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스미트 작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민스미트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기만 작전으로, 독일군을 속여 시칠리아 침공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고안되었다. 연합군은 시신을 활용하여 가짜 정보를 담은 문서를 스페인 해안에 흘려 독일군의 전략적 판단을 왜곡하려 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시칠리아가 아닌 발칸 반도를 공격 목표로 오인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군은 이후 발견된 진본 서류조차 무시하게 되었으며, 이 작전은 전쟁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만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3년 영국 - 누가 느릅나무 안에 벨라를 넣었습니까?
1943년 영국 해글리 숲에서 발견된 여성 해골 사건인 누가 느릅나무 안에 벨라를 넣었습니까?는 피해자가 벨라라는 사실 외에 정확한 사망 원인과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 사건으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다. - 1943년 스페인 - 영국해외항공 777편 격추 사고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해외항공 소속 더글러스 DC-3 항공기가 독일 공군에 의해 격추되어 승객과 승무원 17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격추 원인에 대한 여러 이론과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민스미트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작전 개요 | |
명칭 | 민스미트 작전 |
영문 명칭 | Operation Mincemeat |
작전 목표 | 독일군을 속여 시칠리아 침공 대신 그리스 상륙을 믿게 만들기 |
목표 대상 | 해외방첩청 |
작전 위치 | 스페인 |
관련 작전 | 바클리 작전 |
작전 종류 | 군사 기만 |
작전 성공 여부 | 성공 |
작전 계획 | |
계획 시기 | 1943년 |
계획 주체 | 이웬 몬태규 찰스 촐먼들리 |
실행 시기 | 1943년 4월 |
실행 주체 | 군사정보총국 (MI5) 영국 왕립해군 (에서) |
관련 정보 | |
배경 |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을 은폐하기 위함 |
관련 영화 | Operation Mincemeat (2021) |
관련 뮤지컬 | Operation Mincemeat |
2. 역사적 배경
1939년 9월 29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해군 정보부 국장 존 고드프리 해군 소장은 전쟁 중 적을 속이는 것을 플라이 낚시에 비유한 보고서인 Trout memo를 배포했다. 이 보고서에는 추축국을 상대로 유보트와 독일 해상 함선을 기뢰밭으로 유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여러 계획이 담겨 있었으며, 그중 28번째 항목은 "제안(별로 좋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적이 발견할 시신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서를 심는 아이디어였다.[3]
다음 제안은 바실 톰슨의 책에서 사용되었다. 낙하산이 고장난 것처럼, 시신을 공군 조종사의 복장으로 하고, 주머니에 발송 서류를 넣어 해안에 떨어뜨릴 수 있다.영어
이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다른 국가들이 사용했던 Haversack Ruse와 같이 가짜 문서를 고의적으로 심는 새로운 방식은 아니었다.[4] 1942년 8월, 알라메인 전투 전에 독일 90 경보병 사단을 마주한 기뢰밭에 있는 파괴된 정찰차에 영국 기뢰밭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를 가진 시신이 놓였다. 독일군은 이 지도를 사용하여 그들의 탱크를 모래밭으로 유도하여 갇히게 했다.[5]
이후, 영국 정보 장교 찰스 쳄리는 트로이 전쟁의 아카이아인의 기만을 본따 트로이 목마라는 암호명으로 트라우트 메모 계획의 변형을 제시했다. 쳄리는 영국의 국내 방첩 및 보안 기관인 MI5에 파견된 영국 공군(RAF)의 비행 중위였으며, 이중 스파이를 담당하는 소규모 부처 간 정보 팀인 20 위원회의 서기였다.
1942년 11월, 20 위원회는 쳄리의 계획을 실행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다. 위원회 의장 존 세실 마스터먼은 해군 대표 에웬 몬태규에게 쳄리와 함께 계획을 발전시키도록 지시했다. 몬태규는 해군 정보국에서 고드프리와 함께 근무했으며, 방첩 업무를 처리하는 하위 부서인 NID 17(M)을 운영했다. 고드프리는 몬태규에게 이중 스파이를 포함한 모든 해군 기만 작전을 감독하도록 임명했고, 몬태규는 지중해에서 있을 예정인 침공 작전을 돕기 위한 기만 작전의 필요성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전황
1942년 말,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군사 계획가들은 다음 목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국 계획가들은 1944년까지 영국에서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총리 윈스턴 처칠은 북아프리카의 연합군을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연합군이 공격할 수 있는 주요 목표는 시칠리아와 그리스, 발칸 반도 두 곳이었다. 시칠리아를 장악하면 연합군의 해상 수송로가 지중해로 열리고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 본토를 침공할 수 있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로 진격하면 영국-미국 침략군과 소련 사이에 독일군을 가둘 수 있었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 계획가들은 시칠리아 (허스키 작전)를 선택하고 7월까지 침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7]아돌프 히틀러는 발칸 반도 침공을 우려했는데, 그 지역은 구리, 보크사이트, 크로뮴, 석유 등 독일 전쟁 산업의 원자재 공급원이었다. 연합군은 히틀러의 두려움을 인지하고, 바클레이 작전을 시작하여 독일군이 발칸 반도를 목표로 생각하도록 오도하고 시칠리아에서 자원을 분산시키려 했다. 이 기만 작전은 독일군의 전략적 사고를 영국군의 예상 목표로 강화했다. 동부 지중해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연합군은 가상의 부대인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2군의 본부를 이집트 카이로에 설치했다. 시리아에서는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고, 더미 탱크와 장갑차로 숫자를 부풀려 관찰자들을 속였다. 그리스어 통역관을 모집했고, 연합군은 그리스 지도와 통화를 비축했다. 제12군 본부에서는 병력 이동에 대한 허위 통신이 생성되었고, 시칠리아 침공 본부가 될 튀니지 튀니스에 있는 연합군 지휘소는 가능한 모든 경우에 유선 통신을 사용하여 무선 통신량을 줄였다.[7]
2. 2. 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1942년 말,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군사 계획가들은 다음 목표를 고민했다. 총리 윈스턴 처칠은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공격하고자 했고, 연합군은 시칠리아와 그리스, 발칸 반도 두 곳을 후보지로 검토했다. 시칠리아를 장악하면 지중해가 연합군 해상 수송로로 열리고,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 본토를 침공할 수 있었다.[5] 반면 그리스와 발칸 반도를 공격하면 영국-미국 침략군과 소련 사이에 독일군을 가둘 수 있었다.[6]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선택하고 7월까지 침공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시칠리아는 명백한 전략 목표였고, 독일군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지독한 바보가 아닌 이상 시칠리아라는 것을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5] 게다가 연합군의 대규모 병력 증강(허스키 작전)은 독일군에게 탐지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발칸 반도가 침공받을 것을 우려했는데, 그 이유는 그 지역이 독일 전쟁 산업에 필요한 구리, 보크사이트, 크롬, 석유 등 원자재의 공급처였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히틀러의 이러한 우려를 이용하여 독일군을 속이고 시칠리아에서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기만 작전인 바클레이 작전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가상의 부대인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2군 본부를 이집트 카이로에 설치하고, 시리아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며, 가짜 탱크와 장갑차로 숫자를 부풀렸다. 또한 그리스어 통역관을 모집하고 그리스 지도와 통화를 비축했으며, 제12군 본부에서는 병력 이동에 대한 허위 통신을 생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시칠리아가 아닌 다른 곳을 공격할 것처럼 꾸미는 기만 작전이 필요했다.
2. 3. 트라우트 메모
1939년 9월 29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해군 정보부 국장 존 고드프리 해군 소장은 전쟁 중 적을 속이는 것을 플라이 낚시에 비유한 보고서인 Trout memo를 배포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벤 매킨타이어는 이 보고서가 고드프리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고드프리의 개인 비서인 중령 이안 플레밍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었다"고 말한다.[1] 이 보고서에는 추축국을 상대로 유보트와 독일 해상 함선을 기뢰밭으로 유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여러 계획이 담겨 있었다.[2] 목록의 28번째 항목은 "제안(별로 좋지 않은)"이라는 제목으로,[3] 적이 발견할 시신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서를 심는 아이디어였다.다음 제안은 바실 톰슨의 책에서 사용되었다. 낙하산이 고장난 것처럼, 시신을 공군 조종사의 복장으로 하고, 주머니에 발송 서류를 넣어 해안에 떨어뜨릴 수 있다. 해군 병원에서 시신을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물론 신선한 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영어
적이 발견하도록 가짜 문서를 고의적으로 심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Haversack Ruse로 알려진 이 기만술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다른 국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4] 1942년 8월, 알라메인 전투 전에, 시신이 독일 90 경보병 사단을 마주한 기뢰밭에 있는 파괴된 정찰차에 놓였다. 시신에는 영국 기뢰밭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가 있었고, 독일군은 이 지도를 사용하여 그들의 탱크를 모래밭으로 유도하여 갇히게 했다.[5]
2. 4. 이전의 기만 작전 사례
이전의 기만 작전 사례로, 시체를 활용한 방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몽태규도 알고 있었을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의 알람 할파 전투 직전, 독일군 제90경보병사단 앞 지뢰밭에서 불타고 있는 정찰차 안에 가짜 영국군 지뢰밭 지도를 가진 시체를 놓았다. 에르빈 롬멜의 전차 부대는 이 꾀에 넘어가 침몰했다.[5][6]
- 1942년 9월, 제임스 해든 터너 주계 중위를 수송하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카디스 해역에서 추락했다. 터너 중위는 마크 W. 클라크 장군이 지브롤터 (영국령) 총독에게 보내는 횃불 작전 상륙일(11월 4일, 실제로는 11월 8일)이 적힌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터너의 시체는 타리파 근처 해안에서 스페인 당국에 의해 수습되었고, 편지는 여전히 시신에 있었다. 영국으로 반환된 후, 편지가 봉인되지 않았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 독일군은 편지를 개봉하지 않고 내용을 읽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편지를 위장된 가짜 정보로 간주하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5]
3. 작전 계획
MI5의 찰스 촐몬들리[1] 대위와 해군 정보국의 유언 몬태규 소령은 1943년 초, 촐몬들리 대위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민스미트 작전을 계획했다.[2] 처음에는 결함 있는 낙하산을 착용한 시체에 서류를 들려주는 방식을 고안했으나, 독일군이 이를 의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해상 추락 사고로 위장하기로 결정했다. 작전명은 "민스미트"였다.[3]
이들은 시체를 스페인 해안으로 떠내려 보내, 중립국이었지만 독일 첩보 기관 아프베어(Abwehr)와 협력 관계에 있던 스페인 당국을 통해 독일군이 서류를 확인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민스미트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군은 연합군의 진짜 정보도 의심하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 직후, 독일군은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공격 목표를 상세히 담은 극비 문서를 발견했지만, 히틀러는 이것이 민스미트 작전과 같은 속임수라고 생각하여 무시했다.[10] 마켓 가든 작전 중에도 독일군은 연합군의 작전 명령서를 입수했지만, 이 역시 기만 작전으로 판단하여 병력을 잘못 배치했다.[11]
3. 1. 작전의 기본 구상
몬태규와 촐몬들리는 시체를 위한 "전설" – 허구의 배경과 캐릭터 – 을 만들기 시작했다.[3] 선택된 이름과 계급은 대위 (임시 소령) 윌리엄 마틴으로, 연합 작전 본부에 배속된 영국 해병대 소속이었다. "마틴"이라는 이름은 로열 해병대에 그 계급의 사람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로열 해병대 소속인 마틴 소령은 해군성의 권한 하에 있었고, 그의 죽음에 대한 모든 공식적인 문의와 메시지가 해군 정보 부서로 전달되도록 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4] 또한, 로열 해병대는 쉽게 구할 수 있고 표준 사이즈로 제공되는 전투복을 착용했을 것이다.[5] 임시 소령 계급은 그를 기밀 문서에 위탁할 만큼 충분히 고위 계급이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예상할 정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6]
마틴이 실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몬태규와 촐몬들리는 그의 소지품에 담겨질 뒷받침 세부 사항을 제공했는데, 이는 첩보 세계에서 지갑 또는 포켓 리터로 알려져 있다.[7] 여기에는 팸이라는 가상의 약혼녀 사진(MI5 사무원 진 레슬리의 사진)[8], 팸의 연애 편지 2통[9], 본드 스트리트 보석점에서 구입한 53.525GBP의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 영수증이 포함되었다.[10] "에드워드 시대의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거만하고 고루했다"고 묘사된[11] 가상의 마틴 아버지의 편지, 가족 변호사의 메모, 로이즈 은행에서 79.958GBP의 초과 인출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포함된 추가 개인 서신도 포함되었다.[12] 편지가 해수에 잠긴 후에도 읽을 수 있도록 몬태규는 MI5 과학자들에게 잉크 테스트를 요청하여 물 속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잉크를 확인했고, 과학자들은 인기 있고 사용 가능한 잉크 브랜드 목록을 제공했다.[13]
마틴의 소지품에는 우표 책, 은십자가와 성 크리스토퍼 메달, 담배, 성냥, 연필 자루, 열쇠, 기브스의 새 셔츠 영수증도 있었다. 런던 극장 티켓 꽂이와 해군 및 군 클럽 4박 숙박료 청구서를 추가하여,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런던에서 마틴의 활동 여정을 구성할 수 있었다.[14]

시체의 해군 신분증 사진 촬영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시체임이 분명했다. 몬태규와 촐몬들리는 시체와 닮은 MI5의 로니 리드 대위를 찾아, 로열 해병대 제복을 입은 리드의 사진으로 신분증을 만들었다.[15] 오랫동안 복무한 장교에게 너무 새롭게 보이지 않도록, 필요한 카드와 패스는 분실된 원본의 최근 대체품으로 발행되었다. 몬태규는 카드를 바지에 문질러 사용한 듯한 광택을 냈다.[16] 촐몬들리가 비슷한 체형이었기에 제복에 사용감을 주기 위해 착용했다. 제복의 유일한 비표준 부분은 허버트 피셔(뉴 칼리지, 옥스퍼드 학장)의 고급 양모 속옷이었다.[17]
3. 2. 시신 확보
몽태규와 그의 팀은 저명한 병리학자 서 버나드 스필즈버리의 도움을 받아 "해상에서 저체온증에 빠져 익사하여 며칠 뒤 해안으로 밀려온 것처럼 보이는" 시신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신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은밀하게 조사하면 소문이 퍼질 것이고, 사망자의 친족에게 시체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4] 1943년 2월,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의 검시관인 벤틀리 퍼체스는 쥐약을 삼킨 결과 화학 물질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한 34세 남성의 시신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폐 속에 삼출액이 고여 바다에서 사망한 상태와 일치했다. 퍼체스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다는 조건하에 시신 확보를 도왔다.[4]3. 3. 가상의 인물 "윌리엄 마틴 소령" 창조
The Man Who Never Was영어 작전을 위해 몽태규와 촐몬들리는 가상의 인물인 "윌리엄 마틴 소령"을 창조했다. 윌리엄 마틴은 영국 해병대(로열 마린; Royal Marines) 소속으로, 연합작전본부에 배속된 인물로 설정되었다. 1907년 웨일스의 카디프 출신으로, 소령 대리(Acting Major) 계급이었다. 마틴이라는 이름은 영국 해병대에 비슷한 계급의 동명이인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4]윌리엄 마틴 소령의 신분을 뒷받침하기 위해 "팸"이라는 약혼녀를 설정하고, 팸의 사진 (MI5 사무 직원이 촬영), 연애편지 2통, 보석상의 약혼반지 청구서 등을 준비했다.[4] 또한 아버지의 과장된 편지, 사무 변호사(솔리시터)의 편지, 로이즈 은행의 대출금 독촉장, 런던 극장 티켓, 해군 군인 클럽 숙박비 청구서, 새빌 로우의 Gieves & Hawkes 사의 새 셔츠 영수증 등도 포함되었다.
몽태규와 그의 팀은 마틴 소령이 다소 경솔한 인물임을 암시하기 위해 신분증(사진은 시체와 외모가 비슷한 해군 장교를 촬영)을 분실 후 재발급된 것으로 설정하고, 연합작전본부 통행증은 만료된 채 갱신되지 않은 상태로 두었다.
3. 4. 위조 문서 작성
연합군은 실제 목표인 시칠리아 대신 그리스와 사르데냐를 침공할 것처럼 위장한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아치볼드 나이 중장(제국 참모 본부 부참모장)이 해럴드 알렉산더 경(알제리 와 튀니지 제18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친서 형태로 작성되었다.[4]이 편지는 아치볼드 경이 직접 작성했으며, 몇 가지 "미묘한 문제"를 언급했다. 예를 들어, 미군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영국군에게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하는 문제(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짐)나, 근위 여단 (Brigade of Guards)의 신임 지휘관 임명 등이다. 이는 편지가 정규 경로가 아닌, 직접 전달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4]
지중해 연합군의 계획과 관련하여, 이 편지는 이집트와 리비아의 군대가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장군의 지휘 하에 그리스를 침공할 것이라고 허스키 작전에 대해 언급했다. 두 공격 목표의 해안과, 거기에 할당된 몇몇 부대 이름도 기록되었다 (허스키는 실제로는 시칠리아 침공 작전이었다). 편지에는 시칠리아를 가짜 목표로 하는 두 번째 공격 계획인 브림스톤 작전(Operation Brimstone)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는데, 튀니지의 알렉산더의 전력이 다른 유력한 목표인 사르데냐를 침공할 것임을 암시했다.[4]
영국 해병대 마틴 소령을 그의 지휘관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제독으로부터 연합국 지중해 해군 사령관 앤드루 커닝햄 제독에게 소개하는 편지도 있었다. 이 편지에는 정어리(sardines)에 관한 서투른 말장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독일군이 사르데냐 침공 계획에 대한 언급으로 여기도록 몬터규가 삽입한 것이었다.[4]
터너 주계 중위 사건을 고려하여, 몬터규 팀은 독일군(과 스페인 협력자들)이 주머니에 있던 편지를 간과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들이 편지를 간과하지 않도록 서류를 서류 가방에 넣기로 결정했다. 서류를 서류 가방에 넣어 운반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틴 소령은 힐러리 손더스(Hilary Saunders)가 작성한 합동 작전(Combined Operations)에 대한 공식 팜플렛 2부와, 마운트배튼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이 팜플렛의 미국판에 대한 간략한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다.[4]
4. 작전 실행
1943년 4월 19일, 영국 해군의 S급 잠수함 세라프는 스코틀랜드 홀리 로크를 출발하여 스페인 우엘바 해안으로 향했다. 세라프 함에는 '윌리엄 마틴 소령'으로 위장된 시신이 담긴 특수 강철 용기가 실려 있었다. 이 용기 안에는 드라이아이스가 채워져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되었다.[1],[2]
4월 30일 새벽, 세라프는 우엘바 인근 해상에 부상하여 시신을 바다에 띄웠다. 이때 영국 성공회의 장례 기도문이 낭독되었다. 영국군은 우엘바 지역에 친(親)독일 성향의 아프베어(독일 국방군 방첩대) 요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시신과 함께 위조된 서류가 독일군에게 흘러 들어가도록 계획했다.[3]
독일군이 이 정보를 입수했다는 최종 증거는 5월 14일에 나타났다. 블레츨리 파크의 정부 통신 본부 (GC&CS)는 울트라 암호 해독을 통해 독일군의 통신을 감청했다. 이 통신은 도데카니소스 제도를 위장한 발칸 반도 침공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레슬리 홀리스 준장은 당시 미국에 있던 윈스턴 처칠 총리에게 "민스미트 작전이 적절한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받아들여졌으며, 최고의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그에 따라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는 메시지를 보냈다.[4]
한편, 몽타규는 마틴 소령의 존재를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6월 4일 ''타임스''지에 게재된 영국군 전사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포함시켰다.[5]
4. 1. 시신 운반 및 투기
Major Martin영어의 시신은 1943년 4월 30일 오전 9시 30분경 지역 어부[5]에 의해 발견되었다.[6] 시신은 스페인 군인들에 의해 우엘바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해군 판사에게 넘겨졌다. 부영사 해즐든은 스페인으로부터 공식 통보를 받고, 시신과 서류 가방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해군성에 전달했다. 해즐든과 그의 상사들 사이에는 여러 날 동안 일련의 미리 작성된 외교 전신이 오갔다. 영국 측은 이 전신이 감청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비록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독일군은 암호를 해독했다. 메시지는 해즐든이 서류 가방을 회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내용이었다.[7]5월 1일 정오에 마이클의 시신에 대한 부검이 실시되었다. 해즐든이 참석하여, 두 명의 스페인 의사들이 시신이 3개월 된 시체라는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낮의 더위와 시체의 냄새 속에서 의사들에게 부검을 마무리하고 점심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동의했고, "바다에 잠겨 질식사"라는 내용의 윌리엄 마틴 소령의 사망 진단서에 서명했다.[8][9] 시신은 스페인 측에 의해 인도되었고, 마틴 소령으로서 5월 2일 우엘바의 누에스트라 세뇨라 묘지 산 마르코 구역에 정식 군 예우를 갖춰 매장되었다.[10][11]

스페인 해군은 서류 가방을 보관했고, 아돌프 클라우스와 그의 일부 Abwehrde 요원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류 가방과 그 내용은 독일 측에 넘겨지지 않았다.[12] 5월 5일, 서류 가방은 카디스 인근 산 페르난도에 있는 해군 본부로 전달되어 마드리드로 보내졌다.[13] 산 페르난도에 있는 동안, 독일 동조자들이 내용을 사진으로 찍었지만, 편지는 개봉되지 않았다.[14] 서류 가방이 마드리드에 도착하자, 그 내용은 스페인에서 가장 고위 Abwehrde 요원 중 한 명인 카를 에리히 퀼렌탈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Abwehrde의 수장인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에게 개인적으로 개입하여 스페인 측에 문서를 넘기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15] 요청을 수락한 스페인 측은 아직 젖어 있는 종이를 탐침 주위에 단단히 감아 원통형으로 만든 다음, 밀랍 봉인으로 닫혀 있는 봉투 덮개와 봉투 본체 사이로 빼냈다. 편지는 말린 후 사진 촬영을 했고, 24시간 동안 소금물에 담갔다가 그곳에 심어 놓았던 속눈썹 없이 봉투에 다시 넣었다. 정보는 5월 8일에 독일 측에 전달되었다.[16] 이 정보는 스페인에 있는 Abwehrde 요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져 퀼렌탈이 직접 문서를 독일로 가져갔다.[17]
5월 11일, 스페인 당국은 서류와 함께 서류 가방을 해즐든에게 반환했고, 그는 이를 외교 행낭에 넣어 런던으로 보냈다. 서류가 접수되자, 법의학적 검사가 이루어졌고, 속눈썹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추가 검사 결과, 종이의 섬유질이 여러 번 접혀 손상되었음이 밝혀져, 편지가 꺼내져 읽혔다는 것을 확인했다. 런던으로 돌아온 서류가 여전히 젖어 있는 상태에서 건조되면서 추가적인 검사가 이루어졌다. 접힌 종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봉투에서 꺼냈을 때와 같은 둥글게 말린 형태로 건조되었다. 독일 측이 그들의 활동이 발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잠재적인 두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또 다른 미리 준비된 암호화되었지만 해독 가능한 전신이 해즐든에게 보내져 봉투가 검사되었지만 개봉되지 않았다고 알렸다. 해즐든은 독일 측에 동조적인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흘렸다.[18]
4. 2. 스페인 당국의 개입
이전 결과물은 주어진 섹션 제목 "스페인 당국의 개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원본 소스에도 해당 내용이 없으므로, 이전 결과물은 올바르며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4. 3. 독일군의 정보 획득
카를 되니츠 제독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민스미트 작전 문서를 "앵글로색슨의 명령"이라고 언급했다.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달리 사르데냐와 펠로폰네소스반도가 주요 공격 목표라고 믿고 있었다.[4]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그리스,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방어해야 한다고 알리고, 제1 기갑 사단을 그리스 테살로니키로 이동시켰다. 이 명령은 5월 21일 GC&CS에 의해 감청되었다.[4]6월 말, 사르데냐의 독일군 병력은 1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고, 어뢰정이 시칠리아에서 그리스 섬으로 이동했다. 7개의 독일 사단이 그리스로 이동하여 주둔 병력이 8개로 늘었고, 발칸 반도에는 10개 사단이 배치되어 총 18개 사단이 되었다.[4]
7월 9일, 연합군의 허스키 작전으로 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된 지 4시간 후에도, 감청된 독일 신호는 21대의 항공기가 사르데냐를 증원하기 위해 시칠리아를 떠났음을 보여주었다.[4] 히틀러는 여전히 발칸 반도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고 확신하여 7월 말 에르빈 롬멜 장군을 테살로니키로 보내 방어를 준비하게 했다. 독일 고위 사령부가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4]
5. 작전의 결과
민스미트 작전의 결과, 독일군은 연합군의 실제 침공 목표였던 시칠리아 대신 그리스와 사르데냐 방어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오판을 내렸다. 시칠리아 상륙 작전이 시작된 후에도, 독일군은 연합군의 주 공격 방향이 발칸 반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12]
영국은 민스미트 작전을 통해 허스키 작전에서 상당한 이점을 얻었다. 전투 초기 예상보다 훨씬 적은 사상자를 냈고, 해군 손실도 예상보다 적었으며, 작전 기간도 단축되었다.[11]
하지만, 군사 역사가들은 민스미트 작전이 시칠리아 점령의 유일한 요인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존 래티머는 히틀러의 이탈리아군 불신 등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고 보았고,[8] 마이클 하워드는 히틀러의 발칸에 대한 집착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0]
민스미트 작전은 이후 독일군에게 혼란을 야기하여, D-데이와 마켓 가든 작전에서 실제 연합군 문서를 기만 작전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효과를 낳았다.[13],[14]
5. 1. 독일군의 오판
1943년 7월 25일, 시칠리아 전투가 추축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이탈리아 파시즘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권력 제한을 가결하고, 이탈리아 군대의 통제권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넘겼다. 다음 날 무솔리니는 국왕을 만나 총리에서 해임되었고, 투옥되었다. 새로운 이탈리아 정부가 권력을 잡고 연합국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5] 시칠리아는 8월 17일에 함락되었다.[6] [7]군사 역사가 존 래티머는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비교적 쉽게 점령한 것이 민스미트 작전, 더 나아가 작전 바클리의 광범위한 기만 작전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래티머는 히틀러가 이탈리아인을 불신하고, 항복 직전일 수 있는 이탈리아군과 함께 독일군을 위험에 빠뜨리려 하지 않았다는 점 등 다른 요인들을 꼽았다.[8] 군사 역사가 마이클 하워드는 민스미트 작전을 "전쟁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단일 기만 작전"으로 묘사하면서도,[9] 민스미트 작전과 바클리가 히틀러의 "발칸에 대한 타고난 집착"보다 시칠리아 작전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보았다.[10] 맥킨타이어는 민스미트 작전의 정확한 영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적었다. 영국은 전투 첫 주에 1만 명의 사상자를 예상했지만, 실제 사상자는 그 7분의 1에 불과했다. 해군은 작전에서 300척의 선박이 침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12척을 잃었다. 예상했던 90일 작전은 38일 만에 종료되었다.[11]
스미스는 허스키 작전의 결과로 히틀러가 7월 13일에 쿠르스크 공세를 중단했다고 적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소련군의 활약 때문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시칠리아 연합군 상륙이 발칸 침공을 앞두고 벌이는 양동 작전이라고 추정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신속하게 배치할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히틀러가 소련에 주도권을 넘겨준 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고 지적한다.[12]
민스미트 작전의 성공은 이후 독일군이 발견한 진본 서류도 무시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 D-데이 상륙 2일 후, 독일군은 버려진 상륙정이 노르망디의 비르 강에 떠내려가고, 그 안에 이 지역의 공격 목표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적힌 극비 서류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히틀러는 이것이 민스미트 작전과 마찬가지로 기만 작전이라고 믿고 서류를 무시했다. 이때 독일 측은 이미 다수의 거짓 정보로 인해 주 공격이 파드칼레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3]
- 1944년 9월의 네덜란드 진격인 마켓 가든 작전 진행 중, 침공의 항공 작전 단계의 지도와 도표를 포함한 완전한 작전 명령서가 부주의로 수송용 글라이더에 잊혀졌다. 작전 명령은 독일군 수중에 들어갔지만, 독일군은 이것이 또 다른 민스미트 스타일의 기만 작전의 시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눈앞의 정보에 반하여 병력을 배치해버렸다.[14]
5. 2.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성공
1943년 7월, 연합군은 허스키 작전을 통해 시칠리아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시칠리아 전투가 추축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7월 25일 이탈리아 파시즘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권력 제한을 가결하고 군 통제권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넘겼다. 다음 날 무솔리니는 국왕을 만나 총리직에서 해임된 후 투옥되었다. 새로운 이탈리아 정부가 권력을 잡고 연합국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1] 시칠리아는 8월 17일에 함락되었는데, 6만 5천 명의 독일군이 40만 명의 미국 및 영국군을 상대로 충분히 버텨내면서 많은 독일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철수할 수 있었다.[2] [3]군사 역사가 존 레이티머는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비교적 쉽게 점령한 것이 전적으로 민스미트 작전, 더 나아가 작전 바클리의 광범위한 기만 작전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는 히틀러가 이탈리아인을 불신하고, 항복 직전일 수 있는 이탈리아군과 함께 독일군을 위험에 빠뜨리려 하지 않았다는 점 등 다른 요인들을 꼽았다.[4] 군사 역사가 마이클 하워드는 민스미트 작전을 "전쟁 전체에서 가장 성공적인 단일 기만 작전"으로 묘사하면서도,[5] 민스미트 작전과 바클리가 히틀러의 "발칸에 대한 타고난 집착"보다 시칠리아 작전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보았다.[6]
영국은 전투 첫 주에 1만 명의 사상자를 예상했지만, 실제 사상자는 그 7분의 1에 불과했다. 해군은 작전에서 300척의 선박이 침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12척을 잃었다. 예상했던 90일 작전은 38일 만에 종료되었다.[7]
독일군은 시칠리아 침공 이후에도 한동안 발칸반도에 대한 공격을 예상하며 전력을 집중하지 못했다. 허스키 작전의 결과로 히틀러가 7월 13일에 쿠르스크 공세를 중단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소련군의 활약 때문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시칠리아 연합군 상륙이 발칸 침공을 앞두고 벌이는 양동 작전이라고 추정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신속하게 배치할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소련에 주도권을 넘겨준 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8]
6. 작전의 영향 및 평가
1943년 초, 연합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토치 작전을 수행하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지중해에서의 공세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시칠리아 점령은 연합군에게 지중해를 개방하고 유럽 대륙 침공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윈스턴 처칠은 "지독한 바보가 아닌 이상 시칠리아라는 것을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시칠리아의 중요성은 명백했다.
연합군은 허스키 작전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고, 이는 독일군에게 탐지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연합군은 독일군을 속여 병력을 분산시키면 침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MI5의 찰스 챔들리(Charles Cholmondeley[1]) 공군 대위는[2] 죽은 병사에게 무전기와 제대로 펴지지 않은 낙하산을 착용시켜 프랑스에 투하시켜 독일군이 연합군의 허위 정보를 얻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아이디어는 실현 가능성이 낮아 기각되었지만, 이중 스파이 작전인 더블 크로스 시스템(XX System)을 담당하는 20 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20 위원회는 군 및 부서 간의 첩보 연락을 조정하는 팀으로, 챔들리와 영국 해군 첩보 요원 유언 몬태규(Ewen Montagu) 소령이 멤버였다.
몬태규와 챔들리는 챔들리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무전기 대신 서류를 이용하는 계획을 고안했다. 처음에는 결함이 있는 낙하산을 착용한 시체에 서류를 두는 계획을 세웠으나, 독일군은 연합군이 비밀 서류를 적진 위로 보낼 리 없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를 해상 추락 사고의 희생자로 위장하기로 결정했다. 시체는 스페인 해안에 표류하도록 했으며, 스페인은 중립국이었지만 독일 첩보 기관인 '''아프베어(Abwehr)'''와 협력 관계에 있었다. 영국은 스페인 당국이 시체를 수색하고 독일군에게 정보를 넘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몬태규는 이 작전에 "민스미트(Mincemeat)"[3]라는 코드명을 부여했다. 이 이름은 다른 작전에서 사용되었으나, 당시 사용 가능한 코드명 목록에 다시 포함되었다[4]。
6. 1. 장기적인 영향
민스미트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이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수행한 기만 작전으로, 이후 여러 창작물에 영감을 주었다. 유언 몬태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Man Who Never Was''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이는 1956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19]. 일본에서는 『어떤 시체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20].벤 매킨타이어는 2010년에 민스미트 작전을 다룬 책 ''Operation Mincemeat''을 출간했으며, 이 책은 2021년에 작전명 민스미트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민스미트 작전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픽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en:Cryptonomicon)』
- 톰 클랜시의 소설 『교황 암살(en:Red Rabbit)』
-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en:David Ignatius)의 소설 ''Body of Lies'' (Body of Lies (novel))
- 영화 『007은 두 번 죽는다』
-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우주의 법칙(Space: Above and Beyond)』
- 하야시 죠지의 가공전기 시리즈 『통상 호위 기동 함대 흥국의 방패』 제12권 「모략! 맥아더 암살 지령」
6. 2. 전후 진실 공개 및 평가
유언 몬태규가 1953년에 출간한 책 ''The Man Who Never Was''를 통해 민스미트 작전의 진상이 공개되었다. The Man Who Never Was영어 초판은 1953년 Evans Bros에서 출판되었다.[19] 일본어 번역본은 『어떤 시체의 모험』으로, 치쿠마 서방의 『세계 논픽션 전집 26』에 수록되어 1962년에 간행되었다.[20] 1956년에는 유언 몬태규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국 영화 :en:The Man Who Never Was가 제작되었다.2010년에는 벤 매킨타이어(Ben Macintyre)가 민스미트 작전을 다룬 책 ''Operation Mincemeat''을 출간했다. 일본어 번역본은 『나치를 속인 시체 - 영국의 기책·민스미트 작전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중앙공론신사 문고에서 2011년 10월에 출간되었다. 2021년에는 매킨타이어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국 영화 작전명 민스미트가 개봉되었다(감독: 존 매든, 주연: 콜린 퍼스).
민스미트 작전은 다음과 같은 픽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문서
Cholmondeley は、この綴りでコルモンダリーではなくチャムリーと発音する
[2]
웹사이트
Operation ''Mincemeat'' - The About.com
http://militaryhisto[...]
[3]
문서
Mincemeatは挽肉ではなく、砂糖・リンゴ・干しぶどう・香料を混ぜたもの。イギリス料理ミンスパイの材料となる
[4]
웹사이트
Operation Mincemeat - The Man Who Never Was in BBC's h2g2
http://www.bbc.co.uk[...]
2006-12-01
[5]
간행물
Operation MINCEMEAT
1988-05
[6]
간행물
Coming Into its Own: The Contribution of Intelligence at the Battle of Alam Halfa
2002-07
[7]
문서
Ibid.
[8]
웹사이트
Archer Class Auxiliary Carrier, HMS Dasher Destroyed by Explosion on the 27th of March 1943. 379 Dead, an account of the HMS ''Dasher'' disaster
http://ahoy.tk-jk.ne[...]
2006-12-11
[9]
뉴스
Operation Mincemeat
http://www.militaryp[...]
World War II Magazine
1995-11
[10]
문서
Dead Men's Secrets Documentary, D-Day Deception Episode
[11]
서적
A Bridge Too Far
[12]
웹사이트
the-man-who-never-was
https://www.abebooks[...]
[13]
문서
モーガンはマイケルの名前を西ロンドンのキューの Public Record Office で発見している
[14]
서적
The Defence of the Realm: The Authorised History of MI5
Penguin Books
[15]
웹사이트
The Scotsman - Tribute to the man who never was
http://thescotsman.s[...]
2007-04-12
[16]
문서
Mincemeat Revisited',After the Battle,146,Nov 2009.
[17]
웹사이트
Freedom of Information request D/NHB/25/56 of 22 January 2010
http://www.arrse.co.[...]
2010-01-27
[18]
서적
ナチを欺いた死体――英国の奇策・ミンスミート作戦の真実
中央公論新社
[19]
웹사이트
the-man-who-never-was
https://www.abebooks[...]
[20]
웹사이트
世界ノンフィクション全集 26 おそるべき証人 死刑囚は逃げた ある死体の冒険
https://www.amazon.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