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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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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물로, 1767년 데시즈에서 태어났다. 랭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에로틱 풍자시를 지하 출판하여 혁명적 면모를 드러냈다. 국민공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루이 16세 재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공안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공포 정치에 기여했다. 플뢰뤼스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체포되어 26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는 혁명적 사상을 담은 저서를 남겼으며, 사후에는 '죽음의 천사'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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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생쥐스트의 초상화
'"생쥐스트"', 피에르폴 프뤼동 그림, 1793년 (리옹 미술관)
본명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다른 이름앙투안-루이-레옹-플로렐 드 생쥐스트
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드 리슈부르
별칭혁명의 대천사
출생일1767년 8월 25일
출생지데시즈, 프랑스 왕국
사망일1794년 7월 28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제1공화국
사망 원인단두대 처형
정치 경력
소속 정당산악파
국민 공회 의원선거구: 엔 주
임기 시작: 1792년 9월 20일
임기 종료: 1794년 7월 27일
국민 공회 의장임기 시작: 1794년 2월 19일
임기 종료: 1794년 3월 6일
전임: 조제프-니콜라 바보 뒤 바랑
후임: 필리프 륄
공안위원회 위원임기 시작: 1793년 5월 30일
임기 종료: 1794년 7월 27일
서명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서명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서명

2. 생애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는 프랑스 중부 니베르네 지방의 데시즈에서 태어났다.[19] 그는 퇴역한 프랑스 기병 장교이자 생 루이 훈장 기사인 아버지와[6] 공증인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장남이었다.[7] 1768년과 1769년에 태어난 두 여동생이 있었다. 가족은 1776년 북쪽 피카르디 지방의 블레랑쿠르로 이주하여 시골 귀족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사한 지 1년 후,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와 세 자녀가 남겨졌다.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저축했고, 1779년에 생쥐스트는 예수회 오라토리안 학교인 수아송으로 보내졌다. 교사들은 생쥐스트를 문제아로 여겼지만,[8] 1786년에 졸업했다.[9]

젊은 시절 생쥐스트는 "야성적이고, 잘생겼으며, 규범을 벗어난" 사람이었다.[10] 블레랑쿠르의 젊은 여성 테레즈 겔레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였으나, 그녀는 1786년 7월 25일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생쥐스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파리로 떠났고, 어머니에 의해 체포되어 1786년 9월부터 1787년 3월까지 교정 시설에 수감되었다.[13] 돌아온 후 랭스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지만,[13] 1년 후 법학을 떠나 블레랑쿠르로 돌아왔다.[14]

A rustic country house
생쥐스트의 블레랑쿠르 자택은 현재 박물관이자 관광 센터이다.


어린 나이에 문학에 대한 매력을 보였던 생쥐스트는[15] 1789년 5월 혁명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익명으로 장편 시 ''오르강''을 출판했다. 이 시는 원시인의 미덕을 칭찬하고 자유주의와 독립성을 찬양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부와 권력의 불평등으로 돌렸다.[18]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쓰여진 이 작품은[19] 왕정, 귀족, 교회를 공격했다.[20] ''오르강''은 금지되었지만, 잘 팔리지 않아 저자에게 금전적인 손실을 안겨주었다.[21] 혁명 전야에 대중의 문학적 취향이 바뀌면서 생쥐스트는 사회 정치 이론에 집중하게 되었다.[22]

1789년 혁명으로 블레랑쿠르의 권력 구조가 뒤엎어졌다. 생쥐스트의 친구들이 이끄는 개혁가 그룹은 1790년 블레랑쿠르 최초의 공개 시립 선거에서 승리했다. 생쥐스트는 방위대에 합류하여[24] 몇 달 안에 중령으로 지휘관이 되었다.[25] 그는 지역 회의에서 애국심과 재능으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26] 카미유 데물랭과 같은 혁명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고,[27] 1790년 8월에는 로베스피에르에게 편지를 써서 존경심을 표했다.[28]

1791년 봄, 생쥐스트는 《프랑스 혁명과 헌법 정신》을 집필했다.[30] 이 책은 몽테스키외의 영향을 받아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지만, 혁명에서의 폭력에 혐오감을 표하며 미덕이 혁명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33] 1791년 6월 21일, 루이 16세의 바렌으로의 도주 사건은 생쥐스트의 이론을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 1792년 8월 10일 파리 폭도들이 튈르리 궁전을 공격하면서 의회는 새로운 선거를 소집했다. 생쥐스트는 Aisne ''데파르트망''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38] 국민 공회의 최연소 의원이 되었다.[39]

생쥐스트는 처음에는 자코뱅 클럽에서 지롱드파와 몽테뉴파 모두와 거리를 두었다.[40] 1792년 11월 13일, 국민 공회에서 첫 연설을 통해 폐위된 국왕을 맹렬히 비난하며 "루이 카페는 국왕이나 시민으로 재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한 반역자, 적으로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3][44] 그는 "누구도 무죄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46] 이 연설은 국민 공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47]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생쥐스트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연설했다.[50]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51]

1793년 5월, 생쥐스트는 공안위원회에 합류했고,[54] 초대 프랑스 헌법을 대체할 1793년 프랑스 헌법 개발을 주도했다. 새 헌법은 1793년 6월 24일에 법으로 비준되었지만,[55] 전시 비상 조치로 인해 시행되지 않았다.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정부가 승리할 때까지 비상 조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6]

1793년 6월 2일, 상퀼로트는 국민 방위대의 지원을 받아 국민 공회를 포위하고 지롱드파 의원들을 체포했다.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지롱드당에 반대했고, 공안위원회를 대표하여 국민 공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57] 1793년 10월 31일, 지롱드당 지도자들은 단두대로 보내졌다.[59] 생쥐스트는 혐의자 법 (1793년 9월 17일)과 같은 법률을 통해 위원회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60]

1793년 10월 10일,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를 최고의 "혁명 정부"로 인정했다. 생쥐스트는 라인 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알자스로 파견되어[65] 규율을 부과하고 군대를 재조직했다. 그는 "군대가 아직 목격하지 못한 정의와 엄격함의 본보기"를 약속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많은 장교들이 해고되었고, 일부는 처형되었다. 그는 혁명 반대자들을 탄압했지만, 대량 처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트라스부르의 지도자 오일로지우스 슈나이더를 체포했고, 샤를 피슈그뤼 장군과 협력하여 국경을 확보하고 독일 라인란트 침공을 시작했다.

1794년 1월과 2월, 생쥐스트는 벨기에의 북부군으로 파견되어 비슷한 문제를 해결했다. 파리가 정치적 폭력으로 혼란에 빠지자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공화군이 진격하고 지롱드파가 몰락하면서,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몽테뉴파가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1794년 2월 19일, 생쥐스트는 국민공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70] 그는 방토즈 법령을 통과시켜 귀족 망명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상퀼로트에게 분배하도록 의회를 설득했지만,[74] 이 법은 실행되지 못했다.[76]

1794년 봄, 공안위원회는 에베르와 에베르파를 공격하여 체포하고 처형했다.[82] 이후 조르주 당통을 비롯한 온건파를 체포하고 처형했다.[83] 생쥐스트는 "혁명은 얼어붙었고, 모든 원칙이 약해졌다"고 사적으로 썼다.[89]

1794년 4월, 생쥐스트는 플뢰뤼스 전투에서 승리한 북부군의 최고 감독관으로 다시 파견되었다.[63][96] 이 전투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전환점을 기록했다.[97] 파리로 돌아온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입지가 악화되었음을 발견했다. 카르노는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를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라고 묘사했지만,[101]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와의 동맹을 유지했다.[102] 22 프레리알 법은 위원회 반대자들에게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108]

테르미도르 9일에서 10일 밤, 파리 시청에 있는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 장조제프 베르츠 그림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를 공개적으로 옹호했지만,[114] 국민 공회는 그들의 체포를 명령했다. 생쥐스트는 오텔 드 빌로 피신했지만, 체포되어 다음 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에랑시 묘지에 묻혔다가 파리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126]

2. 1. 초기 활동

1789년 오르간을 지하 출판하여 전통, 권위, 가톨릭 교회, 국왕을 비판하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790년 23세의 나이로 엔주 국민위병대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7월 14일 파리에서 열린 연맹제에 참가했다. 1791년 『혁명 및 프랑스 헌법의 정신』을 발행하여 혁명 중 최연소 이론가가 되었다.[18]

1792년 8월 10일 혁명 이후 루이 16세 재판에서 "처녀 연설"을 하여 재판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국민공회 의원으로 당선된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의 동료로서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어 치안국을 창설하고, 헌법 초안 작성 및 행정 개혁 등을 진행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에는 전선 시찰로 파리를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방토즈 법은 생쥐스트가 실현을 원했던 법령이었지만, 플레느파와의 결렬을 초래하여 실각의 요인이 되었다.

2. 1. 1. 유년 시절

1767년 니에브르주 데시즈에서 태어났다.[19] 그는 기병대 대위 루이 장 드 생쥐스트 드 리슈부르(1716–1777)와[6] 공증인의 딸인 마리안 로비노(1736–1811)의 장남이었다.[7] 1남 2녀 중 첫째였으며, 1768년과 1769년에 태어난 두 여동생이 있었다. 마리안느 로비노는 부유한 지방 공증인이자 지주 가문 출신으로, 학력은 높지 않았지만 사색과 학식을 갖추고 평등주의 사상을 가졌다. 그녀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타락에 분개했고, 귀족들이 중산층 수준으로 격하되기를 원했다.

생쥐스트는 어린 시절을 베르누이유 성직자였던 백부 앙투안 로비노와 함께 보낸 후, 1776년 가족과 함께 아버지 고향인 피카르디 엔 주 블레랑쿠르로 이사했다.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세 자녀만 남게 되었다.

2. 1. 2. 청소년기

1767년 니에브르주(드세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장은 기사 작위를 가진 농민 출신 경보병대 대위였고, 어머니 마리-안 로비노는 드세즈의 공증인 레오나르 로비노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을 베르누이의 사제였던 숙부 앙투안 로비노와 함께 보낸 후, 1777년 부모와 함께 피카르디주 엔주 브레랑쿠르로 이주했다.[15]

1785년 수아송 근처 오라토리오회 콜레주에 진학했으며, 같은 해 수아송에 있는 오라토리오파 학원을 마치고 블레랑쿠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 작은 도시인데다 인맥과 연줄이 없던 생쥐스트에게는 적당한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같은 해 생쥐스트는 블레랑쿠르 공증인의 딸 테레즈 겔레와 교제하다가 연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생쥐스트의 가문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1786년 7월에 다른 공증인의 아들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자 그는 한동안 방황하였다. 상처받고 화가 난 그는 1786년 9월 어느 날 밤 집안의 귀중품을 몇 점 훔쳐 들고 파리로 도망쳤다. 당시 사교계의 중심가인 루아얄 궁전 근처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가져간 돈은 금방 탕진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안 어머니가 그의 소재지를 찾아와 1786년 10월 그를 감화원에 집어넣었다. 그는 1787년 4월까지 감화원에 수감되어 있었다.[16]

석방 후 수아송 주 검찰청의 서기보시보 시험에 합격한 뒤 1787년랭스에 있는 랭스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다. 입학 후 1787년 4월의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수료와 동시에 수아송 주의 검사서기시보로 발령받고, 바로 검사서기보가 되었다.[17]

1789년에는 에로틱한 풍자시 "오르간"을 지하 출판하여 전통·권위·가톨릭 교회·국왕을 비판했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790년에는 23세의 나이로 엔 주의 국민위병대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7월 14일 파리에서 열린 연맹제에 참가했다. 1791년에는 『혁명 및 프랑스 헌법의 정신』을 발행하여 혁명 중에 최연소 이론가가 되었다.[18]

1785년 생쥐스트는 쿠시 성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이 성은 던전이 있는 중세 시대의 성이다.

2. 1. 3. 자유주의 주장과 피신

당시 프랑스는 흉년과 혹독한 한파에 시달렸는데, 그는 공공연히 자유주의,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 자유로운 직업 선택을 말하다가 반쯤 정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1789년 22세의 나이로 익명으로 에로틱한 풍자 노래 《바티칸의 오르간》(''Organt au Vatican'')이라는 책을 지하 출판하여 전통과 권위, 가톨릭 교회, 국왕을 비판하고 자유를 주장하다가, 동료의 밀고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서사시 《오르강 Organt》에서 그는 성의 해방, 성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나 생 쥐스트 자신은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금욕주의적으로 생활하였다.

서사시 《오르강 Organt》에서 정치적 암시로 가득 찬 풍자적인 내용과 음란성을 거침없이 표현한 생 쥐스트의 이 저서는 곧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는 볼테르의 《처녀 (La Pucelle)》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아직 그의 문장력은 정제되어 있지 않았다. 《오르강》에서 그는 격렬한 열정과 원한을 토로하였지만 친구들조차 이 작품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그의 적들은 조롱했고 1789년 6월 당국은 〈오르강〉을 압수했다. 익명으로 출간한 그는 주변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조심하느라 사직서를 내고 파리에 있는 친구 집에 몸을 숨겼다.[30]

2. 2. 혁명 활동

1793년 10월 10일,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를 최고의 "혁명 정부"로 인정하는 법령을 공포했고, 이는 12월 4일에 확정되었다. 생쥐스트는 임시 정부가 평화가 올 때까지 혁명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민공회 대표들이 모든 군사적 노력을 직접 감독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이 제안은 1793년 10월 10일에 승인되었다. 그해 가을,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자 여러 대표들이 ''파견 의원''으로 지정되어 라인 군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자스의 중요한 지역으로 보내졌다. 결과가 충분하지 않자, 생쥐스트는 국민공회 동료인 필리프-프랑수아-조제프 르 바와 함께 알자스로 파견되었다. 이 임무는 1793년 11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되었으며, 두 사람은 규율을 부과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한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다.

"병사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복수하고, 여러분을 승리로 이끌 지휘관을 주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는 자격 있는 사람을 찾고, 보상하고, 승진시키기로 결심했으며, 죄가 있는 모든 사람, 누구든 추적할 것입니다... 모든 지휘관, 장교, 정부 요원은 3일 이내에 병사들의 정당한 불만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이 지난 후, 우리는 스스로 불만을 듣고, 군대가 아직 목격하지 못한 정의와 엄격함의 본보기를 제시할 것입니다."
– 생쥐스트가 라인 군에게 보낸 첫 번째 포고령, 1793년



생쥐스트는 이 임무를 주도하며 지휘관들에게는 끊임없이 결과를 요구하는 동시에 일반 병사들의 불만에 공감했다. 그는 전선에 도착한 첫날, "군대가 아직 목격하지 못한 정의와 엄격함의 본보기"를 약속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즉시 모든 군대에 가혹한 규율을 적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장교들이 해고되었고, 적어도 한 명의 장군을 포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사격 분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생쥐스트는 혁명의 반대자들을 탄압했지만, 다른 대표들이 명령한 대량 처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대표들의 많은 활동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파리로 소환했다. 지방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트라스부르의 강력한 지도자 오일로지우스 슈나이더도 생쥐스트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었고, 많은 장비가 군대에 징발되었다. 생쥐스트는 자신이 존경했던 자코뱅인 샤를 피슈그뤼 장군과 긴밀히 협력했다.Pichegru|샤를 피슈그뤼프랑스어는 훗날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생쥐스트와 자코뱅주의를 등지고 왕당파 지지자가 되었으며, 프뤼크티도르 쿠데타 (1797) 동안 감옥에서 사망했다. 생쥐스트의 감시 아래, 피슈그뤼와 라자르 오슈 장군은 국경을 확보하고 독일 라인란트 침공을 시작했다.

군대가 활력을 되찾자 생쥐스트는 잠시 파리로 돌아와 성공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축하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곧 북부군이 규율과 조직 문제에 직면했던 벨기에 전선으로 다시 보내졌다. 1794년 1월과 2월 동안 그는 다시 한번 가차 없고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임무는 중단되었다. 파리가 정치적 폭력으로 혼란에 빠지자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전투 중인 병사들의 그림
플뢰뤼스 전투 (1794) (장바티스트 모제스 그림). 생쥐스트는 장바티스트 조르당의 왼쪽에 있다. 베르사유 궁전 소장.


혁명군이 여전히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생쥐스트는 다가올 갈등을 준비하기 위해 벨기에로 다시 파견되었다.[39] 1794년 4월부터 6월까지,[65] 그는 다시 북부군의 최고 감독관이 되었고 플뢰뤼스 전투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다.[63][96] 1794년 6월 26일의 이 치열한 전투에서 생쥐스트는 가장 가혹한 조치를 적용하여 적에게서 도망친 모든 프랑스 병사들을 즉결 처형하라고 명령했다.[96] 오스트리아군과 그 동맹군이 남부 네덜란드에서 전면적인 후퇴를 하자 그는 자신의 조치가 정당했다고 느꼈다.[96] 플뢰뤼스 전투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전환점으로 기록되었으며, 프랑스는 1797년 최종 승리할 때까지 공세를 유지했다.[97] 전투 후, 생쥐스트는 영웅으로 대우받으며 "모든 측면에서 환호"를 받았다.[98]

파리로 돌아온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악화되었음을 발견했다.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하고 "대공포"가 시작되면서, 적들의 반격 위험은 거의 불가피해졌다.[99][100] 카르노는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를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라고 묘사했지만,[101]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와의 동맹을 굳건히 유지했다.[102] 플뢰뤼스에서의 프랑스 승리와 그 뒤를 이은 승리는 전쟁 중 국가 안보의 필요성을 줄였고, 이는 원래 공포정치의 정당화로 여겨졌기에 "공포정치의 변명은 끝났다".[103] 공포정치의 반대자들은 1793년 헌법의 완전한 시행을 요구하며 생쥐스트 자신의 말을 자신에게 불리하게 사용했다.[104][105]

정치적 대립이 절정에 달하면서, 위원회는 22 프레리알 법을 도입했다. 이 법은 매우 모호한 용어로 사실상 누구라도 고발하고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범주의 "인민의 적"을 설정했다. 피고인은 법적 자문을 받을 수 없었고, 혁명 재판소는 사형 이외의 형벌을 부과하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신속하게 이 법안을 통과시켰고, 생쥐스트는 이 법안 작성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지지했을 것으로 보인다.[106] 재판소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면서, 새로운 법규는 대공포를 촉진했다. 시행 첫 달에 파리에서 처형 건수는 하루 평균 5건에서 17건으로 증가했고, 다음 달에는 26건으로 급증했다.[107]

프레리알 법은 위원회 반대자들에게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108] 카르노는 다시 한번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를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라고 묘사했다.[109] 카르노와 피에르 조제프 캉봉은 공포정치를 종식시킬 것을 제안했다. 7월 22일과 23일, 두 위원회는 본회의에서 만났다. 코뮌은 직원의 임금을 제한(일부 경우에는 절반으로 줄임)하는 새로운 최고치를 발표했고, 이는 구역에서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110] 파리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111]

공포정치에 대한 저항이 국민 공회 전체로 퍼져 나갔고, 생쥐스트는 분열에 대처해야 했다. 생쥐스트는 베르트랑 바레르와의 협상에서 일반 보안 위원회의 종속적 지위에 대한 양보를 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112] 바레르와 다른 테르미도르파는 그가 로베스피에르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독재적 권한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113] 이에 대한 대가로 생쥐스트는 파리에서 포병 부대를 내보내기로 한 카르노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한동안 테르미도르파 중 일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쥐스트를 구원할 수 있거나, 최소한 자신의 야망에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대한 태도는 그가 9 테르미도르 (1794년 7월 27일)에 로베스피에르를 굽힘없이 공개적으로 옹호했을 때 바뀌었다.[114]

그들은 공안 위원회로 향했고, 그곳에서 생쥐스트가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기소장을 작성하고 있는지 물었다. 생쥐스트는 세션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115] 그는 친구에게 시작 부분을 보냈고 자신의 메모를 보여주는 것을 거부했다. 국민 공회의 의장을 맡은 콜로 다르부아는 그가 발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다음 날에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결정했다.[116] 바레르에 따르면: "우리는 생쥐스트가 더 독재적인 보스로 등장하여 결국 그를 전복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결코 속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었고 그가 우리를 단두대에 처형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막았다".[117]

2. 2. 1. 혁명 활동 초반

1789년 혁명의 급격한 전개는 블레랑쿠르의 전통적인 권력 구조를 뒤엎었다. 이전에는 마을의 무소불위의 지도자였던 공증인 젤레는 생쥐스트의 여동생 루이즈의 남편을 포함한 몇몇 생쥐스트의 친구들이 이끄는 개혁가 그룹에 의해 도전받았다.[23] 그들의 시도는 1790년 블레랑쿠르가 최초의 공개 시립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국민 제헌 의회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선거 구조는 생쥐스트의 친구들이 시장, 서기, 그리고 그의 매형의 경우 지역 국민 방위대의 수장으로서 마을에서 권력을 잡도록 했다. 실업 상태였던 생쥐스트는 법적 연령과 세금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24]

그는 즉시 그가 명성을 얻게 될 무자비한 규율을 보였다. 몇 달 안에 그는 중령의 계급으로 지휘관이 되었다.[25] 그는 지역 회의에서 자신의 애국심과 재능으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많이 반복되는 일화 중 하나는 생쥐스트가 반혁명 팸플릿을 불태우는 불꽃 속에 손을 집어넣어 공화국에 대한 헌신을 맹세함으로써 시의회를 눈물짓게 했다는 것이다.[26] 그는 자신의 지역 선거 의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강력한 동맹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카미유 데물랭과 같은 혁명의 유명한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27] 1790년 8월 중순, 그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존경심을 표하고 지역 청원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28] 그 편지는 최고의 찬사로 가득 차 있었는데,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폭정의 격류와 음모에 맞서 흔들리는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당신; 저는 당신을, 신의 기적을 통해서만 신을 알듯이, 알고 있습니다...."[29]

1790년 7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위병대의 지역 대원으로 참여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한 끝에, 같은 달 23세의 나이에 국민위병대의 블레랑쿠르 지역대의 제2대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우선 나이가 젊다는 약점과 현지에 변변한 인맥, 연줄이 없이 뿌리내리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점, 현지의 적대적인 파벌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해 7월 14일 지역 민병대 지휘관의 한 사람 자격으로 파리로 가 연맹 축제에 참가한다. 그러나 파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나중에는 실망스러웠다고 평하였다. 1791년에는 ‘혁명과 프랑스 헌법의 정신’을 발행하여 혁명 중 최연소 이론가가 된다.

생쥐스트는 어설픈 자비 보다는 확실한 심판을 주장하였다. 그는 '혁명은 이제 자비롭고 어설픈 정의감이나, 어떤 애국적인 활동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으며, 어설픈 타협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생쥐스트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쉽게 바뀌거나 변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정의를 내렸다. 1791년 그는〈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이란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대담한 표현과 함께 생략법을 구사했다. 〈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에서 그는 입법의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첫 단계의 헌법으로는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지만 아직도 기득권의 벽이 탄탄하여 프랑스 국민은 자유롭지 못하며, 지금 현재는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지만 국민주권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법률은 여론에는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되며 윤리에는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해의 국민공회 의원 선거에 그는 2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실망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며 왕당파, 사제 계급 등을 공격하는 논설과 칼럼을 발표했다.

2. 2. 2. 엽관 활동

그는 혁명에서 원하는 역할을 맡기 위해서는 지위의 역할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시청이나 주 정부의 행정관, 법관이 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국민의회의 지역의회 의원에 선출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당시 생쥐스트는 아직 지역의회 의원에 입후보할 수 있는 나이인 25세가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시청과 주 정부, 법원의 관료가 되기 어렵다는 점과, 오르강 등의 서적 저자가 자신임이 알려진 것에 낙담했다. 하지만 1791년 블레랑쿠르 시청의 법률고문이 되어 시의 복지 정책과 자유무역, 관세 감소 등을 옹호하였다.

한편, 그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여인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공연히 그녀를 만났다. 블레랑쿠르 시의 시청 법률고문 직은 유지했지만, 되도록 블레랑쿠르 시를 벗어나 그 주변 지역의 각종 사교클럽과 모임, 가톨릭 계통의 종교 시설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다. 몇 번의 감기와 과로로 빠진 것 외에는 항상 그러한 모임에 참여했다. 한편으로 야간을 이용해서 단기간의 노동에 종사하여 약간의 여유 수입원을 벌어들였다. 그는 동시에 반혁명적 소책자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몇 번의 퍼포먼스로 국민의회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블레랑쿠르 지구 주민들은 그를 차기 국민의회 의원으로 뽑을 만한 유능하고 활동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그는 의원 입후보 자격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중앙의 정치인들에게도 손을 뻗쳤다. 혁명의 강화를 외치고 인민의 적을 처단해야 함을 강조했지만, 한편으로 정치가들의 자부심을 부추기는 아부성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공화군이 진격하고 지롱드파가 몰락하면서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좌익 몽테뉴파가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력 방토즈 1일(1794년 2월 19일) 생쥐스트는 다음 2주 동안 국민공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70]

그는 이 새로운 권력을 이용하여 귀족 망명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상퀼로트(평민)에게 분배하는 급진적인 방토즈 법령을 통과시키도록 의회를 설득했다.[74] 그러나 이 재산 재분배 행위는 논쟁의 여지없이 프랑스 혁명의 가장 혁명적인 조치였지만,[75]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위원회는 이를 시행하기 위한 절차를 마련하는 데 실패했고,[74] 급박하게 전개되는 정치적 사건의 속도에 따라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76]

자코뱅의 반대자들은 방토즈 법령을 과격한 좌파에게 어필하기 위한 냉소적인 책략으로 간주했다.[77]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생쥐스트는 이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법령 채택 1주일 후, 법령의 강력한 시행을 촉구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칭송했다. "자유로운 국가를 욕되게 하는 빈곤을 제거하라. 애국자의 재산은 신성하지만, 음모자들의 재산은 불쌍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불쌍한 자들은 이 세상의 강자이며, 그들을 무시하는 정부에게 주인으로서 말할 권리가 있다."[77]

2. 2. 3. 국민공회 의원 당선과 혁명 활동

1792년 8월 10일 혁명 후 진행된 국왕 재판에서 생쥐스트는 "처녀 연설"을 통해 주목받았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국민 공회 의원으로 참여한 그는 "인민들은 신탁과 자신의 행복만을 갈구해왔다"며 적극적인 혁명 활동을 독려했다.[39] 왕정 복귀를 꾀하는 왕당파, 사제 계급, 오스트리아와 결탁하려는 귀족, 부르주아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했다. 정부의 재정,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 문제에도 관여하여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는 왕당파를 공격했다.

그는 군 간부와 병사 간의 격차를 줄이고자 노력하여 장군들과 고급 장교들에게는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었으나, 일반 사병과 하급 간부들에게는 성자처럼 추앙받았다. "진정한 행복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다"며 하급 군간부와 병사들을 위문했고, 일반 병사들에게 낭만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39] 1792년 9월 국민공회 의원에 당선되어 혁명 의회에 진출하였다.

1792년 11월 13일 연설에서 생쥐스트는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여론을 주도했다. 이 일로 주목받은 그는 곧 몽테뉴파(산악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의 우정은 자코뱅 파에도 널리 알려져, 그를 ‘민중의 메시아인 성 요한’(''saint Jean du Messie du peuple'')이라고 불렀다.[41][42]

생쥐스트는 루이 16세를 "국왕이나 시민으로 재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한 반역자, 적으로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3][44] 그는 "나로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통치해야 하거나 죽어야 합니다! 그는 자유로운 국민을 억압했고, 스스로를 그들의 적으로 선언했으며, 법을 남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국민을 짓밟으려 했으므로 국민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45] 연설 마지막에는 "누구도 무죄하게 통치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46]

젊은 의원의 연설은 국민 공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47][48] 생쥐스트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설을 자주 중단해야 했다.[49]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생쥐스트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연설했고,[50] 이들의 견해는 자코뱅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43] 12월까지 이 입장은 법제화되어 국왕은 국민 공회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51]

1793년 5월 29일/30일, 생쥐스트는 공안위원회에 합류했고, 쿠통은 5월 31일 – 6월 2일 봉기 직전 비서가 되었다.[54]

1793년 6월 2일, 국민 방위대의 지원을 받은 상퀼로트지롱드파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며 국민 공회를 포위하고 지롱드파 의원들을 체포했다. 몽테뉴파는 이 행동에 불만을 품었지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묵인했다. 지롱드당 지도자 자크 피에르 브리소는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다른 지롱드파 의원들은 투옥되거나 추적되었다.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지롱드당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공안위원회의 초기 기소가 접수되자, 생쥐스트는 국민 공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57]

7월 초, 생쥐스트는 위원회를 대표하여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당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담은 장문의 보고를 했다. 지롱드당 재판은 진행되어야 하며, 어떤 판결도 가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몇 달 동안 진행되었고, 브리소와 그의 동료 20명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1793년 10월 31일 단두대로 보내졌다.[59] 생쥐스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혐의자 법 (1793년 9월 17일)과 같은 위협적인 법률 승인을 얻어내 위원회에 막대한 체포 및 영향력을 부여했다.[60]

1794년 봄,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조르주 쿠통이 이끄는 공안위원회는 정부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했다.[78] 그러나 자크 에베르와 같은 경쟁자와 적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에베르는 자신의 신문 ''르 페르 뒤센''을 통해 부르주아 자코뱅주의를 비판했고, 코르들리에 클럽의 극단적 급진파인 에베르파는 자코뱅의 상퀼로트 포섭 노력을 훼손했으며, 일부는 공개적으로 봉기를 촉구했다.[79]

A vintage printed document
혁명재판소가 에베르파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명령


생쥐스트는 국민공회 의장으로서 "혁명 정부의 존엄성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는 자는 누구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국민공회는 방토즈 13일(1794년 3월 3일) 투표를 통해 이에 동의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와 함께 에베르를 공격했고, 에베르와 그의 측근들은 다음 날 체포되었다.[70] 생쥐스트는 국민공회에 에베르파의 활동이 정부에 대한 외국의 음모의 일부라고 말했다. 피고인들은 혁명 재판소에 회부되었다.[80] 생쥐스트는 "더 이상 동정심도, 유죄자에 대한 약점도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정부는 더 이상 범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81] 제르미날 4일(1794년 3월 24일), 재판소는 에베르, 샤를-필리프 롱생, 프랑수아-니콜라 뱅상 및 대부분의 다른 주요 에베르파 인물을 단두대로 보냈다.[82]

2. 3. 생애 후반

1793년 10월 10일,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를 최고의 "혁명 정부"로 인정하는 법령을 공포했고, 이는 12월 4일에 확정되었다. 생쥐스트는 임시 정부가 평화가 올 때까지 혁명적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국민공회 대표들이 모든 군사적 노력을 직접 감독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 제안은 1793년 10월 10일에 승인되었다. 그해 가을,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자 여러 대표들이 ''파견 의원''으로 지정되어 라인 군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자스의 중요한 지역으로 보내졌다. 결과가 충분하지 않자, 생쥐스트는 국민공회 동료인 필리프-프랑수아-조제프 르 바와 함께 그곳으로 보내졌다. 이 임무는 1793년 11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규율을 부과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한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다.

"병사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복수하고, 여러분을 승리로 이끌 지휘관을 주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는 자격 있는 사람을 찾고, 보상하고, 승진시키기로 결심했으며, 죄가 있는 모든 사람, 누구든 추적할 것입니다... 모든 지휘관, 장교, 정부 요원은 3일 이내에 병사들의 정당한 불만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이 지난 후, 우리는 스스로 불만을 듣고, 군대가 아직 목격하지 못한 정의와 엄격함의 본보기를 제시할 것입니다."
– 생쥐스트가 라인 군에게 보낸 첫 번째 포고령, 1793년



생쥐스트는 처음부터 이 임무를 지배했다. 그는 지휘관들에게 결과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동시에 일반 병사들의 불만에 공감했다. 그는 전선에서 첫날, "군대가 아직 목격하지 못한 정의와 엄격함의 본보기"를 약속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는 즉시 모든 군대에 가장 가혹한 규율을 적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장교들이 해고되었고, 적어도 한 명의 장군을 포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사격 분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병사와 민간인 모두에게 생쥐스트는 혁명의 반대자들을 탄압했지만, 그는 임무를 수행한 다른 대표들이 명령한 대량 처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대표들의 많은 활동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파리로 소환했다. 지방 정치인들도 그에게 취약했다. 심지어 알자스 최대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의 강력한 지도자 오일로지우스 슈나이더도 생쥐스트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었고, 많은 장비가 군대에 징발되었다. 생쥐스트는 존경했던 신뢰할 수 있는 자코뱅인 샤를 피슈그뤼 장군과 긴밀히 협력했다. 생쥐스트의 감시 아래에서 피슈그뤼와 라자르 오슈 장군은 국경을 확보하고 독일 라인란트 침공을 시작했다.

군대가 활력을 되찾자 생쥐스트는 잠시 파리로 돌아와 그의 성공에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축하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곧 다시 전선으로 보내졌는데, 이번에는 북부군이 규율과 조직의 동일한 문제에 직면했던 벨기에였다. 1794년 1월과 2월 동안 그는 다시 한 번 가차 없고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임무는 중단되었다. 파리가 정치적 폭력으로 격랑에 휩싸이자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공포 정치 시기부터 피비린내 나는 것으로 알려졌던 정치적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에베르파가 몰락한 후, 관심은 조르주 당통을 시작으로 관대한 온건파에게로 향했다.[83] 당통은 위원회에 반대하는 온건파 중 가장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특히 생쥐스트의 광신과 "과도한" 폭력 사용에 반대했다.[84] 1794년 3월 30일, 두 위원회는 당통과 관대한 온건파를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3월 31일, 생쥐스트는 공개적으로 둘 모두를 공격했다. 국민 공회에서 체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이 순간 떨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죄인이다"라는 말로 잠재웠다.[85]

당통의 공포 정치 비판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게 했지만,[84]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관련된 금융 스캔들은 그의 몰락의 구실을 제공했다.[83] 로베스피에르는 다시 생쥐스트를 국민 공회로 보내 위원회 보고서를 전달하게 했는데 (1794년 3월 31일), 그는 당통과 "왕당파의 마지막 지지자들"의 체포를 발표했다.[83] 생쥐스트는 무역 회사와 관련된 부패 혐의 외에도, 당통이 왕정을 복고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를 "악한 시민", "거짓 친구", "사악한 자"라고 비난했다.[86] 당통은 계속해서 증인을 소환할 권리를 요구했다. 생쥐스트는 국민 공회로 가서 죄수들이 법정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말했다.[87][88] 격렬한 재판 끝에 파브르, 데물랭, 그리고 당통의 다른 주요 지지자들은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 제르미날 16일(1794년 4월 5일) 단두대로 향했다. 생쥐스트는 보고서에서 이것이 공화국의 적들에 대한 "최종 숙청"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83] 그러나, 생쥐스트는 이러한 사건의 진행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사적으로 "혁명은 얼어붙었고, 모든 원칙이 약해졌다"고 썼다.[89]

에베르파와 당통파의 폭력적인 제거는 안정의 환상만을 제공했다. 그들의 죽음은 국민 공회에 깊은 원한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부재는 자코뱅이 위험할 정도로 예측 불가능한 민중인 ''상퀼로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90] 대중 선동가들의 제거와 그 결과 거리에서의 지지 상실은 테르미도르 사건 동안 생쥐스트,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다른 자코뱅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91]

위원회 보고서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생쥐스트는 공포 정치의 공적인 얼굴 역할을 했고, 이후 작가들은 그를 "죽음의 천사"라고 불렀다.[145] 1794년 4월 23일, 생쥐스트는 공안 위원회를 위해 새로운 "일반 경찰" 사무소를 만드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일반 보안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부여된 권한과 일치했으며 이를 찬탈했다.[92][93] 그러나 그 설립 직후, 생쥐스트가 다시 전선으로 파리를 떠나자 이 새로운 사무소의 관리는 로베스피에르에게 넘어갔다.[94][95]

혁명군은 여전히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생쥐스트는 다가올 갈등을 준비하기 위해 벨기에로 다시 파견되었다.[39] 1794년 4월부터 6월까지,[65] 그는 다시 북부군의 최고 감독관이 되었고 플뢰뤼스 전투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다.[63][96] 1794년 6월 26일의 이 치열한 전투에서 생쥐스트는 가장 가혹한 조치를 적용하여 적에게서 도망친 모든 프랑스 병사들을 즉결 처형하라고 명령했다.[96] 그는 승리로 오스트리아군과 그 동맹군이 모든 남부 네덜란드에서 전면적인 후퇴를 하자 정당성을 느꼈다.[96] 플뢰뤼스 전투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전환점을 기록했다. 프랑스는 1797년 최종 승리할 때까지 공세를 유지했다.[97] 전투에서 돌아온 후, 생쥐스트는 영웅으로 대우받았고 "모든 측면에서 환호"를 받았다.[98]

파리로 돌아온 후,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악화되었음을 발견했다.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하면서, 이른바 "대공포"가 시작되면서, 그의 적들에 의한 반격의 위험은 거의 불가피해졌다.[99][100] 카르노는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를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라고 묘사했다.[101] 그러나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와의 동맹에서 흔들리지 않았다.[102] 플뢰뤼스에서의 프랑스 승리와 그 뒤를 이은 승리는 (일부의 눈에는) 전쟁 중 국가 안보의 필요성을 줄였다. 이는 원래 공포정치의 정당화로 여겨졌었다. "공포정치의 변명은 끝났다".[103] 공포정치의 반대자들은 1793년 프랑스 헌법의 완전한 시행을 요구하면서 생쥐스트 자신의 말을 자신에게 불리하게 사용했다.[104][105]

정치적 대립이 절정에 달하면서, 위원회는 "혐의자법"의 새로운 버전을 제정하는 법안, 즉 22 프레리알 법을 도입했다. 이 법은 매우 모호한 용어로 사실상 누구라도 고발하고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범주의 "인민의 적"을 설정했다. 피고인은 법적 자문을 받을 수 없었고, 혁명 재판소는 사형 이외의 형벌을 부과하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신속하게 이 법안을 통과시켰고, 생쥐스트는 이 법안의 작성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확실히 이를 지지했다.[106] 재판소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면서, 새로운 법규는 대공포를 촉진했다. 시행 첫 달에 파리에서 처형 건수는 하루 평균 5건에서 17건으로 증가했고, 다음 달에는 26건으로 급증했다.[107]

프레리알 법은 위원회 반대자들에게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108] 카르노는 두 번째로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를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라고 묘사했다.[109] 카르노와 캉봉은 공포정치를 종식시킬 것을 제안했다. 1794년 7월 22일과 23일, 두 위원회는 본회의에서 만났다. 코뮌은 직원의 임금을 제한(일부 경우에는 절반으로 줄임)하는 새로운 최고치를 발표했고, 이는 구역에서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110] 파리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111]

공포정치에 대한 저항이 국민 공회 전체로 퍼져 나갔고, 생쥐스트는 분열에 대처해야 했다. 생쥐스트는 바레르와의 협상에서 일반 보안 위원회의 종속적 지위에 대한 양보를 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 바레르와 다른 테르미도르파는 그가 로베스피에르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독재적 권한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생쥐스트는 파리에서 포병 부대를 내보내기로 한 카르노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한동안 테르미도르파 중 일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쥐스트를 구원할 수 있거나, 최소한 자신의 야망에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대한 태도는 그가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에 로베스피에르를 굽힘없이 공개적으로 옹호했을 때 바뀌었다.[114]

그들은 공안 위원회로 향했고, 그곳에서 생쥐스트가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기소장을 작성하고 있는지 물었다. 생쥐스트는 세션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친구에게 시작 부분을 보냈고 자신의 메모를 보여주는 것을 거부했다. 국민 공회의 의장을 맡은 콜로 다르부아는 그가 발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다음 날에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결정했다. 바레르에 따르면: "우리는 생쥐스트가 더 독재적인 보스로 등장하여 결국 그를 전복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결코 속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었고 그가 우리를 단두대에 처형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막았다".[117]

2. 3. 1. 국민의회의 국방위원회 위원

1792년 9월 국민공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국민공회의 각 분과 중 국방분과의 위원이 되었다. 그는 군사 문제 외에도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재정 문제 해결 및 경제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생쥐스트는 곧 자크 르네 에베르, 장폴 마라,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극좌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공안위원회의 경비 출입구 그림
공안위원회 입구.


그는 혁명 초기의 지역민병대의 지휘관 경력과 국민공회의 국방분과 위원 자격으로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군대로 보내졌을 때, 그는 전략가와 행동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군인들에 대한 염려와 동시에 엄격한 군율, 무서운 결단력을 보여주었고, 그 자신도 식사와 의복은 검소함을 유지하였다. 군대에서 일련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상대방에게는 냉혹하면서도 자신의 병사들에게는 정의를 아낌없이 베푸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하였으며, 자신이 제정한 군율을 자신이 엄격하게 솔선수범하면서 장군들은 그를 꺼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오히려 일반 병사들은 그에게 생 쥐스트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과 외경심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52]

초대 프랑스 헌법은 국왕의 역할을 포함했기 때문에 무효가 된 지 오래였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위해 업데이트가 필요했다. 루이 16세 처형 이후 국민 공회 내에서 많은 초안이 돌았고, 생쥐스트는 1793년 4월 24일에 자신의 긴 제안서를 제출했다.[53] 그의 초안은 다른 제안서들의 가장 일반적인 주장을 통합했다. 투표권, 청원권, 동등한 고용 자격이 그의 초안을 지지할 수 있게 하는 기본 원칙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 문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생쥐스트는 모든 복잡한 투표 시스템에 반대했고, 전국 투표에서 시민들의 단순 다수결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지지했다.[54] 다른 대표들의 제안이 쇄도하는 가운데, 생쥐스트는 그의 "1인 1표" 계획을 굽히지 않았고, 혁명 기간 동안 프랑스 문화에서 특히 소중히 여겨지고 이상화되었던 이 그리스-로마 전통에 대한 눈에 띄는 헌사는 그의 정치적 명성을 높였다. 어떤 계획도 통과할 만큼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하자, 소수의 대표단을 공식적인 헌법 초안 작성자로 임명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생쥐스트는 선출된 5명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의 임무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모든 초안 작성자들은 강력한 새 공안위원회에 추가되었다.

국민 공회는 1793년 초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가 안보를 제공하기 위해 위원회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생쥐스트는 이 문제를 맡아 1793년 프랑스 헌법 개발을 주도했다. 그의 첫 임기가 끝나기 전에 새로운 문서가 완성되어 국민 공회에 제출되었고, 1793년 6월 24일에 법으로 비준되었다.[55]

새로운 헌법은 결코 시행되지 않았다. 전시 비상 조치가 시행되었고, 이러한 조치는 헌법적 민주주의의 유예를 요구했다. 전시 상황은 현 국민 공회에 최고의 권력을 부여했으며, 공안위원회가 그 하위 행정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의 도움을 받아 정부가 승리할 때까지 비상 조치—"혁명적"—하에 유지되도록 강력하게 싸웠다.[56]

2. 3. 2.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최후

1793년 국민공회 의장으로 선출된 생 쥐스트는 1794년 3월 방토즈 법령을 제정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방토즈 법령은 혁명의 적으로 규정된 왕당파,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계급, 부르주아층이 소유한 재산을 혁명 정부에서 몰수해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한 것이었다. 1794년 6월 26일에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격으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플뢰뤼스로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출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쌓았다.[96] 그는 승리로 오스트리아군과 그 동맹군이 모든 남부 네덜란드에서 전면적인 후퇴를 하자 정당성을 느꼈다.[96] 플뢰뤼스 전투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전환점을 기록했다. 프랑스는 1797년 최종 승리할 때까지 공세를 유지했다.[97] 전투에서 돌아온 후, 생 쥐스트는 영웅으로 대우받았고 "모든 측면에서 환호"를 받았다.[98]

1794년 초부터 그는 〈공화국 제도에 관한 단상 Fragments sur les institutions républicaines〉을 기초했는데, 이는 이전에 공화국 헌법보다 훨씬 급진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다음날, 반대파의 방해로 마지막 연설도 하지 못한 채, 로베스피에르 등과 함께 26세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오에 생 쥐스트는 빌로, 콜로 다르부아, 카르노에게 책임을 물을 준비를 하고 바로 국민 공회로 향했다.[118] 그는 "나는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파벌과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119] 빌로 바렌은 전날 저녁 자코뱅 클럽에서 자신이 어떻게 취급받았는지 불만을 토로했고, 생 쥐스트가 회의 전에 자신의 연설문을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생 쥐스트는 침묵을 지켰다. 이어진 토론에서 동료 의원인 프레롱은 그를 로베스피에르, 쿠통과 함께 삼두 정치를 형성했다는 비난을 했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를 언급한 것으로, 이는 로마 공화국의 종말로 이어졌다.[120] 결국, 그들 중 몇몇은 그를 연단에서 밀어냈고, 각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모든 지지자들의 제거를 요구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바라스는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 생 쥐스트가 "다른 사람이면 질릴 만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몇 걸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서 당당하게 자신의 연설을 계속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침착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도전하는 듯했다."라고 회상했다.[121]

생 쥐스트는 연단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켰지만, 생명은 지키지 못했다. 그를 지지하기 위해 일어선 로베스피에르는 말을 더듬고 목소리를 잃었다. 그의 형 오귀스탱, 필리프 르바, 그리고 다른 핵심 동맹국들은 모두 의원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22] 회의는 그들의 체포 명령으로 끝났다. 생 쥐스트는 "에코세"(스코틀랜드 칼리지)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5명은 시장에 의해 오텔 드 빌으로 피신하도록 초대받았다. 오후 11시쯤, 생 쥐스트가 인도되었다.[123] 새벽 2시쯤, 바라스와 부르동은 국민 공회 의원 몇 명과 함께 두 열을 이루어 도착했다. 척탄병이 안으로 들이닥치자 패배한 자코뱅파들은 자살을 시도했다. 당황하지 않은 생 쥐스트는 말없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 "생 쥐스트만이 손은 묶였지만 머리를 높이 든 채 걸을 수 있었다."[124]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그리고 그의 동료 20명은 다음 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생 쥐스트는 쿨함과 자부심을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마지막 신원 확인 절차로, 그는 1793년 헌법 사본을 가리키며 "내가 바로 그걸 만든 사람이다"라고 말했다.[125] 생 쥐스트와 단두대에서 처형된 그의 동료들은 혁명 기간 동안 처형된 사람들의 일반적인 매장지였던 에랑시 묘지에 묻혔다. 19세기 중반, 그들의 유골은 파리 지하 묘지로 옮겨졌다.[126]

2. 4. 사후

로베스피에르가 일부 왕당파나 지롱드당원의 처형에 대해 주저하거나 머뭇거렸던 것과 달리, 생쥐스트는 주저함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1]

20세기 전체주의 지도자들의 선구자는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오히려 생 쥐스트였다는 평가가 있다.[1] 자코뱅 파가 몰락하면서 그는 피에 굶주린 살인자로 격하되었으며, 자코뱅 당 내 온건파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집권 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1] 1950년대 이후 복권 여론이 나타나면서 그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연구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1]

고서적 표지
샤를 벨레이가 편집한 ''Œuvres complètes''("전집"). 초판, 파리, 1908년

3. 사상



생쥐스트는 정치 경력 동안 혁명의 의미에 대한 책과 에세이를 계속 썼지만, 생전에 출판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만년에 작성한 초고와 메모는 《오르강》, 《아를르캥 디오겐》, 《혁명의 정신》, 공개 연설, 군사 명령, 개인 서신과 함께 다양한 컬렉션으로 묶였다.[127]

생쥐스트의 많은 입법 제안들은 그가 사망한 후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개요를 형성하기 위해 편집되었다. 이 제안들은 《공화주의적 제도에 대한 단편》이라는 단일 권으로 출판되었으며, 1793년 헌법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고, 고대 스파르타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793년, 생쥐스트는 프랑스 국민 공회에 현재 단기 양도 불가 투표로 알려진 선거 제도를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전국을 하나의 다선거구로 하고 각 유권자가 한 표만 갖도록 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프랑스에서 채택되지 않았다.[128]

그의 제안들은 프로토 사회주의적 규범으로 해석되며,[129] 전반적인 주제는 평등이었다. 생쥐스트는 "인간은 독립적이어야 한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어야 한다"라고 요약했다.[130] 그는 또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담은 장문의 초고인 ''자연에 관하여''(De la Nature)를 작성했는데, 이 원고는 1951년 알베르 소불에 의해 필사될 때까지 잊혀졌다.[131] 소불은 이 작품을 1951년 ''프랑스 혁명 역사 연보'' 제124호에 "생쥐스트의 잊혀진 원고"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했다.[131] 알랭 리에나르의 ''생쥐스트, 정치 이론''과 이후의 여러 작품집에는 확장된 버전이 포함되어 있다.[127] ''자연에 관하여''는 생쥐스트의 사회 본성에 대한 생각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집필 연대는 1791년에서 1792년 사이로 추정된다.[132]

생쥐스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가정에 기초하여 자연 상태에서는 계약, 법률, 폭력 행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133] 이러한 구성물들은 사회가 도덕적 재생을 필요로 할 때에만 필요하며,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유대감을 불만족스러운 대체물로 작용할 뿐이다.[134] 이는 소규모 집단이 부당한 권력을 갖도록 하여 사회 내 부패로 이어진다고 보았다.[135] 생쥐스트는 자연 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의 가장 교육받은 구성원으로 구성된 정부를 옹호한다.[136] 그는 정부 외에도 모든 사람이 물질적 소유와 개인적 독립에 대한 동등한 보장을 포함하여 완전한 평등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산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지만, 보편적인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시민(여성 포함)이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137]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1951)에서 생쥐스트는 반항과 인간의 계몽 및 자유를 향한 진전에 대한 분석의 맥락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된다. 카뮈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옹호한 생쥐스트의 주장을 군주제의 왕권신수설에 대한 죽음의 순간, 즉 니체의 "우상의 황혼"으로 규정한다.[153] "인민의 주권과 법의 신성한 힘"에 대한 생쥐스트의 헌신은 "절대주의의 근원"이자 "새로운 신"으로 묘사된다.[154] 이러한 "정치적 신격화"[154]는 카뮈 시대에 성장한 점진적인 전체주의의 근원으로 분석된다.[155] 카뮈는 《페스트》(1947)에서도 생쥐스트를 언급한다.

4. 저서

생쥐스트는 정치 경력 동안 혁명의 의미에 대한 책과 에세이를 썼지만, 생전에 출판되지는 못했다. 만년에 이러한 초고와 메모는 《오르강》, 《아를르캥 디오겐》, 《혁명의 정신》, 공개 연설, 군사 명령, 그리고 개인 서신과 함께 다양한 컬렉션으로 묶였다.[127]

생쥐스트의 많은 입법 제안들은 그가 사망한 후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개요를 형성하기 위해 편집되었다. 그것들은 《공화주의적 제도에 대한 단편》이라는 단일 권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바티칸의 오르간》(Organt au Vatican)
  • 〈공화국 제도에 관한 단상 Fragments sur les institutions républicaines〉
  • 〈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


생쥐스트는 1791년 봄에 《프랑스 혁명과 헌법 정신》(L'Esprit de la Re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을 집필했다.[30] 그의 문체는 프랑스 혁명가들이 숭배했던 고전적인 로마 공화국의 엄격하고 도덕적인 어조를 반영했다.[31] 이 저서는 입헌군주제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지만,[30] 미덕이 혁명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며, 입법 의회의 인민 대표들에게 칭찬을 쏟아부었다.[33] 5권으로 구성된 《프랑스 혁명과 헌법 정신》은 생쥐스트가 정부를 인간 본성에 억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성공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준다.[34]

그의 많은 제안들은 프로토 사회주의적 규범으로 해석된다. 전반적인 주제는 평등이며, 생쥐스트는 "인간은 독립적이어야 한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어야 한다"라고 요약했다.[130]

생쥐스트는 또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담은 장문의 초고인 ''자연에 관하여''(De la Nature)를 작성했는데, 이 원고는 1951년 알베르 소불에 의해 필사될 때까지 잊혀진 채로 남아 있었다.[131] 알랭 리에나르의 ''생쥐스트, 정치 이론''과 이후의 여러 작품집에는 확장된 버전이 포함되어 있다.[127] ''자연에 관하여''는 생쥐스트의 사회 본성에 대한 생각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 집필 연대는 논란이 있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시기는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이다.[132]

생쥐스트는 자연 상태에서는 계약, 법률, 폭력 행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133] 생쥐스트는 정부 외에도 모든 사람이 물질적 소유와 개인적 독립에 대한 동등한 보장을 포함하여 완전한 평등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산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지만, 보편적인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시민(여성 포함)이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137]

생쥐스트의 출판물은 다음과 같다.

  • ''생쥐스트 전집, 국민 공회 대표'' 아돌프 아바르 편집, 파리, 1834.
  • ''생쥐스트 전집'' 2권, 샤를 벨레이 편집, 파리, 1908.
  • ''전집'', 미셸 뒤발 편집, 파리, 1984.
  • ''전집'', 안느 쿠피에크와 미겔 아벤수르 편집, 파리, 2004.

4. 1. 시집

생쥐스트는 어린 나이에 문학에 대한 매력을 보여주었고, 1막짜리 연극 ''아를레캥 디오겐''을 포함한 자신의 작품을 썼다.[15][16] 1789년 5월 혁명이 발발하기 2년 이상 전에 익명으로 장편 시 ''오르강, 20개의 칸토로 된 시''를 출판했다. 21세의 생쥐스트는 이 시를 통해 당시 사회적 격변에 자신의 손길을 더했다. 젊은 앙투안 오르강의 퀘스트를 묘사한 중세 서사시인 이 시는 원시인의 미덕을 칭찬하고 그의 자유주의와 독립성을 찬양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점을 부와 권력의 불평등으로 돌렸다.[18]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쓰여진 이 작품은[19] 저자의 미래 정치적 극단주의를 예고했다. 잔혹한 풍자와 스캔들로 가득한 포르노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왕정, 귀족, 교회를 명백히 공격했다.[20]

당대의 사람들은 ''오르강''을 선정적인 신작으로 여겼고, 곧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본을 압수하려던 검열관들은 사본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책은 잘 팔리지 않았고 저자에게 금전적인 손실을 안겨주었다.[21] 혁명 전야에 대중의 문학적 취향이 바뀌었고, 생쥐스트의 취향도 함께 바뀌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그의 서류에서 발견된 미완성 소설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 그의 미래의 글을 거의 전적으로 장식 없는 사회 정치 이론의 에세이에 헌신했다. 이전의 문학적, 변호사적 명성에 대한 야망을 이루지 못한 생쥐스트는 혁명적 지휘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다.[22]

5. 대중 문화에 나타난 생 쥐스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는 시기까지 등장한다. 베르나르 샤트레의 먼 친척이라는 설정이다. 원작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는 혁명가로 나오지만, TV판에서는 로베스피에르에게도 신랄한 발언을 하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 나폴레옹 - 사자의 시대

루이 16세 처형 직전부터 등장한다.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으로 묘사되지만, 나폴레옹을 높게 평가하는 등 자코뱅파 다른 인물들의 행동과 성과가 생 쥐스트 한 사람에게 모여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겨우 탈출하여 탈리앙을 암살하고, 바라스를 암살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에게 저지당하고 강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안개달 쿠데타로 실각하고 고향으로 가던 바라스의 마차를 빼앗아 절벽으로 몰고 간다.

  • 마리벨

무대 배우를 꿈꾸는 주인공 소녀 마리벨의 잃어버린 오빠로 등장한다. 작가 우에하라 키미코에 따르면, 생쥐스트에게 이복 언니 두 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설정했다고 한다.[168]

  • 욕망의 성녀 영애 테레지아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지롱드파에 가까운 주인공 테레지아와 적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 지팡이와 날개

키하라 토시에의 만화로, 주인공 소녀 아델의 소꿉친구로 등장한다.

  • 라 센느의 별

프랑스 혁명을 다룬 TV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루이 16세의 사형을 결정짓는 연설을 생 쥐스트가 했다.

  • 제3의 기데온

반체제 혁명가로 등장한다. 사회를 미워하며 혁명파에 가담한, 근본은 선량하지만 입만 앞선 젊은이로 묘사된다. 의원이 된 후부터는 재능을 발휘해 나간다.

  • 단두대의 아르캉주

생 쥐스트의 반생을 그린 작품이다. 귀족 혐오자였던 그가 여동생의 비극을 계기로 귀족과 신분 사회에 강한 증오를 품고, 부패한 프랑스 왕국의 "국가 살해"에 도전한다.

베르사유 랑비네 박물관에 있는 생쥐스트의 테라코타 흉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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