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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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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1427년에 태어나 1482년에 사망한 귀족 출신 여성으로, 피렌체의 은행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들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와 결혼했다. 그녀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조언자 역할을 했으며, 경제 활동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고, 종교 기관 및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종교적 이야기, 희곡, 시를 썼으며, 2016년 드라마 《메디치: 피렌체의 지배자들》과 후속 시즌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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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의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초상화, 1475년경, 단순한 검은색 드레스와 흰색 윔플 착용,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 소장.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의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초상화, 1475년경
이름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배우자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
자녀비안카 데 메디치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
줄리아노 데 메디치
마리아 데 메디치
아들 둘
가문토르나부오니 가문
아버지프란체스코 디 시모네 토르나부오니
어머니난나 구이차르디니 또는 프란체스카 피티
출생일1427년 6월 22일
출생지피렌체
사망일1482년 3월 28일
사망지피렌체
종교로마 가톨릭교
작위
작위명토스카나 여주인
재임 시작1464년 8월 1일
재임 종료1469년 12월 2일

2. 가문과 혼인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1427년 6월 22일에 태어났다.[1] 아버지는 5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가문 출신의 프란체스코 디 시모네 토르나부오니였고,[1] 어머니는 난나 디 니콜로 디 루이지 구이치아르디니였다.[1] 루크레치아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그리스어를 포함한 많은 서적을 읽었다.[2]

1444년 6월 3일, 루크레치아는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들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와 혼인했다.[3] 프란체스코는 코시모의 친구이자 지원가였으며, 1434년에 코시모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을 때에도 그를 지지했다. 이 결혼과 1,200 플로린의 지참금은 두 가문 사이의 동맹을 굳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3]

피에로와 루크레치아 부부는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피에로는 통풍을 앓았고 루크레치아는 관절염피부염을 앓았다. 이 때문에 루크레치아는 토스카나 주변의 온천을 자주 찾았다. 부부는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게 애정과 걱정을 담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으며, 루크레치아는 시아주버니인 조반니 디 코시모 데 메디치와도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3. 자녀

루크레치아와 피에로는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 비안카(1445년-1505년)는 굴리엘모 파치와 혼인하였고, 루크레치아(난니나)(1448년-1493년)는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와 혼인했다.[2] 로렌초 데 메디치(1449년-1492년)는 피렌체의 군주였고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혼인했으며,[3] 줄리아노 데 메디치(1453년-1478년)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버지였다.[2] 마리아(1455년-1479년)는 레오네토 로시와 혼인했다.[2] 루크레치아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사망한 아들 둘과 딸 하나도 낳았다.

3. 1. 비안카 데 메디치

비안카(1445년–1505년)는 굴리엘모 파치와 혼인하였다.

3. 2. 난니나 데 메디치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1448년-1493년)는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와 혼인했다.[2] 그녀는 난니나라고도 알려져 있다.[2]

3. 3. 로렌초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는 1449년에 태어나 1492년에 사망했으며, 피렌체의 군주였고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혼인했다.[3] 루크레치아와 피에로는 자녀들이 문학과 미술에 대한 좋은 취향을 갖도록 했고, 철학, 경영, 회계, 정치와 같은 주제를 가르치기 위해 젠틸레 데 베키,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등의 교사들을 고용했다.

루크레치아와 피에로는 그들의 영향력을 피렌체 외부, 특히 로마의 궁정으로 늘리고 싶어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 개선을 위해 아들 로렌초를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결혼하게 주선했다. 클라리체의 지참금은 6000플로린이었다. 그녀는 1469년 6월 피렌체에 도착했으나, 불행하게도 로렌초는 그의 신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피에로는 장자이자 후계자인 로렌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루크레치아에게 조반니 디 세르 조반니 구이디의 ''명성의 승리''가 그려져 있는 출산 쟁반을 주었다.

조반니 디 세르 조반니 구이디가 그린 ''명예의 승리''라는 그림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탄생을 기념하여 루크레치아에게 증정되었다.

3. 4. 줄리아노 데 메디치

줄리아노 데 메디치 (1453년–1478년)는 피에로 데 코시모 데 메디치와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의 아들이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버지였다.[2] 1478년 메디치 가문을 겨냥한 파치 음모로 인해 살해되었다.[2]

3. 5. 마리아 디 피에로 데 메디치

마리아(1455년–1479년)는 레오네토 로시와 혼인했다.[2] 마리아는 피에로와 다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일 수도 있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랐다.[2]

3. 6. 기타

루크레치아와 피에로 사이에는 최소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 넷은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비안카1445년1505년굴리엘모 파치와 혼인
루크레치아 (난니나)1448년1493년베르나르도 루첼라이와 혼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년1492년피렌체의 군주,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혼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1453년1478년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버지. 파치 음모로 사망.
마리아1455년1479년레오네토 로시와 혼인. 피에로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음.
루크레치아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사망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루크레치아와 피에로는 자녀들에게 문학과 미술에 대한 좋은 소양을 길러주고자 했으며, 철학, 경영, 회계, 정치 등을 가르치기 위해 젠틸레 데 베키,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등의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마리아는 피에로와 다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수 있으나, 다른 자녀들과 함께 양육되었다.

루크레치아와 피에로는 피렌체 외부, 특히 로마 교황청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들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 아들 로렌초를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결혼시켰다. 클라리체의 지참금은 6000플로린이었다.

4. 정치적 중요성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정치적으로 현명하고 기민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의 시아버지이자 피렌체의 첫 번째 메디치 사실상 통치자인 코시모는 그녀의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2] 1450년에 그녀와 남편 피에로는 가문 예배당에 제단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준 교황 니콜라오 5세를 접견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었다.[3]

그녀는 사업과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피사와 피렌체 주변, 그리고 도시 내의 주택, 상점, 농장들을 사들였다. 그녀는 상점을 다른 사업체에 임대하여 후원 체제를 확장했으며, 1477년에는 볼테라 인근의 공중 목욕 시설을 임대하여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투자는 가문의 영향력과 후원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루크레치아는 수녀원을 후원하고 과부와 고아를 돕는 자선 활동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가문 구성원들이 교회나 정부에서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돕거나, 가난한 가정의 여성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결혼 지참금을 제공하는 데 자신의 수입을 사용하기도 했다.

''마니피카트의 성모''는 책과 먹물 항아리를 들고 있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를 마리아로 묘사하고 있다.

4. 1. 피에로의 섭정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귀족 혈통이었기 때문에 남편 가문과 귀족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1]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조언을 구했고, 그녀는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를 받아들였다.[1] 시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는 문제 해결에 대한 그녀의 능력을 존경하기도 했다.[2]

1464년 피에로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침대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3] 이로 인해 그들의 침실은 귀족의 궁정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피에로의 건강 문제로 루크레치아는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요청을 피에로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에는 추방 명령을 철회하거나, 청원자의 투옥, 병사들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요청 등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또한 지역의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20년간 두 가문 간의 불화를 끝내기도 하였다. 1467년 봄, 그녀는 로렌초의 아내감을 찾기 위해 로마와 교황을 방문했다. 당시 여성이 남편 없이 여행하고 교황과 다른 영향력 있는 관리들을 만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동시대 사람이 언급했다. 1467년 10월, 피에로와 루카 피티의 경쟁의 일환으로 루크레치아와 아들 줄리아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루크레치아의 남편 피에로는 1469년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녀는 아들 로렌초의 조언자로서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다. 로렌초는 그녀가 사망했을 때 그녀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고 인정했다.

4. 2. 외교 및 중재

그녀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편 가문과 귀족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1]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고,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를 받아들였다.[1] 그녀의 시아버지는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2] 1450년, 그녀와 남편은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니콜라오 5세를 만나 가문 예배당에 제단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3]

1464년 피에로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의 건강 문제로 그는 침대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침실은 귀족 궁정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피에로의 건강 문제 덕분에 루크레치아는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추방 명령 철회, 투옥 중단, 병사들의 공격 중단 등을 요청받았다. 그녀는 또한 지역 내 분쟁을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20년간 지속된 두 가문 간의 불화를 끝내기도 했다. 1467년 봄, 그녀는 로렌초의 아내감을 찾기 위해 다시 로마와 교황을 방문했다. 당시 여성이 남편 없이 여행하고 교황과 다른 영향력 있는 관리들을 만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1467년 10월, 피에로와 루카 피티의 경쟁 속에서 루크레치아와 아들 줄리아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1469년 남편 피에로가 사망한 후, 그녀는 아들의 조언자로서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다. 로렌초는 그녀가 죽을 때 그녀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고 인정했다.

4. 3. 로렌초의 조언자

그녀는 남편과 달리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과 다른 귀족 가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1]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녀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다.[1] 그녀의 시아버지는 그녀의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2] 1464년 피에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3] 이로 인해 그들의 침실은 귀족들의 궁정처럼 변했다. 피에로의 건강 문제 때문에 루크레치아는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남편에게 전달하는 일을 자주 맡았다. 여기에는 추방 명령을 철회해 달라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달라거나, 병사들의 공격을 멈춰달라는 요청 등이 있었다. 그녀는 또한 지역 주민들 간의 갈등을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20년 동안 이어진 두 가문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도 했다. 1467년 봄, 그녀는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을 만나고, 로렌초의 신붓감을 찾았다. 당시 여성이 남편 없이 혼자 여행하여 교황과 다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고, 동시대 사람들은 이 사실을 특별하게 언급했다. 1469년 남편 피에로가 세상을 떠난 후, 루크레치아는 아들의 조언자로서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로렌초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고 인정했다.

4. 4. 암살 시도

1467년 10월, 피에로루카 피티의 경쟁의 일환으로, 루크레치아와 아들 줄리아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1]

5. 경제 활동

귀족 여성으로서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재산을 소유하고 사업을 경영할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녀는 피사(Pisa)와 피렌체(Florence) 안팎에서 주택, 소매점, 그리고 농장을 매입했다.[1] 그녀의 상점들은 여러 사업체에 임대되어 그녀의 후원 사업 네트워킹을 확장했다.[2] 1477년, 그녀는 볼테라(Volterra) 근처에 있는 공중 목욕탕을 임대하여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개조했다.[3] 피렌체 주변 지역에 대한 그녀의 투자는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 네트워크 확산에 기여했다.

루크레치아는 과부와 고아를 돕기 위해 종교 수녀원에 꾸준한 기부를 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소득을 사용하여 가난한 가정의 여성들에게 혼수를 제공하여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러한 지원은 종종 가족 구성원이 교회나 정부에서 좋은 직책을 얻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6. 문화적 영향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예술종교 분야에서 폭넓은 후원 활동을 펼쳤으며, 스스로도 뛰어난 작가였다.

루이지 풀치에게 모르간테 집필을 의뢰했고, 안젤로 폴리치아노,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 등 여러 시인들을 후원했다. 그녀는 시인들에게 기사도를 주제로 한 시를 쓰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폴리치아노는 그녀의 시를 칭찬했으며, 손자 로렌초의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그녀의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6. 1. 종교적 후원

루크레치아는 종교 기관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방문 채플 증축을 담당했다. 피렌체의 수호 성인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1467년 병에 걸렸을 때, 성 르무알도의 중보기도 덕분에 회복되었다고 믿었다. 그 후부터 그가 세운 카말돌리의 은둔처를 지원하였다. 또한 자신과 가족의 수많은 봉헌 제물들을 여러 교회에 기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1475년경 루크레치아의 형제 조반니 토르나부오니의 의뢰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현재 워싱턴 D.C.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 소장되어 있다. 그녀는 토르나부오니 채플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 중 방문, 요한의 탄생, 막달레나의 강탄, 이 세 장면에 등장한다.


6. 2. 저술 활동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종교적인 이야기, 희곡, 시들을 썼다.[1] 유명 시인들의 작품들을 비교해 가면서 읽었다.[2] 그녀의 시들 중 일부는 대중들에게 맞춰져 널리 퍼지게 되었다.[1] 에스텔, 수산나, 토비아스, 세례자 요한, 유딧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1] 작품들은 부분적으로는 손자에게 영감을 주고 교육시키기 위해 썼고, 희곡은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공개적으로 공연되지 않았다.[1] 시는 그녀가 사망하고 4년 후에 인쇄되고 출판되었다.[1]

그녀는 예술의 중요한 후원자이기도 하였다.[3] 곁에 있던 시인들에게 기사도를 테마로 한 시를 쓰도록 권했고, 일부는 그리하였다. 그녀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여인"이라고 불렀던 루이지 풀치에게 모르간테를 쓰도록 의뢰하기도 했다.[3] 안젤로 폴리치아노와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녀와 벨린치오니는 서로가 쓴 시를 교환했었다. 폴리치아노는 그녀의 시가를 칭찬했었다. 그는 또한 그녀의 손자인 로렌초의 교사이기도 했었으며, 그들에게 그녀가 쓴 시를 읽어줬었다.

7. 사망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관절염습진을 앓았으며, 이러한 질병 때문에 토스카나 지역의 여러 온천에서 치료를 받았다.[1] 평생 질병을 앓던 루크레치아는 1482년 3월 25일, 54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사망했다.[2] 사망 당시 그녀에게는 많은 손주들이 있었다.[3]

8. 대중 문화

토르나부오니는 2016년 드라마 《메디치: 피렌체의 지배자들》과 《메디치: 피렌체의 영주》에서 발렌티나 벨레가 젊은 시절의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를 연기했다.[3][1]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즌에서는 사라 패리시가 나이 든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를 연기했다. 이 드라마는 그녀가 자신의 사업 거래가 아닌 아들의 사업을 대신해 메디치 은행을 운영하며, 파치 음모 7년 후인 1485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참조

[1] 웹사이트 Medici: Masters of Florence https://www.imdb.com[...] 2016-12-24
[2] 서적 イタリアの中世都市 山川出版社
[3] 웹인용 Medici: Masters of Florence https://www.imdb.com[...] 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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