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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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하세는 일본 기록에서 숙신(肅慎)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정확한 발음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 시대에 사도섬에 숙신이 방문한 기록, 사이메이 천황 시대의 숙신 토벌, 텐무 천황과 지토 천황 시대의 숙신 방문 및 관위 수여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미시하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에미시, 퉁구스계 민족, 오호츠크 문화인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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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하세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미시하세 (粛填) |
로마자 표기 | Mishihase |
역사 | |
시대 | 고대 |
관련 문화 | 오호츠크 문화 |
언어 및 민족 | |
관련 민족 | 아이누 니브흐 |
관련 언어 | 아이누어 니브흐어 |
문화 | |
주요 유적 | 모요로 패총 |
특징 | 수렵 어업 채집 |
기타 | |
참고 | 일본에서는 에미시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음. |
관련 인물 | 샤쿠샤인 (아이누 지도자, 일부 학계에서 미시하세의 후예로 추정) |
2. 숙신의 명칭과 정체
숙신(肅慎)이라는 명칭은 일본 기록에서 "미시하세" 또는 "아시하세"로 읽혔는데, 그 정확한 발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미(見)’자를 생략한 ‘미’음을 나타내는 변체가나가 가타카나의 ‘아(ア)’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혼란이 발생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미시하세, 아시하세"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시기 | 사건 |
---|---|
킨메이 천황(欽明天皇) 때 | 사도섬(佐渡島)에 숙신이 옴 |
사이메이 천황(斉明天皇) 때 | 아베히라후(阿倍比羅夫)의 숙신 토벌 |
텐무 천황(天武天皇)・지토 천황(持統天皇) 때 | 숙신의 방문과 관위 수여 |
『일본서기』와 『속일본기(続日本紀)』에 6세기 이후부터 기록된 "미시하세, 아시하세"가 어떤 집단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2. 1. 에미시 동일설
숙신을 에미시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숙신"이라는 명칭이 유서 깊은 이름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를 차용하여 에미시를 지칭했다는 주장이다.[4][5]2. 2. 퉁구스계 민족설
숙신을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퉁구스계 민족과 동일시하는 견해이다. 이는 흑수말갈 등 북방 민족과의 유물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된다.[4][5]2. 3. 별개 민족설
미시하세(みしはせ일본어) 또는 아시하세(あしはせ일본어)가 어떤 집단인가에 대한 여러 설 중 하나는, 이들이 에미시나 중국 문헌의 숙신과는 다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견해이다. 니브흐, 알류트 등이 후보로 거론된다.[4][5]2. 4. 발해, 말갈, 고구려 연관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6세기 이후 등장하는 "미시하세(みしはせ), 아시하세(あしはせ)"는 여러 집단으로 추정될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720년 말갈국 기록과 544년 사도섬(佐渡島) 숙신 도래 기록을 바탕으로 발해(渤海 (国)), 말갈(靺鞨), 고구려(高句麗) 북동부 등 과거 숙신으로 여겨졌던 중국 동북부~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어떤 집단이라는 설이다.[4][5]2. 5. 오호츠크 문화인설
미시하세를 오호츠크 문화인과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다. 오호츠크인은 유전자 분석 결과[4][5] 현재 사할린 북부에 사는 니브흐 등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홋카이도(北海道)의 오호츠크해(オホーツク海) 연안과 사할린 등지에 당시 유적이 보인다.3. 일본 기록에 나타난 숙신
사이메이 천황 시대에는 왜(일본)가 에미시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 일환으로 에쓰 국의 국수(國守)였던 아베노 히라후가 왜와 숙신을 여러 차례 토벌했다. 『일본서기』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다. 아베노 히라후의 숙신 토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섹션에 정리되어 있다.
676년 11월, 신라 사절단과 함께 숙신인들이 왜(倭)를 방문했다.[1] 지토 천황 시대에는 숙신인들에게 관직을 부여하고, 에미시와 함께 물품을 하사했다.[3] 해당 하위 섹션에 관련 기록이 있다.
3. 1. 긴메이 천황 시대
544년 12월(음력), 긴메이 천황 5년에 일본서기에 숙신에 대한 일본에서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사도섬에 숙신인이 도착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1]고시국(越国, 지금의 호쿠리쿠 지방)의 보고에 따르면, 사도섬 북쪽 미나베(御名部) 해안에 숙신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 머물렀다. 봄과 여름에는 고기를 잡아 먹었다. 사도섬 사람들은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귀신이라고 말하며, 감히 가까이하지 않았다.[1]
섬 동쪽 우무(禹武) 마을 사람들이 밤송이를 주워 익혀 먹으려고 했다. 재 속에 넣어 구웠는데, 밤송이 껍질이 변하여 두 사람의 형상이 되어 불 위로 한 자 남짓 뛰어올랐다. 시간이 지나 서로 싸웠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 마당에 두었더니, 역시 전과 같이 날아다니며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점을 치는 사람이 “이 마을 사람들은 반드시 가뭄귀신에게 홀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한 대로 물건이 빼앗겼다.[1]
그래서 숙신 사람들은 세나미가와(瀬波河) 어귀로 옮겼다. 어귀의 신의 힘은 강력했다. 사람들은 감히 가까이하지 않았다. 목이 말라 그 물을 마셨는데, 죽은 사람이 거의 절반에 달했다. 뼈는 바위굴에 쌓였다. 세나미쿠마(肅愼隈)라고 부른다.[1]
3. 2. 사이메이 천황 시대
사이메이 천황 시대에는 왜(일본)가 에미시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 일환으로 에쓰 국의 국수(國守)였던 아베노 히라후가 왜와 숙신을 여러 차례 토벌했다. 『일본서기』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다.아베노 히라후의 숙신 토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 정리되어 있다.
3. 2. 1. 아베노 히라후의 숙신 토벌
사이메이 천황 시대에는 왜(일본)가 에미시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 일환으로 에쓰 국의 국수(國守)였던 아베노 히라후에 의한 왜와 숙신 토벌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아베노 히라후에 의한 6건의 정벌 기록이 있다.연도 | 내용 |
---|---|
사이메이 천황 4년 (658년) 4월 | 180척의 배를 이끌고 왜를 토벌[1] |
사이메이 천황 4년 (658년) 당해[2] | 숙신 토벌과 불곰 헌상[3] |
사이메이 천황 5년 (659년) 3월 | 180척의 배를 이끌고 왜를 토벌[4] |
사이메이 천황 5년 (659년) 3월 주석 | 숙신 토벌과 포로 헌상[5] |
사이메이 천황 6년 (660년) 3월 | 숙신 토벌[6] |
사이메이 천황 6년 (660년) 5월 | 숙신 포로 헌상 |
『일본서기』에 있는 숙신에 관한 기록은 내용이 매우 유사하며, 토벌 기간은 모두 3월부터 4월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실제로 토벌이 몇 번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본고 선장(本居宣長)은 원래 토벌은 한 번뿐이었고, 4년, 5년, 6년으로 세 번 행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진신의 난 등으로 인한 기록 혼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4년, 5년, 6년이라는 세 가지 전승이 생겨났고, 『일본서기』 편찬자가 그 세 가지 전승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아베노 히라후가 숙신 토벌을 위해 간 곳은 와타리시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불곰은 혼슈에는 없고 홋카이도와 사할린에만 서식한다. 아베노 히라후가 불곰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어, 와타리시마를 홋카이도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불곰은 북반구에 널리 서식하고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해에 아베노 히라후는 숙신을 정벌하여 살아있는 불곰 2마리와 불곰 가죽 70장을 헌상했다. 다른 기록에는 아베노 히라후가 숙신과 싸우고 돌아와 포로 39명을 바쳤다고 한다.
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의 기록을 보면, 아베노 히라후는 2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숙신국을 정벌했다. 아베노 히라후는 무쓰 국의 에미시를 자신의 배에 태우고 큰 강가에 도착했다. 그때 와타리시마의 에미시 천 명 남짓이 해변에 모여 강을 향해 진을 쳤다. 그중 두 사람이 “숙신의 수군이 많이 와서 우리를 죽이려 하므로, 강을 건너 (조정에)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외쳤다. 아베노 히라후는 두 에미시에게 적이 숨어 있는 곳과 배의 수를 물었고, 에미시는 “배는 20척 남짓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베노 히라후는 사자를 보내 숙신을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아베노 히라후는 비단, 무기, 철 등을 해변에 쌓아두어 숙신을 유인했다. 숙신은 수군을 정렬하고 깃털을 나무에 매달아 깃발로 삼아 접근했다. 배에서 나온 두 노인이 비단 등을 살핀 후, 옷을 갈아입고 비단 한 조각을 들고 돌아갔다. 잠시 후 노인이 다시 와서 갈아입은 옷과 비단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아베노 히라후는 다시 숙신을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숙신은 헤로베 섬(와타리시마의 다른 이름)으로 돌아가 화친을 청했지만, 아베노 히라후는 들어주지 않았다. 숙신은 자기들의 보루에 의지하여 싸웠고, 이때 노토(能登) 臣(臣) 마미타쓰(馬身龍)가 숙신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숙신은 패배하여 자기 아내와 자식을 죽였다. 또한 아베노 히라후는 이(夷) 50여 명을 바쳤고, 숙신 47명에게 대접하였다.
3. 3. 텐무, 지토 천황 시대
676년 11월, 신라 사절단과 함께 숙신인들이 왜(倭)를 방문했다.[1] 지토 천황 시대에는 숙신인들에게 관직을 부여하고, 에미시와 함께 물품을 하사했다.[3]3. 3. 1. 텐무, 지토 천황 시대의 숙신 관련 기록
676년 11월, 신라 사절이 숙신인을 데리고 왜(倭)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1] 694년에는 숙신인에게 관직을 부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2] 이들은 신라 사절과 함께 온 것으로 추정된다. 696년에는 왜(蝦夷)와 숙신에게 물품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텐무 5년 11월 3일, 신라 사찬(신라 8등관) 김청평(金清平)이 정치 상황을 보고했다. 이때 숙신인 7명이 김청평 일행을 따라 왜(倭)에 왔다.[4]
지토 천황 8년, 당나라 사람 7명과 숙신인 2명에게 무광사(武廣肆, 후의 종7위하) 등의 벼슬을 주었다.[5]
지토 천황 10년, 고시(越) 와타리시마(渡島) 섬의 에미시(蝦夷) 이나리무시(伊奈理武志)와 숙신 시라스에소(志良守叡草)에게 비단 겉옷(袍), 바지, 붉은 비단, 도끼 등을 하사했다.[6]
4.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의 숙신 관련 기록
『日本書紀』와 『續日本紀』에는 숙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은 숙신의 정체, 일본과의 관계,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일본서기에는 긴메이 천황 시대부터 지토 천황 시대까지 숙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며, 특히 사이메이 천황 시대 아베노 히라후의 숙신 토벌 기록이 상세하게 나타난다.[1] 덴무 천황 시대에는 신라 사절이 숙신을 데리고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6] 몬무 천황 시대에는 숙신인에게 관직을 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토 천황 시대에는 왜와 함께 숙신에게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속일본기에는 말갈국에 사신을 보내 풍속을 살피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1]
4. 1. 『일본서기』의 기록
『日本書紀』에는 긴메이 천황 시대부터 지토 천황 시대까지 숙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특히 사이메이 천황 시대 아베노 히라후의 숙신 토벌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1]- 긴메이 천황 5년 (544년) 12월 (음력): 사도에 숙신인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1] 이들은 귀신이라고 불렸으며,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
- 사이메이 천황 시대: 왜의 적극적인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아베노 히라후에 의한 숙신 토벌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6건의 정벌 기록이 있다.[1]
연도 | 내용 |
---|---|
사이메이 천황 4년 (658년) 4월 | 180척의 배를 이끌고 왜를 토벌.[1] |
사이메이 천황 4년 (658년) 당해(是歳) | 숙신 토벌과 불곰 헌상.[2] |
사이메이 천황 5년 (659년) 3월 | 180척의 배를 이끌고 왜를 토벌.[1] |
사이메이 천황 5년 (659년) 3월 주석 | 숙신 토벌과 포로 헌상.[3] |
사이메이 천황 6년 (660년) 3월 | 숙신 토벌.[4] |
사이메이 천황 6년 (660년) 5월 | 숙신 포로 헌상.[5] |
- 덴무 천황 5년 (676년) 11월: 신라 사절이 숙신을 데리고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6]
- 몬무 천황 8년 (694년): 숙신인에게 관직을 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신라 사절과 함께 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 지토 천황 10년 (696년) 3월: 왜와 함께 숙신에게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숙신 토벌은 내용이 유사하고 기간도 3~4월로 비슷하여 실제 횟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진신의 난 등으로 인한 기록 혼란으로 4년, 5년, 6년의 세 가지 전승이 생겼고, 일본서기 편찬자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고 주장했다.[1]
아베 씨가 숙신 토벌을 위해 간 와타리시마(渡島)의 위치는 불확실하나, 불곰이 혼슈에는 없고 홋카이도와 사할린에만 있다는 점, 아베 씨가 불곰을 헌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홋카이도로 보는 설도 있다.[1]
4. 2. 『속일본기』의 기록
遣島津軽津司従七位上諸鞍男|견도진경진사종칠위상제안남|겐시마즈쓰가루쓰노쓰카사주나나이조모로노키미쿠라오일본어 등 6인을 말갈국(발해)에 보내어 그 풍속을 살피게 했다.[1]참조
[1]
웹사이트
Q 奥尻島の意味は
https://web.archive.[...]
Hokkaido Shimbun
2002-11-09
[2]
서적
Japanese Demon Lore: Oni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https://archive.org/[...]
University Press of Colorado
[3]
웹사이트
オホーツク文化人とモヨロ貝塚 網走
http://kamuimintara.[...]
Rinyu Kanko
1987-08-01
[4]
뉴스
消えた北方民族の謎追う 古代「オホーツク人」北大が調査。朝日新聞2009年2月4日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09-02-04
[5]
뉴스
オホーツク人のDNA解読に成功ー北大研究グループー 北海道新聞2012年6月18日朝刊
http://www.okhotsk.o[...]
北海道新聞
2012-06-18
[6]
웹사이트
オホーツク文化人とモヨロ貝塚 網走
http://kamuimintara.[...]
Rinyu Kanko
198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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