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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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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슬로 4세는 1262년 이슈트반 5세와 쿠만족 출신 에르제베트 사이에서 태어난 헝가리의 국왕이었다. 127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1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어머니가 섭정으로 통치했으나 귀족 파벌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친정 이후 쿠만족과의 유착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으며, 1290년 쿠만족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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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 4세
기본 정보
라슬로 4세의 인장
라슬로 4세의 인장
칭호헝가리 왕, 크로아티아 왕
통치 기간1272년 8월 6일 – 1290년 7월 10일
대관식1272년 8월, 세케슈페헤르바르
이전 통치자이슈트반 5세
다음 통치자언드라시 3세
배우자엘리자베트 (1270년 결혼)
왕조아르파드 왕조
아버지이슈트반 5세
어머니엘리자베트 더 쿠만
출생일1262년 8월 5일
사망일1290년 7월 10일 (27세)
사망 장소쾨뢰세그 (케레시그), 헝가리 왕국
매장 장소차나드 대성당 (현재 루마니아 세나드)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이름
헝가리어IV. (쿤) 라슬로
크로아티아어라디슬라브 IV. (쿠마나츠)
슬로바키아어라디슬라브 IV. (쿠만스키)

2. 생애

라슬로 4세는 이슈트반 5세와 쿠만족 출신의 어머니 에르제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 1270년 시칠리아의 군주였던 카를로 1세의 딸 엘리자베타와 정략 결혼을 했다.[1]

1272년 아버지 이슈트반 5세가 사망하면서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1277년까지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섭정을 맡았다.[1] 1277년 섭정을 끝내고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쿠만인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쿠만인에게 기독교 율법을 따르도록 지시했다.[1] 이 때문에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고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파문당했다.[1]

1290년 7월 10일 쾨뢰세그 성에서 쿠만인 출신인 아르보츠, 퇴르텔, 케멘체에게 살해당했으며,[1] 언드라시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

2. 1. 어린 시절 (1262년 ~ 1272년)



라슬로 4세는 이슈트반 5세와 쿠만족 출신 어머니 에르제베트 사이에서 1262년에 태어났다.[1] 에르제베트는 헝가리로 이주한 이교도 쿠만족 족장의 딸이었다.[3] 1264년, 아버지 이슈트반 5세와 할아버지 벨러 4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을 때, 라슬로와 어머니는 사로스파탁에 감금되었다.[3] 이후 투로츠 성을 거쳐 크라쿠프 공작 볼레스와프 5세의 궁정으로 보내졌다가, 1265년 3월에 조부와 부친의 화해로 석방되어 아버지에게 돌아갔다.[3]

1269년 9월, 이슈트반 5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고, 7세였던 라슬로는 카를로 1세의 딸 엘리자베타와 정략결혼을 했다.[3] 이듬해인 1270년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3]

2. 2. 즉위와 섭정 (1272년 ~ 1277년)

1272년 8월 6일 아버지 이슈트반 5세가 사망하자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1]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1277년까지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섭정을 맡았다.[1]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귀족 파벌들이 행사했다.[2]

이슈트반 5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구트켈레드 요어킴은 즉시 세케슈페헤르바르로 가서 어린 왕의 대관식을 준비했다.[3] 라슬로의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여기에 합류하자, 이슈트반 5세의 지지자들은 그녀가 남편을 모함했다고 비난하며 분노했다.[3] 이슈트반 5세의 재무관이었던 에기디우스 모노즐로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있는 에르제베트의 궁전을 포위했지만, 구트켈레드의 지지자들에게 격퇴당했다.[3] 모노즐로는 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로 도망쳐 도시를 점령하고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에게 양도했다.[3]

라슬로의 어머니, 쿠만족의 엘리자베트의 인장


1272년 9월 3일경, 에스테르곰 대주교 튀르예 필립이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라슬로에게 왕관을 씌웠다.[4] 이론적으로는 10세의 라슬로가 어머니의 섭정 아래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남작 파벌들이 왕국을 관리했다.[2]

귀족 파벌 간의 권력 다툼은 계속되었다. 1272년 11월, 헨리 쾨쇠기가 보헤미아에서 돌아와 라슬로의 사촌인 마초의 벨라를 암살했다. 남부 국경에 위치한 벨라 공작의 광대한 영지는 헨리 쾨쇠기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분할되었다. 1273년 4월,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모라바 변경백령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와 모라바 군대가 헝가리의 국경 지역을 침략하여 죄르와 솜바텔리를 점령하고 서부 군을 약탈했다. 두 달 후 요아힘 구트켈레드가 두 요새를 탈환했지만,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는 헝가리를 침략하여 가을에 죄르와 쇼프론을 포함한 많은 요새를 점령했다.

차크 페테르 1세와 그의 동맹들은 요아힘 구트켈레드와 헨리 쾨쇠기를 권력에서 제거했지만, 1274년 6월 구트켈레드와 쾨쇠기는 라슬로와 그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페테르 차크가 국왕과 그의 어머니를 해방시켰지만, 구트켈레드와 쾨쇠기는 라슬로의 동생인 슬라보니아 공작 앤드루를 포획하여 슬라보니아로 데려갔다. 그들은 앤드루 공작의 이름으로 슬라보니아를 요구했지만, 페테르 차크는 9월 말 폴가르디 근처에서 그들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쾨쇠기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페테르 차크는 쾨쇠기의 아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라슬로가 그와 동행했다.

1274년 말, 독일의 루돌프 1세는 새로운 독일 국왕이 되었고, 라슬로는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라슬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심각한 질병에 걸렸지만 회복했다. 그는 이 회복을 사망한 그의 성스러운 이모인 헝가리의 성 마가렛의 기적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1275년 그녀의 시성식을 추진하기 위해 교황청에 접근했다. 같은 해에 요아힘 구트켈레드와 페테르 차크 사이에 새로운 내전이 발발했다. 라슬로는 구트켈레드의 지지자인 쾨쇠기 가문에 대한 차크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1276년 6월경 부다에서 열린 남작과 귀족 회의에서 구트켈레드와 그의 지지자들이 반대파들을 권력에서 제거했다.

1276년 가을, 라슬로는 루돌프 1세와 오토카르 2세 사이의 전쟁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를 침략했다. 쇼프론은 곧 라슬로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오토카르 2세는 그가 서부 헝가리에서 점령한 모든 마을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277년 헝가리에서는 새로운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트란실바니아 작센족은 줄라페헤르바르 (현재 루마니아의 알바 율리아)를 점령하여 파괴했으며, 트란실바니아 가톨릭 교구의 주교좌이자 교구인 곳이고, 바보니치는 슬라보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2. 3. 친정과 쿠만족 문제 (1277년 ~ 1285년)

1277년 라슬로는 섭정을 끝내고 왕권 강화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쿠만인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특히 쿠만인에게는 쿠만족 전통 법률 대신 기독교 율법을 따르도록 지시했다. 이 때문에 귀족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교황 니콜라오 4세에 의해 파문당하게 된다.[2]

교황 니콜라우스 3세는 1278년 9월 22일, 라슬로의 왕권 회복을 돕기 위해 페르모의 필립 주교를 헝가리로 보냈다.[2] 교황 사절은 1279년 초 헝가리에 도착했다. 사절의 중재로 라슬로는 코세기 가문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필립 주교는 곧 대부분의 쿠만족이 여전히 헝가리에서 이교도임을 깨달았다. 그는 쿠만족 수장들에게 이교도 관습을 포기하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을 받아냈고, 어린 국왕 라슬로에게 쿠만족 수장들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맹세를 하도록 설득했다. 테테니에서 열린 회의에서 사절의 요구에 따라 쿠만족이 텐트를 떠나 "땅에 붙은 집에" 살도록 규정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쿠만족은 이 법을 따르지 않았고, 쿠만족의 피가 섞인 라슬로도 그들을 강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필립 주교는 10월에 그를 파문하고 헝가리에 교황령 금지를 부과했다. 라슬로는 쿠만족에 합류하여 성좌에 호소했지만, 교황은 그의 죄를 사면해 주는 것을 거부했다.[2]

라슬로의 요구에 따라 쿠만족은 1280년 1월 초 페르모의 필립을 체포하여 투옥했다. 그러나 핀타 아바, 트란실바니아보이보드가 라슬로를 체포하여 롤란드 보르사에게 넘겼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교황 사절과 국왕 모두 풀려났고, 라슬로는 쿠만족 법을 시행하겠다는 새로운 맹세를 했다. 그러나 많은 쿠만족은 사절의 요구에 복종하는 대신 헝가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라슬로는 이동하는 쿠만족을 샬란케멘(현재 세르비아의 스타리 슬란카멘)까지 따라갔지만, 그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2]

라슬로는 1281년 여름 핀타 아바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여 그의 성들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 운율 연대기''에 따르면, 페르모의 필립 주교는 같은 무렵 헝가리를 떠나면서 "성부"를 위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1282년 쿠만족 군대가 헝가리 남부를 침공했다. ''채색 연대기''는 라슬로가 "용감한 여호수아처럼" 쿠만족에 맞서 "그의 백성과 왕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 나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4] 그는 1282년 가을 호드메죄바샤르헤이 근처의 호드 호수에서 침략자 군대를 물리쳤다.[2]

1282년 말, 라슬로는 코세기 가문이 점령하고 있던 보로슈티안코 (현재 오스트리아의 베른슈타인 임 부르겐란트)를 포위했다. 코세기 가문은 저항했고, 국왕은 1283년 초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라슬로는 심지어 이반 코세기와 화해하여 7월 6일 전에 그를 팔라틴으로 임명했다. 라슬로는 아내 이사벨라를 버리고 그해 말 쿠만족과 함께 정착했다.[2]

2. 4. 말년 (1285년 ~ 1290년)

1285년 1월, 탈라부카 칸과 노가이 칸의 지휘 아래 금장 칸국의 몽골군이 헝가리를 침공했다.[3] ''채색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은 다뉴브 동쪽 전체 지역에 "끔찍한 불의 파괴"를 퍼뜨렸다.[4] 레게크를 포함한 많은 장소에서 현지 군대가 몽골군에게 저항했다.[3] 몽골군의 침략은 두 달 동안 지속되었고, 이후 몽골군은 철수했다.[3]

라슬로 4세는 쿠만족을 편애하여, 많은 신하들이 그가 몽골의 헝가리 침략을 부추겼다고 비난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3] 실제로 라슬로는 1285년 9월 스페세쉬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뇨게르'라고 알려진 몽골 전쟁 포로들을 고용했다.[3] 라슬로는 쿠만족의 의상과 머리 모양을 포함한 생활 방식을 선호했고, 쿠만족 소녀를 첩으로 삼았다.[3]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도머에 따르면, 라슬로는 대중 앞에서 "독"이라고 묘사한 그의 가장 좋아하는 첩 아유두아와 성관계를 가졌다.[3]

1286년 9월, 라슬로는 아내를 투옥하고 그녀의 모든 수입을 첩에게 주었다.[3] 로도머 대주교는 다음 해 9월에 여왕을 석방했다.[3] 대주교는 부다에서 고위 성직자, 남작, 귀족들을 소집하여 라슬로를 파문했다.[3] 로도머 대주교에 따르면, 이에 격분한 라슬로는 "에스테르곰 대주교와 그의 교구 주교들을 시작으로 타타르 검의 도움을 받아 로마까지 모두 근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

Assassination of Ladislaus
쿠만 암살자들이 1290년 7월 10일 쾨뢰쇠그 (체레시그, 루마니아)에서 라슬로를 살해하다


남작들은 1288년 1월 스페세쉬에서 라슬로를 체포했다.[3] 그의 지지자들이 곧 그를 석방했지만, 그는 로도머 대주교와 합의를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3] 대주교는 국왕이 기독교 윤리에 따라 살 것을 조건으로 라슬로를 사면했다.[3] 그러나 라슬로는 약속을 어겼다.[3] 그는 여동생 엘리자베스를 납치하여 도미니코회 토끼섬의 복된 성모 수도원의 원장인 팔켄슈타인의 자비시 체코 귀족과 결혼시켰다.[3] 로도머 대주교에 따르면, 라슬로는 심지어 "당신이 원하는 만큼 많은 수도원에 15명 이상의 여동생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거기에서 훔쳐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그들과 결혼시킬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의 뜻을 수행하는 데 모든 힘으로 나를 지지할 친족 집단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3]

라슬로는 말년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3] 헝가리의 중앙 정부는 고위 성직자와 남작이 군주와 독립적으로 왕국을 통치했기 때문에 권력을 잃었다.[3] 예를 들어, 이반 쾨쇠기 형제들은 알베르트 1세, 오스트리아 공작과 전쟁을 벌였지만, 라슬로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서부 국경을 따라 최소 30개의 요새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지 않았다.[3]

쾨쇠기 일족은 1290년 초 헝가리에 도착한 베네치아의 앤드루에게 왕관을 제안했다.[3] 그들의 반대 세력 중 한 명인 아르놀트 하호트는 그 사칭자를 체포하여 알베르트 공작에게 넘겨주었다.[3] 라슬로는 최근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미제를 팔라틴으로 임명했다.[3] 교황 니콜라우스 4세는 라슬로를 상대로 십자군을 선포할 계획까지 세웠다.[3] 그러나 항상 쿠만족 신하들을 편애했던 라슬로는 1290년 7월 10일 쾨뢰쇠그 (현재 루마니아의 체레시그) 성에서 아르부즈,[3] 퇴르텔, 케멘체라는 세 명의 쿠만족에게 암살당했다.[3] 미제와 라슬로의 쿠만족 연인이었던 니콜라스는 라슬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여 살인자들을 학살했다.[3]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명령에 따라 "국왕이 가톨릭 기독교인으로 죽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조사가 실시되었다.[3] 조사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다 연대기''에는 라슬로가 차나드 (현재 루마니아의 체나드) 대성당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3] 그의 후계자인 베네치아의 앤드루와 교황 베네딕토 8세는 라슬로를 "유명한 기억"으로 회상했다.[3]

3.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

1290년 7월 10일 쾨뢰세그 성(현재 루마니아의 체레시그)에서 쿠만인 출신인 아르보츠[3], 퇴르텔, 케멘체에 의해 라슬로 4세가 암살당했다. 그의 왕위는 언드라시 3세가 승계받았다.[3] 그러나 언드라시 3세 역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 이후 헝가리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3. 1. 앙주 가문의 왕위 계승

나폴리 왕국의 앙주 가문은 라슬로 4세의 여동생을 통해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1] 카로이 1세가 헝가리 왕위에 오르면서 헝가리는 카페 앙주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1]

3. 2.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 (1301년 ~ 1308년)

András halálahu 1301년 1월 14일, 헝가리의 언드라시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헝가리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다.[1] 헝가리 왕위를 주장한 세력은 바츨라프 3세, 오토 3세, 카로이 로베르토였다.[1] 이들은 각각 헝가리 왕가의 혈통을 주장하며 왕위를 노렸다.

혈통 관계인물
헝가리의 벨러 4세의 외손자바츨라프 3세
헝가리의 벨러 4세의 외손자오토 3세
헝가리의 이슈트반 5세의 외손자카로이 로베르토



이들의 대립으로 헝가리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앙주 왕가 출신의 카로이 로베르토가 1308년 헝가리 왕위에 오르며 내전은 종식되었다.[1]

4. 평가

라슬로 4세의 통치는 헝가리 역사에서 혼란과 분열의 시기로 기록된다. 그는 쿠만족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귀족 세력과 갈등하면서 왕권이 약해지고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라슬로 4세는 쿠만족에게 기독교 율법을 따르도록 지시했지만, 귀족들과의 갈등이 깊어졌고 교황 니콜라오 4세에 의해 파문당하기도 했다.[2] 그는 쿠만족의 생활 방식을 선호하고 쿠만족 소녀를 첩으로 삼았으며, 심지어 왕비를 투옥하기도 했다.[3] 이러한 행동은 많은 신하들의 비난을 샀고, 민심을 잃게 만들었다.

1282년 호드 호수에서 쿠만족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했지만,[4] 1285년 금장 칸국의 몽골군 침입 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라슬로 4세는 1290년 쿠만인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3] 그의 죽음은 헝가리 왕권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Simon of Kéz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2]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3] 논문 Les anthroponyms Comans de Hongrie https://www.jstor.or[...] 1967
[4]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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