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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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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 전쟁은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러시아 제국과 스웨덴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은 스웨덴이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반대하고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러시아는 핀란드를 "자유 처분"하겠다는 나폴레옹과의 밀약에 따라 핀란드를 침공했다. 전쟁의 경과로 러시아는 핀란드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스웨덴은 1809년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핀란드와 올란드 제도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이로 인해 스웨덴은 핀란드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스웨덴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2. 배경



1807년, 나폴레옹과 틸지트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에게 편지를 보내 스웨덴이 대륙 봉쇄령을 따라야 한다고 알렸다.[5] 그러나 나폴레옹을 적그리스도로 여겼던 구스타브 4세는 이 제도가 스웨덴의 해상 상업에 큰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하여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덴마크의 노르웨이 영토를 노리고 영국과 덴마크 공격을 협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해군이 코펜하겐을 공격하고 영-러 전쟁이 발발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구스타브 4세에게 모든 외국 군함에 대해 발트해를 폐쇄할 것을 요구했지만, 국왕은 프랑스가 발트해 주요 항구를 장악하고 있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당시 스웨덴 장교들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지만, 구스타브 4세는 스웨덴의 방어 능력에 대해 비현실적인 낙관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러한 스웨덴의 상황을 이용하여 핀란드를 점령하고 러시아-스웨덴 국경을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스웨덴은 덴마크와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기에 군사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구스타브 4세는 겨울 공격에 핀란드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러시아의 경고를 무시했다. 당시 스웨덴은 겨울에는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핀란드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로 해군 지원 의존도가 낮아진 상황이었다.

스웨덴의 초기 계획은 핀란드 남부 해안 요새를 수동적으로 방어하고, 나머지 스웨덴군은 북쪽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이후 봄에 해군 지원을 받은 스웨덴 군대가 남북에서 동시 반격하는 전략이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주요 전투를 피하는 데 있었다. 사무엘 묄러 중령은 즉각적인 공세를, 구스타프 마우리츠 아르메펠트는 남부 해안 주둔군과 협력하여 적을 지연시키는 방식을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핀란드 주둔 스웨덴군 사령관 빌헬름 마우리츠 클링스포르는 이러한 다양한 계획들을 혼합한 지시를 받았다.

한편 러시아는 스파이 등을 통해 핀란드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했다. 러시아 지도는 스웨덴 지도보다 정확했으며, 게오르그 마그누스 슈프렝트포르텐 장군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수립했다. 슈프렝트포르텐은 겨울철 핀란드가 고립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겨울 공세를 제안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부흐스회벤 장군이 러시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이 계획은 더욱 발전되었다. 러시아군의 전략은 1790년 이후 건설된 요새들을 발판 삼아 핀란드 남부를 장악하고 북쪽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사볼락스 주둔군은 스웨덴군을 압박하며 보트니아만 연안 도시 울레아보리와 바사를 점령하여 스웨덴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2. 1. 러시아와 스웨덴의 관계

알렉산드르 1세 러시아 황제가 1807년 틸지트 조약을 나폴레옹과 체결한 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대륙 봉쇄령 참가를 거부했다. 나폴레옹을 적그리스도로 여겼던 국왕은 이 제도가 스웨덴의 해상 상업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5]

1807년 10월, 나폴레옹 1세는 알렉산드르 1세와 에르푸르트에서 회담을 갖고, 스웨덴을 대륙 봉쇄령에 참여시키기 위해 러시아를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이 회담에서 두 사람은 스웨덴과의 전쟁 대신, 스웨덴의 속령 핀란드를 러시아가 "자유 처분"한다는 밀약을 맺었다.[5]

이에 맞서 구스타프 4세는 영국과 동맹을 꾀했지만, 영국은 스웨덴과의 동맹 참가를 거부하고 덴마크와 전쟁을 시작했다. 덴마크를 물리친 영국은 러시아와 영러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스웨덴의 공투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발트해해전과 핀란드의 육전에서는 전개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아, 영국의 참전은 스웨덴에 아무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5]

2. 2. 스웨덴의 상황

알렉산드르 1세는 1807년 틸지트 조약을 나폴레옹과 체결한 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에게 대륙 봉쇄령 준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적그리스도로 여겼던 국왕은 이 제도가 스웨덴의 해상 상업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거부했다.[5] 그는 덴마크의 노르웨이 영토를 탐내며 덴마크에 대한 합동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과 협상에 들어갔다.

영국 해군이 코펜하겐을 공격하고 영-러 전쟁 (1807–1812)이 선포되자, 알렉산드르 1세는 구스타브 아돌프에게 모든 외국 군함에 대해 발트해를 폐쇄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은 프랑스가 주요 발트해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한 이전 약속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스웨덴 장교들은 러시아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구스타브 아돌프는 스웨덴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완고함은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하여 러시아-스웨덴 국경을 러시아 수도 서쪽으로 밀어내는 구실로 여겨졌다.[5]

이 상황은 스웨덴에게 덴마크와 러시아를 잠재적 적으로 마주하게 하여 군대를 분산시켜야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국왕은 적이 겨울에 공격할 경우 핀란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다. 대부분의 스웨덴 계획은 겨울에는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했다. 또한 핀란드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로 건설로 해군 지원 의존도를 크게 줄였다.

스웨덴의 계획은 먼저 핀란드 남부 해안의 요새를 수동적으로 방어하고 유지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스웨덴군은 북쪽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봄에 스웨덴 군대가 해군 지원을 받고 러시아 군대가 핀란드 전역에 분산되어 보급선이 길어질 때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반격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근본적인 이유는 결정적인 주요 전투를 피하는 것이었다.

즉각적인 공세를 옹호한 사무엘 묄러 중령과 남부 해안의 주둔군과 협력하여 진격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을 지지한 구스타프 마우리츠 아르메펠트도 있었다.

결국 핀란드의 새로운 스웨덴 사령관 빌헬름 마우리츠 클링스포르 장군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지시는 이러한 계획에서 나온 아이디어의 혼합이었다.

2. 3. 러시아의 공격 계획

러시아는 핀란드로부터 스파이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 지도는 스웨덴 지도보다 여러 면에서 더 정확했다. 러시아는 계획을 세울 때 게오르그 마그누스 슈프렝트포르텐 장군의 도움을 받았다. 슈프렝트포르텐은 바다가 얼어붙으면 핀란드가 대부분 고립될 것이기 때문에 겨울 동안 공세를 제안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1807년 12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부흐스회벤 장군이 핀란드 주둔 러시아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에 얀 피터 반 주흐텔렌 장군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3]

이 계획은 1790년 이후 건설된 일련의 요새를 핀란드로 진격하는 러시아군의 발판으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했다. 핀란드 남부에서는 군대가 요새를 고립시키고 핀란드 남부 전체를 먼저 장악한 다음 북쪽으로 더 진격할 예정이었다. 사볼락스(핀란드어: ''사보'')의 군대는 스웨덴군을 압박하고 보트니아만을 향해 울레아보리(핀란드어: ''울루'')와 바사(핀란드어: ''바사'')에 도달하여 스웨덴군 본대의 후퇴를 차단할 예정이었다.[3]

3. 경과

1808년 2월 21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벅스호에벤 휘하의 러시아군 24,000명이 국경을 넘어 핀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1] 핀란드 주둔 스웨덴군 사령관 대행은 타바스테후스 (핀란드어: ''Hämeenlinna'')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3월 2일 빌헬름 마우리츠 클링스포르가 지휘권을 인수하여 군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러시아군은 초기에 로비사, 포르보, 헬싱키, 한코 반도, 투르쿠, 올란드 제도, 바사, 쿠오피오 등을 빠르게 점령했다. 스웨덴군은 대부분 철수하며 물자를 파괴했다.[1] 스바르트홀름 요새는 3월 18일에, 스베아보르는 5월 6일에 항복했다.

칼 요한 아들레르크로이츠와 요한 아담 크론스테드 휘하의 스웨덴군은 시이요키 전투와 레볼락스 전투에서 반격했고, 빌헬름 마우리츠 클링스포르는 원수로 진급했지만, 진격은 느렸다.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는 쿠오피오로 빠르게 진격했고, 5월에 스웨덴 해군은 올란드 제도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쿰링에 섬을 점령했다.

6월과 7월, 스웨덴은 레모 전투, 바사 전투 등 상륙 작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스웨덴 해군은 리미토 크람프 전투, 푸키사리 전투, 탈홀멘 전투, 산되스트롬 전투에서 러시아 해군과 교전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러시아는 해안 부대를 연결했다. 스웨덴은 크리스티네스타드와 카스피넨 근처에서 소규모 상륙을 시도했지만, 격퇴되었다.

8월과 9월, 러시아군은 니콜라이 카멘스키 지휘 하에 쿠오르타네 전투, 살미 전투, 오라바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미하일 페트로비치 돌고루코프는 샌델스를 후퇴시켰다. 벅스호베덴의 휴전 제의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거부되고, 보그단 폰 크노링으로 사령관이 교체되었다.

스웨덴은 해상 봉쇄와 상륙 작전으로 러시아를 괴롭히려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표트르 카니코프 휘하의 러시아 함대는 스웨덴의 봉쇄를 해제하려 했지만, 영국 함대에 저지되었다. 8월 30일, 스웨덴 해안 함대는 그뢴비크순드 해전에서 승리했고, 9월에는 팔바순드 전투에서 상륙 작전을 펼쳤지만, 악천후로 철수했다.

1808년 11월, 러시아군은 핀란드 전역을 점령했고, 올키요키 조약에 따라 스웨덴군은 핀란드를 떠났다. 1809년 3월, 구스타브 4세가 쿠데타로 폐위되고, 칼 13세가 즉위했다. 러시아군은 보트니아만을 건너 스웨덴 본토를 공격, 올란드 제도를 점령하고 스톡홀름 근처에 도달했다. 바클라이 드 톨리우메오에 진입했다.

제임스 소머즈 휘하의 영국 함대가 핀란드 만에 도착하여 러시아 해군을 봉쇄했다. 1809년 8월, 칼 13세는 구스타프 바흐트마이스터에게 스웨덴 북부에 상륙하여 러시아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새바르 전투와 라탄 전투에서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1809년 9월 17일,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스웨덴은 핀란드와 토르네 강 동쪽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대륙 봉쇄령에 참여,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1810년 1월, 러시아는 스웨덴과 프랑스 간 파리 조약을 중재했다.

3. 1. 1808년 2월 ~ 5월: 러시아의 초기 공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벅스호에벤 휘하의 러시아군 24,000명이 1808년 2월 21일 아흐벤코스키에서 국경을 넘어 로비사를 점령했다.[1] 스웨덴군은 타바스테후스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빌헬름 마우리츠 클링스포르는 군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러시아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전쟁 첫날 로비사를 점령하고 스바르트홀름 요새를 포위했다. 포르보는 2월 24일에, 헬싱키는 3월 2일에 점령되었다. 한코 반도에 있는 버려진 스웨덴 요새는 3월 21일에 점령되었고, 같은 날 러시아군은 투르쿠를 점령하는 동시에 소규모 부대가 올란드 제도로 파견되었다. 1808년 3월 말까지 바사도 점령되었다. 사보락스에서 러시아군은 3월 16일에 쿠오피오를 점령했다. 스웨덴군은 철수하며 사용 가능한 물자를 파괴했고, 오보에 정박해 있던 군도 함대의 함선(50척에 가까운 포격 슬루프)은 나포를 막기 위해 불태워졌다.

스바르트홀름 요새는 전쟁 준비 부족으로 3월 18일에 러시아군에 항복했다.[1] 스베아보르는 칼 올로프 크론스테드 제독의 지휘 하에 있었으나, 1808년 5월 6일에 항복했다. 러시아군은 스웨덴 군도 함대의 주력 부대와 물자, 탄약을 확보했다.

3. 2. 스웨덴의 반격과 교착

핀란드 전쟁, 1808년 5월~10월


칼 요한 아들레르크로이츠 대령 휘하의 스웨덴군은 시이요키 전투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레볼락스 전투에서 요한 아담 크론스테드 대령 휘하의 스웨덴군은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빌헬름 마우리츠 클링스포르는 원수 계급으로 진급했지만, 스웨덴군의 진격은 매우 느렸다.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대령 휘하의 여단은 쿠오피오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5월, 스웨덴 소함대는 올란드 제도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쿰링에 섬을 침공하여 러시아 주둔군을 항복시켰다. 존 무어 경 휘하의 영국 함대가 예테보리에 도착했지만, 스웨덴 국왕과의 불일치로 상륙하지 않고 스페인으로 떠났다.

3. 3. 1808년 6월 ~ 7월: 스웨덴의 상륙 작전과 해전

에버하르트 폰 베게작 소장은 핀란드로 진군하는 첫 번째 스웨덴 육군을 이끌도록 선택되었다. 그는 2,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뉘스타드(핀란드어: ''우시카우풍키'')와 오보 사이의 어딘가에 상륙하여 후자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대신 폰 베게작은 오보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레모(핀란드어: ''레무'') 영지에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상륙은 6월 19일에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오보에 주둔한 놀란 러시아군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3,000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하여 상륙 부대를 막았다. 6월 20일 아침, 스웨덴군은 철수해야 했다.

요한 베르겐스트롤레 대령은 6월 25일 바사에서 북동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1,100명의 스웨덴군을 상륙시켜 빠르게 마을로 진격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3,000명의 병력을 모아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스웨덴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1]

러시아 해안 함대가 항코 너머로 진격하면서 스웨덴군에게 어려움이 발생했다. 핀란드 군도에 배치된 스웨덴 해안 부대의 전력은 러시아군이 스베아보르 항복으로 확보한 해안 함대와 동일했다. 러시아군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해 클라에스 옐름스체르나 소장 휘하의 스웨덴 해안 함대 부대는 두 차례 전투를 벌였다. 6월 30일 리미토 크람프 전투에서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고, 러시아군이 오보에 더 가까이 후퇴한 후 7월 4일 푸키사리 전투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교착 상태로 끝났지만, 스웨덴군은 러시아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스웨덴의 실패로 볼 수 있다.[2]

스베아보르에서 추가 러시아 해안 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경고를 받은 스웨덴군은 현재 오보에 갇혀 있는 러시아 해안 부대와 합류하기 전에 그들을 가로막기 위해 이동했다. 러시아군이 키미토(핀란드어: ''케미오엔사리'') 섬을 우회할 의도라는 것을 알고, 스웨덴군은 좁은 해협에 포격정을 배치했다. 7월 21일 탈홀멘 전투에서 처음 러시아군과 만났고, 8월 2일 산되스트롬 전투에서 다시 만났다. 8월 2일 베스탄케르에서 포격정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과 포병을 상륙시키려는 스웨덴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북스호베덴 장군을 포획할 뻔했다. 전투 중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핀란드 군도에서 별도의 해안 부대를 연결하는 데 성공하여 러시아가 전반적인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3]

스웨덴은 크리스티이나카우풍키(핀란드어: ''크리스티이난카우풍키'')와 카스쾨(핀란드어: ''카스피넨'') 근처 해안을 따라 여러 차례 소규모 상륙을 감행하여 현지인들을 모아 러시아에 대항했다. 첫 번째 상륙은 7월 3일에 있었고, 그 직후 여러 차례 더 일어났다. 스웨덴군은 모두 수백 명의 현지 무장 병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스웨덴이 모집한 농민과 민병대보다 훨씬 더 잘 훈련되고 장비를 갖춘 증원을 이 지역으로 보낼 수 있었다. 7월 말까지 스웨덴이 상륙시킨 소규모 부대와 그들을 지원한 사람들은 패배하거나 배로 철수했다.[4]

3. 4. 1808년 8월 ~ 9월: 러시아의 재공세와 휴전

러시아군은 증원을 받아 병력이 55,000명으로 늘어난 반면, 스웨덴군은 36,000명이었다. 8월 14일, 니콜라이 카멘스키 백작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카멘스키의 군단은 쿠오르타네 전투(9월 1일)와 살미 전투(9월 2일)에서 승리했다. 예오르그 칼 폰 뢸벤이 9월 13일 유타스 전투에서 스웨덴을 위해 승리했지만, 카멘스키는 9월 14일 오라바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표트르 바그라티온 중장의 신속한 행동으로 스웨덴의 상륙 시도는 좌절되었다. 동부 핀란드에서는 게릴라 운동이 점차 소멸되었다. 9월 26일, 미하일 페트로비치 돌고루코프 공작이 샌델스를 후퇴시켰다. 벅스호베덴은 휴전을 체결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이를 거부하고 12월에 벅스호베덴을 보그단 폰 크노링으로 교체했다.

남쪽에서는 스웨덴 전투 함대가 핀란드 군도에 정박하여 해안 항로를 막았지만, 러시아 함선은 얕은 해협에 머물렀다. 7월 17–18일 밤 동안 뢰브 해전(Lövön kahakkafi)이 벌어졌지만, 스웨덴 함대는 8월 22일에 봉쇄를 풀었고, 러시아 해안 부대가 통합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핀란드 군도에 약 100척의 해안 함선을 보유한 반면, 스웨덴은 7척의 갤리선과 30척의 건 슬루프만 배치할 수 있었다.

스웨덴은 상륙을 통해 러시아를 괴롭히려 했지만, 러시아의 대응으로 병력이 약화되었다. 8월 1일, 안데르스 귈렌보겔 선장 휘하의 약 1,000명의 지원병이 바사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봉기를 지원했다. 상륙은 성공했고, 스웨덴 군과 함께 러시아군을 비외르네보리(핀란드어: 포리)로 몰아냈다. 스웨덴 순찰선은 해안을 정찰하고 습격하여 러시아 포로를 올란드 제도로 데려갔다. 이러한 습격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은 해안을 따라 그들의 병력을 약화시켰다. 에버하르트 폰 베게삭 소장이 지휘하는 약 4,000명의 스웨덴 핀란드 남부 군대가 올란드 제도에서 핀란드로 이동하여 늦가을에 크리스티네스타드에 상륙하여 폰 뢸벤의 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폰 베게삭은 비외르네보리에 병력을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국왕은 군사 재판에서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추구한 후 폰 베게삭에게 그의 계급과 직함을 잃도록 선고했다.

표트르 카니코프 제독 휘하의 러시아 전투 함대는 7월 말에 군도에서 스웨덴의 봉쇄를 해제하고 연락을 끊으려 했지만, 8월 20일, 두 척의 영국 전열함 (HMS ''Implacable'' 및 ''Centaur'')이 스웨덴 함대에 합류하면서 저지되었다. 영국 함대는 러시아 함대와 단독으로 교전하여 마지막 러시아 전열함을 나포하여 불태웠다. 더 많은 왕립 해군 함선(HMS ''Victory'', ''Mars'', ''Goliath'', 및 ''Africa'')이 발티스키 포트에서 러시아 함대를 봉쇄했다.

핀란드 군도에서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산발적인 전투와 상륙이 계속되었다. 8월 30일, 스웨덴 해안 함대는 그뢴비크순드 해전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9월 17일, 스웨덴군은 다시 상륙했고, 상륙을 지원하는 해안 함대는 9월 18일 팔바순드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상륙한 병력은 9월 18일 함선으로 후퇴했지만, 9월 26일 다시 핀란드에 상륙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9월 28일에 또 다른 철수가 이루어졌다.

3. 5. 1808년 겨울 ~ 1809년 봄: 러시아의 스웨덴 본토 공격

1808년 11월, 러시아군은 핀란드 전역을 점령했고, 올키요키 조약에 따라 스웨덴군은 핀란드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스웨덴 본토로 군사 작전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카멘스키는 러시아군이 얼어붙은 보트니아만을 두 곳에서 건너는 계획을 제안했다. 한 부대는 바사에서 우메오로, 다른 부대는 오보에서 올란드 제도를 거쳐 스톡홀름 부근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부대는 육로로 토르네아를 통해 스웨덴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코닝은 이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시행을 미루었지만, 아라크체예프 전쟁 장관의 압박으로 결국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구스타브 4세 체포


1809년 3월 러시아 군대의 크바르켄 해협 횡단
(알렉산더 코체부)


핀란드 비에르쾨비에 있는 1809년 러시아 군의 크바르켄 해협 횡단 기념비


1809년 3월 13일, 핀란드 상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구스타브 4세가 쿠데타로 폐위되고, 그의 삼촌이 칼 13세로 즉위했다. 3월 17일, 바그라티온의 군단은 올란드 제도를 점령했고, 쿨네프는 스톡홀름 근처 스웨덴 해안에 도달했다.

크노링은 휴전을 제안했고, 바클라이 드 톨리 부대는 우메오에 진입했다. 슈발로프 백작은 토르네아를 공격하여 스웨덴 군대를 항복시켰다. 이후 차르는 크노링의 휴전 제안 서명을 취소하고 바클레이 드 톨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3. 6. 1809년 여름: 스웨덴의 최후 공세와 종전

제임스 소머즈 제독 휘하의 영국 왕립 해군 함대가 1809년 5월에 스웨덴에 도착하여 전열함 10척과 소형 선박 17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핀란드 만에 집결시켰다. 영국 해군 부대의 존재로 인해 러시아 전투함대는 크론시타트에 갇혔고, 영국군이 포르칼라 곶에 포병대를 건설한 후에는 러시아 선박의 연안 항로가 차단되었다. 영국이 핀란드 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러시아의 보급망에 큰 장애가 발생했고, 핀란드 해안 전역에 상당한 규모의 주둔군을 배치해야 했다. 영국 왕립 해군은 1809년 9월 28일 발트해를 떠나기 전에 러시아 선박 35척을 나포하고 20척을 소각했다.[1]

1809년 8월, 평화 협상에서 입지를 개선하고자 했던 칼 13세는 구스타프 바흐트마이스터 장군에게 스웨덴 북부에 상륙하여 카멘스키의 후방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새바르와 라탄에서의 교전은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고, 카멘스키는 이 늦은 반격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후 피테오에서 스웨덴군에 대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스웨덴 베스테르보텐우메오 근처 라탄에서 벌어진 이 전쟁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전투


바흐트마이스터의 작전은 8월에 시작된 평화 협상의 서막에 불과했으며, 그 결과 1809년 9월 17일 프레드릭스함 조약이 체결되어 스웨덴은 핀란드 전체와 토르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당시 ''베스테르보텐''이라고 불렸던 북동부 지역, 오늘날의 ''노르보텐'')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이후 스웨덴은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여 영국 선박에 자국 항구를 폐쇄했고, 이는 영국에 대한 공식적인 전쟁 선포로 이어졌다. 몇 달 후인 1810년 1월 6일, 러시아 정부는 스웨덴과 프랑스 사이에 파리 조약을 중재했다.

4. 결과 및 영향

러시아는 핀란드 대공국을 창설하고 1812년에 구 핀란드를 병합했다. 핀란드 대공국은 1919년까지 1772년 헌법을 유지했다.[2] 전쟁 후 대부분의 핀란드 병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2]

스웨덴은 핀란드 전쟁 패배로 관료제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를 더욱 효과적이고 기능적으로 만들었다.[1] 1809년 이전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로 명성이 높았지만, 전쟁에서의 패배는 스웨덴에게 동쪽의 실존적 위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스웨덴 엘리트들은 관료제를 개혁하도록 동기를 부여받았다.[1]

1809년 9월,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강화에 응하여 프레데릭스함 조약(하미나 평화)을 체결하도록 강요받았다. 1810년 1월에는 프랑스와도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굴복했다. 이 조약에 의해 스웨덴은 대륙 봉쇄령에 강제적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600년 동안 지배했던 핀란드를 잃고, 올란드 제도까지 할양했으며, 스웨덴은 북유럽에서의 영향력과, 아버지인 구스타브 3세가 쌓아 올린 유럽에서의 지위 전부를 잃었다. 한편 알렉산드르 1세는 핀란드에 대해 해방자로서 군림했다. 이후 핀란드는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 하의 보호국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1809년 3월, 스웨덴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대 나폴레옹의 선봉이었던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었고, 나폴레옹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다. 이후 스웨덴에서는 적자가 없는 칼 13세가 옹립되어,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핀란드 전쟁은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가 '만국흥망사'와 같은 역사 논평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2]

5. 분석

스웨덴군은 구스타프 4세 아돌프 국왕이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충분한 물자를 준비하지 못했다.[1] 게다가 스웨덴의 전략은 무기, 군대의 기동성, 핀란드의 획기적으로 개선된 도로망 발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구식 계획에 의존했다.[1] 핀란드의 요새 대부분은 완공되지 않았거나, 완공되었더라도 대부분 방치되어 훼손된 상태였다. 심지어 스웨덴의 가장 강력한 요새인 스베아보리 요새조차 육상 요새가 없는 등 계획된 요새 몇 개가 빠져 있었다.[1]

1808년 존 무어 휘하의 영국 원정군이 스웨덴에 도착했지만, 몇 달 동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다가 반도 전쟁 참전을 위해 떠났다.[1] 만약 국왕이 스카니아에 영국군 1만 명을 상륙시키는 것을 허가했다면, 스웨덴은 핀란드 전쟁에 1만 명 이상의 훈련된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은 셸란 섬이나 노르웨이를 정복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정예 부대를 포함한 병력을 핀란드 전쟁에서 제외했다. 스웨덴의 상륙 부대는 장비와 훈련이 부족하고 사기가 낮은 병력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스웨덴 해군이 항고를 지나 해안 해로를 봉쇄하지 못한 것도 상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

6. 기념

핀란드 수오넨요키의 쿠투요키 전투 기념비


핀란드는 2008년에 핀란드 전쟁 200주년 기념 주화를 발행했다. 이 주화는 100EUR의 가치를 가지는 기념 주화로, 주요 모티브는 전쟁 200주년이었다. 주화의 모티브는 핀란드가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전환되는 것을 나타낸다. 앞면에는 러시아 독수리 상징이, 뒷면에는 스웨덴 왕관이 묘사되어 전쟁 전후 핀란드의 역사를 보여준다.[2]

참조

[1] 웹사이트 Southern Towns Mark War of Finland Bicentennial https://yle.fi/uutis[...] Yle News 2008-02-21
[2] 웹사이트 Golden collector coin in honour of the anniversary: two hundred years since the Finnish war and the birth of autonomy https://web.archive.[...] Mint of Finland 2008-12-02
[3] 논문 Getting to Sweden, Part I: War and Malfeasance, 1720–1850 2015-09-01
[4] 논문 Getting to Sweden, Part II: Breaking with Corruption in the Nineteenth Century 2015-09-01
[5] 뉴스 緊張高まるバルト海の要塞ゴトランド島 スウェーデン12年ぶり再軍備「“夢”破れた。挑発抑える」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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