 나타났다. 시라크는 "찬성"에 투표했지만 필립 세갱과 파스카는 "반대"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시라크는 "사회적 균열"을 줄이기 위해 케인지언즘을 옹호하며 승리했다. 1995년 11월, 알랭 쥐페 총리는 복지 국가 개혁 계획을 발표해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했고 1997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패배했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전에, 시라크를 지지하는 RPR과 비RPR 지지자들은 "대통령 다수당 연합(UMP)"을 결성했다. 시라크는 재선되었고 UMP는 2002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승리했다. 몇 달 후 인민운동을 위한 연합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UMP는 영구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지도 아래 골리스트 당은 더욱 보수적인 정책을 채택하며 우파로 이동했다. 사르코지는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당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5년에 골리스트 당의 이름을 공화당(LR)으로 변경했다.
다음은 골리스트 정당 및 그 후신들의 목록이다.
정당 | 기간 | 비고 |
---|---|---|
프랑스 인민 결집 (RPF) | 1947년–1955년 | |
사회 공화주의자 국가 중심 (RS) | 1954년–1958년 | |
신공화당 (UNR) | 1958년–1962년 | |
노동 민주 연합 (UDT) | 1958년–1962년 | |
신공화당 – 노동 민주 연합 (UNR – UDT) | 1962년–1967년 | |
공화당을 위한 민주주의자 연합 (UDR) | 1967년–1976년 | |
민주주의 운동 (MDD) | 1974년–1980년대 | |
공화당을 위한 결집 (RPR) | 1976년–2002년 | |
시민 운동 (MDC) | 1993년–2003년 | |
프랑스를 위한 운동 (MPF) | 1994년–2018년 | |
프랑스를 위한 집회 (RPF) | 1999년–2011년 | |
인민 운동을 위한 연합 (UMP) | 2002년–2015년 |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선출 (2007년) |
시민 및 공화주의 운동 (MRC) | 2003년–현재 | |
일어나라 공화국 (DLR) | 2008년–2014년 | |
프랑스 일어서기 (DLF) | 2014년–현재 | |
공화당 (LR) | 2015년–현재 | |
애국자들 (LP) | 2017년–현재 | |
시민 운동 (MDC) | 2018년–현재 |
5. 평가 및 유산
드골의 정치적 유산은 프랑스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점차 정치 스펙트럼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5] 그의 후임 대통령인 조르주 퐁피두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의 임기 동안 드골주의를 강화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드골주의 사상은 프랑스 정치적 합의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더 이상 정치적 논쟁의 초점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대통령직은 사회당 출신의 프랑수아 미테랑(1981~1995)을 포함하여 드골의 모든 후임자들에게 유지되었다.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 능력과 드골주의의 영향을 받은 외교 정책은 비록 "보다 유연한 용어로" 표현되지만 "프랑스 국제 관계의 지침이 되고 있다."[5] 2017년 대선 당시 드골의 유산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장-뤼크 멜랑숑, 브누아 아몽,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수아 피용, 마린 르펜을 포함한 후보들이 주장했다.[5]
버슈타인에 따르면, "드골주의가 전후 프랑스를 형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동시에 드골주의 사상의 본질이 이제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드골의 정당한 계승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예: RPR의 자크 시라크)은 지금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그들은 다른 정치적 관점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어렵다."[5] 그러나 모든 드골주의 사상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통령과 총리가 다른 정당 출신인 '공존'(1986~1988, 1993~1995, 1997~2002)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이는 드골의 "제국적 대통령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지휘주의''(경제에 대한 국가의 관리)라는 개념에 기반한 드골의 경제 정책도 약화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주요 프랑스 은행과 보험, 통신, 철강, 석유, 제약 회사가 국유화되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 이후로 많은 국유 자산을 민영화했다.[6]
참조
[1]
서적
Nations and Nationalism: A Global Historical Overview
ABC-CLIO, Inc.
2008
[2]
서적
Decolonization in Britain and France: The Domestic Consequences of International Relations
https://muse.jhu.edu[...]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3]
학술지
Contestataires et compagnons : les formes de l'engagement gaulliste
1998
[4]
웹사이트
Nuclear Weapons - Israel
https://fas.org/nuke[...]
[5]
서적
The Routledge Handbook of French Politics and Culture
Routledge
2019
[6]
뉴스
French wrestle with De Gaulle's legacy
http://news.bbc.co.u[...]
BBC News
2002-04-15
[7]
학술지
L'Univers Idéologique des Cadres RPR: Entre l'héritage gaulliste et la dérive droitière
1987
[8]
학술지
Un gaullisme intransmissible
2006
[9]
서적
The Government and Politics of France
Routledge
2006
[10]
학술지
Le RPR et le gaullisme. Les infortunes d'une fidélité
1994
[11]
웹사이트
Le gaullisme social : le rendez-vous manqué de la droite française ?
http://theconversati[...]
2020-05-12
[12]
서적
Histoire du gaullisme
Perrin
2001
[13]
학술지
A Likely Story: Chirac, France-NATO, European Security, and American Hegemony
1996
[14]
학술지
General de Gaulle and His Enemies: Anti-Gaullism in France Since 1940
1999
[15]
뉴스
Liberté, Egalité, Absurdité
https://www.nytimes.[...]
200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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