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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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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은 1847년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불교 승려가 되어 린노지노미야라는 칭호를 받았다. 막부 말기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 세력과 연대하여 북방 동맹의 명목상 수장이 되었으나,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환속하여 육군 군인으로 복무했다. 독일 유학 후 육군 소장, 중장을 거쳐 제6사단장을 역임했으며, 청일 전쟁에 참전하여 대만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그는 황족 최초로 외지에서 순직하여 국가 신도에 따라 가미로 추앙받았으며,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요시히사 친왕은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동부 천황' 추대설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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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본군 장군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
본명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北白川宮能久親王)
출생1847년 4월 1일
출생지교토, 일본
사망1895년 10월 27일
사망지타이난, 일본령 타이완
묻힌 곳도요시마오카 묘지
가문기타시라카와노미야
아버지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어머니호리우치 노부코
배우자야마우치 미쓰코
시마즈 도미코
자녀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왕 (장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 (3남)
호시나 다케코 (3녀)
존칭전하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군종육군
복무 기간1887년 – 1895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지휘제4사단
제1사단
주요 참전타이완 출병
청일 전쟁
일본의 타이완 침공 (1895년)
훈장
주요 직책
직책육군대장
제4사단 장
제6사단
근위사단 장

2. 생애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불교에 귀의하여 린노지노미야(輪王寺宮)라는 법호를 받았다. 막부 말기 혼란기에 에도 우에노의 칸에이지 관주를 맡았으며,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도쿠가와 막부 측에 서서 신정부군에 저항하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맹주로 추대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독일로 유학하여 군사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 일본 제국 육군에 투신하여 육군 중장까지 진급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자, 대만 점령 작전에 근위사단장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작전 수행 중 말라리아에 걸려 타이난에서 병사하여, 근대 일본 황족 중 처음으로 외국에서 임무 중 사망한 인물이 되었다. 사후 그의 죽음은 미화되어 국가 신도에 의해 신격화되었고, 일본 통치 시기 대만 각지와 도쿄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출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과 호리우치 노부코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에이 원년(1848년) 8월 3일, 1세의 나이에 쇼렌인 궁의 부제(附弟)가 되었고, 세상을 떠난 닌코 천황의 유사(猶子)가 되었다. 이후 가에이 5년(1852년)에는 카지이몬제키의 부제가 되었다.

안세이 5년(1858년) 10월 22일에는 친왕 선하를 받아 노쿠(能久)라는 를 받았으며, 다음 달인 11월 23일에는 린노지노미야 지세이 입도 친왕(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의 동생)의 부제가 되었다. 이때 형인 쇼렌인 궁 손뉴 입도 친왕(훗날의 쿠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을 계사(戒師)로 하여 득도하고 '''공현'''(公現)이라는 법휘를 받았다.

이후 불교 승려로서 린노지노미야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 5월, 에도로 내려가 우에노의 칸에이지에 들어갔다. 같은 달, 지세이 입도 친왕이 은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칸에이지 관주(貫主) 및 닛코 린노지몬제키를 계승하였다. 이때 원호는 "진호왕원궁(鎮護王院宮)"이었으며, 역대 몬슈들과 마찬가지로 "린노지노미야"로 통칭되었다. 지세이 입도 친왕은 텐다이좌주이기도 했으나, 좌주직은 카지이몬제키의 마사히토 입도 친왕이 다시 계승했다.

2. 2. 막부 말기와 보신 전쟁

게이오 3년(1867년) 5월, 에도로 내려가 우에노의 칸에이지에 들어가, 같은 달 린노지노미야 지세이 입도 친왕의 은퇴에 따라 칸에이지 관주 및 닛코 린노지 몬제키(門跡)를 계승했다. 이때부터 역대 몬슈와 같이 "린노지노미야"로 통칭되었다.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보신 전쟁이 시작되고 토바·후시미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중심의 신정부군이 에도를 점령하자, 린노지노미야는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의뢰를 받아 측근들과 함께 2월 21일 에도를 출발했다. 3월 7일에는 토세이 다이소토쿠(東征大総督)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을 슨푸성에서 만나 요시노부의 구명과 동정(東征, 에도 공격) 중지를 간청했다. 구명에 대해서는 조건부 수락 가능성이 제시되었으나, 동정 중지는 거절당했고, 결국 6일 후인 13일 칸에이지로 돌아왔다.

아버지 아사히코 친왕과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으로부터 교토 귀환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쇼기대가 칸에이지에 주둔한 후인 5월 4일에는 타루히토 친왕이 에도성으로 초청했지만,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4] 5월 15일 우에노 전쟁이 발발하여 쇼기대가 패배하자, 린노지노미야는 칸에이지를 탈출했다. 25일 하네다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구 막부 해군의 도움으로 쵸게이마루(長鯨丸)를 타고 도호쿠 지방으로 피신하여 히라카타(平潟)에 상륙했다.

도호쿠에서는 측근들과 함께 아이즈, 요네자와를 거쳐 센다이번에 의탁했다. 7월 12일 시로이시성에 들어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명목상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 동맹은 센다이의 다테 요시쿠니가 주도하며 일본 북부의 여러 번으로 구성되었다. 린노지노미야 자신도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고 속히 불적(佛敵)이자 조적(朝敵)을 퇴치하고자 한다"고 말하며 신정부군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 측은 군사적 역할까지 포함한 총재 취임을 요청했으나, 린노지노미야는 출가한 몸임을 이유로 군사 지휘는 거부하고 정치적 맹주 역할만 수락했다. 결국 6월 16일 맹주 취임이 결정되었고, 7월 12일 시로이시성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항복할 때까지 시로이시성과 텐다이종 센가쿠인(仙岳院)을 오갔다.

=== 동부 천황 추대설 ===

보신 전쟁 중 린노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쇼기대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의해 '동부 천황'(東武天皇, Tōbu-tennō) 또는 동부 황제(東武皇帝, Tōbu-kōtei)로 추대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우에노 전쟁 무렵부터 린노지노미야가 천황으로 옹립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5], 그의 에도 탈출을 도운 에노모토 다케아키조차 "남북조 시대와 같은 일을 하려는 자가 있더라도 동의하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법학자 다키가와 마사지로[6]가 처음 이 가능성을 제기한 이후, 무샤노코지 미노루[7], 가마다 에이키치[8] 등이 이를 지지했다. 후지이 도쿠유키는[9] 한 발 더 나아가, 당시 주일 미국 공사가 본국에 "지금 일본에는 두 명의 천황(미카도)이 있으며, 북방 정권이 우세하다"고 보고했고, 신문에도 유사한 기사가 실렸다는 점[10], 그리고 '동부 천황'을 옹립하고 연호를 '다이세이'(大政)로 정하며 정부 조직을 명시한 문서("기쿠치 요사이 사료", "하치스카가 사료" 등, 후지이가 '도호쿠 조정 각료 명부'라 칭함)가 남아있다는 점을 근거로 '도호쿠 조정'의 존재가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호시 료이치, 오다베 유키 등도 이 설을 지지한다. 다키가와 마사지로는 요시히사 친왕이 쇼기대 대장 아마노 하치로에게 사쓰마와 조슈 토벌을 명하는 령지(令旨)를 내렸고, 쇼기대가 닛코산에 숨겨져 있던 금의 어기(錦の御旗)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시이 다카시, 사사키 고우, 구도 다케시 등은 이러한 주장이 현실성이 부족한 구상에 불과했다고 비판한다. 린노지노미야는 열번 회의 참석 전인 7월 5일 "금상 황제(즉, 메이지 천황)의 옥체 청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며, 7월 9일과 10일에는 아키타 번과 센다이 번에 대해 "유군"(幼君, 어린 천황)을 위해 "사쓰적"(薩賊, 사쓰마 도적)을 제거하라는 내용의 '린노지노미야 령지'를 내렸다. 또한 7월 10일 공의부(公議府)에서 발표된 포고문에는 린노지노미야가 '사쓰적' 제거를 위해 나섰으며, 목적 달성 후에는 다시 칸에이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포고문은 "남북조 시대의 옛일을 끌어들여 미야사마(宮様, 친왕)의 본의를 왜곡하고 헛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경계한다"고 덧붙였다. 이시이 다카시는 이 포고문을 근거로 도호쿠 조정의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구도 다케시 역시 실제 즉위나 개원, 환속(還俗, 승려가 속세로 돌아옴) 등이 이루어진 증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도호쿠 조정 각료 명부'로 제시된 사료들도 작성 경위가 불분명하다는 비판이 있다. 독자 연호로 거론되는 '다이세이' 역시 실제 사용 여부는 불확실하며, 일부 자료에서는 즉위 날짜(6월 15일)와 개원 날짜(6월 16일)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1890년경)


기타노마루 공원에 있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기마상. 도쿄 황궁 북쪽에 위치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보신 전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칩거 명령을 받았던 요시히사 친왕은 메이지 2년(1869년) 9월 4일에 처분이 해제되어[11] 친가인 후시미노미야 가문으로 돌아갔다[12]. 당시에는 유아명인 '''후시미 미츠노미야'''로 불렸다. 메이지 3년(1870년) 10월 영국 유학을 청원했으나[14], 11월 4일에 궁호를 다시 칭하는 것이 허락되면서 요시히사라는 이름으로 돌아갔고[14][15][16], 12월에 프로이센(훗날의 독일 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이던 메이지 5년(1872년) 3월, 요절한 동생 기타시라카와노미야 토모나리 친왕의 유언에 따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을 상속하여 2대 당주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군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프로이센 육군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메이지 7년(1874년) 9월 25일에는 육군 소좌로 임관했다[17]. 그러나 메이지 9년(1876년) 12월, 독일 귀족의 미망인 베르타와 약혼하고 이듬해인 메이지 10년(1877년) 4월에 결혼 허가를 신청했으나 메이지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귀국을 명령했다. 귀국 직전 이 약혼 사실을 독일 신문에 발표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18], 결국 7월 2일 인도양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와[19] 이와쿠라 토모미 등의 설득으로 약혼을 파기하고 7월 26일부터 교토에서 다시 근신하게 되었다.

3개월 후 근신이 해제된 뒤 육군에 복귀하여 직무에 힘썼다. 메이지 11년(1878년) 8월 26일에는 닌코 천황의 유자(猶子)로서 친왕의 지위를 회복했다[20]. 이후 군에서 경력을 쌓아 메이지 17년(1884년)에는 소장으로, 메이지 25년(1892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6사단장이 되었다[21]. 1893년에는 제4사단의 사령관을 맡았다. 또한, 독일학협회의 초대 총재가 되어 독일학협회학교 설립에 힘썼으며, 대일본농회의 초대 총재도 역임했다. 1890년(메이지 23년) 2월에는 귀족원 황족 의원으로 활동했다[22]. 1891년(메이지 24년) 오쓰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메이지 천황의 명을 받아 교토로 가서 사건 처리에 관여했다[23]. 1893년 6월에는 제6사단장으로서 군함 야마토함을 타고 오키나와현의 여러 섬을 시찰하기도 했다[25].

청일 전쟁(1894-1895)이 발발하자 정예 부대인 제1사단으로 전속되어 대만 침공에 참여했다.

대만 아오디에서 야영 중인 근위 사단장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일행. 이 사진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 야스쿠니 신사의 유슈칸에 전시되어 있다.


침공 작전 중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막료들의 귀국 요양 권유를 거절하고 고열 속에서도 진군을 계속하다 타이난 외곽에서 사망했다[2]. (당시 대만 게릴라에 의해 전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근대에 일본 영토 밖에서 사망한 최초의 일본 황족이자, 전쟁에서 사망한 첫 황족이 되었다. 사후 국가 신도에 따라 ''가미''(신)로 추앙받았으며, 일본 통치 시기 대만에 세워진 여러 신사와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었다[3][26].

2. 4. 청일 전쟁과 대만에서의 죽음

메이지 26년(1893년) 11월 10일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4사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청일 전쟁 (1894-1895)이 발발하자, 이듬해인 메이지 28년(1895년) 정예 부대인 제1사단으로 전출되어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대만 정벌에 근위사단장으로 참전했다.

대만 현지에서 말라리아에 걸렸으며(일부 기록에는 티푸스라는 설도 있음[26]), 막료들의 귀국 및 요양 권유를 거절하고 40°C에 달하는 고열 속에서도 타이난 방면으로 진격을 강행했다.[26] 결국 1895년 10월 28일, 대만 전역이 일본군에 의해 평정되기 직전에 타이난 외곽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48세였다. (당시 대만 현지에서는 그가 병사가 아닌 대만 저항 세력(게릴라)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는 소문도 있었다.)[2]

그의 유해는 안핑구에서 군함 세이쿄마루 편으로 비밀리에 일본 본토로 운구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병으로 귀국 중"이라고 발표되었다. 유해가 일본에 도착한 후 육군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그제야 그의 사망 사실이 공표되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3], 도시마가오카 묘지에 안장되었다.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은 근대 일본 황족 중 처음으로 외국 땅에서 임무 중 사망(순직)한 인물이자, 전쟁 관련 활동 중 사망한 첫 사례였다.[2] 이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장 당시부터 그를 신격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그는 ''가미''(신)로 추앙받았다. 일본 통치 시기 타이베이에 세워진 대만신궁(옛 대만 신사)과 그가 사망한 타이난의 타이난 신사, 그리고 퉁샤오 신사[24] 등 대만 각지에 건립된 약 60여 개의 신사에서 주요 제신(祭神)으로 봉안되었다.[3]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대만에서 철수하면서, 그를 모시던 대만의 신사들은 모두 폐지되었다. 현재 그는 도쿄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전후인 1957년 10월 4일 쓰쿠바 후지마로 궁사(당시)의 주도로 합사되었으며, 1959년에는 그의 손자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도 함께 합사되었다).[3]

황족의 서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 승려로 보내고, 보신 전쟁 당시 반대파의 맹주로 추대되었다가 결국 일본 육군 군인으로서 대만 침공에 참여해 현지에서 병사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고대 영웅 일본 무존(日本武尊)의 일생에 비유되기도 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후시미노미야 쿠니이에 친왕
  • 적모(嫡母): 쿠니이에 친왕비 케이코
  • 생모: 가녀방(家女房) 호리우치 노부코

  • '''배우자'''
  • * 1877년 독일 베를린에서 귀족 Bertha von Tettau|베르타 폰 테타우de 남작 부인과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32][33]
  • * 선실(先室): 노구 친왕비 미츠코 - 옛 도사 번 15대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장녀. 1878년 결혼했으나 7년 후 미츠코 비의 병을 이유로 이혼했다.
  • * 후실(後室): 노구 친왕비 후미코 - 백작 다테 무네노리의 차녀. 1886년 7월 10일 결혼했으며, 결혼 전 공작 시마즈 히사미쓰의 양녀가 되었다. 정식 이름은 시마즈 토미코(島津 富子, 1862년 10월 1일 – 1936년 3월 20일)이다. 요시히사 친왕의 정실(正室)로 간주된다.

  • '''자녀'''

요시히사 친왕은 후실 후미코 비와의 사이에서 1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외에 가녀방이나 외첩 등 총 5명의 측실에게서 5남 5녀, 모두 10명의 서자를 두었다. 이 중 8명이 성인이 되었다.

구분이름생몰년비고
후실
(후미코)
나루히사 왕1887년 4월 18일 – 1923년 4월 1일[1]기타시라카와노미야 계승
측실
(가녀방 사루하시 사치코)
쓰네히사 왕1882년 9월 22일 – 1919년 4월 23일다케다노미야 가문 창설, 메이지 천황의 6황녀 마사코 내친왕과 결혼
측실
(가녀방 사루하시 사치코)
미쓰코 여왕1885년 10월 19일 – 1975년 7월 16일백작 간로지 우케나가와 결혼
측실
(가녀방 사루하시 사치코)
타케코 여왕1890년 3월 28일 – 1977년 3월 18일자작 호시나 마사아키와 결혼, 이후 고준 황후의 여관장 역임
측실
(가녀방 사루하시 사치코)
노부코 여왕1891년 12월 20일 – 1892년 1월 22일요절
측실
(가녀방 이와나미 이네코)
노부히사 왕1885년 8월 28일 – 1886년 6월 28일요절
측실
(가녀방 이와나미 이네코)
사다코 여왕1887년 8월 6일 – 1964년 8월 16일백작 아리마 요리야스와 결혼
측실
(가녀방 이와나미 이네코)
테루히사 왕1888년 8월 12일 – 1970년 11월 5일신적강하 후 후작 고마쓰 테루히사가 됨.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의 제사 계승.
측실
(가녀방 우키야마 이쿠무)
히로코 여왕1895년 5월 28일 – 1990년 3월 7일백작 후타라 요시노리와 결혼
측실
(외첩 신하시 카네)
요시유키1889년 – 1909년 4월 18일친왕 사후 인지 문제 발생. 메이지 천황의 칙유로 화족(백작)이 됨. 후타라 가명 하사받음.
측실
(외첩 마에나미 사카에)
마사오1890년 7월 16일 – 1965년 2월 16일친왕 사후 인지 문제 발생. 메이지 천황의 칙유로 화족(백작)이 됨. 우에노 가명 하사받음.


  • '''서자들의 신분 문제'''

요시히사 친왕이 사망한 후, 그의 첩이었던 신하시 카네와 마에나미 사카에가 각각 낳은 아들 요시유키와 마사오가 친왕의 자녀라고 주장했다. 궁내성의 조사 결과, 두 사람 모두 실제로 친왕의 아들이며 친왕 역시 생전에 이를 알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친왕이 이미 사망했고 인지에 대한 유언장도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친왕의 자녀로 인정하여 황족으로 삼을 수 없었다. 당시 황실전범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규정이 없어 일반 신민처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민사 소송을 통해 인지를 청구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에서는 후미코 비가 이 두 아들을 데려와 다른 서자들과 마찬가지로 양육하기로 결정했다. 평민의 아이가 황족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1897년 메이지 천황은 특별 칙유를 내렸다. 이를 통해 당시 만 8세였던 요시유키와 만 7세였던 마사오를 특별히 화족에 편입시키고 백작 작위를 부여하는 동시에, 각각 '후타라'와 '우에노'라는 가명을 하사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황족의 내규(성인이 된 왕자가 신적강하하여 화족이 되는 규정)를 앞당겨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타라 요시유키는 병약하여 자식 없이 만 21세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로는 이복 여동생 히로코 여왕과 후미코 비의 남동생인 다테 무네노리의 아들 요시노리를 결혼시켜 부부 양자로 삼아 후타라 백작가를 잇게 했다. 이는 요시유키가 자신을 받아들여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과 양어머니 후미코 비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4. 평가 및 논란

보신 전쟁 당시 도쿠가와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에도를 점령하자, 요시히사 친왕은 막부 측 인사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명목상 수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를 '동부 천황'(東武天皇) 혹은 동부 황제(東武皇帝)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관련 문서도 발견되었으나 실제로 그가 천황으로 즉위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논쟁적인 부분으로 남아있다. 이는 당시 혼란했던 정치 상황과 그의 상징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속세로 돌아와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독일에서 군사 교육을 받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참전하여 대만 침공을 이끌었으나, 침공 과정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대만 현지 주민들의 저항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도 제기된다.[2] 그의 죽음은 근대 일본 황족 중 최초로 해외에서, 그리고 전쟁 중에 사망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사후 국가 신토에 의해 신격화되어 '가미'로 추앙받았으며, 당시 일본 식민 통치 하의 대만에 세워진 여러 신사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도 합사되었다.[3] 이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황족의 희생을 미화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어, 야스쿠니 신사 문제와 더불어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 대중문화


  • 모리 오가이 (森鷗外) 저, 『요시히사 친왕 사적(能久親王事蹟)』, 도쿄 계행사 내 당음회(東京偕行社内棠陰会), 1908년.
  • 나가오 우카(長尾宇迦) 저, 『보신 비책(戊辰秘策) (소설 · 린노지노미야 공현(小説・輪王寺宮公現))』, 신진물왕래사, 1998년. ISBN 4-404-02662-5.
  • 요시무라 아키라 (吉村昭) 저, 『쇼기대(彰義隊)』
  • * 아사히 신문사, 2005년. ISBN 4-02-250073-5.
  • * 신초 문고, 2008년. ISBN 978-4-10-111750-8.
  • 호다카 겐이치 (穂高健一) 저, 『홍자색의 관(紅紫の館)』, 미지곡, 2020년 12월. ISBN 978-4896426281.

참조

[1] 서적 The Japan Year Book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1906
[2] 뉴스 Taiwan in Time: The prince who became a god http://www.taipeitim[...] Taipei Times 2019-05-26
[3] 웹사이트 Taiwan in Time: The prince who became a god - Taipei Times https://www.taipeiti[...] 2019-05-26
[4] 간행물 大総督宮上野輪王寺宮ヲ江戸城ニ招ク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5] 문서 海舟日記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868-06-19
[6] 서적 日本歴史解禁 創元社 1950
[7] 논문 戊辰役の一資料 史学雑誌 1953
[8] 논문 いわゆる大政改元史料をめぐって 秋大史学 1967
[9] 서적 明治元年 所謂「東北朝廷」成立に関する一考察 北樹出版 1981
[10] 뉴스 JAPAN: Northern Choice of a New Mikado(北部日本は新たなミカドを擁立した)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 1868-10-18
[11] 간행물 輪王寺宮履歴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2] 간행물 輪王寺宮ノ幽閉ヲ解キ実家ニ復帰セシメ終身禄ヲ賜フ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3] 간행물 公現親王ヲ有栖川家ニ同居セシム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4] 뉴스 伏見若宮上表 御改名御聴許 https://dl.ndl.go.jp[...] 新聞集成明治編年史 1870-11-04
[15] 간행물 伏見能久ニ官号ヲ賜フ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6] 간행물 伏見宮四男公現ヲ名ヲ能久ト改ム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7] 간행물 式部寮より北白川宮陸軍少佐に任せらる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 서적 皇族 天皇家の近現代史 中央公論新社 2009
[19] 뉴스 北白川宮御帰朝 https://dl.ndl.go.jp[...] 新聞集成明治編年史 1877-06-27
[20] 간행물 往入2681 三品能久王外4方御養子并御名付等の義宮内省廻達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1] 문서 浅見
[22]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 貴族院・参議院議員名鑑
[23] 서적 明治天皇 ミネルヴァ書房 2006-09-10
[24] 웹사이트 日本統治時代に建てられた苗栗の通宵神社は日本建築と中華建築の融合 http://www.taiwanzin[...] Taiwanzine 台湾マガジン 2015-04-20
[25] 서적 南嶋探験 恵愛堂 1894
[26] 서적 軍閥興亡史 新装版 第一巻 潮書房光人社 2016-11-13
[2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7-01-04
[28] 간행물 宮廷錄事 官報 1889-11-30
[2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11-05
[30] 간행물 賞勲叙任 官報 1885-02-13
[3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2-05
[32] 서적 "The Japanese Community in Pre-War Britain: From Integration to Disintegra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7-04
[33] 논문 近代日本研究 慶應義塾福澤研究センター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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