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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선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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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1623년부터 1806년까지 존재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국이다. 30년 전쟁 중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팔츠 선제후령과 선제후 지위를 획득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참전 등의 과정을 겪었다. 1777년에는 팔츠 선제후국과 통합되었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아 1805년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어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이자 대궁내장이었고, 1657년부터 1792년까지 황제 대리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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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선제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 (독일어)쿠르퓌르스텐툼 바이에른
일반 명칭바이에른
시대초기 근대 유럽
지위선제후국
국가신성 로마 제국
정부 형태봉건 군주제
수도뮌헨
종교가톨릭 교회
데모님바이에른인
지도
1648년 신성 로마 제국 지도에서 강조 표시된 바이에른
1648년 신성 로마 제국 지도에서 강조 표시된 바이에른
역사
시작 연도1623년
종료 연도1806년
시작 사건선제후 지위 부여
시작 날짜1623년
주요 사건 1베스트팔렌 조약
주요 날짜 11648년
주요 사건 2제국 추방령 하에 놓임
주요 날짜 21706년
주요 사건 3제국 추방령 철회
주요 날짜 31714년
주요 사건 4팔츠 선제후국과의 인적 동군연합
주요 날짜 41777년
종료 사건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
이전 국가바이에른 공국
이후 국가바이에른 왕국
통치
통치자 직함바이에른 선제후
통치자 1막시밀리안 1세
통치 기간 11623년–1651년
통치자 2페르디난트 마리아
통치 기간 21651년–1679년
통치자 3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통치 기간 31679년–1726년
통치자 4카를 알브레히트
통치 기간 41726년–1745년
통치자 5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통치 기간 51745년–1777년
통치자 6카를 테오도어
통치 기간 61777년–1799년
통치자 7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통치 기간 71799년–1805년
국기 및 문장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국기 (1623-1806)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국기 (1623-1806)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문장 (1753)
국장(1623–1777)

2. 역사

161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면서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 편에서 가톨릭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에게 그 공을 인정받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팔츠 선제후령과 선제후 지위를 빼앗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인정받았고,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는 새로운 선제후 지위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1세 사후,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마리아 (1651~1679)는 30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1679~1726)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는 등 야망을 펼쳤으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가 오스트리아와 선제후령 사이에 분할되기도 했다. 이후 1714년 바덴 조약으로 영토를 되찾았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아들 카를 알브레히트 (1726~1745)는 카를 6세 사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1742년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으나,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점령당했다. 1744년 프리드리히 2세의 보헤미아 침공으로 뮌헨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1745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1745~1777)는 1745년 퓌센 조약을 통해 실용적 조약을 인정하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는 계몽주의 군주로서 여러 개혁을 추진했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수회의 언론 검열을 폐지했다.

1777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바이에른 계열 비텔스바흐 가문이 단절되었다.[1] 살리카 법에 따라, 팔츠-줄츠바흐 가문 출신의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 선제후를 계승하여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합되었다.[1] 그러나 카를 테오도르는 바이에른 통치에 의욕이 없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남 네덜란드)의 교환을 제안했다.[1] 카를 테오도르는 이 교환에 응하려고 했지만, 주변 국가들의 방해(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로 실현되지 못했다.[1]

카를 테오도어


프랑스 혁명 직전 바이에른의 지적, 사회적 상황은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1]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팔츠 지방을 점령하면서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795년, 프랑스군은 바이에른을 침략하여 뮌헨까지 진격했고, 당시 선제후였던 카를 테오도르는 작센으로 도망쳤고, 남은 섭정단은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4]

1799년 카를 테오도르가 사망하고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가 새로운 선제후가 되면서 바이에른은 전환점을 맞았다.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팔츠, 츠바이브뤼켄, 율리히 공국을 잃었다.[4] 이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의 대신이었던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1803년, 나폴레옹의 영토 재편 결과 바이에른은 상당한 영토를 획득하여 라인 강 연안의 손실을 보상받았다.[4]

마리안네 퀴르칭거(Marianne Kürzinger)의 ''갈리아가 바이에른을 보호하다(Gallia Protects Bavaria)'', 1805년. 바이에른과 나폴레옹 프랑스의 군사 동맹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


1805년, 바이에른은 프랑스와 보겐하우젠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기여했다.[5] 같은 해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여러 영토를 합병하고,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왕으로 즉위했다.[5] 1806년, 브르노 조약과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1806년 1월 1일 뮌헨에서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 즉위했다.[6] 같은 해 7월, 바이에른은 라인 동맹에 가입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고,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6] 이로써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소멸하고 바이에른 왕국으로 재탄생했다.

2. 1. 30년 전쟁과 선제후 지위 획득 (1618년 ~ 1648년)

161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면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 편에서 가톨릭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에게 그 공을 인정받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팔츠 선제후령과 선제후 지위를 빼앗았다. 이는 1356년의 황금칙서에 위배되는 조치였으나, 전쟁의 결과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웨덴군에 의해 뮌헨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인정받았고,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는 새로운 선제후 지위를 받았다. 이후 막시밀리안 1세의 가계는 대대로 바이에른을 통치하며 선제후 지위를 이어받았다.

2. 2.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17세기 후반 ~ 18세기)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 가문에 가져다준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두 세기 동안 바이에른 자체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마리아 (1651~1679)는 30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건설적인 업적은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1679~1726)에 의해 대부분 무산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는 등 야망을 펼쳤다. 그러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가 오스트리아와 선제후령 사이에 분할되기도 했다. 이후 1714년 바덴 조약으로 영토를 되찾았지만, 1706년 오스트리아 점령군에 의해 진압된 "젠들링의 살인의 밤"으로 알려진 바이에른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첫 번째 왕비 마리아 안토니아는 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조카였기에,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아스투리아스 공에 책봉되었고, 막시밀리안 2세 자신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요절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 막시밀리안 2세는 프랑스 편에 섰지만 패배하여 바이에른을 점령당하고 망명해야 했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아들 카를 알브레히트 (1726~1745)는 카를 6세 사후, 1713년 실용적 조약에 이의를 제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174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으나,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점령당했다. 1744년 프리드리히 2세의 보헤미아 침공으로 뮌헨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1745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1745~1777)는 1745년 퓌센 조약을 통해 실용적 조약을 인정하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는 계몽주의 군주로서 여러 개혁을 추진했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수회의 언론 검열을 폐지했다.

2. 3. 팔츠 선제후국과의 통합 (1777년)

1777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바이에른 계열 비텔스바흐 가문이 단절되었다.[1] 살리카 법에 따라, 먼 친척인 팔츠-줄츠바흐 가문 출신의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 선제후를 계승하여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합되었다.[1] 그러나 카를 테오도르는 바이에른 통치에 의욕이 없었고, 이를 눈여겨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남 네덜란드)의 교환을 제안했다.[1] 카를 테오도르 자신은 이 교환에 응하려고 했지만, 주변 국가들의 방해(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로 실현되지 못했고, 바이에른 백성들과의 사이만 더 멀어졌다.[1]

인접 국가의 세력 증가는 오스트리아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1]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상속 재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여러 영지를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왕관의 몰수된 봉토로서 주장했다.[1] 합법적인 상속자가 없었고 황제로부터 자신의 서출자들을 제국 공작의 지위로 격상시키기를 원했던 카를 테오도어 자신도 비밀리에 동의한 가운데, 오스트리아군이 이들 영지를 곧 점령했다.[1] 다음 계승자인 츠바이브뤼켄 공작 칼스 2세는 프로이센 국왕의 지원을 받아 항의했고, 이는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1] 테셴 조약(1779년 5월 13일)에 따라 인강 지역이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고, 츠바이브뤼켄의 칼스에게 계승권이 보장되었다.[1]

카를 테오도어는 바이에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1] 그는 자신을 타지 사람들 사이의 타지 사람으로 여겼고, 오스트리아 내각과의 끝없는 음모의 대상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1785년 군주 동맹(Fürstenbund)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그의 가장 좋아하는 계획은 바이에른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부르고뉴의 왕위와 맞바꾸는 것이었다.[1] 그 외에도 그의 전임자의 계몽적인 내정 정책은 폐기되었다.[1]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국가의 교육 제도 개혁에 사용할 목적으로 폐지된 예수회의 기금은 신앙의 적들과 싸우는 목적으로 성 요한 예루살렘 기사단의 영지를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다.[1] 정부는 좁은 성직자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바이에른 주교들을 독일 대도시의 관할권에서 떼어내 교황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두려는 시도에서 절정에 달했다.[1] 프랑스 혁명 직전 바이에른의 지적, 사회적 상황은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1]

2. 4.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18세기 말 ~ 19세기 초)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팔츠 지방을 점령하면서 바이에른은 프랑스 혁명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795년, 프랑스군은 바이에른을 침략하여 뮌헨까지 진격했고, 자유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 선제후였던 카를 테오도르는 작센으로 도망쳤고, 남은 섭정단은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4]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바이에른은 1799년 카를 테오도르가 사망하고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가 새로운 선제후가 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취약한 재정 및 군사력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800년, 바이에른 군대는 호엔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패배했고, 프랑스군은 다시 뮌헨을 점령했다.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팔츠, 츠바이브뤼켄, 율리히 공국을 잃었다.[4]

이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의 대신이었던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1803년, 나폴레옹의 영토 재편 결과 바이에른은 뷔르츠부르크, 밤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프라이징 주교령 등 상당한 영토를 획득하여 라인 강 연안의 손실을 보상받았다.[4] 몽젤라스는 바이에른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바이에른이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것은 경계했다.[4]

1805년, 바이에른은 프랑스와 보겐하우젠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바이에른 군대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기여했다.[5] 같은 해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여러 영토를 합병하고,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왕으로 즉위했다.[5]

1806년, 브르노 조약과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1806년 1월 1일 뮌헨에서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 즉위했다.[6] 같은 해 7월, 바이에른은 라인 동맹에 가입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고,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6] 이로써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소멸하고 바이에른 왕국으로 재탄생했다.

3. 지리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현재의 상바이에른, 하바이에른, 상팔츠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1779년 이전에는 현재 오스트리아의 일부인 인피어텔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바이에른 계승 전쟁 이후 테셴 조약에 따라 합스부르크가에 할양되었다.

바이에른 선제후국 내에는 팔라티나트-노이부르크 공국, 팔라티나트-줄츠바흐 공국(상팔라티나트에 위치,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가 소유), 프라이징, 레겐스부르크, 파사우와 같은 교회령, 레겐스부르크 제국자유도시 등 독립적인 점유지와 관할구역이 존재했다. 행정 목적으로 바이에른은 1507년부터 뮌헨, 부르크하우젠, 란츠후트, 슈트라우빙의 네 집정관구(''Rentamtde'')로 나뉘어 있었다. 30년 전쟁 동안 상팔츠를 획득하면서 암베르크 집정관구가 추가되었다.

4. 정치

바이에른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한 명으로, 황제 선출에 참여하고 제국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57~1658년, 1740~1742년, 1745년, 1790년, 1792년에는 작센 선제후와 함께 황제 대리 직책을 수행했다.

1180년 오토 1세가 바이에른 공작으로 봉해진 이후, 바이에른은 비텔스바흐 가가 통치하였으나, 14세기에 바이에른 계와 팔츠(라인 궁중백) 계로 분리되었다. 후자는 1356년 황금칙서에서 선제후 지위를 획득하였다. 비텔스바흐 가의 양 계통은 이후에도 일족 내에서 분할 상속이 이루어져 영토가 여러 번 세분화되었으나, 바이에른에서는 16세기 빌헬름 4세 이후 장자 단독 상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618년, 프로테스탄트의 수장이었던 팔츠-짐머른 가의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된 것을 계기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대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 (신성 로마 황제) 측에 서서 가톨릭 군의 주력으로 싸웠다. 막시밀리안 1세는 그 공적을 황제에게 인정받아 1623년 프리드리히 5세가 가지고 있던 팔츠 선제후령 및 선제후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이것은 명백히 황금칙서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전쟁을 악화시켰다. 막시밀리안 1세 자신도 스웨덴군에 의해 뮌헨에서 쫓겨났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어졌던 팔츠 영토의 대부분은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에게 반환되었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카를 1세 루트비히에게도 신설된 것으로서 선제후 지위가 수여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안 1세의 가계는 전래의 바이에른 공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선제후 지위를 이어받았고, 그 영토는 바이에른 선제후령이라 불리게 된다.

5. 역대 선제후

재위 기간이름
1623년 - 1651년막시밀리안 1세
1651년 - 1679년페르디난트 마리아
1679년 - 1726년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1726년 - 1745년카를 7세
1745년 - 1777년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1777년 - 1799년카를 테오도르
1799년 - 1805년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6. 평가

30년 전쟁을 거치며 막시밀리안 1세는 영토와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마리아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농업과 산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에 힘썼다. 1669년에는 1612년 이후 중단되었던 국회를 다시 소집하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블렌하임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영토는 일베르스하임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선제후령 사이에 일시적으로 분할되기도 했으나, 1714년 바덴 조약으로 회복되었다.[1]

카를 알브레히트 역시 가문의 영광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하고 바이에른이 점령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745년 그가 사망한 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퓌센 조약을 통해 영토를 회복하고, 계몽주의 군주로서 농업, 산업, 광물 자원 개발을 장려하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바이에른의 사회, 문화적 발전에 기여했다.[2]

카를 테오도어는 바이에른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교환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내치에 소홀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의 지적, 사회적 상황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3]

1799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가 선제후가 된 후, 바이에른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1806년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참조

[1] 웹사이트 Standarte des Kürfursts - reported 1860 http://www.crwflags.[...]
[2] 문서 Based on original preserved depictions
[3] 서적 Napoleon's German Allies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1980-11-01
[4] 문서 Based on original preserved depictions
[5] 웹사이트 Standarte des Kürfursts - reported 1860 http://www.crwflags.[...]
[6] 문서 Based on original preserved depictions
[7] 서적 Napoleon's German Allies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198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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