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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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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도루는 닌메이 천황의 아들로, 838년에 태어나 895년에 사망한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다. 872년 좌대신에 올랐으나, 876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섭정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칩거했다. 이후 고코 천황의 치세에 정계에 복귀하여 태정관의 수반이 되었으며, 최종 관위는 좌대신 종일위였다. 그는 '겐지 이야기'의 히카루 겐지의 모델로 여겨지며, 시오가마와 관련된 인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조간 8년(866년) 오텐몬의 변이 발생하여 반노 요시오는 실각, 미나모토노 마코토는 칩거에 들어가 출사를 멈췄고, 결국 조간 10년(868년)에 미나모토노 마코토는 사고사했다. 이 기간 동안 조간 9년(867년)에는 우대신 후지와라노 요시사스와 대납언 다이라노 타카무네 등 대신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도루는 급속도로 승진했다. 조간 12년(870년) 대납언으로 승진했고, 조간 14년(872년)에는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사망하면서 태정관의 수반이 되어 좌대신에 임명되었다.[4]

닌나 3년(887년) 종일위에 서위되었다.[4] 우다 천황 치세인 간표 3년(891년) 관백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사망하자, 도루는 다시 태정관의 수반이 되었다. 간표 7년(895년) 8월 25일 훙거하였다.[4] 향년 74세. 최종 관위는 좌대신 종일위였으며, 사후 정일위가 증위되었다.[4]

2. 1. 출생과 초기 관직

닌메이 천황 치세인 조와 5년(838년)에 원복하여 정사위하로 직서되었고, 조와 6년(839년)에 미나모토노 도루로서 신적강하하여 시종에 임명되었다. 닌메이 천황 치세 말기인 조와 15년(848년)에 우근위 중장에 임명되었고, 가쇼 3년(850년) 정월에 종삼위에 서위되어 29세에 공경이 되었다. 몬토쿠 천황 즉위 후 같은 해 5월에 우위문독에 임명되어 계속해서 무관을 맡았으며, 사이코 3년(856년)에 참의로 승진했다.[12]

세이와 천황 치세에 들어서도 텐안 4년(859년)에 정삼위, 조간 6년(864년)에 중납언으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같은 해 3월부터 조간 11년(869년) 1월까지는 무쓰 데와 안찰사도 겸임했다. 이때 이복 형인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대납언 반노 요시오가 불화 상태에 있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도루, 미나모토노 킨 형제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투서가 있어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5]

2. 2. 순조로운 승진과 무쓰데와 안찰사 겸임

세이와 천황 치세에 들어 덴안 4년(859년)에 정삼위에 오르고, 조간 6년(864년)에 중납언으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같은 해 3월부터 조간 11년(869년) 1월까지 무쓰 데와 안찰사를 겸임했다.[5] 이 무렵, 이복 형인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대납언 반노 요시오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같은 해 겨울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도루, 미나모토노 킨 형제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투서가 들어와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5]

2. 3. 오텐몬의 변과 좌대신 임명

조간 12년(872년)에 좌대신에 올랐다.[4] 조간 18년(876년) 우대신으로 있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요제이 천황섭정으로 내정된 것에 항의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버리고 자택에서 칩거했다.[6] 그 후 8년이 지난 884년고코 천황이 즉위하고 나서야 정무에 복귀했다. 요제이 천황의 양위 논쟁이 있을 때 미나모토노 도오루는 "어째서 가까운 황윤(皇胤)만 보고, 나는 계속 시중이나 들란 말인가"라며 자신의 위치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며, 자신도 황윤의 한 명으로서 양위 후보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겐지라는 이유로 섭정이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에게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지만[12], 사실관계는 부족하다.

세이와 천황 치세에 들어서도 텐안 4년(859년)에 정삼위, 조간 6년(864년)에 중납언으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같은 해 3월부터 조간 11년(869년) 1월까지는 무쓰 데와 안찰사도 겸임했다. 이때, 이복 형인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코토와 대납언 반노 요시오가 불화 상태에 있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미나모토노 마코토가 도루, 미나모토노 킨 형제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투서가 있어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5] 그 후, 조간 8년(866년)에 오텐몬의 변이 발생하여 반노 요시오는 실각, 미나모토노 마코토는 칩거하여 출사를 멈추고, 결국 조간 10년(868년)에 미나모토노 마코토도 사고사했다. 더불어, 이 기간인 조간 9년(867년)에는 우대신 후지와라노 요시사스와 대납언 다이라노 타카무네와 같은 대신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도루는 급속도로 승진한다. 조간 12년(870년)에 대납언으로 승진하고, 조간 14년(872년)에는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훙거에 따라 태정관의 수반이 되어 좌대신에 임명되었다.[4]

조간 18년(876년) 스스로 동궁부로서 섬겼던 사다아키 친왕(요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약 15세 연하로 태정관의 서열도 아래인 우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와라노 모토츠네가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정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도루는 상표를 내고 자택에 은거했다.[6]

겐케이 8년(884년) 요제이 천황의 양위로 인해 황사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을 때 "어찌할까. 가까운 황윤을 찾으면, 도루도 있소이다" (자신도 황윤의 한 사람이니 후보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주장했지만, 겐지로 강하한 후에 즉위한 예는 없다는 이유로, 모토츠네에게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오오카가미』태정대신 모토츠네전에 남아 있다.[4]. 그러나 당시, 도루는 사저에 칩거 중이었고, 사후인지는 불분명하다. 고코 천황이 즉위하자 도루는 정무에 복귀했다. 그 후, 고코 천황이 붕어하자, 천황의 아들은 모두 신적강하하여 겐지(源氏)가 되었지만, 모토츠네는 겐지로 강하했던 미나모토노 사다미(源定省)를 황족으로 복귀시켜 즉위시켰다(우다 천황)[7].

2. 4. 후지와라 모토쓰네와의 갈등과 칩거

872년 좌대신이 되었다. 876년 우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요제이 천황의 섭정으로 내정되자 이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버린 뒤 자택에 칩거했다. 그 후 8년 뒤인 884년고코 천황이 즉위하자 정무에 복귀했다. 요제이 천황의 양위 논쟁이 있었을 때, 미나모토노 도오루는 "어째서 가까운 황윤(皇胤)만 보고, 나는 계속 시중이나 들란 말인가"라며 자신의 위치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다. 자신도 황윤의 한 명으로서 양위 후보로 인정받기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겐지라는 이유로 섭정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에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12], 사실관계는 부족하다.

876년 스스로 동궁부로서 섬겼던 사다아키 친왕(요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약 15세 연하로 태정관의 서열도 아래인 우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와라노 모토츠네가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정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도루는 상소를 내고 자택에 은거했다.[6]

884년 요제이 천황의 양위로 인해 황사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을 때 "어찌할까. 가까운 황윤을 찾으면, 도루도 있소이다" (자신도 황윤의 한 사람이니 후보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주장했지만, 겐지로 강하한 후에 즉위한 예는 없다는 이유로, 모토츠네에게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오오카가미』태정대신 모토츠네전에 남아 있다.[4] 그러나 당시, 도루는 사저에 칩거 중이었고, 사후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고코 천황이 즉위하자 도루는 정무에 복귀했다.

2. 5. 정계 복귀와 사망

조간 18년(876년) 스스로 동궁부로서 섬겼던 사다아키 친왕(요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약 15세 연하로 태정관의 서열도 아래인 우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정에 임명되었다. 이에 도루는 상표를 내고 자택에 은거했다.[6]

겐케이 8년(884년) 요제이 천황양위로 인해 황사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을 때, 도루는 "어찌할까. 가까운 황윤을 찾으면, 도루도 있소이다" (자신도 황윤의 한 사람이니 후보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겐지로 강하한 후에 즉위한 예는 없다는 이유로, 모토쓰네에게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오오카가미』태정대신 모토쓰네전에 남아 있다.[4] 다만, 당시 도루는 사저에 칩거 중이었고, 이 일화가 사후인지는 불분명하다. 고코 천황이 즉위하자 도루는 정무에 복귀했다. 그 후, 고코 천황이 붕어하자, 천황의 아들은 모두 신적강하하여 겐지(源氏)가 되었지만, 모토쓰네는 겐지로 강하했던 미나모토노 사다미(源定省)를 황족으로 복귀시켜 즉위시켰다(우다 천황).[7]

닌나 3년(887년) 종일위에 서위되었다.[4] 우다 치세의 간표 3년(891년) 관백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사망하고, 도루는 다시 태정관의 수반이 되었다. 간표 7년(895년) 8월 25일 훙거[4]. 향년 74세. 최종 관위는 좌대신 종일위. 사후 정일위의 증위를 받았다.[4]

3. 인물과 평가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실존 모델로 유력하게 거론된다.[13]

겐 토루 가와라인터지 비


무쓰 데와 아사쓰시로 임명받은 도루가 교토 로쿠조 가와라 인(현재의 쇼세이엔)에 시오가마[8]의 풍경을 본뜬 정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세 이야기 등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며, 제아미가 지은 노 "도루"의 소재가 되었다. 노 "도루"에서는 무쓰의 시오가마에 대해 들은 도루가 나니와쓰 해안 (오사카 만)에서 매일 바닷물을 길어 교토까지 운반하여 소금을 굽게 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시오가마에서는 소금 만들기(모시오야키)가 이루어졌으며, 여기서는 도루가 그것을 재현하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고킨와카슈』에 수록된 기노 쓰라유키의 "그대가 없으니 연기가 끊긴 시오가마의 해안, 쓸쓸하게 멀리 보이네"는 도루 사후 소금을 굽는 연기가 끊어져 버린 것을 노래한 것이다.

도루의 저택이 있던 곳은 현재 교토시시모교구 혼시오가마초 및 시오가마초 주변으로 여겨지며, 부근에는 "엔소잔(塩竈山)" 산고를 가진 조토쿠지가 있다. 가와라 인은 도루 사후 아들 노보루가 상속받았고, 우다 상황에게 헌상되었으며, 상황이 머무는 동안 도루의 망령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곤자쿠모노가타리슈』, 『고단쇼』 등에 전해진다[4]. 사가에 있던 별장 세이카칸의 고지는 오늘날 사가 샤카도 세이료지이다. 우지에 지은 별장이 있던 땅은 후에 뵤도인이 되었다.

칙찬 가인으로서, 『고킨와카슈』, 『고센와카슈』에 각각 2수씩 와카 작품이 실려 있다[4][9]. 오구라 백인일수에서는 '''가와라 좌대신'''으로 알려져 있다.

오에노 마사후사의 『혼초 신센덴』에는 가와라 인 대신 시종 이름으로, 선인이 되지 못한 인물로 수록되어 있다[10]. 선도를 배우고 있다는 측근에게 "나는 곧 선인이 될 수 있지만, 도루에게는 선골이 있으니 함께 선경으로 가자"라고 권유받지만, 처자식에게 허락을 구하고 가겠다고 대답하자, 처자식에게 애정을 쏟는 것으로는 도저히 선도를 달성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는 이야기이다.

4. 미나모토노 도루와 시오가마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실존 모델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무쓰 국 무쓰 데와 아사쓰시로 임명받은 도루는 교토의 로쿠조 가와라 인(현재의 쇼세이엔)에 시오가마[8]의 풍경을 본뜬 정원을 만들었다. 이는 이세 이야기 등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며, 제아미가 지은 노 "토루"의 소재가 되었다. 노 "토루"에서는 무쓰의 시오가마에 대해 들은 도루가 나니와쓰 해안(오사카 만)에서 매일 바닷물을 길어 교토까지 운반하여 소금을 굽게 했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시오가마에서는 소금 제조(모시오야키)가 이루어졌으며, 여기서는 도루가 이를 재현하려는 모습이 묘사된다. 기노 쓰라유키가 『고킨와카슈』에 수록한 "그대가 없으니 연기가 끊긴 시오가마의 해안, 쓸쓸하게 멀리 보이네"는 도루 사후 소금 굽는 연기가 끊긴 것을 노래한 것이다.

조간 6년 (864년) 무쓰데와 안찰사로 임명된 미나모토노 도루가 고쿠후다가성으로 부임하여 시오가마에 살았다는 전설이 미야기현시오가마시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시오가마시 이즈미가오카(시오가마 고등학교 주변)는 과거 미나모토노 도루가 저택을 지었다는 전설에서 "토루가오카"라고도 불린다.

미나모토노 도루가 다가성 고쿠후에 직접 부임했다는 전승에 대해서는, 당시 상류 귀족이 지방관으로 임명될 경우 대리인을 파견하는 요닌이 일반적이었고, 주나곤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천황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도루가 직접 지방으로 부임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요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이토 요시유키)

미나모토노 도루는 시오가마 및 주변 지역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시오가마시 혼마치의 마치카도 박물관(구 에비야 여관)에는 미나모토노 도루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다가시 우키시마 신사 경내에는 미나모토노 도루를 "증정 1위 미나모토 아손 토루 경"으로 모시는 대신궁 신사(오토도노미야진자)가 있다. 시오가마시의 과자점 "바이카도"에서는 미나모토노 도루 관련 상품 "검은 콩가루 쿠키 토루(유)"를 판매하고 있다.

5. 미나모토노 도루를 모시는 신사

도루를 모시는 신사는 시가현 오쓰시의 융 신사,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의 고토우라 신사, 미야기현 다가조시 우키시마 신사 경내의 대신궁 신사(오토도노미야진자), 교토부 교토시 니시키텐만구 경내의 시오가마 신사 등이 있다.

6. 관력

해당 관직역임 기간비고
정사위하 (직서)838년 11월 7일원복
시종839년 윤정월 2일
겸 사가미노카미841년 정월 12일
오미노카미842년 9월 8일
오미노카미847년 정월 12일
미마사카노카미시기 불명
우콘노에츄조, 미마사카노카미848년 2월 14일여고
종삼위850년 정월 7일
우에몬노카미850년 5월 17일
겸 이세노카미851년 8월
겸 이세노카미854년 8월 28일
산기856년 9월
겸 빗추노카미857년 정월
겸 빗추노카미, 정삼위859년정월 13일: 겸 빗추노카미, 11월 19일: 정삼위
겸 오미노카미860년 정월 16일
사에몬노카미863년 2월 10일
주나곤, 무쓰 데와 안사쓰시864년정월 16일: 주나곤, 3월 8일: 무쓰 데와 안사쓰시
거무쓰 데와 안사쓰시869년 정월 13일
다이나곤870년 정월 13일
사다이진872년 8월 25일
종이위, 도구후873년정월 7일: 종이위, 정월 13일: 도구후
지토구후876년 11월 29일
정이위 (방관상)877년 정월 3일
칙수대검884년 3월 5일
종일위887년 11월 17일
훙거 (사다이진 종일위), 증 정일위895년8월 25일: 훙거 (사다이진 종일위), 8월 28일: 증 정일위


7.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사가 천황
어머니오하라 젠시(大原全子, 오하라 마무로의 딸)
아내후지와라노 후사쓰구의 딸
아들미나모토노 탄 (845년 - 915년)
생모 불명의 자녀


참조

[1]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2] 웹사이트 Minamoto no Tōru • . A History . . of Japan . 日本歴史 https://historyofjap[...] 2022-07-30
[3] 웹사이트 清涼寺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4]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5巻 岩波書店 1984-12
[5] 간행물 日本三代実録
[6] 간행물 日本三代実録
[7] 간행물 日本三代実録
[8] 문서 塩竈の浦
[9] 간행물 勅撰作者部類
[10] 서적 不老長寿への旅:ニッポン神仙伝 集英社
[11] 간행물 公卿補任
[12] 간행물 大鏡
[13] 간행물 今昔物語,江談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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