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바이에른 왕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이에른 왕국은 1806년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 결성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승격되어 건국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으나 반도 전쟁,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13년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프랑스와 싸웠고,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영토를 확장했다. 1815년 독일 연방, 남독일 연방에 가입했으며,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후 독일 혁명으로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하면서 멸망했다. 바이에른 왕국은 1818년 헌법 제정, 예술의 번영, 그리스 국왕 오톤 1세 배출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으며, 독일 제국 시기에는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이에른 왕국 - 호프브로이하우스
    1589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가 설립한 호프브로이하우스는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 중 하나로, 왕궁 양조장에서 밀맥주 독점 생산을 통해 성장했으며, 역사적 사건의 장소이자 현재는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 및 뮌헨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다.
  • 바이에른주의 역사 - 다하우 강제 수용소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1933년 나치 독일이 바이에른주 다하우에 설립한 최초의 수용소로, 정치범을 시작으로 다양한 집단이 수용되어 학대와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확장되어 강제 노동에 이용되다 1945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현재는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바이에른주의 역사 - 바이에른 선제후국
    30년 전쟁으로 시작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으로 존속하다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가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 즉위하며 바이에른 왕국으로 통합, 해체되었다.
  • 라인 동맹 가맹국 -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 알프스에 위치한 작은 내륙국으로,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높은 1인당 GDP와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가지지만 조세 피난처 논란이 있고, 스위스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사회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 라인 동맹 가맹국 - 작센 왕국
    작센 왕국은 1806년 작센 선제후국에서 승격되었으나 빈 회의 이후 프로이센에 영토를 할양하며 국력이 약화되었고, 독일 연방과 북독일 연방을 거쳐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마지막 국왕의 퇴위로 멸망한 베틴 가의 입헌 군주국이다.
바이에른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914년 독일 제국의 일부였던 바이에른 왕국
1914년 바이에른 왕국
기본 정보
공식 명칭1806-1825:
1825-1918:
일반 명칭바이에른
시대나폴레옹 전쟁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지위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국 (1806년)
라인 연방의 국가 (1806–1813)
독일 연방의 국가 (1815–1866)
독일 제국의 연방 국가 (1871–1918)
건국1806년
멸망1918년
건국 사건왕국 선포
건국 날짜1806년 1월 1일
멸망 사건아니프 선언
멸망 날짜1918년 11월 12일
이전 국가바이에른 선제후국
뷔르츠부르크 주교후국
오르텐부르크 백국
이후 국가바이에른 인민공화국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현재 국가독일
수도뮌헨
바이에른 왕국 국기
국기
바이에른 왕국 국장
국장
표어("충성으로 굳건히")
공용어바이에른어
상부 독일어 방언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대다수)
소수: 루터교, 칼뱅주의, 유대교
통화바이에른 굴덴 (1806–1873)
금 마르크 (1873–1914)
파피어 마르크 (1914–1918)
면적75,865km²
인구6,524,372명 (1910년)
정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국왕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1806–1825)
루트비히 1세 (1825–1848)
막시밀리안 2세 (1848–1864)
루트비히 2세 (1864–1886)
오토 (1886-1913)
루트비히 3세 (1913–1918)
섭정루이트폴트 (1886–1912)
루트비히 3세 (1912–1913)
총리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 (1806–1817)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1912–1917)
오토 리터 폰 단들 (1917–1918)
의회바이에른 주의회
상원바이에른 의회 의원
하원바이에른 대의원
역사적 사건
라인 동맹 가입1806년 7월 12일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일 - 10월 19일
나폴레옹 전쟁에서 연합군으로 이탈1813년 10월 8일
파리 조약 체결1814년 5월 30일
독일 제국 성립1871년 1월 18일
독일 혁명 발발1918년 11월 9일

2. 역사

나폴레옹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인 동맹을 결성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독일 연방과 남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에 가맹하였다.[4]

1799년부터 1817년까지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 백작은 바이에른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행정 구조의 기반을 마련했다. 1817년 몽젤라스가 해임된 후, 바이에른은 새로운 헌법 개혁 시대를 맞이했다. 1818년 5월 26일, 프랑스 부르봉 왕정의 1814년 헌장을 모델로 한 두 번째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은 양원제 의회를 설립하고 입헌 군주제를 확립하여, 법안 성립과 조세 부과에 의회 동의를 필요로 했다.

1832년 런던 조약에 따라 루트비히 1세의 차남 오토가 그리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바이에른 출신 섭정 3인 (요제프 루트비히 폰 아르만스페르크,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마우러, 카를 빌헬름 폰 하이데크)이 오토가 성년이 될 때까지 실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바이에른은 패배했지만, 적은 영토 할양과 의 배상금으로 강화되어 남독일의 맹주 지위를 유지했다.

1890년대 포토크롬 인쇄물 노이슈반슈타인 성. 이 성은 루트비히 2세 통치 기간 동안 설계 및 건설되었으며 바이에른의 주요 관광 명소이다.


1871년,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에 가맹하여 연방참의원에서 6표를 얻었다.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건설 등 개인 프로젝트에 몰두하다 1886년 정신병자로 선언되어 폐위되고,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토 1세가 즉위했으나 정신 질환으로 루이트폴트 왕자가 섭정을 맡았다.

1886년부터 1912년까지 루이트폴트 섭정 시대는 바이에른과 프로이센 간 관계가 냉랭했던 시기였다. 바이에른은 문화투쟁과 프로이센의 지배력에 반발했다. 1912년 루이트폴트 사후, 루트비히 3세가 즉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리비우(렘베르크)에 있는 루트비히 3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루트비히 3세는 알자스와 벨기에 앤트워프 병합을 주장하며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간 힘의 균형 유지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전쟁 장기화로 바이에른 내 반전 여론이 높아졌다. 1918년 11월 7일, 독일 혁명 발발로 루트비히 3세는 폐위되고, 바이에른 왕국은 멸망했다.

2. 1. 성립 배경

나폴레옹 황제가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가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 즉위했다.[4]

1777년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계열이 단절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카를 테오도어에게 넘어갔고, 팔츠 선제후령은 율리히, 베르크 공국과 함께 바이에른과 통합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군이 팔츠를 침략하고, 1795년 모로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뮌헨으로 진격했다. 카를 테오도어는 작센으로 도피했고, 남은 섭정들은 모로와 협정을 맺어 거액의 공물을 지불하고 휴전을 맺었다.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바이에른은 곤경에 처했고, 카를 테오도어 사후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을 점령했다.[4]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


새로운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는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의 도움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1800년 호헨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한 후 모로는 다시 뮌헨을 점령했다. 뤼네빌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팔츠, 츠바이브뤼켄, 율리히 공국을 잃었지만, 몽젤라스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바이에른의 이익을 추구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을 왕국으로 승격시켰고, 1806년 1월 1일 막시밀리안 1세로서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바이에른은 1806년 8월 1일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하여 라인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바이에른 왕국은 반도 전쟁 참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영토 손실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1808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최초의 성문 헌법을 공포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1813년 리트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라인 동맹을 탈퇴하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했다. 1814년 나폴레옹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바이에른은 뷔르츠부르크 대공국, 프랑크푸르트 대공국 등 새로운 영토를 얻었고, 뮌헨 조약으로 라인 팔츠를 획득하여 마인 강 남쪽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1799년부터 1817년까지 몽젤라스 백작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행정 구조의 기반을 마련했고, 1817년 몽젤라스 해임 후 바이에른은 새로운 헌법 개혁 시대를 맞이했다.

2. 2.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 황제가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이 되었고,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는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 즉위했다.[4] 1815년 팔츠 지방을 흡수하고, 이후 독일 연방 및 남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팔츠-비르켄펠트-츠바이브뤼켄)는 어려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와 그의 전권 대신이었던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는 오스트리아보다는 프랑스에 더 우호적이었지만, 바이에른의 재정 상태와 바이에른 군의 분산 및 무질서는 그를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했다. 1800년 12월 2일, 바이에른 군은 호헨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패배에 연루되었고, 모로는 다시 뮌헨을 점령했다. 뤼네빌 조약(1801년 2월 9일)에 따라 바이에른은 팔츠와 츠바이브뤼켄 공국, 율리히 공국을 잃었다. 몽젤라스는 오스트리아 궁정의 야망과 음모를 고려하여 바이에른의 이익이 프랑스 공화국과의 동맹에 있다고 판단, 막시밀리안 요제프를 설득하여 1805년 8월 24일 파리에서 프랑스와 별도의 평화 및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을 왕국으로 승격시켰고, 1806년 1월 1일 막시밀리안 1세로서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1806년 8월 1일 바이에른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하여 라인 동맹에 가입할 때까지 왕은 선제후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베르크 공국은 1806년에야 나폴레옹에게 할양되었다. 새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나폴레옹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으며, 반도 전쟁을 위해 징집병을 제공해야 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직면했으며, 1810년부터 1814년까지 뷔르템베르크와 이탈리아에 영토를 잃었다. 1808년에는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같은 해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 최초의 성문 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5년 동안 파리의 뜻에 따라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당시 약 3만 명의 바이에른 군인이 전사했다. 1813년 10월 8일 리트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은 라인 동맹을 탈퇴하고 주권과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10월 14일 바이에른은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조약은 왕세자 루트비히와 칼 필리프 폰 브레데 원수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로 독일 원정이 연합국 승리로 끝났고 프랑스는 완패했지만, 바이에른 군이 하나우 전투에서 프랑스 그랑 아르메의 후퇴를 저지하려고 시도했을 때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1814년 나폴레옹 프랑스의 패배로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잃었지만, 뷔르츠부르크 대공국, 프랑크푸르트 대공국, 헤세 대공국의 일부를 보상받았다. 라인 팔츠는 뮌헨 조약에 의해 바이에른에 주어졌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프랑스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막시밀리안 4세(막시밀리안 1세)는 오스트리아로부터 티롤을 할양받았으나, 티롤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해 4월 13일, 인스브루크 수비대를 항복시켜 진압의 발판을 마련하고, 여러 차례 실패 후 11월 10일 인스브루크를 점령했다. 1806년, 인근 영토를 병합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막시밀리안 4세는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를 칭하며 라인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는 라인 동맹 성립으로 퇴위하고 제국 해산을 선포했다. 바이에른은 프랑스와 동맹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딸 아우구스테와 나폴레옹의 계자 외제느 드 보아르네를 결혼시켜 유대를 강화했다. 1808년에는 간략한 헌법을 제정했다.

1810년 2월 28일, 프랑스와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가 포기한 옛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베르히테스가르텐, 인 지역, 하우스루크 지역을 획득했다. 바이로이트 변경백령[16]과 레겐스부르크[17]를 각각 과 에 프랑스로부터 매입했다. 나폴레옹은 티롤 반란의 원인이 바이에른의 통치에 있다고 판단하여, 바이에른은 남티롤을 이탈리아 왕국(1805년-1814년)에, 동티롤을 일리리아주에 할양해야 했다.

1813년 10월 8일 리트 조약을 맺고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했다. 전날 막시밀리안 1세, 막시밀리안 폰 몽주라, 카를 필립 폰 ヴレー데 세 사람이 보겐하우젠(천문대가 있는 곳)에 위치한 몽주라의 별장에 모여 협의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ヴレー데와 몽주라가 밀어붙였다. 이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바이에른이 영토를 양도할 때는 완전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15일, 바이에른군과 오스트리아군이 합류하여 ヴレー데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빈 회의에서 바이에른 영토는 확정되지 않고 오스트리아와 직접 협상했다. 1815년 팔츠의 일부를 회복하고 독일 연방에 참가했다. 영토는 1816년 4월 뮌헨 조약에서 확정되었다.

2. 3. 독일 연방 시기

나폴레옹 황제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이 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연방 및 남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가, 1871년 1월에 독일 제국에 가맹하였다. 바이에른 왕국은 연방참의원에서 6표를 가지고 있었다.[4]

1815년 빈 회의에서 바이에른 영토는 확정되지 않고 오스트리아와 직접 협상했다. 1815년 팔츠의 일부를 회복하고 독일 연방에 참가했다. 영토는 1816년 4월 뮌헨 조약에서 확정되었다. 뮌헨 조약 체결의 계기는 양국이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루드비카 폰 에스터라이히-에스테의 죽음을 계기로 대립 관계 해소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11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딸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과 결혼했다. [18]

1818년 5월 26일, 프랑스 부르봉 왕정의 1814년 헌장을 모델로 한 두 번째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칙정 헌법에 따라 양원제 의회가 설립되었고, 바이에른은 입헌 군주국이 되어 법안 성립과 조세는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1832년 런던 조약에 따라 루트비히 1세의 차남 오토가 그리스의 국왕에 즉위했다. 3명의 섭정도 바이에른에서 파견되었다. 요제프 루트비히 폰 아르만스페르크,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마우러, 카를 빌헬름 폰 하이데크이다. 오톤이 성년이 되는 1835년까지 이 세 사람이 실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아주 적은 영토의 할양과 의 배상금으로 강화하고, 남독일의 맹주적 존재가 되었다. 독일 제국이 성립할 때 프로이센 왕국에 이어 영방이 되었다.

2. 4. 독일 제국 시기

1871년 1월,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에 가맹하였다. 바이에른 왕국은 연방참의원에서 6표를 가졌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북독일 연방이 신속하게 통일되었고, 프로이센 국왕이 국가를 이끌게 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1814년 패배에 대한 "보상"으로 바이에른이 점령한 라인 연방의 일부인 팔츠를 요구하면서, 바이에른을 포함한 많은 남독일 국가들의 프로이센에 대한 억제는 변화했다. 루트비히 2세는 통일된 독일의 가장 큰 적이라고 여겨진 프랑스에 대항하여 1870년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바이에른은 북독일 연방과의 정치적, 법적, 무역 관계를 강화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바이에른 군대는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의 지휘하에 프랑스 군대에 맞서 파병되었다.[6]

프랑스가 연합 독일군에 패배하자,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새로운 독일 제국(독일 제국de)의 황제(카이저)로 선포될 것을 루트비히 2세가 제안했고, 이는 1871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북독일 연방의 국가들과 모든 남독일 국가들을 포함하여 독일 제국의 영토가 선포되었다. 제국은 또한 루트비히의 팔츠에서 프랑스 국경을 멀리 옮기려는 욕망으로 인해 주로 합병된 이전 프랑스 영토인 알자스-로렌을 합병했다.

바이에른의 독일 제국 편입은 프랑스 패배에 대한 환호에서 새로운 독일 총리이자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지도하에 독일이 나아가는 방향 때문에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토 폰 브라이-슈타인부르크 백작이 이끄는 바이에른 대표단은 독일 제국 내에서 바이에른 왕국의 특권 지위(''Reservatrechte'')를 확보했다. 바이에른 왕국은 전쟁 시에만 프로이센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자체 외교단과 자체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7]

바이에른이 제국에 편입된 후,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의 정치 문제에서 점점 더 소외되었고, 동화 같은 성과 궁전을 여러 개 건설하는 등 개인 프로젝트에 막대한 돈을 썼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그너식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루트비히는 국고가 아닌 자신의 사재로 이러한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했고, 건설 프로젝트로 인해 심각한 부채에 시달렸다. 이러한 부채는 루트비히에게 건설을 중단하도록 설득하려던 바이에른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거부했으며 정부 장관들과 왕실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8]

1886년 위기가 고조되었다. 내각이 임명한 의료 위원회는 루트비히를 정신병자로 선언하여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삼촌인 루이트폴트 왕자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루트비히 폐위 하루 후, 왕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공식 부검 결과 사인은 자살로 인한 익사로 발표되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루트비히의 폐에서 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건조 익사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정치적 암살에 대한 음모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9]

왕위는 루트비히의 형제인 오토에게 승계되었다. 그러나 오토는 오랜 기간 정신 질환을 앓았고, 3년 전부터 의료 감독 하에 있었다. 따라서 국가 원수의 직무는 실제로 루이트폴트 왕자의 손에 달려 있었고, 그는 오토의 섭정으로 계속해서 봉직했다.

뮌헨 사법궁전에 있는 루이트폴트 왕자 섭정상


1886년부터 1912년까지 루이트폴트 왕자 섭정 시대 동안 바이에른과 프로이센 간의 관계는 냉랭했다. 바이에른인들은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의 반(反)가톨릭적 의제와 프로이센의 제국에 대한 전략적 지배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이에른은 독일 내 프로이센의 지배력에 항의했고, 1900년 프로이센 출신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생일에 공공 건물에 바이에른 깃발 이외의 다른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를 무시했지만, 이후 독일 제국 깃발을 바이에른 깃발 옆에 게양하는 것을 허용하여 이는 빠르게 수정되었다.

1868년에 설립된 가톨릭 보수주의 애국당은 바이에른 주의회에서 주요 정당이 되었다. 1887년 그 이름은 바이에른 중앙당으로 변경되었다. 1893년 사회민주당이 의회에 진출했다. 1903년부터는 여학생들도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06년 선거 개혁으로 의회 선거 방식이 간접 선거에서 직접 선거로 바뀌었다. 1912년 루이트폴트는 중앙당 정치인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을 주의회 다수당 대표로 임명하여 최초로 주의회 다수당 대표가 이끄는 정부를 구성했다.

루이트폴트의 섭정 시대는 바이에른에서 '''프린츠레겐텐야레'''("왕자 섭정 시대")로 알려진 엄청난 예술적, 문화적 활동으로 특징지어진다. 1912년 루이트폴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왕자가 섭정을 이어받았다. 그때까지 오토가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 오래전부터 분명해졌고, 루트비히가 스스로 왕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11월 6일, 주의회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법을 통과한 다음 날, 루트비히는 섭정을 끝내고 오토를 폐위시키고 자신을 루트비히 3세로 바이에른 국왕으로 선포했다.

루이트폴트의 섭정 시대인 '''프린츠레겐텐차이트'''("왕자 섭정 시대")는 바이에른의 이익이 점차 독일 제국의 이익 뒤로 옮겨가는 시대였다. 루트비히 2세의 이전 통치의 불행한 결말과 관련하여 바이에른 군주제의 이러한 단절은 더욱 강력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1913년의 헌법 개정은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왕의 통치의 연속성에 결정적인 단절을 가져왔는데, 이는 특히 이러한 변화가 대표자의 집인 주의회에 의해 승인되었고, 따라서 간접적으로 완전한 의회 정부로 향하는 첫 번째 단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 수립과 더불어 일련의 협약을 통해 여러 주의 군사력 대부분이 프로이센 전쟁성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평시에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했으며, 바이에른의 2개(후에 3개) 군단은 프로이센의 전투 서열 밖에 남아 있었다.[10] 바이에른 보병과 기병 연대는 육군 대부분에서 채택한 프로이센식과는 다른 역사적인 밝은 파란색과 녹색 군복을 유지했다. 각 바이에른 병사는 루트비히 국왕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만, 전시에는 이 복종 서약이 최고 사령관인 빌헬름 황제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914년 7월, 바이에른 육군은 92,400명 또는 총 독일 제국군의 11%를 차지했다.[11]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침공(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침략)으로 인해 동맹국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병대원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독일은 이전의 라이벌이었던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편을 들었고, 프랑스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처음에는 바이에른을 포함한 독일 전역에서 많은 징집병들이 열렬히 군대에 합류했다. 전쟁 발발 당시 루트비히 3세 국왕은 바이에른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베를린에 공식 공문을 보냈다. 나중에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을 위해 알자스와 벨기에의 앤트워프 시(항구 접근을 위해)를 병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숨겨진 목표는 승리 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부 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잔혹한 전쟁으로 인해 바이에른 사람들은 많은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지쳐갔다.

1917년, 바이에른 총리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이 독일 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오토 리터 폰 단들이 새로운 바이에른 총리가 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눈먼 충성심을 보였다는 비난을 받은 루트비히 3세는 전쟁 중 인기가 점점 떨어졌다. 1918년, 바이에른 왕국은 연합국과의 별도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18년까지 바이에른과 독일 전역에 시민 불안이 확산되었고, 프로이센의 패권에 대한 바이에른의 반항과 바이에른 분리주의가 주요 동기였다.

1918년 11월 7일, 루트비히 3세는 뮌헨 레지덴츠에서 독일 혁명의 발발로 인해 가족과 함께 도망쳤다. 그는 독일 제국 군주 중 가장 먼저 폐위된 군주였으며, 며칠 후 카이저가 독일 왕좌에서 물러났다. 루트비히 3세는 일시적인 체류로 예상되었던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게 되었다. 11월 12일, 그는 아니프 선언을 발표하여 현재 상황에서는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그는 군인들과 관리들을 그의 맹세에서 해방시켰다. 그는 공식적으로 퇴위하지 않았지만, 쿠르트 아이스너가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는 루트비히 3세의 선언을 퇴위로 간주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을 폐위했다.

3. 행정 구역

1837년 이래 바이에른 왕국은 8개 지방(Regierungsbezirke)으로 구분되었다. 각 지방의 수도는 다음과 같다.

지방 이름수도
오버프랑켄(Oberfranken)바이로이트
미텔프랑켄(Mittelfranken)안스바흐
운터프랑켄(Unterfranken)뷔르츠부르크
슈바벤(Schwaben)아우크스부르크
팔츠(Pfalz)슈파이어
오버팔츠(Oberpfalz)레겐스부르크
오버바이에른(Oberbayern)뮌헨
니더바이에른(Niederbayern)란트슈트



1808년 바이에른 왕국 건립 초기에는 프랑스의 주(départements) 방식을 본떠 15개의 행정 구역(Kreise)이 설치되었다. 이들은 주요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10년과 1815년의 영토 변화로 인해 구역 조정이 필요해졌고, 크라이스의 수는 8개로 줄었다.

1838년 루트비히 1세는 각 지역의 이전 역사적 부족과 영토의 이름을 따서 크라이스(Kreise)를 개명하였다. 이때 노이부르크, 레겐스부르크, 아샤펜부르크 등의 도시 이름은 삭제되었다. 루트비히 1세는 자신의 왕위를 "바이에른의 왕, 프랑코니아 공작, 슈바벤 공작, 라인 팔라틴 백작"으로 변경하였고, 그의 후계자들도 이를 유지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바이에른은 여러 하프랑코니아 지구를 프로이센에 할양해야 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은 1920년에야 바이에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바이에른 왕국에 속한 적이 없다. 오스트하임은 1945년 바이에른에 추가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초기 용어인 크라이스(Kreis)와 베르치크(Bezirk)는 레기어룽스베르치크(Regierungsbezirk)와 란트크라이스(Landkreis)로 바뀌었다.

4. 역대 국왕

재위 기간이름비고
1806년 - 1825년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 선제후로서는 막시밀리안 4세. 마지막 선제후.
1825년 - 1848년루트비히 1세로라 몬테스와의 스캔들로 인해 퇴위.
1848년 - 1864년막시밀리안 2세
1864년 - 1886년루트비히 2세퇴위 다음 날, 슈타른베르크 호에서 익사체로 발견됨.
1886년 - 1913년오토 1세형 루트비히 2세와 마찬가지로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알려짐. 1913년 폐위.
1913년 - 1918년루트비히 3세오토 1세의 섭정을 거쳐 스스로 즉위. 제1차 세계 대전 후 혁명으로 퇴위.


5. 주요 인물

wikitext


  •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국왕(재위 1913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에 협력했으나, 1918년 독일 혁명으로 폐위되었다.
  • 루프레히트: 루트비히 3세의 아들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 알브레히트: 루프레히트의 아들.
  • 프란츠: 알브레히트의 아들로,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이다.
  • 막시밀리안 폰 몽젤라스: 바이에른 왕국의 정치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행정 구조의 기반을 마련했다.
  • 루트비히 1세: 바이에른 왕국의 왕(재위 1825년 ~ 1848년). 예술을 장려하고 신고전주의 건축물들을 건설했으며, 산업화를 추진했다.
  • 루트비히 2세: 바이에른 국왕(재위 1864년 ~ 1886년). 동화 같은 성과 궁전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여 재정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정신병자로 선언되어 폐위되었다.
  • 루이트폴트: 루트비히 2세의 삼촌이자 섭정(재위 1886년 ~ 1912년).
  • 오토: 루트비히 2세의 동생. 정신 질환으로 인해 루이트폴트가 섭정을 맡았다.
  •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중앙당 정치인이자 바이에른 총리.
  • 오토 리터 폰 단들: 바이에른 총리.
  • 오토 폰 브라이-슈타인부르크 백작: 독일 제국 내에서 바이에른 왕국의 특권 지위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 루트비히 폰 데어 프포르텐: 바이에른의 총리.
  • 바이에른의 카를 테오도어 왕자: 바이에른 군 지휘관.
  • 헤르만 로에슬러: 일본 제국의 고용 외국인. 일본 제국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 Julius Binder영어: 신헤겔파 법철학자.
  • 미하엘 빗트만: 나치 친위대 대위.

6. 기타


1806년 라인 동맹 내 바이에른 왕국 (티롤 포함)


1812년 라인 동맹 내 바이에른 왕국 (잘츠부르크 포함)


1816년 독일 연방 내 바이에른 왕국 (라인 팔츠 포함)

  • '''면적''': 75865km2 (1900년)
  • '''인구'''

1818년1840년1900년1910년
3,707,966명4,370,977명6,176,057명6,524,372명


  • '''행정구역''' (Kreisede)


1808년 ~ 1817년



1816/1817년 ~ 1838년



1838년 ~ 1918년


참조

[1] 서적 Die Volkshymnen aller Staaten des deutschen Reiches. Beiträge zu einer Geschichte über ihre Entstehung und Verbreitung https://digital.ub.u[...] 2022-07-15
[2] 서적 Region and State in Nineteenth-Century Europe: Nation-Building, Regional Identities and Separatism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2
[3] 웹사이트 Bavaria Becomes a Kingdom https://www.museum.b[...] 2023-11-26
[4] 웹사이트 Constitutional monarchy in the Kingdom of Bavaria https://www.bavariko[...] 2023-11-26
[5] 웹사이트 Forschung – Universität Regensburg http://www.uni-regen[...] Uni-regensburg.de 2012-09-09
[6] 웹사이트 The Royal Drama of Ludwig II https://www.museum.b[...] 2023-11-26
[7] 웹사이트 16 Bizarre Facts About King Ludwig II, The Most Extreme Fanboy of All Time https://www.ranker.c[...] 2023-11-26
[8] 웹사이트 Be careful what you wish for…especially if you wish you were a king. https://portiabridge[...] 2010-12-11
[9] 웹사이트 Foundation of the German Reich in 1871 https://www.bavariko[...] 2023-11-26
[10] 서적 The Army of the German Empire 1870-1888 Bloomsbury USA 1973-06-15
[11] 서적 The German Army in World War I Bloomsbury USA 2003-08-20
[12] 웹사이트 Beisetzung Ludwigs III., München, 5. November 1921 http://www.historisc[...] 2011-07-01
[13] 서적 Handbuch der bayerischen Ämter, Gemeinden und Gerichte 1799–1980 Munich 1983
[14] 서적 Handbuch der bayerischen Ämter, Gemeinden und Gerichte 1799–1980 (Guide of the Bavarian Districts, Municipalities and Courts 1799–1980) Munich 1983
[15] 문서 ザールラント州とラインラント=プファルツ州の一部
[16] 문서 フランスがティルジットの和約でプロイセン王国から獲得
[17] 문서 領主カール・テオドール・フォン・ダールベルクには代替地としてフランクフルト大公国が与えられた
[18] 문서 大司教区はミュンヘン・フライジングとバンベルクの二つ。その他六つの司教区が割り当てられた(アウクスブルク、レーゲンスブルク、パッサウ、ヴュルツブルク、アイヒシュテット、シュパイアー)。
[19] 웹인용 Die Volkshymnen aller Staaten des deutschen Reiches. Beiträge zu einer Geschichte über ihre Entstehung und Verbreitung https://digital.ub.u[...] 2022-07-15
[20] 문서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있던 국가
[21] 문서 1863년 이후 안할트에 합병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