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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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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플라워호는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청교도 102명을 태우고 북아메리카로 향한 배이다. 원래는 와인을 운반하던 화물선이었으며, 1620년 66일간의 항해 끝에 케이프코드에 도착했다. 메이플라워호는 메이플라워 서약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졌으며,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는 미국 건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300주년 기념 행사와 기념 우표 발행, 후손 협회 설립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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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호 - [배(Ship)]에 관한 문서
배 정보
선박 종류네덜란드 화물 플루트
톤수180+ 톤
갑판 길이
전체 길이
갑판 수약 4개
수용 인원알 수 없음, 그러나 플리머스 식민지로 약 135명 수송
선박 이력
국가잉글랜드
깃발[[파일:Union flag 1606 (Kings Colors).svg|60px]]
이름메이플라워
선주크리스토퍼 존스 (배의 )
첫 항해1609년 이전
퇴역1622–1624년
운명1624년경 로더하이트 해체업자에 의해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큼
선장크리스토퍼 존스
항해
승선 인원약 135명
출발일1620년 9월 6일
도착일1620년 11월 11일
목적지플리머스 식민지
기타 정보
관련 사건메이플라워 서약

2. 역사적 배경

1527년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3년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을 선포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영국 성공회로 독립하였으나, 헨리 8세가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기에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 문제에 있어 중도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이에 반대하는 청교도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며 성공회와 갈등했다.

1603년 제임스 1세 즉위 후 청교도들은 종교 개혁에 대한 기대를 품었으나,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제임스 1세는 성공회를 지지하며 청교도들을 박해했다. 이에 일부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와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다.

1608년 네덜란드 라이덴으로 망명한 영국 개신교 신자들은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 실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서 분리주의자로 살았으나, 잉글랜드에서는 불법적인 급진주의자로 여겨졌다.[5] 네덜란드에서의 삶은 고된 노동과 건강 문제, 시민 불안, 스페인의 재침략 위협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5] 잉글랜드 제임스 1세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으며 독립적인 잉글랜드 교회 집회를 금지하는 조건을 걸었다.[6] 이러한 요인들은 분리주의자들이 신대륙으로 항해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5]

북아메리카 정착은 이전의 실패 사례들과 원주민의 공격 위협으로 인해 위험한 시도로 여겨졌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신대륙 이주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5][7]

2. 1. 잉글랜드 종교 개혁과 청교도의 등장

1527년 헨리 8세의 이혼(혼인무효)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3년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을 선포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는 1533년에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재혼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를 파문하자, 1534년 잉글랜드 의회는 수장령을 공표하여[84]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 이후 종교개혁 운동이 영국으로 들어와 탄력을 받기 시작했으며, 성상 파괴, 순례 폐지, 성인 숭배 폐지 등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는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가 아니었으며, 헨리 8세가 신봉하는 믿음도 가톨릭 그 자체였다. 1539년 잉글랜드 교회의 6개 신조를 통해 영국 교회가 가톨릭 교회적인 성격을 유지함을 선언하였다.

1559년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믿음의 옹호자"(에미리트)로 인식하여 왕위지상령을 채택하고, 반대로 개신교적인 법을 폐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억지로 창문을 열 수 없는 것처럼, 종교 문제도 강제로 해결할 수 없다"라고 판단하여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공존할 수 있는 중도적인 종교 정책을 지향하였다.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 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안을 만들었는데, 의식은 가톨릭을 따르되 교리는 칼뱅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85] 매슈 파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앙고백》을 제정, 영국 성공회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타협안에 반대하며 급진 개혁을 추구했던 청교도는 중도 노선을 지향하는 성공회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청교도들은 종교 개혁에 대해 큰 기대를 품었으나,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인 제임스 1세는 영국 성공회를 강력히 지지하였고 청교도들은 이에 실망하였다. 엄격한 계율 준수와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청교도들은 성공회와 많은 갈등을 겪으며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86] 결국 잉글랜드에서는 더 이상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청교도들 중 일부가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라이덴에 망명하여 살고 있던 약 400명의 영국 개신교 신자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자신들이 과도함과 남용이라고 느꼈던 많은 문제들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다른 청교도들처럼 잉글랜드에서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1608년에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네덜란드에서 분리주의자로 살기로 선택했다. 분리주의자로서 그들은 고국인 잉글랜드에서 불법적인 급진주의자로 여겨졌다.[5]

아이작 클래스 반 스와넨부르크의 라이덴 양모 산업 노동자 그림


네덜란드에서의 삶은 그들에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들은 양모 청소와 같은 고되고 힘든 일에 내몰렸고, 이는 다양한 건강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그 나라의 주요 신학자들 중 일부는 공개 토론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시민 불안을 야기했으며, 스페인이 수년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네덜란드 인구를 포위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5]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이후 스페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고, 네덜란드에서 독립적인 잉글랜드 교회 집회를 금지하는 조건을 걸었다.[6] 종합하면, 이것들은 분리주의자들이 신대륙으로 항해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는 제임스 왕과 그의 주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이 있었다.[5]

북아메리카 정착 시도는 이전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들의 아메리카 여행에 대한 열망은 대담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1607년에 설립된 제임스타운에서는 첫 해에 대부분의 정착민이 사망했다. 새로 도착한 500명 중 440명이 겨울의 처음 6개월 동안 기아로 사망했다.[5]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은 또한 원주민의 끊임없는 공격 위협에 대해 알게 되었다.[5] 그러나 이 새로운 땅으로 가는 것에 대한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이 가기를 원하신다는 그들의 확신이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진실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그들은 썼다, "그분께서 우리 마음의 단순함에 따라 우리의 노력을 은혜롭게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5][7]

2. 2. 청교도의 네덜란드 망명과 신대륙 이주 결정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지만,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제임스 1세는 영국 성공회를 강력하게 지지하였고 청교도들은 이에 실망하게 되었다.[86] 종교적 박해가 이어지자,[86] 잉글랜드에서 더 이상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청교도들 중 일부는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필그림 (플리머스 식민지)#역사

1608년, 네덜란드 라이덴에 망명하여 살고 있던 약 400명의 영국 개신교 신자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개혁에 실패한 것에 불만을 품고,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네덜란드에서 분리주의자로 살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분리주의자들은 잉글랜드에서 불법적인 급진주의자로 여겨졌다.[5]

네덜란드에서의 삶은 그들에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양모 청소와 같은 고되고 힘든 일에 내몰려 건강 문제가 발생했다.[5] 또한, 공개 토론으로 인한 시민 불안과 스페인의 재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5]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으면서 네덜란드에서 독립적인 잉글랜드 교회 집회를 금지하는 조건을 걸었다.[6] 이러한 요인들은 분리주의자들이 신대륙으로 항해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5]

북아메리카 정착 시도는 이전에 실패했기에, 아메리카 여행에 대한 열망은 대담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1607년에 설립된 제임스타운에서는 첫 해에 대부분의 정착민이 사망했고, 새로 도착한 500명 중 440명이 기아로 사망했다.[5] 원주민의 공격 위협도 있었다.[5]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이 가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힘을 발휘했다.[5][7]

북아메리카로의 항해 중 기도하는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포드와 마일스 스탠디쉬. 로버트 월터 웨어의 1844년 그림.


네덜란드를 떠나기로 결정한 후, 그들은 두 척의 배를 구입하여 대서양을 건너기로 계획했다. 스피드웰호가 먼저 그들을 라이덴에서 잉글랜드로 수송하고, 더 큰 메이플라워호가 승객과 물품을 수송할 계획이었다.[12]

모든 분리주의자들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더 젊고 강한 사람들이 먼저 가고,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따라갈 수 있도록 결정했다. 교회가 미국 이민을 처음 제안한 존 로빈슨은 항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라이덴에 남기로 결정했다.[12]

로빈슨은 교인들에게 이민의 이유를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는 것에 비유하며 설명했다.[8] 피터 마셜은 "청교도와 청교도들은 실제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8] 따라서 청교도들이 미국에서 "영적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것은 운명으로 여겨졌다.[8][19]

떠나야 할 때, 배의 선임 지도자인 에드워드 윈슬로는 이별의 장면을 눈물이 쏟아지고 슬픔에 겨워 서로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묘사했다.[9]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별을 슬프고 비통한 작별이라고 묘사했다.

1620년 7월 26일(구력), 잉글랜드 남해안으로의 여정은 3일이 걸렸고, 배는 사우스햄튼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청교도들은 먼저 더 큰 배인 ''메이플라워''가 물품을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12]

3. 메이플라워 호

메이플라워 호는 1609년부터 1622년까지 크리스토퍼 존스 선장이 지휘한 화물선이었다.[87][88] 1620년의 유명한 대서양 횡단 항해도 그가 지휘했다. 모항은 런던 로드히스이며, 항해 후 영국으로 돌아온 뒤 1622년 존스가 사망하고 1년 뒤인 1623년 로드히스에서 해체되었다.

배의 상세한 제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게는 180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상선의 전형적인 크기로 길이 27.4m ~ 33.5m, 폭 약 7.6m로 추정된다.[87] 승무원은 25명에서 30명 정도였으며, 존 알덴을 포함하여 5명의 이름만 알려져 있다.[88]

3. 1. 선박의 역사와 특징

메이플라워호는 주로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스페인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화물(주로 와인)을 운반하는 화물선이었다.[87][88] 1609년부터 1622년까지 크리스토퍼 존스(en) 선장이 지휘했으며, 유명한 대서양 횡단 항해도 그가 지휘했다.[62] 모항은 런던의 로드히스(en)였다. 역사상 찬란하게 빛나는 항해를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1622년 3월에 존스가 사망했고, 그 1년 뒤인 1623년에는 로드히스에서 해체되었다. 그 폐재를 사용하여 버킹엄셔의 조던스라는 퀘이커 마을 근처에 Mayflower Barn이 세워졌다고도 하지만, 의심스러운 설이다.[89]

배의 치수에 대한 상세 정보는 불분명하지만, 중량이 180이라는 점과 당시 상선의 전형적인 크기를 고려해 볼 때, 전체 길이 약 27.4-33.5m, 전체 폭 약 7.6m로 추정된다.[87]

승무원은 25명에서 30명이었지만,[88] 존 알덴을 포함해 5명밖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88]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쓴 메이플라워호 항해의 유일한 기록에 따르면, 사우샘프턴에서 통 제작 일을 하던 존 알덴은 메이플라워호가 보급을 위해 사우샘프턴에 기항했을 때 고용되었다. 희망과 야망에 넘치는 젊은이로, 미국 도착 후 그대로 남을지, 메이플라워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갈지는 본인의 자유였지만, 남아서 결혼했다.[69]

메이플라워 2호, 오리지널 ''메이플라워''의 복제품,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박해 있다.


''메이플라워''는 17세기 초 영국 상선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던 설계인, 사각 돛과 선수루 선수, 그리고 승무원과 주 갑판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높고 성과 같은 구조의 선미루와 고물을 갖추고 있었다. 선미에는 높이의 사각형 선미루가 있어 배가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특히 1620년 가을과 겨울에 북대서양의 편서풍에 맞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영국에서 아메리카까지의 항해는 두 달 이상 걸렸다. ''메이플라워''의 1621년 4월-5월 런던으로의 귀항은 그 절반도 안 걸렸으며, 당시에는 동일한 강풍이 항해 방향으로 불어왔다.[16][18]

''메이플라워''의 정확한 치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선수에서 선미 구조물 끝까지 약 정도, 가장 넓은 지점은 약 , 흘수선 아래 용골 바닥은 약 정도였을 것이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화물 적재 능력이 180톤으로 추정했으며,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각 180갤런을 담는 통 180개를 실을 수 있었다.[18] 배의 일반적인 레이아웃은 다음과 같았다.

  • 세 개의 돛대: 미즌(선미), 메인(중앙), 포어, 그리고 선수 부분에 스프릿 세일

  • 세 개의 주요 층: 주 갑판, 건 데크, 화물창


선미의 주 갑판에는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의 선실이 있었고, 크기는 약 였다. 그 앞에는 조타실이 있었는데, 아마도 배의 장교들을 위한 선실이 있었고, 배의 나침반과 항해 조정을 위한 채찍간 (방향타 연장)이 있었다. 조타실 앞에는 밧줄이나 케이블을 당기는 데 사용되는 수직 축인 캡스턴이 있었다. 주 갑판의 가장 앞쪽, 선수 바로 뒤에는 선원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 조리사가 있는 포캐슬 공간이 있었다. 선원들이 잠을 자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선미루 갑판은 선미의 선미루와 선장 존스의 선실 위에 있는 배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 갑판에는 선미루가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상선에서 차트실이나 선장의 부관을 위한 선실이었지만, ''메이플라워''에서는 승객들이 잠을 자거나 화물칸으로 사용했을 수 있다.

건 데크는 승객들이 항해 중에 거주하던 곳으로, 크기는 약 이고 천장은 이었다. 만약 갈등이 발생하면 대포를 밖으로 발사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포구들이 있어 위험한 장소였다. 건 룸은 갑판의 선미 구역에 있었는데, 화약과 탄약을 보관하는 공간이므로 승객들은 접근할 수 없었다. 건 룸에는 또한 배의 선미에서 발사하는 데 사용되는 소형 대포인 선미 추격포 한 쌍이 있을 수도 있었다. 건 데크의 선수 구역에는 조타실의 캡스턴과 유사한 기능으로, 배의 주 닻을 올리고 내리는 데 사용되는 윈들러스가 있었다. 건 데크의 승객들은 주 갑판으로 가기 위해 격자창을 통해 올라가는 계단이 없었으며, 나무 또는 밧줄 사다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건 데크 아래에는 승객들이 대부분의 식량과 기타 물품, 옷과 침구를 보관했던 화물창이 있었다. 갑옷, 머스켓총, 화약과 탄환, 칼, 탄띠와 같은 승객들의 개인 무기와 군사 장비도 보관했다. 또한 순례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도구와 신세계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와 식기도 보관했다. 아이작 알러턴, 윌리엄 멀린스 등 일부 순례자들은 무역 상품을 배에 실었으며, 이 또한 화물창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메이플라워''에는 변기가 없었으며, 승객과 선원은 그 부분에 대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건 데크 승객들은 바다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갑판이나 벌크헤드에 고정된 양동이를 요강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메이플라워''는 중무장했으며, 가장 큰 대포는 무게가 약 이고, 포탄을 거의 1마일(1,600m)까지 발사할 수 있는 미니언 대포였다. 또한 약 의 세이커 대포와 약 의 기반 대포 2문이 있었으며, 3~5온스(85~140g)의 포탄을 발사했다. 그녀는 건 데크의 좌현과 우현에 최소 10문의 무기를 실었으며, 7문의 대포는 장거리용, 3문의 소형 대포는 근거리에서 선미에서 발사되었으며 머스켓총알이 채워져 있었다. 선장 존스는 플리머스 식민지를 강화하기 위해 4문의 무기를 하역했다.[18]

3. 2. 항해 준비와 스피드웰 호의 문제

필그림은 네덜란드를 떠나기로 결정한 후,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두 척의 배를 구입할 계획이었다. 스피드웰호(Speedwell)라는 이름의 작은 배가 먼저 그들을 라이덴에서 잉글랜드로 수송할 예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더 큰 메이플라워호를 사용하여 승객과 물품 대부분을 수송할 계획이었다.[12]

모든 분리주의자들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필요한 여행 물품을 구매하기에는 예산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인들은 더 젊고 강한 사람들이 먼저 가고,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따라갈 수 있도록 결정했다. 존 로빈슨의 지도 아래 교회가 미국 이민을 처음 제안했지만, 그는 항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라이덴에 남기로 결정했다.[12]

로빈슨은 교인들에게 왜 이민을 가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들의 성전을 짓는 데서 벗어나는 것에 비유했다.[8] 피터 마셜은 "청교도와 청교도들은 실제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8] 따라서 청교도와 청교도들이 미국에서 이와 유사하게 "영적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것은 운명으로 여겨졌다.[8][19]

떠나야 할 때가 되자, 배의 선임 지도자인 에드워드 윈슬로는 이별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항해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배까지 왔지만, 헤어지기 전 슬픔에 겨워 서로 말을 할 수 없었다."[9]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또 다른 지도자이자 플리머스 식민지의 두 번째 총독이 될 사람은 이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잉글랜드 남해안으로의 여정은 3일이 걸렸고, 배는 1620년에 사우스햄튼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청교도들은 먼저 더 큰 배인 ''메이플라워''가 물품을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12]

1620년 7월 중순, 약 65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는 런던을 출발했다.[11] 그 후 이 배는 템스 강을 따라 잉글랜드 남부 해안으로 내려가 햄프셔주 사우샘프턴에 정박했다. 거기에서 7월 22일, 네덜란드에서 레이던 회중의 일원들을 태우고 온 ''스피드웰''과의 만남을 기다렸다.[12] 두 배 모두 7월 말까지 아메리카로 출발할 계획이었지만, ''스피드웰''에서 누수가 발견되어 수리해야 했다.[13]

두 배는 8월 5일경 아메리카로 출항했지만, ''스피드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누수가 발생하여 수리를 위해 데번주 다트머스로 돌아와야 했다. 수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지만, 잉글랜드 남서쪽 끝에 있는 랜즈엔드에서 32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스피드웰''은 세 번째 누수가 발생했다. 9월 초였고, 그들은 ''스피드웰''을 포기하고 승객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에서의 정착의 미래 성공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배에 막대한 자금이 낭비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매우 심각했다. 두 배는 잉글랜드 플리머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20명의 ''스피드웰'' 승객이 이제 과밀 상태가 된 ''메이플라워''에 합류했고, 다른 사람들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14]

그들은 바람이 불 때까지 7일을 더 기다렸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우리는 불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바람을 기다리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량은 잉글랜드 해안을 떠나기 전에 절반이나 먹어치울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항해가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가 그 나라에 도착했을 때 한 달 치의 식량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걱정했다.[15] 브래드포드에 따르면, ''스피드웰''은 "소유주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며... 많은 항해를 했다"며 개조되어 항해에 적합했다. 그는 ''스피드웰''의 선장이 아메리카에서의 굶주림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누수를 유발함으로써 항해를 중단하기 위해 "교활함과 속임수"를 사용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16]

원래 계획은 2척의 배로 항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 척의 배는 ''스피드웰''이라는 다소 작은 배로, 네덜란드의 델프스하벤에서 필그림의 일부를 사우샘프턴까지 수송했다.

1620년 8월 15일(8월 5일)에 2척의 배는 사우샘프턴을 출항했지만[70], ''스피드웰''은 누수가 심해져 8월 27일(8월 17일)에 다트머스에서 수리하게 되었다.

수리를 마치고 다시 대서양을 향해 출항했지만, ''스피드웰''에서 다시 누수가 발생하여 플리머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스피드웰''을 조사해도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필그림들은 이 배의 승무원이 1년에 가까운 항해 계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괴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71]

4. 신대륙으로의 항해

1620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90]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한 영국인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북아메리카)으로 떠났다. 66일간의 항해를 거쳐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 케이프코드 끝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78]

메이플라워호는 1620년 11월 21일 (11월 11일), 케이프코드 끝에 도착했다. (1997년 위성사진)


이들은 당시 두 번째로 큰 이민단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허드슨강 하구의 현재 뉴욕시 인근으로 당시 영국의 버지니아 정착민의 북쪽 끝 땅이었다. 버지니아 정착민은 미국 최초의 영국 이주민 땅에서 이들보다 13년 먼저 1607년에 도래하여 건설된 ‘제임스타운’에 정착하였다.[91]

메이플라워호는 항로를 이탈하여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케이프코드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해 겨울, 승객의 반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 겨울 동안 배 안에서 살아남은 승객들은 플리머스 해안으로 이동했고, 메이플라워호는 그해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에 잉글랜드로 되돌아갔다.[78]

플리머스 식민지의 두 번째 지사인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필그림들이 해안에 발을 디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이렇게 좋은 항구에 도착하여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광대하고 격렬한 바다를 건너오게 하시고, 그 모든 위험과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그들의 발을 굳고 안정된 땅, 그들의 적절한 요소에 놓아주신 하늘의 하나님을 축복했다.[28]

정착자들은 처음 닻을 내린 곳에서 상륙하여 눈 덮인 주변을 탐험했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무인 마을을 발견했다. 인공적인 언덕을 파헤쳐보니 일부는 옥수수를 저장해 두었고, 다른 곳은 묘지였다.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에 따르면, 옥수수를 훔치고 묘지를 파헤쳐 모독했기 때문에[73] 원주민과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74] 필브릭은 또한 이들이 몇 주에 걸쳐 프로빈스타운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트햄 부근까지 탐험하고, 원주민이 저장해 둔 것을 약탈했다고 한다.[75] 1620년 12월, 노셋족과의 우호적이지 않은 만남(현재 First Encounter Beach)을 거쳐, 만 건너편 플리머스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브래드퍼드의 ''History of Plymouth Plantation''에 따르면, 옥수수를 보여주기 위해 조금만 배로 가져왔고, 이후 필요한 곡물을 다른 저장 구멍에서 가져왔으며, 6개월 후 원주민에게 대가를 지불했을 때 기꺼이 받았다고 한다.

겨울 동안 승객들은 메이플라워호 선내에서 지내며 괴혈병, 폐렴, 결핵 등의 질병에 시달렸다.[62] 그 결과, 겨울을 살아남은 승객은 약 절반인 53명이었고, 승무원도 약 절반이 사망했다.[62] 봄이 되자 해안에 오두막을 짓고,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에 정착자들은 메이플라워호를 떠났다.[62]

1621년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에서 잉글랜드로 출항하여[62] 5월 16일(율리우스력 5월 6일)에 도착했다.

4. 1. 플리머스 출항과 대서양 횡단

1620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한 영국인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북아메리카)으로 떠났다.[90] 66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 케이프코드 끝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78]

원래 목적지는 허드슨강 하구의 현재 뉴욕시 인근이었으나, 항로 이탈과 늦은 도착으로 케이프코드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91]

9월 초, 서부 강풍으로 북대서양은 항해하기 위험했다. 메이플라워호의 식량은 사우샘프턴 출발 시 이미 부족했고, 한 달 이상 지연되며 더욱 부족해졌다. 승객들은 작은 배의 좁은 공간에 갇혀 힘든 대서양 항해를 할 수 없는 상태로 지쳐 있었다.[16]

1620년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를 출항했을 때, 승객 102명과 선원 25~30명을 포함하여 총 130명 정도가 승선했다.[17] 약 180톤의 메이플라워호는 주로 잉글랜드와 보르도를 오가며 의류와 와인을 운송하는 화물선으로, 대양 항해용 선박은 아니었다.[6] 대서양 횡단 4년 만에 고철로 팔렸을 정도로 상태도 좋지 않았다.[6] 배의 앞뒤가 높이 솟아 있었으며, 길이는 약 약 30.48m, 가장 넓은 곳은 약 약 7.62m였다.[16][18]

승객 102명을 위한 생활 공간은 비좁았는데, 크기는 약 20by (1600ft2), 천장은 약 약 1.52m 높이였다.[16]

항해 전반부는 잔잔한 바다와 맑은 하늘 아래 진행되었다. 이후 북동풍이 배를 강타하고 파도가 갑판을 덮치는 등 날씨가 변했다.[23][16] 항해 중 유일한 사망자인 윌리엄 버튼은 바다에 수장되었고,[15][14] 오세아너스 홉킨스라는 아기가 태어났다.[14] 폭풍우로 존 하울랜드가 배 밖으로 떨어졌지만, 선원이 던진 밧줄을 잡고 구조되었다.[15]

대양 한가운데에서 배의 주 빔이 손상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으나,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금속 잭스크루로 빔을 고정하여 항해 가능성을 유지했다.[15][14]

배에는 도구, 음식, 무기, 가축(개, 양, 염소, 가금류), 약 6.40m 크기의 보트 2척, 포병 등이 실려 있었다.[23]

원래 ''메이플라워'' 호와 ''스피드웰'' 호, 2척으로 항해할 예정이었다. 1620년 8월 15일(율리우스력 8월 5일) 사우샘프턴을 출항했으나,[70] ''스피드웰'' 호의 누수로 8월 27일(율리우스력 8월 17일) 다트머스에서 수리했다.

수리 후 대서양으로 출항했으나, ''스피드웰'' 호에서 다시 누수가 발생하여 플리머스로 돌아갔다. 결국 66일간의 항해는 메이플라워 호 단독으로 이루어졌고,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 플리머스의 메이플라워 계단 부근에서 출항했다.[70] 메이플라워 호는 콘월의 뉴린에 기항하여 물을 보충했다.[72]

목적지는 북버지니아 허드슨강 하구 부근이었으나, 악천후로 항로를 벗어났다. 늦은 출발로 케이프코드에 도착했을 때는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법 질서 확립과 분쟁 진정을 위해, 메이플라워 호가 케이프코드에 닻을 내린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 이후 배 위에서 사회 계약설에 기초한 메이플라워 서약을 맺었다.[62]

4. 2. 케이프코드 도착과 메이플라워 서약

1620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90]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한 영국인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북아메리카)으로 떠났다. 66일간의 항해를 거쳐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 케이프코드 끝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78]

당시 이들은 두 번째로 큰 이민단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허드슨강 하구의 현재 뉴욕시 인근으로 당시 영국의 버지니아 정착민의 북쪽 끝 땅이었다. [91]

메이플라워호는 항로를 이탈하고 늦게 도착하여 이미 겨울이었기 때문에 케이프코드에 머물면서 월동하였다. 그해 겨울, 승객의 반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 겨울 동안 배 안에서 살아남은 승객들은 플리머스 해안까지 이동했고, 〈메이플라워호〉는 그해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에 잉글랜드로 되돌아가게 된다.[78]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기 전 배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을 체결하여,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하나의 시민정치체를 만들고 필요한 법률과 공직을 제정하여 이에 복종한다는 것을 서약하였다. 이러한 식민지의회의 설치와 자치체의 형성은 그 뒤에 건설된 다른 식민지에도 도입되었다.[92]

메이플라워 서약은 대략 다음의 내용으로 41명이 서명하였다.[92][93]

  • 영국왕에 충성을 다하며
  •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기약하고
  • 자치사회를 형성하여 질서와 안전을 도모하며
  • 평등한 법률을 만들어 관제를 정한 다음, 여기에 종속할 것을 맹세한다.


상륙 직전 배 안에서 맺은 ‘메이플라워 서약’은 다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정부의 설립을 결정한 것으로서,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케이프코드를 발견한 후[25][24] 버지니아 식민지로 남쪽으로 항해하려 했지만, 거센 겨울 바다가 그들을 프로빈스타운 항구로 알려진 케이프코드 후크의 항구로 되돌아오게 했고, 닻을 내렸다.[6][25]

닻을 내리기 전 남성 필그림과 비 필그림 승객들이 메이플라워 콤팩트를 작성하고 서명했다.[6] 콤팩트의 결의안 중에는 법적 질서를 확립하고 내부의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6][27][28][29] 마일스 스탠디시는 계획된 식민지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훈련을 시행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으므로 규칙을 준수하도록 선택되었다.[6] 자치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합의하자, 그들은 해안으로 상륙했다.[30]

5.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과 초기 정착 과정

1620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90] 존 카버,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한 영국인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북아메리카)으로 떠났다. 66일간의 항해를 거쳐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 케이프코드 끝에 도착했다.[78]

원래 목적지는 허드슨강 하구의 현재 뉴욕시 인근이었으나, 항로를 이탈하여 케이프코드에 도착했다.[91]

1620년 12월 7일(율리우스력 11월 27일), 크리스토퍼 존스 선장의 지휘 아래 34명(승객 24명, 선원 10명)이 정착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탐험을 시작했다. 그러나 순례자들은 추운 겨울 날씨에 익숙하지 않아 탐험 중 큰 어려움을 겪었다. 브래드퍼드는 "우리 중 사망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이 탐험에서 죽음의 원인을 얻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16][25]

존스는 순례자들이 정착지를 찾자마자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선원들이 질병으로 시달리자 플리머스 항에 머물렀다. ''메이플라워''호는 1620-21년 겨울 동안 뉴플리머스 항에 정박해 있다가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에 영국으로 출항했다. 5월 16일(율리우스력 5월 6일) 런던에 도착했는데, 이는 아메리카로 항해하는 데 걸린 시간의 절반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34]

5. 1. 혹독한 겨울과 생존

메이플라워호는 항로를 이탈하고 늦게 도착하여 케이프코드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해 겨울, 승객의 절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78]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 겨울 동안 배 안에서 생존한 승객들은 플리머스 해안으로 이동했고, 메이플라워호는 그해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78]

플리머스는 첫 겨울 동안 굶주림의 위험과 적절한 쉼터 부족 등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6] 순례자들은 11월 중순쯤 땅이 얼어붙어 식물을 심을 수 없다는 것과 눈보라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서두르는 바람에 낚싯대를 가져갈 생각도 못했다.[6]

처음부터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움이 매우 중요했다. 한 식민지 개척자는 "우리는 옥수수를 더 파서 두세 바구니 가득, 콩 한 자루를 찾았습니다. ... 모두 10부셸 정도 되었는데, 씨앗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신의 도우심으로 이 옥수수를 찾았습니다."라고 기록했다.[31]

겨울 동안 승객들은 메이플라워호에 머물면서 괴혈병, 폐렴, 결핵 등이 발생했다. 병이 끝난 후에는 승객 53명만 남았고, 선원들의 절반도 사망했다. 봄에 그들은 육지에 오두막을 짓고,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에 메이플라워호에서 하선했다.[32]

5. 2. 원주민과의 관계

처음에는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움이 매우 중요했다. 한 식민지 개척자는 "우리는 옥수수를 더 파서 두세 바구니 가득, 콩 한 자루를 찾았습니다. ... 모두 10부셸 정도 되었는데, 씨앗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신의 도우심으로 이 옥수수를 찾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몇몇 인디언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기록했다.[31] 브래드퍼드 총독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너대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에 따르면, 정착민들이 옥수수를 훔치고 묘지를 파헤쳐 모독했기 때문에 원주민과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73][74] 필브릭은 또한 그들이 몇 주에 걸쳐 프로빈스타운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트햄 부근까지 탐험하고, 원주민이 저장해 둔 것을 약탈했다고 한다.[75] 1620년 12월, 노셋족과의 우호적이지 않은 만남(그 장소는 현재 First Encounter Beach라고 불린다)을 거쳐, 그들이 만 건너편 플리머스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브래드퍼드의 ''History of Plymouth Plantation''에 따르면, 그들은 옥수수를 보여주기 위해 조금만 배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 후, 필요한 곡물을 다른 저장 구멍에서 가져왔고, 6개월 후에 원주민에게 대가를 지불했을 때,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적고 있다.

6. 메이플라워 호의 유산

''메이플라워'' 300주년 기념 우표, 1920년


1620년부터 1640년까지 아메리카 식민지로의 모든 항해 중에서, ''메이플라워'' 호의 필그림 파더스의 첫 번째 횡단은 발견의 시대 동안 유럽에서 신세계로의 이주 역사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상징적이고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4]

6. 1. 미국 건국의 상징

필그림호 ''메이플라워''는 미국의 초기 유럽 식민지 개척의 상징으로서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6] ''메이플라워''호의 항해와 플리머스 식민지에 대한 주요 기록은 지도자이자 훗날 총독이 된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편지와 일기에서 나온다. 그의 상세한 항해 기록은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주요 자료 중 하나이며, ''메이플라워''호 승객이 쓴 플리머스 식민지의 가장 완벽한 역사이다.[47]

''플리머스에서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 (1914) 제니 A. 브라운스콤 작


미국의 국경일인 추수감사절은 1621년 필그림들이 처음으로 개최한 추수감사절 축제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메이플라워'' 정착민들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기도 행사와 저녁 식사였다.[4]

''메이플라워''호의 300주년 기념 상륙은 1920년과 1921년 초 미국 전역과 유럽 국가에서 기념 행사로 기념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대표단이 뉴욕에서 만났다. 뉴욕 시장 존 프란시스 하일런은 연설에서 필그림의 메이플라워 협약의 원칙이 미국 독립 선언의 전조라고 말했다.[48] 미국의 역사가 조지 뱅크로프트는 이를 "헌법적 자유의 탄생"이라고 불렀다.[6] 캘빈 쿨리지 주지사도 마찬가지로 협약의 형성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메이플라워'', 필그림 300주년 기념 반달러, 1920–21


미국 전역에 20개의 ''메이플라워'' 역사 협회가 있어, 기념 행사는 1920년의 대부분 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몇 년 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결과,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려는 원래 계획은 취소되었다.[50]

정부는 선박을 뒷면에, 승객 윌리엄 브래드포드를 앞면에 묘사한 필그림 300주년 기념 반달러를 발행했다.

메이플라워 후손 일반 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에 3,500만 명의 메이플라워 후손"이 있다고 한다.[51]

6. 2. 메이플라워 2세 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메이플라워호의 항해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해군 설계사 William A. Baker|윌리엄 A. 베이커영어에 의해 가능한 한 원본을 충실히 재현한 배가 설계되어, 잉글랜드의 데번에서 1956년 9월 22일에 진수되었고, 1957년 봄에 출항했다. 앨런 빌리에 선장 지휘 하에, 1957년 6월 13일에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 배는 지금도 플리머스 항구에 계류되어 있으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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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문서 イングランドでは当時[[ユリウス暦]]を、ヨーロッパ本土では[[グレゴリオ暦]]を使っていた。そのため、文献には両方の日付が見られる。ここでは混乱を避けるためグレゴリオ暦の後にユリウス暦を括弧つきで表記する。
[64] 문서 なお、[[スペイン人]]の新大陸入植は[[イギリス人]]よりも早く、[[1565年]]には[[フロリダ半島]]に[[セントオーガスティン]]入植地を、また[[1610年]]にはヌエボ・メヒコ植民地(現[[ニューメキシコ州]])の首都[[サンタフェ (ニューメキシコ州)|サンタフェ]]をそれぞれ建設している。
[65] 문서 Harvnb|Philbrick|2006|pp=4-5
[66] 웹사이트 The Mayflower after the Pilgrims http://www.mayflower[...] MayflowerHistory.com 200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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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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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웹사이트 Mayflower II Background Information http://www.plimoth.o[...] 2008-09-24
[78] 웹인용 The Pilgrim-Fathers’ Voyage with the 'Mayflower' (history) http://www.shipsonst[...] ShipsOnStamps.org 2010-11-11
[79] 서적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평민사
[80] 서적 기독교 죄악사 (하) 평단문화사
[81] 서적 한권으로 보는 미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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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백과사전 메이플라워호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84] 서적 한권으로 보는 미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85] 서적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재미있는 교회사이야기 호산
[86] 서적 한권으로 보는 미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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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문서 The Mayflower's Crew
[89] 웹사이트 The Mayflower after the Pilgrims http://www.mayflower[...] 2011-01-21
[9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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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간행물 미국의 건국정신과 헌법정신의 함의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93] 서적 미국정당정치사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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