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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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승일은 일제강점기 만주군에서 복무하고,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영천 전투와 평양 탈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950년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의 회유와 세뇌 공작에 맞서 항전하다가 1953년 1월,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를 요구하는 데모를 주도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국방부 공식 기록은 전사로 처리되었으나, 생존했다는 증언과 함께 여순 사건 관련 이력으로 인해 송환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1920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만주군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6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1]
2. 생애
6.25 전쟁 발발 후 제7사단 8연대장으로 영천 전투와 평양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1] 1950년 11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북진하던 중 평안남도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1] 평안남도 덕천·영원 전투에서 제2군단 예하 6사단, 7사단, 8사단 모두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박승일 대령을 포함한 4명의 연대장급 영관 장교들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였다.[1]
국방부 공식 기록으로는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당시 7사단 직할 공병대 이기봉 하사가 박승일 연대장과 같이 중공군에게 생포되었다가 생환하여 당시 포로가 되던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2] 또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함께 포로가 된 박진홍 옹의 회고록에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목격담이 기술되어 있다.
8사단 21연대 소속 정훈장교로 포로가 되었던 최춘영 중위의 수기에 따르면, 박승일은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으며, 1951년 5월과 7월 사이 사상교육 관련 사건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3] 그러나 제2보병사단 32연대 소속 통신장교였던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는 1951년 4월 말경 제10 포로수용소(일명 천마포로수용소)에서 박승일 연대장과 함께 같은 감방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승일은 포로수용소 최고 선임 장교로서 북괴군의 세뇌 공작과 회유를 뿌리치고 부하 국군 포로들을 지휘하였다. 1952년 11월경 북괴군이 포로들에게 '귀환 후 부하를 데리고 월북하라'는 등의 지령을 내리자, 박승일은 술에 취한 척하며 "한번 먹은 일편단심 멸공만을 바라노라"라는 정몽주의 시조를 변조해 읊었다고 한다. 이후 박승일은 정치보위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포로들에게 요령껏 대처하되 서로에게 알려 대응 방침을 세울 수 있도록 충고했다.
1953년 1월, 박승일을 포함한 포로 4중대에서 제네바 협약에 의한 대우를 요구하는 데모를 일으켰고, 주동자로 지목된 박승일 등 8명의 영관급 장교들은 북괴군에 호출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박승일은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거나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이기봉 하사는 박승일이 여순 반란 당시 패잔병들을 산청에서 섬멸했기 때문에 포로교환 때 송환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4] 한편, 철원군 승일교는 박승일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1920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만주군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6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1]
6.25 전쟁 발발 후 제7사단 8연대장으로 영천 전투와 평양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1] 1950년 11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북진하던 중 평안남도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1] 평안남도 덕천·영원 전투에서 제2군단 예하 6사단, 7사단, 8사단 모두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박승일 대령을 포함한 4명의 연대장급 영관 장교들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였다.[1]
국방부 공식 기록으로는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당시 7사단 직할 공병대 이기봉 하사가 박승일 연대장과 같이 중공군에게 생포되었다가 생환하여 당시 포로가 되던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2] 또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함께 포로가 된 박진홍 옹의 회고록에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목격담이 기술되어 있다.
8사단 21연대 소속 정훈장교로 포로가 되었던 최춘영 중위의 수기에 따르면, 박승일은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으며, 1951년 5월과 7월 사이 사상교육 관련 사건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3] 그러나 제2보병사단 32연대 소속 통신장교였던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는 1951년 4월 말경 제10 포로수용소(일명 천마포로수용소)에서 박승일 연대장과 함께 같은 감방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승일은 포로수용소 최고 선임 장교로서 북괴군의 세뇌 공작과 회유를 뿌리치고 부하 국군 포로들을 지휘하였다. 1952년 11월경 북괴군이 포로들에게 '귀환 후 부하를 데리고 월북하라'는 등의 지령을 내리자, 박승일은 술에 취한 척하며 "한번 먹은 일편단심 멸공만을 바라노라"라는 정몽주의 시조를 변조해 읊었다고 한다. 이후 박승일은 정치보위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포로들에게 요령껏 대처하되 서로에게 알려 대응 방침을 세울 수 있도록 충고했다.
1953년 1월, 박승일을 포함한 포로 4중대에서 제네바 협약에 의한 대우를 요구하는 데모를 일으켰고, 주동자로 지목된 박승일 등 8명의 영관급 장교들은 북괴군에 호출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박승일은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거나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이기봉 하사는 박승일이 여순 반란 당시 패잔병들을 산청에서 섬멸했기 때문에 포로교환 때 송환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4] 한편, 철원군 승일교는 박승일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2. 2. 6.25 전쟁 참전
박승일은 6.25 전쟁 발발 후 제7사단 8연대장으로 영천 전투와 평양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1] 1950년 11월에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북진하던 중 평안남도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1]
평안남도 덕천·영원 전투에서 제2군단 예하 6사단, 7사단, 8사단 모두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박승일을 포함한 4명의 연대장급 장교들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였다.[1]
국방부 공식 기록으로는 덕천 전투에서 전사로 처리되었지만, 당시 7사단 직할 공병대 이기봉 하사가 박승일과 같이 중공군에게 생포되었고 그 후 생환하여 당시 포로가 되던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2] 또한,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박승일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박진홍의 회고록에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목격담이 기술되어 있다.
8사단 21연대 소속 정훈장교로 포로가 되었던 최춘영 중위의 수기에 따르면, 박승일은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으며, 1951년 5월과 7월 사이 사상교육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3] 당시 박승일은 포로들에게 사상교육을 열심히 받을 것을 독려했는데, 이는 인민군에 편입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 이후 박승일은 본부에 불려 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3]
제2보병사단 32연대 소속 통신장교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는 1951년 4월 말경 제10 포로수용소(일명 천마포로수용소)에서 박승일과 함께 같은 감방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박승일은 포로수용소 최고 선임 장교로서 북괴군의 회유를 뿌리치고 국군 포로들을 지휘하였다. 1952년 11월경 북괴군이 포로들에게 지령을 하달하려 할 때, 박승일은 술에 취해 "한 번 먹은 일편단심 멸공만을 바라노라"라며 정몽주의 시조를 변조하여 읊었다. 그러나 이 말이 누설되어 다음날 정치보위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3]
1953년 1월, 박승일을 포함한 포로 4중대에서 제네바 협약에 의한 대우를 요구하는 데모를 일으켰으나, 주동자 8명은 호출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박승일은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거나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
덕천 전투 후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이기봉 하사는 박승일이 여순 반란 당시 패잔병들을 섬멸했기 때문에 포로교환 때 송환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4] 한편, 철원 승일교는 박승일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2. 3. 포로 및 실종
국방부 공식 기록으로는 평안남도 덕천 전투에서 전사로 처리되었지만, 당시 7사단 직할 공병대 이기봉 하사는 박승일 연대장과 같이 중공군에게 생포되었다고 1971년 중앙일보 기사에서 증언했다.[2] 7사단 5연대에 배속되었던 학도병 박진홍은 회고록에 덕천 전투에서 박승일 대령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하여 포로수용소에서의 목격담을 기록했다.
8사단 21연대 소속 정훈장교였던 최춘영 중위의 수기에 따르면, 박승일은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으며, 1951년 5월과 7월 사이에 행방불명되었다.[3] 최춘영의 수기에는 박승일이 사상교육에서 "동무들 우리가 고향으로 빨리 가는 길은 사상교육을 열심히 받아야 여기서 공산주의자로 전향된 거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포로들에게 전향을 권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발언 이후 박승일은 본부에 불려 간 후 돌아오지 않았고, 최춘영은 감방 안에 인민군에 매수된 스파이가 있다고 추측했다.
제2보병사단 32연대 소속 통신장교였던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는 1951년 4월 말경 제10 포로수용소(천마포로수용소)에서 박승일 대령과 함께 포로 생활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1953년 1월, 박승일 대령을 포함한 포로들이 제네바 협약에 의한 대우를 요구하며 데모를 일으켰으나, 박승일 대령을 포함한 8명의 영관급 장교들은 북괴군에 호출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권경호 소위는 정전 이후 포로 교환 때 제10 포로수용소(천마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장교들 중 30%가 송환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
종합하면, 박승일 대령은 1950년 11월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된 후 벽동 포로수용소를 거쳐 1951년 제10 포로수용소(천마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3년 1월 이후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거나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 덕천 전투에서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이기봉 하사는 여순 사건 당시 박승일 대령이 지리산에서 패잔병들을 섬멸했기 때문에 포로교환 때 송환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4]
2. 3. 1.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
1950년 11월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박승일 대령은 포로수용소 최고 선임 장교였다.[1] 그는 북괴군의 집요한 세뇌 공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부하 국군 포로들을 지휘하며 멸공 정신을 고취했다.[2]
제2보병사단 32연대 소속 통신장교로 1951년 1월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권경호 소위의 회고록에는 박승일 대령과의 포로 생활에 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3] 1952년 11월경, 인민군 총사령부 정치보위부에서 국군 포로들에게 '귀환하거든 부하를 데리고 월북하라', '주요 부서를 파괴하라', '군내 비밀을 탐색해서 월북하라' 등의 지령을 내리려 했다. 어느 날 밤, 박승일 대령은 정치보위부 요원에게 불려갔다 와서 술에 취한 채 "한 잔 했다네. 수법이 유치하더군. 술로서 나를 설득하면 내가 응할 것 같으냐. 바보 녀석들"이라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넋이야 있건 없건 한번 먹은 일편단심 멸공만을 바라노라"라는 정몽주의 시조를 변조해 읊었다. 이에 다른 포로들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김일성 방안에 모기가 되었다가 김일성의 붉은 피를 송두리째 빨아다 대동강 푸른물에 흩어 줄까 하노라"라는 즉흥시를 지어 화답했다. 박승일 대령은 "당신들 이제부터 주의하시오. 시기는 왔소이다. 그러나 잘 못하면 최후를 맞을 수도 있소. 알아서 일편단심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 말이 누설되었는지, 다음 날 박 대령은 정치보위부에 불려가 욕설, 협박, 모욕을 당했다. 고초를 겪고 돌아온 박 대령은 포로들에게 "만약, 누구든지 불려가면 요령껏 해서 빠져나오게. 그러지 못하거든 순응하되 돌아와서 모두에게 알려야 하네"라고 충고했다.[3]
1953년 1월, 박승일 대령이 포함된 포로 4중대는 제네바 협약에 의한 대우를 요구하며 데모를 일으켰다. 그러나 데모 주동자들인 박승일 대령, 6사단 7연대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 노 소령, 장 소령 외 8명의 영관급 장교들은 북괴군에게 호출된 후 돌아오지 못했다. 권경호 소위는 정전 이후 포로 교환 때 제10 포로수용소(일명 천마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장교들 중 30%가 송환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
박승일은 1950년 11월에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후 벽동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1년 제10 포로수용소(일명 천마포로수용소) 이송되어 여기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53년 1월 이후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거나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
2. 4. 전사/실종 처리와 의혹
박승일 대령은 1950년 11월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후 벽동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1년 제10 포로수용소(일명 천마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포로 생활을 하였다.[1][2][3] 포로수용소에서 박 대령은 북괴군의 세뇌 공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국군 포로들을 지휘하며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를 요구하는 데모를 주도하기도 했다.[3]
1953년 1월, 박승일 대령은 다른 영관급 장교들과 함께 북괴군에 호출된 후 행방불명되었다.[3] 이후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거나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
함께 포로가 되었던 이기봉 하사는 박승일 대령이 여순 반란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이력 때문에 송환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했다.[4]
3. 기타
3. 1. 승일교 관련 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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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한국군 포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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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01-18
[2]
뉴스
남과 북의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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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포로수용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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