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 파블로브나 라시스키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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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야 파블로브나 라시스키는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의 딸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세자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그녀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예나 대학교에 학과를 신설하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프란츠 리스트를 초빙했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초연을 지원했으며, 리스트의 피아노곡 《위안》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1859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여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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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야 파블로브나 라시스키 황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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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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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리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
출생 | 1786년 2월 16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 | 1859년 6월 23일 |
사망지 | 독일 연방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벨베데레 궁전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작위 정보 | |
작위 | 러시아 여대공 |
배우자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
통치 기간 | 1828년 6월 14일 – 1853년 7월 8일 |
혼인 정보 | |
배우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결혼 날짜 | 1804년 8월 3일 |
사망 날짜 | 1853년 7월 8일 |
자녀 | 파울 알렉산더 공자 마리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카를 알렉산더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가문 정보 | |
가문 | 로마노프 가 |
아버지 | 파벨 1세 |
어머니 | 마리야 표도로브나 (파벨 1세 황후) |
2. 생애
1786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파벨 1세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804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세자였던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으며, 이후 바이마르에서 생활했다. 바이마르 대공비로서 예술과 과학 후원에 힘쓰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53년 남편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이 사망한 후에는 공식적인 활동에서 물러났으며, 1859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여 대공가 묘소 내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

1786년 2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였던 파벨 페트로비치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표도로브나(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사이에서 다섯 번째 자녀이자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을 파블롭스크 궁전과 가치나 궁전에서 보냈다. 어릴 적 종두 시술의 후유증으로 가벼운 천연두를 앓아 외모가 다소 손상되어, 당대 기준으로 미인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 황제는 마리아의 피아노 실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손자가 아닌 손녀로 태어난 것을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이자 러시아 궁정의 카펠마이스터였던 주세페 사르티에게 음악을 배웠다. 1798년부터는 루트비히 빌헬름 테퍼 데 페르구손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2. 2. 결혼과 바이마르에서의 삶
1804년 8월 3일,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세자였던 카를 프리드리히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 부부는 바이마르로 떠나기 전까지 9개월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마리야가 바이마르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는데, 작가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는 "무도회, 불꽃놀이, 산책, 희극, 조명 등 화려함의 가장 축제적인 부분은 새로운 공주의 도착에 대한 광범위하고 진정한 기쁨이었다"고 묘사했다.바이마르에서 대공비로서 마리야는 예술과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예나 대학교에 여러 학과를 신설하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교수로 초빙했다. 또한 러시아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와 평생에 걸쳐 서신을 교환했으며,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그녀에게 자신의 유작이 된 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마리야는 프란츠 리스트를 궁정에 초청하여 연주회를 열었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 1850년 8월 리스트의 지휘로 바이마르에서 초연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리스트의 피아노곡 《위안》 중 일부는 마리야가 작곡한 주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곡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이 외에도 그녀는 대공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썼다.
1853년 남편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이 사망하자 마리야는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서 물러났다. 1855년에는 조카인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59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했으며, 남편 카를 프리드리히 등이 잠든 대공가 묘소 내에 그녀를 위해 세워진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2. 3. 예술과 과학 후원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예술과 과학 양쪽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는 문화적으로 발전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지던 대공국에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리야는 러시아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와 평생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프리드리히 실러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지막 시 중 하나를 헌정하였다. 실러는 마리야의 "음악과 그림에 대한 재능과 독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였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그녀를 당대 가장 뛰어난 여성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녀는 예나 대학교에 여러 학과를 신설하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하는 등 학문 발전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훔볼트가 진행한 강좌를 포함하여 예나 대학교의 여러 강좌에 직접 참석하기도 하였다. 또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Literarische Abende|리터라리셰 아벤데de" (문학의 밤)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지적 교류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후원 활동은 여러 기관의 소장품 확충에도 기여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840년 오리엔탈리스트 요한 구스타프 슈티켈이 설립한 대공 오리엔탈 동전 캐비닛이 있다. 그녀는 바이마르의 팔크 연구소 설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프란츠 리스트를 궁정에 초청하여 1842년 그를 "Kapellmeister extraordinaire|카펠마이스터 엑스트라오디네르de" ('카펠마이스터 특별')로 임명하였다. 리스트의 지휘 아래 1850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 바이마르에서 초연되는 등, 바이마르는 당대 음악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리스트의 피아노곡 《위안》(Consolations|콘솔라시옹프랑스어)은 마리야 파블로브나가 작곡한 주제를 일부 사용하였으며,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하지만 만년에는 청각 장애가 심해져 어려움을 겪었다. 서덜랜드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레베슨-고어는 1820년대에 이미 그녀가 "매우 귀가 어두워졌지만, 훌륭한 매너를 지녔다"고 기록하였다.[1] 이러한 청각 문제로 인해 1850년 《로엔그린》 초연 당시에도 오페라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자녀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남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세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 파울 알렉산더 카를 콘스탄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805년 9월 25일 – 1806년 4월 10일): 유아기에 사망했다.
- 마리 루이제 알렉산드리나 (1808년 2월 3일 – 1877년 1월 18일): 프로이센의 카를 왕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아우구스타 루이제 카테리네 (1811년 9월 30일 – 1890년 1월 7일): 독일 제국의 빌헬름 1세와 결혼하여 독일 황후가 되었고 자녀를 두었다.
- 카를 알렉산더 아우구스투스 요한 (1818년 6월 24일 – 1901년 1월 5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이 되었으며, 네덜란드의 소피 공녀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참조
[1]
서적
Diary of a Tour in Sweden, Norway, and Russia, in 1827, with Letters
https://books.google[...]
1879
[2]
웹사이트
Herzog Friedrich Eugen (1732-1797) - Briefwechsel des Herzogs mit dem kaiserlichen Hause von Russland, 1795-1797 - 3. Schreiben der jungen Großfürsten Alexander und Konstantin und Großfürstinnen Alexandrina, Anna, Katharina, Elisabeth, Helene, Maria
http://www.landesarc[...]
Hauptstaatsarchiv Stuttgart
2021-11-22
[3]
웹사이트
Maria Paulowna letters
https://oac.cdlib.or[...]
Hoover Institution Library & Archives.
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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