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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드 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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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리스틴 드 피장은 136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태어난 프랑스 최초의 직업 여성 작가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프랑스 왕실 점성가 임명으로 파리로 이주하여,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고 프랑스어에 능통해졌다. 1379년 결혼 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생계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여성 옹호적인 작품과 정치적 저술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주요 저서로는 《여인들의 도시의 책》, 《세 가지 덕목의 책》, 《무예와 기사도의 책》 등이 있으며, 그녀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글을 쓰며 유럽 최초의 여성 작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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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드 피장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크리스틴 드 피장은 136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드 피장은 볼로냐 남동쪽에 위치한 피자노 마을(현재 몬테렌치오 자치구의 일부) 출신으로, 의사이자 점성술가였으며 베네치아 공화국 의원으로 일했다. 토마스 드 피장은 프랑스의 샤를 5세 궁정에 점성가로 임명되었고, 1368년 크리스틴은 4살의 나이로 파리로 이주했다.

이 시대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어린 크리스틴은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샤를 5세의 궁정에는 폭넓은 문헌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갖춰진 도서관이 있었고, 크리스틴은 이 책들을 접하며 프랑스어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1379년, 크리스틴은 공증인이자 왕실 서기인 에티엔 뒤 카스텔과 결혼했다. 1380년에 국왕 비서관 에티엔 드 카스텔과 결혼했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딸은 푸아시의 Prieuré Saint-Louis de Poissy프랑스어에서 마리의 동반자가 되어 수녀가 되었다.

크리스틴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결혼한 지 10년 되던 해인 1389년, 흑사병으로 남편 에티엔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1389년 6월 4일, 생 대교구의 대주교와 왕의 의원인 프랑수아 샹트프림이 그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에서 크리스틴은 "젊은 숙녀"이자 "에티엔 뒤 카스텔의 미망인"으로 불렸다.

20대 중반에 3명의 아이와 어머니, 조카를 부양하게 된 크리스틴은 생계를 위해 필사 필경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당시 유행하던 연애시를 쓰게 되었으며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저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드물었고, 크리스틴은 주목을 받아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1364-1389)

크리스틴 드 피장은 136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드 피장은 볼로냐 남동쪽에 위치한 피자노 마을(현재 몬테렌치오 자치구의 일부) 출신으로, 의사이자 점성술가였으며 베네치아 공화국 의원으로 일했다. 토마스 드 피장은 프랑스의 샤를 5세 궁정에 점성가로 임명되었고, 1368년 크리스틴은 4살의 나이로 파리로 이주했다.

이 시대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어린 크리스틴은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샤를 5세의 궁정에는 폭넓은 문헌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갖춰진 도서관이 있었고, 크리스틴은 이 책들을 접하며 프랑스어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1379년, 크리스틴은 공증인이자 왕실 서기인 에티엔 뒤 카스텔과 결혼했다. 1380년에 국왕 비서관 에티엔 드 카스텔과 결혼했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딸은 푸아시의 Prieuré Saint-Louis de Poissy프랑스어에서 마리의 동반자가 되어 수녀가 되었다.

크리스틴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결혼한 지 10년 되던 해인 1389년, 흑사병으로 남편 에티엔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1389년 6월 4일, 생 대교구의 대주교와 왕의 의원인 프랑수아 샹트프림이 그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결에서 크리스틴은 "젊은 숙녀"이자 "에티엔 뒤 카스텔의 미망인"으로 불렸다.

20대 중반에 3명의 아이와 어머니, 조카를 부양하게 된 크리스틴은 생계를 위해 필사 필경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당시 유행하던 연애시를 쓰게 되었으며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저술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드물었고, 크리스틴은 주목을 받아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다.

2. 2. 작가로서의 활동 (1389-1405)

크리스틴 드 피장은 프랑스 최초의 직업적인 여성 문필가로 간주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인 크리스틴은 아버지의 프랑스 왕 샤를 5세 궁정 부임으로 어린 시절 파리로 이주했다. 16세에 결혼했으나 10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녀와 어머니를 부양하게 되었다.

당시 여성 폄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틴은 남편의 재산을 둘러싼 소송을 겪으며 여성에게 불공정한 사회 관행을 경험하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크리스틴은 공부와 시를 통해 위안을 얻었으며, 궁정의 사랑을 찬미하면서도 그 이면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1393년까지 그녀는 사랑의 발라드를 썼는데, 이는 궁정 내 부유한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1399년 작품인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여성을 숭배하는 척하면서도 조롱하는 젊은 귀족을 비판하며 페미니스트적 면모를 드러냈다. 1402년 크리스틴은 장 드 뫼의 ''로망 드 라 로즈''에 나타난 여성관을 비판하며 "Querelle du Roman de la Rose"라는 문학 논쟁에 참여했다. 이 논쟁으로 크리스틴은 여성 옹호자로 유명해졌고, 프랑스 왕비 바이에른의 이사보에게 편지를 전달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크리스틴은 다작 작가로서 책 제작에도 참여하고, 격동적인 정치 시대에 후원 관계를 활용하여 유럽 최초의 전문 여성 문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후원중세 후기에 변화하여, 왕족들은 책을 의뢰하여 작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크리스틴은 단일 후원자 없이 왕실과 부르고뉴, 오를레앙 등 여러 파벌과 관계를 맺으며, 개별 후원자를 위한 프로젝트와 출판을 병행했다.

1400년, 크리스틴은 ''L'Épistre de Othéa a Hector''(''오테아의 헥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판했다. 이 책은 트로이의 헥토르가 지혜의 여신 오테아에게 정치술과 덕목을 배우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에게 헌정되었다. 크리스틴은 이후에도 이 책의 재헌정 판을 여러 후원자에게 바쳤다.

1403년에는 꿈의 알레고리 ''Le Chemin de long estude''를 썼는데, 여기에서 크리스틴은 쿠마이의 무녀와 함께 세계 상태에 대한 논쟁을 목격하며, 정의로운 군주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1404년에는 부르고뉴의 필리프 2세의 의뢰로 샤를 5세의 전기 ''Le Livre des fais et bonnes meurs du sage roy Charles V''를 썼다. 이 책에서 크리스틴은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제시하고, 왕실의 상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내렸다.

크리스틴의 저서 ''Le livre des trois vertus''의 한 페이지. 삽화에서 크리스틴은 세 가지 덕목에 의해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펜테실레이아 여왕과 아마존 군대가 트로이 군대를 돕기 위해 오는 모습을 그린 미니어처로, ''L'Épître Othéa a Hector''를 묘사함


1405년에는 ''Le Livre de la cité des dames'' (''여인들의 도시의 책'')과 ''Le Livre des trois vertus'' (''세 가지 덕목의 책'', ''여인들의 도시의 보물''로 알려짐)을 출판했다. ''여인들의 도시의 책''에서는 지적이고 왕족인 여성 지도자들을 소개하며 여성의 "이성"과 "공정함"이 다스리는 유토피아를 그렸다. 이 책은 여성에 의해 여성을 옹호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로 평가받는다. ''Le Livre des trois vertus''는 네베르의 마가렛에게 헌정되어 젊은 공주에게 필요한 덕목을 조언했다.

2. 3. 내전 시기 (1405-1430)

크리스틴 드 피장은 프랑스 최초의 전업 여성 문필가로 알려져 있지만, 1364년경 이탈리아베네치아에서 태어나 부모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가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점성술사이자 과학 고문으로 임명되어 파리로 이주했으며, 크리스틴은 서너 살 때 파리로 건너갔다. 16세에 에티엔 뒤 카스텔과 결혼했으나, 10년 후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어린 자녀 셋과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다. 당시 여성 폄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틴은 남편의 재산을 둘러싼 친척들과의 소송, 사기꾼들의 위협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남성과 여성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힘든 시기에 크리스틴은 공부와 시를 통해 위안을 찾았고, 이상화된 궁정의 사랑을 찬미하는 것을 넘어 그 이면의 문제점에도 주목했다. 1399년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편지(Epistre au Dieu d'Amour)에서는 여성을 숭배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조롱하고 폄하하는 젊은 귀족을 비판하며 페미니스트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1401년부터 1403년까지는 ≪장미 이야기에 관한 편지≫(Epistre sur le Roman de la Rose)를 통해 여성 옹호자로 이름을 알렸다. 이 편지들은 프랑스 왕비 바이에른의 이자보에게 전달되어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크리스틴은 오를레앙 공의 궁정을 떠나 샤를 6세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과 샤를 6세의 광증으로 인한 권력 공백, 그리고 왕의 동생과 삼촌 간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크리스틴은 이 두 진영의 화해를 원했고, 1407년 오를레앙 공이 부르고뉴 공작의 지시로 암살당하면서 프랑스가 내전에 돌입하자,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감옥에 대한 편지≫를 썼다.

1419년 부르고뉴 공작 장이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필리프 3세가 영국과 연합하면서 전세는 프랑스에게 불리해졌다. 1420년 이자보 여왕은 영국과 트루아 조약을 맺어 영국 왕 헨리 5세를 프랑스의 섭정으로 임명했고, 황태자 샤를 7세는 정통성을 빼앗겼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잔 다르크가 등장했고, 크리스틴은 잔 다르크 전(1430)을 써서 그녀를 찬양했다. 이 작품은 잔 다르크에 관한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크리스틴은 잔 다르크의 무공과 신앙심을 강조하며 그녀를 통해 '숙녀들의 도시'가 현실에서 실현될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화형당하면서 이러한 기대는 무산되었고, 크리스틴은 1430년대 초에 사망했다. ≪잔 다르크 전≫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405년 초, 프랑스는 전면적인 내전에 직면해 있었다.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인 겁 없는 요한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암살을 지시하면서 프랑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암살에 대한 공모 사실이 알려지자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에서 도망쳤지만, 오테 전투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둔 후 1408년 말 샤를 6세를 대신하여 프랑스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1410년, 크리스틴은 기사도에 관한 안내서인 ''Livre des fais d'armes et de chevalerie'' (『무예와 기사도의 책』)를 출판했다. 1411년 초, 크리스틴은 이 책에 대한 대가로 왕실 금고로부터 200 리브르를 받았다. 크리스틴은 베게티우스, 프론티누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같은 고전 작가들을 언급하며 사형, 군대 급여, 비전투원과 포로의 대우와 같은 현대 문제를 논의했다. 크리스틴은 결투 재판에 반대했지만, 전쟁은 하느님이 지배하고 통치하며 전쟁은 정의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것이라는 중세의 믿음을 분명히 했다.

크리스틴 드 피장이 프랑스 왕비 바이에른의 이자보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는 모습


1413년, 크리스틴은 ''Livre de la paix'' (『평화의 책』)를 출판하여 젊은 도팽에게 훌륭하게 통치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다. 크리스틴은 기옌 공작 루이에게 프랑스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을 격려하며, 정의로운 통치자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그렸다. 크리스틴은 단테의 영향을 받아 하늘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평화와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1414년, 크리스틴은 이자보 왕비에게 자신의 작품을 호화롭게 장식한 컬렉션을 헌정했다. 1418년, 크리스틴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가족을 잃은 여성들을 위한 위로를 담은 ''Epistre de la prison de vie Humaine'' (『인간의 삶의 감옥에 관한 편지』)를 출판했다.

크리스틴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젠더를 옹호하고 반여성적인 자세에 맞선 유럽 최초의 여성으로 여겨진다. 정치, 사회 문제를 주제로 다룬 다작한 저술가였으며, 내란기에 평화를 위해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크리스틴의 사후, 프랑스의 정치적 위기는 이자보 왕비의 유일한 생존 아들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으로 겁 없는 요한의 후계자인 필리프 3세가 1435년 아라스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해결되었다.

3. 작품 목록

크리스틴 드 피장은 방대한 양의 산문과 운문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은 정치 논문, 군주를 위한 거울, 서간, 시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다. 크리스틴은 특히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옹호하는 작품들을 통해 당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도덕적 가르침''(1395) (Enseignements moraux)
  •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서한''(1399) (L'Épistre au Dieu d'amours): 여성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을 조롱하고 폄하하는 젊은 귀족에 대해 비판.
  • ''오테아가 헥토르에게 보낸 서한''(1399–1400) (L'Épistre de Othéa a Hector)
  • ''장미 이야기''(1402) (Dit de la Rose): 장 드 뫼의 ''장미 이야기''에 대한 정면 비판.
  • ''사랑하는 이와 여인의 백 개의 발라드, 비를레, 론도''(1402) (Cent Ballades d'Amant et de Dame, Virelays, Rondeaux)
  • ''오랜 연구의 길(1403) (Le Chemin de long estude)
  • ''운명의 변환에 관한 책(1403) (Le Livre de la mutation de fortune): 부르고뉴공 필리프 2세가 감명을 받아 크리스틴에게 샤를 5세의 전기 집필을 의뢰하는 계기가 됨.
  • ''목가''(1403) (La Pastoure)
  • ''현명한 샤를 5세 왕의 행적과 훌륭한 풍습에 관한 책''(1404) (Le Livre des fais et bonnes meurs du sage roy Charles V): 샤를 5세에 관한 동시대 문헌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이자 중요한 사료.
  • ''여인들의 도시의 책(1405) (Le Livre de la cité des dames): 여성들이 존중받고 옹호되는 상징적인 도시를 창조. 보카치오와 단테의 작품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함.
  • ''세 가지 덕목의 책(1405) (Le Livre des trois vertus, 영어 제목은 "여인들의 도시의 보물"): 모든 신분의 여성들에게 유용한 자질을 함양하는 방법을 가르침.
  • ''크리스틴의 환상''(1405) (L'Avision de Christine)
  • ''정치체의 책''(1407) (Livre du corps de policie)
  • ''무기와 기사도의 행위에 관한 책''(1410) (Livre des fais d'armes et de chevalerie, 또는 "요새화에 관한 논문"): 군사 교본으로 사용되었으며,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영향을 줌.
  • ''평화의 책''(1413) (Livre de paix)
  • ''인생의 감옥에 관한 서한''(1418) (Epistre de la prison de vie humaine): 아쟁쿠르 전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작품.
  • ''일곱 개의 시편, 우의적 해석'' (Les sept psaumes allégorisés)
  • ''잔 다르크의 이야기(1429) (Ditié de Jehanne d'Arc):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의 효시이자 잔 다르크 생전에 간행된 유일한 책.


''여인들의 도시''의 삽화. 크리스틴이 서재에서 정직, 이성, 정의의 인격화된 모습 앞에 서 있으며, 정의와 함께 '여인들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크리스틴은 ''장미 이야기''에 나타난 여성 혐오적 표현에 대항하여 여성 옹호의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15세기에 발발한 프랑스 문학 사상의 큰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젠더를 옹호하고 반여성적인 자세에 맞선 유럽 최초의 여성으로 여겨진다.

4. 유산 및 영향

크리스틴 드 피장은 프랑스 최초의 직업적인 여성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생전에 41편의 시와 산문 작품을 발표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왕족이 그녀의 산문을 의뢰하고 동시대 지식인들이 그녀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크리스틴 드 피장은 고전 철학과 인문주의적 이상을 혼합한 스타일을 선보였지만, 여성에 대한 솔직한 변호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장 드 뫼의 《장미 이야기》, 마티외 드 부로뉴의 《애가》와 같은 여성 혐오적인 텍스트에 대항하여 여성들을 변호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여인들의 도시의 책(Le Livre de la cité des dames)》은 계속해서 출판되었으며, 《여인들의 도시의 보물(Le Livre des trois vertus)》은 15세기와 16세기에 왕족 여성들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1536년에도 프랑스어 판이 인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안 드 프랑스는 자신의 딸 수잔느 드 부르봉 공작부인을 위해 1504년에 쓴 《교육》(Enseignements)의 기초로 《여인들의 도시의 보물(Le Livre des trois vertus)》을 활용했다. 크리스틴의 공주들을 위한 조언은 프랑스와 포르투갈 왕가 사이에서 필사본이나 인쇄본으로 번역되어 유포되었다. 《여인들의 도시》는 안 드 보죄, 가브리엘 드 부르봉,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및 조르제트 드 몽트네를 포함한 16세기 프랑스 여성 작가들에 의해 인정받고 인용되었다.

크리스틴의 정치적 저술도 주목을 받았다. 《평화의 책》(Livre de la paix)은 인문주의자 가브리엘 노데에 의해 언급되었으며, 크리스틴은 드니 디드로, 루이 모레리, 프로스페르 마르샹에 의해 백과사전에 큰 비중으로 등재되었다. 1470년 장 V 드 뵈유는 크리스틴이 성이나 마을을 공성전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군대와 물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르 주방스》(Le Jouvence)에 재현했다. 《무예와 기사도의 서》(Livre des fais d'armes et de chevalerie)는 1488년 서적 인쇄업자 앙투안 베라르에 의해 전부 출판되었지만, 베라르는 이것이 베게티우스의 번역이라고 주장했다. 필립 르 누아르는 1527년에 크리스틴의 책을 요약하여 《전투의 나무와 기사도의 꽃》(L'Arbre des Batailles et fleur de chevaleri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무예와 기사도의 서》의 첫 페이지. 윌리엄 캑스턴이 1489년에 영어로 번역하여 인쇄했다.


15세기에는 《여인들의 도시의 책》의 네덜란드어판이 존재했으며, 1521년에는 영어로 출판되었다. 《무예와 기사도의 서》는 1489년 헨리 7세를 위해 윌리엄 캑스턴이 영어로 번역하여 1년 후 출판되었으며, 크리스틴을 저자로 명시했다. 《여인들의 도시의 책》과 《정치체의 서》의 영어판은 1521년에 크리스틴을 저자로 언급하지 않고 인쇄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궁정 도서관에 《여인들의 도시의 책》, 《오테아의 편지》, 《무예와 기사도의 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영국 여왕의 소유물 중에는 《여인들의 도시》의 장면이 담긴 태피스트리도 있었다.

19세기 초, 레이몽 토마시는 크리스틴의 정치 저작에 대한 개요를 발표하며, 이 저작들의 현대판이 출판되지 않았고, 정치 이론가로서 크리스틴은 잊혀져 가고 있다고 언급했다. 마틸드 레글과 마리-조제프 피네는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는 잊혀졌지만 다른 곳에서는 주목받았던 작가, 드 피장의 작품을 되살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에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여성이 자신의 성을 변호하기 위해 펜을 든 최초의 사례"라고 썼다. 주디 시카고의 1979년 작품 《디너 파티》에는 크리스틴 드 피장을 위한 식기 세트가 등장한다.

2024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크리스틴은 센 강을 따라 거대한 기단에서 솟아오른 금색 조각상으로 헌정받은 프랑스 역사에 기여한 10명의 선구적인 여성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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