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세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등세창은 청나라 말기의 해군 장교로, 푸젠 함대와 북양 함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해군 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의 대만 침공 당시 지룽과 펑후 제도의 방어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북양 함대에서 순양함 양위와 치위안의 함장을 맡았으며, 이홍장의 신임을 받았다. 청일 전쟁 중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함대와 교전 중 치위안이 침몰하자 배와 운명을 함께하며 전사했다. 사후에는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함정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일 전쟁 참전 군인 사망자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은 일본 황족이자 군인으로, 보신 전쟁에서 막부 지지 세력의 맹주로 활동 후 군인이 되었고, 청일 전쟁 중 대만 침공 작전에서 말라리아로 순직하여 신사에 제신으로 모셔졌다. - 판위구 출신 - 천야오방
중국의 정치인 천야오방은 화중농업대학 졸업 후 농업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중화인민공화국 농업부 부부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임업부 부장, 농업부 부장 등을 역임하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및 CPPCC 경제위원회 부주임으로 활동했다. - 판위구 출신 - 호인
호인은 중국과 마카오에서 활동하며 통화 및 금 거래로 부를 축적하고 마카오중화총상회 회장을 역임하며 외교적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다 사망한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다. - 청나라의 제독 - 혁흔
혁흔은 청나라 황족이자 정치가로, 도광제의 아들이자 함풍제의 이복 동생이며,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서 활약하고 양무운동을 주도했으나 서태후와의 갈등으로 실각과 복귀를 반복하다가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외교와 군사를 총괄하고 1898년에 사망했다. - 청나라의 제독 - 정여창 (청나라)
정여창은 태평천국의 난에 가담 후 청군에 투항하여 공을 세우고 이홍장 휘하에서 북양 함대 창설에 기여한 청나라 해군 제독으로, 청일 전쟁 황해 해전 패배 후 웨이하이웨이에서 자결했으며 사후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명예가 회복되었다.
등세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등세창 (鄧世昌) |
로마자 표기 | Deng Shichang |
자 | 정경 (正卿) |
시호 | 장절 (壯節) |
출생 | 1849년 10월 4일 |
출생지 | 청나라 광둥성 광저우부 판위현 (현재의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 하이주구) |
사망 | 1894년 9월 17일 |
사망 장소 | 황해 조선만 |
소속 국가 | 청나라 |
군 계급 | 관대 (상응 대령) |
복무 | 1874년–1894년 |
소속 부대 | 청나라 해군 북양 함대 (1880년–1894년) 복건 함대 (1874년–1880년) |
지휘 | 치위안 |
주요 전투 | 압록강 해전 (1894년) |
훈장 | 사후 태자소보 직위 추서 |
2. 초기 생애
덩스창은 현재의 광저우시 하이주 구에 속하는 광둥성 판위 롱다오웨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융창"(永昌)이었으나 나중에 "스창"(世昌)으로 개명했다. 그는 차 무역 사업을 하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그를 상하이의 선교 학교에 보내 서양식 교육을 받게 했다.
1867년, 등세창은 마웨이 푸젠성에 있는 해군 학당(船政學堂)에 제1기 학생으로 입학했다. 5년간의 이론 학습과 순양함 ''젠웨이''(建威)호에서의 2년간의 실습을 포함한 7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친 후, 1874년 해군 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청나라 정부의 해군 대신인 선바오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등세창의 졸업 후, 선바오젠은 등세창을 푸젠 함대에 배속시켰고, 정찰 수송선 ''천항''(琛航)호의 방대(幫帶; 지휘관에 해당)로 임명했다. 이듬해 등세창은 건보트 ''하이동윈''(海東雲)호의 관대(管帶; 대령에 해당)로 승진했다. 1874년 5월, 일본의 대만 침공 당시, 등세창은 청군을 이끌고 지룽과 펑후 제도의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또한 천총(千總; 티두보다 7계급 아래)으로 임명되었다.
3. 푸젠 함대 복무
3. 1. 일본의 대만 침공(1874)
1867년, 등세창은 마웨이 푸젠성에 있는 해군 학당(船政學堂)에 제1기 학생으로 입학했다. 5년간의 이론 학습과 순양함 ''젠웨이''(建威)호에서의 2년간의 실습을 포함한 7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친 후, 1874년 해군 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청나라 정부의 해군 대신인 선바오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등세창의 졸업 후, 선바오젠은 등세창을 푸젠 함대에 배속시켰고, 정찰 수송선 ''천항''(琛航)호의 방대(幫帶; 지휘관에 해당)로 임명했다. 이듬해 등세창은 건보트 ''하이동윈''(海東雲)호의 관대(管帶; 대령에 해당)로 승진했다. 1874년 5월, 일본의 대만 침공 당시, 등세창은 청군을 이끌고 지룽과 펑후 제도의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또한 천총(千總; 티두보다 7계급 아래)으로 임명되었다.
4. 북양 함대 복무
1880년, 등세창은 북양함대로 전출되어 순양함 ''양위''를 인수하고 중국으로 호송하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그는 ''양위''의 ''관대''(함장)로 임명되었다. 1887년, 그는 다시 영국으로 파견되어 방호순양함 치위안을 인수했고, 이후 그의 ''관대''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북양함대 중앙 행정부에서 ''부장''(부제독, ''제독''보다 두 계급 아래)으로 승진했다. 당시 등세창은 중국 밖에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은 유일한 북양함대의 ''관대''였다. 1891년, 직례총독 이홍장이 북양함대를 시찰했을 때, 그는 등세창이 선원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아 등세창에게 ''바투루''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
4. 1. 이홍장의 신임
1880년, 등세창은 북양함대로 전출되어 순양함 ''양위''를 인수하고 중국으로 호송하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그는 ''양위''의 ''관대''(함장)로 임명되었다. 1887년, 그는 다시 영국으로 파견되어 방호순양함 치위안을 인수했고, 이후 그의 ''관대''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북양함대 중앙 행정부에서 ''부장''(부제독, ''제독''보다 두 계급 아래)으로 승진했다. 당시 등세창은 중국 밖에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은 유일한 북양함대의 ''관대''였다. 1891년, 직례총독 이홍장이 북양함대를 시찰했을 때, 그는 등세창이 선원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아 등세창에게 ''바투루''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4. 2. 황해 해전 (압록강 해전)
압록강 해전은 1894년 9월 17일에 발발한 청일 전쟁의 해전으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 간에 벌어졌다. 전투 초기에 등세창은 일본 지휘함인 ''사이쿄마루''를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쓰보이 고조 제독이 이끄는 일본 비행 전대(요시노, 다카치호, 아키쓰시마, 나니와)의 반격을 받았다. 일본 순양함들은 ''치위안''을 포위하여 더 빠른 속도로 사격했고, 훈련이 부족한 중국 포수들이 구식 대포로 발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명중탄을 기록했다. 등세창은 ''치위안''에 ''나니와''에 접근하여 충돌을 시도하라고 명령했지만, 15시 50분에 ''나니와'' 또는 ''다카치호''에서 발사된 포탄에 의해 선수에 명중되어 대규모 폭발을 일으켰고, 그 후 ''치위안''은 빠르게 침몰했다. 약 245명의 장교와 승무원이 순양함과 함께 침몰했다. 등세창은 구조를 거부하고 결국 애완견과 함께 바다에서 익사했다.5. 사후 추서와 평가
북양 함대의 수뇌부는 등세창의 전사 결정을 강력히 비난하며, 등세창의 행동은 영웅적이었지만 순양함뿐만 아니라 함장까지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다른 함장들이 등세창을 본받아 너무 쉽게 목숨을 버리려 할까 우려하여, 전투에서 함선을 잃은 선원들을 사면하는 법률 문서인 ''해군징권장정''(海軍懲勸章程)을 만들었다. 이홍장 또한 북양 함대의 수뇌부와 같은 견해를 공유하여, 등세창이 구조를 거부하고 익사한 결정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보고, 다른 군 지휘관들에게 등세창을 본받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등세창의 죽음은 중국 전역에서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광서제는 눈물을 닦으며 등세창에 대해 "오늘,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대의 용감한 행동은 해군의 사기를 높였다"고 썼다. 청 정부는 등세창에게 시호 "장절"(壯節, 문자 그대로 "용감하고 정숙함")과 태자소보(太子少保; 태자 부보)의 추증을 내렸으며, 베이징의 충렬사(昭忠祠)에서 그를 영웅으로 기렸다. 등세창의 어머니에게는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함"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1.5킬로그램의 기념패가 수여되었고, 등세창의 가족에게는 10만 냥의 은이 연금으로 지급되었다. 등세창의 가족은 그 돈으로 등세창의 고향에 등씨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은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등세창에 대한 존경과 숭배심 때문에 훼손되지 않았다.
5. 1. 청나라 해군 지휘부의 비판
6. 가족
덩스창은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장남 덩하오훙(鄧浩鴻)은 1947년에 사망했고, 차남 덩하오양(鄧浩洋)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셋째 아들 덩하오첸(鄧浩乾)은 중화민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1969년 우시에서 사망했다.
7. 현대의 평가와 기념
1996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은 0891A형 훈련함에 덩샤오핑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등세창''이라고 명명했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