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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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진군은 1922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이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로 진군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내세워 세력을 확장했고, 1922년 총파업 이후 로마 진군을 감행했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내전을 우려하여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했고, 이는 파시스트당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 진군은 쿠데타보다는 기득권을 압박하여 연합 세력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독일, 폴란드 등 여러 국가의 파시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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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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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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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날짜 | 1922년 10월 28일 – 10월 31일 | 
| 장소 | 로마, 이탈리아 왕국 | 
| 결과 | 파시스트 쿠데타 성공 무솔리니가 새 정부 구성 | 
| 교전 세력 | |
| 교전 1 | 이탈리아 정부 왕실 경비대 | 
| 교전 2 | 국가 파시스트당}} 검은 셔츠단 | 
| 지휘관 | |
| 지휘관 1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루이지 팍타 마르첼로 솔레리 에마누엘레 푸글리에세 | 
| 지휘관 2 | 베니토 무솔리니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 미켈레 비앙키 | 
| 관련 정보 | |
| 정치적 지지 세력 2 | 파시스트 [[File:Eagle of Associazione Nazionalista Italiana.svg|23px]] 국가주의자 | 
| 정치적 지지 세력 1 |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인민주의자 공산주의자 | 
| 관련 사건 | 이탈리아의 시민 불안 | 
| 작전 내용 |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이 전국 주요 지점을 점령하고 로마 외곽에 집결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비상사태 선포를 거부하고 파시스트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불만과,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의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3]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심화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통해 민족을 통일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3]
1919년 3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투 파시스트 동맹(Italian Fasces of Combat)(FIC)을 창설하여 이탈리아 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ty)(PSI)과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집권 세력 간의 갈등, 즉 “붉은 이년(Biennio Rosso)”이라 불리는 2년간의 사회 갈등에 뛰어들었다.[3] 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총선(1919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패배했지만,[3] “붉은 이년” 동안 파업(strike action), 생활비 인상에 대한 항의, 공장 및 토지 점거 등 사회주의자들과 지주 및 사업주들 사이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파시스트 민병대인 “스콰드리스모(Squadrismo)” (흑셔츠단(Blackshirts))를 통해 사회주의 정치인과 활동가들을 공격하며 세력을 키웠다.[4][6] 1920년 8월, 흑셔츠단은 알파 로메오(Alfa Romeo) 밀라노(Milan) 공장에서 시작된 총파업(general strike)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6] 1920년 11월에는 볼로냐(Bologna)의 우익 시의원인 줄리오 지오르다니(Giulio Giordani) 암살 이후, 특히 포 계곡(Po Valley)에서 사회주의 운동 억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자, 파시스트 민병대는 노동조합(Trade union) 조직자와 시 행정관들을 공격하여 지방 정부의 기능을 어렵게 만들었다.[7]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9] 경찰은 파시스트 폭력에 개입하지 않거나, 심지어 공공연히 지지하며 무기를 공급하기도 했다.[10]
1921년 이탈리아 총선(1921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파시스트들은 조반니 조리티(Giovanni Giolitti)의 반사회주의(anti-socialist) 연합인 국가 연합(National Blocs)에 참여하여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이후 무솔리니는 화해 협정(Pact of Pacification)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려 했으나,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인 구성원들의 반발로 1921년 11월 국가 파시스트당(National Fascist Party)(PNF)으로 이름을 바꾸고 민족주의(nationalist) 프로그램을 홍보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1]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은 전국적인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1922 Italian general strike)을 조직했다. 무솔리니는 정부가 즉시 개입하여 파업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파시스트들이 스스로 파업을 진압할 것이라고 선언하여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12] 8월 2일 안코나(Ancona)에서 파시스트 부대는 시골에서 이동하여 사회주의자들이 점령한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이후 제노바(Genoa)와 다른 도시에서도 반복되었다.[12] 밀라노(Milan)에서는 8월 3일과 4일, 사회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 거리 싸움이 벌어졌고, 파시스트들은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의 인쇄기를 파괴하고 건물을 불태웠다.[12] 그 후 지역 사업주들의 지원을 받아 지방 정부를 장악하고 시청에서 선출된 사회주의 행정부를 축출했다.[12]
이러한 상황에 대해 로마의 이탈리아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러한 무대응은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계획하게 만들었다.[12] 밀라노에서 새로운 권력 기반을 확보한 파시스트들은 "파업, 볼셰비즘(bolshevism), 국유화"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대기업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13]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상황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국민적 불만이 팽배했다. 또한, 무능한 의회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내세워 민족 통합과 로마 제국의 영광 재현을 약속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1919년 3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투 파시스트 동맹(Italian Fasces of Combat)(FIC)을 창설했다.[3] 이는 이탈리아 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ty)(PSI)과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집권 세력 간의 갈등, 즉 "붉은 2년(Biennio Rosso)"이라 불리는 사회적 갈등 시기에 이루어졌다.[3] 이 시기 동안 파업(strike action), 생활고 항의, 공장 및 토지 점거 등 사회주의자들과 지주, 사업주들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4] 정부는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양측 모두 불만을 표출했다.[5]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지역 엘리트들은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참전 용사가 많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파시스트 운동과 동맹을 맺고, 파시스트 준군사 조직을 이용해 사회주의 조직을 파괴하려 했다.[6] 1919년부터 파시스트 민병대인 “스콰드리스모(Squadrismo)”, 또는 제복 때문에 “흑셔츠단(Blackshirts)”으로 알려진 이들은 사회주의 정치인과 활동가들을 공격했다.[7] 1920년 8월, 흑셔츠단은 알파 로메오(Alfa Romeo) 밀라노(Milan) 공장 총파업(general strike) 진압에 투입되었고,[7] 11월에는 볼로냐(Bologna)의 우익 시의원 암살 이후, 특히 포 계곡(Po Valley)에서 무정부주의적 노조주의(anarcho-syndicalist) 요소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전국적으로 승리하자, 파시스트 민병대는 노동조합(Trade union) 조직자와 시 행정관들을 공격하여 지방 정부 기능을 마비시켰다.[7] 부드리오(Budrio)의 한 지역 의원은 파시스트들이 사실상 마을을 장악했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다.[8]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고, 경찰은 파시스트 폭력에 개입하지 않거나, 심지어 공공연히 지지하며 무기를 공급하기도 했다.[9][10]
1921년 이탈리아 총선(1921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파시스트들은 조반니 조리티(Giovanni Giolitti)의 반사회주의(anti-socialist) 연합인 국가 연합(National Blocs)에 참여하여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11] 이후 무솔리니는 조리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사회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려 했으나, 이는 파시스트 운동 내 급진파들의 반발을 샀다.[11] 1921년 11월, 무솔리니는 자신의 운동 명칭을 국가 파시스트당(National Fascist Party)(PNF)으로 변경하고 민족주의(nationalist) 프로그램을 내세워 세력을 확장했다.[11]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의 전국적인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1922 Italian general strike)에 대해 무솔리니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파시스트들이 직접 진압하겠다고 선언하며,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12] 안코나(Ancona), 제노바(Genoa), 밀라노(Milan) 등에서 파시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건물과 조직을 파괴하고, 지역 사업주들의 지원을 받아 지방 정부를 장악했다.[12] 이탈리아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는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다.[12]
2. 2. 파시즘의 발흥과 무솔리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국민적 불만과 무능한 의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고안하여 민족 통일과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국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3]1919년 3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투 파시스트 동맹(Italian Fasces of Combat)(FIC)을 창설했다.[3] 그러나 1919년 이탈리아 총선(1919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패배했다.[3] 이후 “붉은 이년(Biennio Rosso)”이라 불리는 2년간의 사회 갈등 시기에 파업(strike action), 생활비 인상에 대한 항의, 공장 및 토지 점거 등 사회주의자들과 지주 및 사업주들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었다.[4][5] 지역 엘리트들은 파시스트 준군사 부대인 스콰드리스모(Squadrismo) 혹은 흑셔츠단(Blackshirts)과 동맹을 맺고 사회주의 조직을 파괴하려 했다.[6]
1920년 8월, 흑셔츠단 민병대는 알파 로메오(Alfa Romeo) 밀라노(Milan) 공장에서 시작된 총파업(general strike)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6] 1920년 11월 볼로냐(Bologna)의 우익 시의원인 줄리오 지오르다니(Giulio Giordani) 암살 이후, 특히 포 계곡(Po Valley)에서 사회주의 운동 억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자 파시스트 민병대는 노동조합(Trade union) 조직자와 시 행정관들을 공격하여 지방 정부의 기능을 어렵게 만들었다.[7] 부드리오(Budrio) 마을의 한 지역 의원은 파시스트들이 사실상 장악했고,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클럽은 48시간 이내에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물리적 파괴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고했다.[8]
1921년 이탈리아 총선(1921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파시스트들은 조반니 조리티(Giovanni Giolitti)의 반사회주의(anti-socialist) 연합인 국가 연합(National Blocs) 내에서 출마하여 35석을 차지했고, 무솔리니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무솔리니는 화해 협정(Pact of Pacification)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려고 했으나, 로베르토 파리나치(Roberto Farinacci)와 같은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인 구성원들의 반발을 샀다. 1921년 11월, 무솔리니는 자신의 운동의 이름을 국가 파시스트당(National Fascist Party)(PNF)으로 바꾸고, 민족주의(nationalist) 프로그램을 홍보하여 1921년 말까지 32만 명의 회원을 모았다.[11]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은 전국적으로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1922 Italian general strike)을 조직했다. 무솔리니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파시스트들이 스스로 파업을 진압할 것이라고 선언하여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12] 안코나(Ancona), 제노바(Genoa), 밀라노(Milan) 등에서 파시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건물과 조직을 파괴하고 지방 정부를 장악했다.[12] 이들은 대기업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13] 로마 진군 며칠 전 무솔리니는 미 대사 리처드 워슈번 차일드(Richard Washburn Child)와 상담하여 미국의 지지를 약속받았다.[15]
2. 3. 흑셔츠단(검은 셔츠단)의 등장과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했고,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주창하며 민족 통합과 로마 제국의 영광 재현을 내세워 세력을 확장했다.1919년 3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투 파시스트 동맹(Italian Fasces of Combat)(FIC)을 창설했다.[3] 이 시기는 이탈리아 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ty)(PSI)과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집권 세력 간의 갈등으로 "붉은 이년(Biennio Rosso)"이라 불리는 사회적 혼란기였다.[3] 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총선(1919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패배했지만,[3] "붉은 이년" 동안 발생한 파업(strike action), 생활비 인상 항의, 공장 및 토지 점거 등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발 심리를 이용하여 세력을 키웠다.[4]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 민병대인 스콰드리스모(Squadrismo), 일명 흑셔츠단(Blackshirts)이 등장했다.[6] 흑셔츠단은 사회주의 정치인과 활동가들을 공격하고,[6] 1920년 8월 알파 로메오(Alfa Romeo) 밀라노(Milan) 공장 총파업(general strike) 진압,[6] 1920년 11월 볼로냐(Bologna) 우익 시의원 줄리오 지오르다니(Giulio Giordani) 암살 이후 포 계곡(Po Valley)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6]
1920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자, 파시스트 민병대는 노동조합(Trade union) 조직자와 시 행정관들을 공격하여 지방 정부 기능을 마비시켰다.[7] 부드리오(Budrio)의 한 지역 의원은 파시스트들이 사실상 마을을 장악했다고 보고했다.[8] 경찰은 파시스트 폭력에 개입하지 않거나 오히려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10]
1921년 이탈리아 총선(1921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파시스트들은 조반니 조리티(Giovanni Giolitti)의 반사회주의(anti-socialist) 연합인 국가 연합(National Blocs)에 참여하여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11] 이후 무솔리니는 국가 파시스트당(National Fascist Party)(PNF)으로 이름을 바꾸고, 1921년 말까지 32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11]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의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1922 Italian general strike)에 대해 무솔리니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파시스트들이 직접 진압하겠다고 선언하며,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12] 파시스트 부대는 안코나(Ancona), 제노바(Genoa) 등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건물을 파괴했다.[12] 밀라노(Milan)에서는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의 인쇄기를 파괴하고 건물을 불태웠으며,[12] 지방 정부를 장악하고 사회주의 행정부를 축출했다.[12] 이러한 상황에 대해 로마의 이탈리아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는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다.[12]
2. 4. 1921년 총선과 파시스트당의 의회 진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국민적 불만이 팽배했다.[3] 또한,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통해 민족을 통일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3]1919년 3월, 무솔리니는 "붉은 이년(Biennio Rosso)"이라 불리는 2년간의 사회 갈등 시기에 이탈리아 전투 파시스트 동맹(FIC)을 창설했다.[3] 이 시기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파업, 생활비 인상에 대한 항의, 공장 및 토지 점거 등 사회주의자들과 지주 및 사업주들 사이의 다양한 충돌이 발생했다.[4] 정부는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려 했으나 양측 모두 불만을 표출했다.[5] 지역 엘리트들은 파시스트 준군사 부대를 이용하여 사회주의 조직을 파괴하려 했다.[6]
1920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자, 파시스트 민병대는 노동조합 조직자와 시 행정관들을 공격하여 지방 정부의 기능을 어렵게 만들었다.[7] 경찰은 파시스트 폭력에 개입하지 않거나, 심지어 공공연히 지지하고 무기를 공급하기도 했다.[10]
1921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파시스트들은 조반니 조리티의 반사회주의 연합인 국가 연합 내에서 출마하여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11] 무솔리니는 조리티와 이탈리아 자유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921년 여름 화해 협정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려 했다.[11] 그러나 이 협정은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인 구성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1921년 11월 무효화되었다.[11] 무솔리니는 자신의 운동 명칭을 국가 파시스트당(PNF)으로 바꾸고, 1921년 말까지 32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11]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은 전국적인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을 조직했다.[12] 무솔리니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파시스트들이 스스로 파업을 진압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12] 파시스트 부대는 안코나, 제노바 등 여러 도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점령한 건물을 파괴했다.[12] 밀라노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의 인쇄기를 파괴하고 건물을 불태웠으며, 지방 정부를 장악하고 선출된 사회주의 행정부를 축출했다.[12]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는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다.[12] 무솔리니는 대기업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13] 미 대사 리처드 워슈번 차일드에게 미국의 지지를 약속받았다.[15]
2. 5. 1922년 총파업과 파시스트당의 대응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협력했음에도 승전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불만과,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의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3]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심화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통해 민족을 통일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3]1919년 3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투 파시스트 동맹(Italian Fasces of Combat)(FIC)을 창설하여 이탈리아 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ty)(PSI)과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집권 세력 간의 갈등, 즉 “붉은 이년(Biennio Rosso)”이라 불리는 2년간의 사회 갈등에 뛰어들었다.[3] 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총선(1919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패배했지만,[3] “붉은 이년” 동안 파업(strike action), 생활비 인상에 대한 항의, 공장 및 토지 점거 등 사회주의자들과 지주 및 사업주들 사이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파시스트 민병대인 “스콰드리스모(Squadrismo)” (흑셔츠단(Blackshirts))를 통해 사회주의 정치인과 활동가들을 공격하며 세력을 키웠다.[4][6] 1920년 8월, 흑셔츠단은 알파 로메오(Alfa Romeo) 밀라노(Milan) 공장에서 시작된 총파업(general strike)을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6] 1920년 11월에는 볼로냐(Bologna)의 우익 시의원인 줄리오 지오르다니(Giulio Giordani) 암살 이후, 특히 포 계곡(Po Valley)에서 사회주의 운동 억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자, 파시스트 민병대는 노동조합(Trade union) 조직자와 시 행정관들을 공격하여 지방 정부의 기능을 어렵게 만들었다.[7]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9] 경찰은 파시스트 폭력에 개입하지 않거나, 심지어 공공연히 지지하며 무기를 공급하기도 했다.[10]
1921년 이탈리아 총선(1921 Italian general election)에서 파시스트들은 조반니 조리티(Giovanni Giolitti)의 반사회주의(anti-socialist) 연합인 국가 연합(National Blocs)에 참여하여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이후 무솔리니는 화해 협정(Pact of Pacification)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려 했으나,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인 구성원들의 반발로 1921년 11월 국가 파시스트당(National Fascist Party)(PNF)으로 이름을 바꾸고 민족주의(nationalist) 프로그램을 홍보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1]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은 전국적인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1922 Italian general strike)을 조직했다. 무솔리니는 정부가 즉시 개입하여 파업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파시스트들이 스스로 파업을 진압할 것이라고 선언하여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12] 8월 2일 안코나(Ancona)에서 파시스트 부대는 시골에서 이동하여 사회주의자들이 점령한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이후 제노바(Genoa)와 다른 도시에서도 반복되었다.[12] 밀라노(Milan)에서는 8월 3일과 4일, 사회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 거리 싸움이 벌어졌고, 파시스트들은 사회주의 신문 ''아반티!''의 인쇄기를 파괴하고 건물을 불태웠다.[12] 그 후 지역 사업주들의 지원을 받아 지방 정부를 장악하고 시청에서 선출된 사회주의 행정부를 축출했다.[12]
이러한 상황에 대해 로마의 이탈리아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러한 무대응은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계획하게 만들었다.[12] 밀라노에서 새로운 권력 기반을 확보한 파시스트들은 "파업, 볼셰비즘(bolshevism), 국유화"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대기업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13]
3. 로마 진군 (1922년 10월)
1922년 10월 24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당 대회에서 6만 명의 당원 앞에서 "우리는 이탈리아를 통치하고자 합니다"라고 선언하며 로마 진군을 명령했다.[16] 이어서 사령관 4인조인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미켈레 비앙키,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가 무솔리니에 의해 로마 진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17] 무솔리니는 밀라노에 머물렀지만, 파시스트 행진자들과 함께 행진하는 자신의 사진을 찍도록 허용했다.[17] 구스타보 파라와 산테 체케리니 장군은 10월 18일 행진 준비를 도왔고, 디노 페로네 콤파니 백작과 울리세 이글리오리도 행진을 주최했다.[17]
10월 26일, 안토니오 살란드라 전 총리는 루이지 파크타 총리에게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준비 사실을 경고했으나, 파크타는 이를 믿지 않았다.[18] 파크타는 로마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군사 명령 서명을 거부했다.[19]
10월 28일, 무솔리니는 일 포폴로 디탈리아 본부에서 살란드라와의 타협을 요청하는 기업인 대표단을 만났으나, 살란드라와 함께 통치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20][21] 당시 영상 분석 결과, 이탈리아 그랜드 로지의 그랜드 마스터인 라울 비토리오 팔레르미가 무솔리니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2][23]
10월 29일, 흑셔츠단은 로마에 무혈 입성했고,[33]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조각을 요청했다.[33] 10월 30일, 국왕은 군부, 재계, 우익의 지지를 받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24] 로마 진군은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국왕은 내전을 우려하여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했다.[25] 이는 파시스트의 협박 앞에서 공공 기관이 항복함으로써 가능해진 권력 이양이었다.[26]

3. 1. 진군 계획과 실행
1922년 10월 24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당 대회에서 6만 명의 당원 앞에서 "우리는 이탈리아를 통치하고자 합니다"라고 선언하며 로마 진군을 명령했다.[16] 이어서 사령관 4인조인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미켈레 비앙키,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가 무솔리니에 의해 로마 진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17] 무솔리니는 밀라노에 머물렀지만, 파시스트 행진자들과 함께 행진하는 자신의 사진을 찍도록 허용했다.[17] 구스타보 파라와 산테 체케리니 장군은 10월 18일 행진 준비를 도왔고, 디노 페로네 콤파니 백작과 울리세 이글리오리도 행진을 주최했다.[17]10월 26일, 안토니오 살란드라 전 총리는 루이지 파크타 총리에게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준비 사실을 경고했으나, 파크타는 이를 믿지 않았다.[18] 파크타는 로마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군사 명령 서명을 거부했다.[19]
10월 28일, 무솔리니는 일 포폴로 디탈리아 본부에서 살란드라와의 타협을 요청하는 기업인 대표단을 만났으나, 살란드라와 함께 통치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20][21] 당시 영상 분석 결과, 이탈리아 그랜드 로지의 그랜드 마스터인 라울 비토리오 팔레르미가 무솔리니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2][23]
10월 29일, 흑셔츠단은 로마에 무혈 입성했고,[33]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조각을 요청했다.[33] 10월 30일, 국왕은 군부, 재계, 우익의 지지를 받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24] 로마 진군은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국왕은 내전을 우려하여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했다.[25] 이는 파시스트의 협박 앞에서 공공 기관이 항복함으로써 가능해진 권력 이양이었다.[26]
3. 2. 이탈리아 정부의 대응과 국왕의 결정
1922년 10월 26일, 안토니오 살란드라 전 총리는 당시 총리 루이지 파크타에게 무솔리니가 사퇴를 요구하며 로마 진군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18] 그러나 파크타는 이를 믿지 않고 무솔리니가 자신의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을 것이라 예상했다. 파시스트 군대가 로마 외곽에 모여들자, 파크타는 로마에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다.[18] 그는 이전에 파시스트 폭력 진압에 대해 국왕과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국왕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18]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군사 명령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19]10월 28일 아침, 밀라노에서 무솔리니는 일 포폴로 디탈리아 본부에서 안토니오 살란드라와 타협점을 찾아달라고 긴급히 요청한 지지하는 기업인 대표단을 만났다. 무솔리니는 살란드라와 함께 통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부했다.[20][21] 당시 영상을 안면 인식 기술로 분석한 결과, 무솔리니 옆에 이탈리아 그랜드 로지의 그랜드 마스터인 라울 비토리오 팔레르미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22][23]
결국 국왕은 군부, 재계 및 우익의 지지를 받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24] 로마 진군 자체에는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국왕은 내전을 우려했다.[25] '스콰드리스티'가 이미 포 평야와 국가 대부분을 장악했고 파시즘이 더 이상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2년 10월 29일, 약 2만 5천 명의 흑셔츠단이 로마에서 시위를 벌이는 동안 무솔리니는 내각을 구성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26] 무솔리니는 알베르티노 헌장에 따라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로마 진군은 파시즘이 권력 장악을 기념했던 사건이 아니라, 헌법의 틀 안에서 권력 이양을 촉발시킨 힘이었다. 이러한 전환은 파시스트의 협박 앞에서 공공 기관이 항복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많은 기업 및 금융 지도자들은 초기 연설과 정책에서 자유 시장과 자유 방임 경제를 강조했던 무솔리니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26]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무솔리니는 은행 위기를 피하기 위해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화했다.[27]
1922년 로마 진군 이후, 무솔리니는 조리티 또는 살란드라 내각에서 하급 장관직을 맡을 의향이 있는 척했지만, 총리직을 요구했다.[29] 파시스트와의 갈등을 우려한 지배 계급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
파시스트당은 1922년 나폴리에서 당 대회를 열고 흑셔츠단을 집결시켜 수도 로마로 진군을 명령했다.[33] 군의 일부도 은밀히 협력하는 태세를 보였다. 루이지 파크타 내각과 군부 주류는 반란 부대에 대해 무력 진압, 즉 내전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계엄령 발포를 좋아하지 않던 국왕에 의해 거부되었고, 파크타는 사임했다.[33] 10월 29일, 흑셔츠단은 수도 로마에 무혈 입성했고, 국왕은 같은 날 무솔리니에게 조각의 대명을 내렸다.[33]
3. 3. 무솔리니의 정권 장악
1922년 10월 24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 집회에서 6만 명의 당원 앞에서 이탈리아 통치를 천명했다.[16]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미켈레 비앙키,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 등 사령관 4인조가 행진을 지휘했고, 무솔리니는 밀라노에 머무르며 다음 날 로마로 이동했다.[17]전 총리 안토니오 살란드라는 당시 총리 루이지 파크타에게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준비를 경고했으나, 파크타는 이를 무시했다.[18] 파크타는 로마에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서명을 거부했다.[19]
10월 28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살란드라와의 타협을 거부했다.[20][21] 당시 영상 분석 결과, 이탈리아 그랜드 로지의 그랜드 마스터인 라울 비토리오 팔레르미가 무솔리니 옆에 있었다.[22][23]
10월 30일, 국왕은 군부, 재계, 우익의 지지를 받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24] 로마 진군에는 3만 명 미만이 참여했지만, 국왕은 내전을 우려하여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했다.[25] 10월 29일, 2만 5천 명의 흑셔츠단이 로마에서 시위를 벌이는 동안 무솔리니는 내각 구성 요청을 받았고, 알베르티노 헌장에 따라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26] 이는 파시스트의 협박 앞에서 공공 기관이 항복한 결과였다. 많은 기업 및 금융 지도자들은 무솔리니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26] 대공황으로 인해 이러한 전망은 빗나갔고, 무솔리니는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화했다.[27] 1937년까지 '''이스티투토 페르 라 리코스트루치오네 인두스트리알레'''(산업 재건 연구소)는 이탈리아 산업의 주요 주주가 되었다.[28]
무솔리니는 살란드라 내각에서 하급 장관직을 맡을 의향이 있는 척했지만, 총리직을 요구했다.[29] 지배 계급은 파시스트와의 갈등을 우려하여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고, 무솔리니는 1924년 자코모 마테오티 암살 사건 이후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1922년 10월 24일, 파시스트당은 나폴리에서 당 대회를 열고 흑셔츠단을 집결시켜 수도 로마 진군을 명령했다.[33] 루이지 파크타 내각과 군부 주류는 무력 진압을 시도했으나, 국왕은 계엄령 발포를 거부했고, 파크타는 사임했다.[33] 10월 29일, 흑셔츠단은 로마에 무혈 입성했고,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조각의 대명을 내렸다.[33]
4. 로마 진군의 영향
로마 진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득권을 축출하는 방식의 전통적인 혁명의 모습은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은 기득권을 압박하여 일종의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무솔리니 정부는 마테오티 암살사건 이전까지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1943년 무솔리니가 정권을 잃은 것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그 내각에 의해서였다. 파시스트들의 행동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이 독일의 나치즘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년 후인 1923년 11월,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로마 진군을 참고하여 뮌헨 폭동을 일으켰으나, 다음 날 진압되었고 히틀러 또한 체포되었다.
1926년 5월 폴란드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일으킨 권위주의적 군사 쿠데타인 5월 혁명/Przewrót majowypl 또한 로마 진군을 연구한 결과였다. 5월 혁명은 피우수트스키군과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발생했지만, 며칠 만에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이 승리했다.
이처럼 여러 국가의 파시즘 단체들이 로마 진군을 모방한 쿠데타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그 대부분은 미수에 그치거나, 음모 단계에서 적발되었다.
4. 1.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특징
로마 진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득권을 축출하는 방식의 전통적인 혁명의 모습은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은 기득권을 압박하여 일종의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무솔리니 정부는 마테오티 암살사건 이전까지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1943년 무솔리니가 정권을 잃은 것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그 내각에 의해서였다. 파시스트들의 행동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이 독일의 나치즘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4. 2. 국제적 영향
로마 진군은 다른 국가의 파시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23년 11월,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로마 진군을 참고하여 뮌헨 폭동을 일으켰으나, 다음 날 진압되었고 히틀러 또한 체포되었다. 1926년 5월 폴란드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일으킨 5월 혁명 또한 로마 진군을 연구한 결과였다. 5월 혁명은 피우수트스키군과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발생했지만, 며칠 만에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이 승리했다. 이처럼 여러 국가의 파시즘 단체들이 로마 진군을 모방한 쿠데타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그 대부분은 미수에 그치거나, 음모 단계에서 적발되었다.4. 3.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한국의 관점)
로마 진군은 한국 현대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권위주의 정권 등장의 한 유형으로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로마 진군과 유사하게 기존 정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는 이념적 차이가 있으며, 5.16 군사정변은 국내 정치 상황과 국제 정세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므로, 로마 진군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로마 진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득권을 축출하는 혁명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무솔리니 정부는 초기에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로마 진군과 같은 폭력적인 방식의 정권 장악을 용인하지 않으며,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5. 로마 진군 관련 인물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지도자이자 로마 진군의 총지휘자였다.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미켈레 비앙키,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는 '사령관 4인조'로 불리며 로마 진군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자코모 아체르보, 로베르토 파리나치, 조반니 지우리아티 등 여러 파시스트당 간부들이 로마 진군에 참여했다. 세라피노 마졸리니, 에토레 무티, 아우렐리오 파도바니, 알레산드로 파볼리니, 카를로 스콜차, 아킬레 스타라체도 로마 진군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5. 1. 주요 참가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지도자이자 로마 진군의 총지휘자였다. 에밀리오 데 보노, 이탈로 발보, 미켈레 비앙키,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는 '사령관 4인조'로 불리며 로마 진군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5. 2. 기타 참가자
자코모 아체르보, 로베르토 파리나치, 조반니 지우리아티 등 여러 파시스트당 간부들이 로마 진군에 참여했다. 세라피노 마졸리니, 에토레 무티, 아우렐리오 파도바니, 알레산드로 파볼리니, 카를로 스콜차, 아킬레 스타라체도 로마 진군에 참여한 인물들이다.6. 로마 진군 기념 메달
1923년 말, 로마 진군에 참여한 사람들은 로마 진군 기념 메달(Medaglia commemorativa della Marcia su Romait) 착용을 승인받았다.[30]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일련의 왕실 칙령을 통해 이탈리아 왕국은 메달 수여 자격을 확대하여 1938년 중반까지 모든 검은셔츠단과 이탈리아군 구성원이 착용할 수 있도록 했다.[30][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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