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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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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산재는 1948년 하재우가 후손들의 뜻을 모아 창건한 재실로, 진주 수곡면 사곡리 소현동에 위치한다. 1993년 중수되었으며, 음력 10월 14일에 제향을 지낸다. 창산 성환혁이 기문을 썼으며, 낙성 시에 현손들이 시를 지어 재실의 경관과 선조를 기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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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재

2. 상세

1948년에 사함공의 증손 재우공이 후손들의 뜻을 모아 방산재를 창건하여 선조들의 제향을 봉행해 왔다. 재실이 퇴락하자 1993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현관문을 신축하고 수정문이라 편액을 달았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14일이다.

3. 진주 통지 기록

진주 서쪽 수곡면 사곡리 소현동에 있다. 사함 하홍태 이하 삼세 분암이다. 민국 경자년(1948)에 창건하였다. 창산 성환혁이 기문을 지었다.[1]

4. 기문

성환혁이 지은 기문은 그의 문집인 '우정집'과 '진양하씨대종문헌록'에 수록되어 있다.[2][3][4] 기문은 진양 하씨 사함공파의 역사와 유래, 방산재 건립 배경과 의미, 후손들에게 전하는 당부 등을 담고 있다.

4. 1. 번역문

진주 서쪽 사곡(沙谷)은 하씨(河氏)들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중세(中世)의 사함공(思諴公) 휘(諱) 홍태(洪泰)는 처사(處士) 휘(諱) 달중(達中)의 셋째 아들로 분가(分家)하여 방곡(芳谷)에 살았다. 이곳은 사곡과 1리(里) 정도로 가까우니, 나아가서는 부모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효(孝)와 우(友)를 행했으며, 물러나서는 농사짓고 근검(勤儉)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만년(晩年)에는 곡중(谷中)에 모옥(茅屋)을 지어 노래하며 스스로 즐기더니, 세상을 떠나자 거주지 동쪽 산기슭에 장사(葬事)지냈다. 세상을 떠난 지는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이지만, 자손이 매우 번성하여 가옥이 즐비하며 담장이 연이어 넉넉히 일가(一家)를 형성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곳을 자주 지나면서 보니, 어른들은 진실하고 후덕(厚德)하여 상고(上古)의 기풍(氣風)을 지녔으며, 젊은이들은 근면하고 예의 발라 윤상(倫常)의 직분(職分)을 잘 지켰다. 이에 공(公)의 유풍(遺風)과 교훈(敎訓)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더욱 칭찬하였다. 지난 병술년(丙戌年) 증손(曾孫) 재우(在祐)씨가 여러 일가들의 의견을 모아, 3칸 사영(祠楹)의 재사(齋舍)를 공의 묘(墓) 아래에 지어 예를 닦고 화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더니, 문장(門墻)의 일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맏손자 선진(善鎭)씨가 여러 일가들과 더불어 이를 계승하여 완성하고는 지명(地名)을 인하여 방산(芳山)이라 편액(扁額)하고, 재종제(再從弟) 몽진(夢鎭)으로 하여금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게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천하의 일이란 정성(精誠)이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자손이 선조(先祖)를 위한 도리(道理)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선고(先考)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규모(規模)를 갖추어 놓아도, 그 자식이 마루를 만들기조차 싫어하거늘, 하물며 집을 완성하기를 좋아할까?"라고 하였으니, 집을 즐겨 완성하는 이의 정성이 이를 말미암지 않으면 참으로 즐거워함이 아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네 조상을 생각지 않으랴, 그 덕(德)을 닦으라." 하였으니, 덕을 닦는 이의 정성이 이를 말미암지 않으면 진정으로 닦는 것이 아니다. 이제 하씨(河氏)들이 이 골짜기를 공의 유지(遺址)요 장수소(藏修所)라 하여 이름 짓기에 뜻을 둔 지 수년 만에 마침내 완공하였으니, 그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 재사를 완성시킨 정성을 족히 보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지극한 정성이라 한다면 옳지 않다. 대저 나아가 그 덕을 닦아, 위로는 선조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손에게 모범을 보여서, 대대로 추념(追念)케 하고 사람마다 닦게 한 연후에야 지극한 정성이라 할 수 있다. 선진(善鎭)씨는 여러 일가들과 더불어 어찌 서로 이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창산(蒼山) 성환혁(成煥赫)이 기문을 찬(撰)하다.

5. 방산재 낙성시

방산재 낙성(落成)을 기념하여 현손(玄孫)들이 시를 지어 선조를 기리고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였다. 시에는 방산재의 아름다운 경관과 더불어 유학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5. 1. 시 목록 및 원문/번역문

효현손 선진의 시
원문번역문



현손 판진의 시
원문번역문



현손 천진의 시
원문번역문



현손 위진의 시
원문번역문



현손 택진의 시
원문번역문


6. 관련 인물

방산재 관련 인물로는 진양 하씨 사함공파 중시조 하홍태, 방산재 기문을 지은 창산 성씨 성환혁, 방산재를 창건하고 중수한 하재우가 있다.

6. 1. 하홍태 (河洪泰)

河洪泰중국어진양 하씨 사함공파의 중시조이다. 처사 휘 달중의 삼자로, 효성과 우애, 근검으로 가문을 일으켰다.[1]

6. 2. 성환혁 (成煥赫)

창산 성씨 성환혁(成煥赫)이 방산재 기문을 지었다. 성환혁의 문집인 '우정집'과 '진양하씨대종문헌록'에 수록되어 있다.[2][3][4]

6. 3. 하재우 (河載禹)

하재우는 1948년에 사함공의 증손으로, 후손들의 뜻을 모아 방산재를 창건하여 선조들의 제향을 봉향해 왔다. 재실이 퇴락하자 1993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현관문을 신축하고 수정문이라 편액을 달았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14일이다.[1]

7. 출처

坊山齋중국어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자료명발행처발행년도
수곡 진양하씨 가문의 성장과정과 재지적 기반 (석사학위논문)경남대학교 대학원2014년
선비기의 유향-진양하씨 판윤 송정후손가편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2007년
남명학고문헌시스템
진주통지1964년
진양하씨판윤공파보대보사1999년
우정집성환혁 선생 문집1961년
진양하씨대종문헌록1964년


참조

[1] 문서 진주통지 재각
[2] 문서 송정종중회
[3] 문서 우정집
[4] 문서 진양하씨대종문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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