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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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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송재는 창녕 조씨 봉강 조상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00년대에 그의 문하생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의 3량가 팔작집으로, 대청 상부가구의 기법, 거북이 모양 초석, 조각 문양이 있는 디딤돌 등 건축적 특징을 갖는다. 조상 선생의 9대조인 조성좌 유허비와 조카 조을환의 추모비가 주변에 위치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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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송재
명칭후송재(後松齋)
분류향토문화유산
지정 번호10
지정일2012년 8월 1일
소재지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로 10
시대1938년
소유자조택상, 조무
관리자조택상(다산면 송곡길 13-8)
면적417m²

2. 건립 배경 및 역사

후송재는 1900년대 창녕 조씨 봉강 조상(曺塽, 1847~1911) 선생의 문하생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2] 임재 서찬규와 간재 전우에게서 학문을 배운 조상은 구한말 성리학자였다.

문하생 김재철, 조긍환 등은 삼일계(三一契)를 조직하여 재실 건립 자금을 모금하였다. 1900년대 초, 성산(星山) 남쪽 송곡리(松谷里)에 있는 선생의 거주지에 재실을 건립하고 '후송재(後松齋)'라 이름 지었다. '후송'은 소나무처럼 굳은 절개를 상징하며, 마을 이름을 따온 것이다.

건축 기법으로는 3량가 팔작집에서 추녀와 서까래를 걸기 위한 대청 상부가구의 기법이 세련되며 독특하다.[2] 또한 거북 모양으로 조각된 초석, 3개의 조각 문양이 있는 디딤돌 등은 매우 재미있는 장치이다.[2]

2. 1. 후송재 기문

김재철(金在哲)과 조긍환(曺兢煥)이 금년 봄에 스승을 위해 옛 성산(星山) 남쪽 송곡리에 서재(書齋)를 짓고 현판을 후송재(後松齋)라 하였다. 그 스승은 조상(曺塽)으로, 자는 문보(文甫)이다. 이들은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는데, 의리상 거절할 수 없었다.[3]

여러 초목과 꽃 중에서도 소나무(松)를 취한 것은 거주지의 이름을 따서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소나무의 이치는 대나무(竹)와 잣나무(柏)의 이치와 같고, 이는 다시 연(蓮), 난초(蘭草), 국화(菊花)의 이치와 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物)의 이치는 한쪽에 치우쳐 서로 통하지 못하는 반면, 사람은 오행(五行)의 기운을 타고나 만물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절의는 있으나 학문이 없는 자는 있어도, 학문만 있고 절의(絶義)가 없는 자는 진정한 학문을 이룬 것이 아니다. 순전한 음기(陰氣)의 시대에도 홀로 푸르른 소나무처럼 굳건한 절의를 지녀야 비로소 학문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덕사(德社)에서 조봉강(曺鳳岡)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의 인품은 봄꽃의 화려함은 없으나 오래된 소나무의 순박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뿌리가 굳고 근원이 깊어, 아버지와 임금과 스승을 동일하게 섬기는 정성(誠)을 얻게 된 것은, 비록 세상이 여러 번 바뀌더라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굳건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재(書齋)는 밖의 물건(物件)이고, 학문(學問)은 안의 이치(理致)이다. 물건은 흥망성쇠가 있지만, 이치는 영원하다. 그러니 서재를 지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학문에 정진하여 형체 없는 의리(義理)를 세운다면, 형체 있는 물건도 길이 힘입어 쇠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진시황의 벼슬을 받은 대부송(大夫松)[3]과 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창산(昌山) 성기운(成璣運)

2. 2. 후송재 명

경산 이종익이 후송재 건립에 참여한 이들을 기리고 조상 선생을 추모하며 지은 글이다. 의봉산의 정기와 송곡 마을의 유래, 조상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특히, 삼일계(三一契)를 조직해 재실 건립에 헌신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김재철, 조긍환을 애도하고 있다.[4]

:천 길 의봉산이여 맑은 기운 높게 쌓았도다.

:넓게 수용하였으니 아래는 송곡 마을 있도다.

:송곡에 사람이 있으니 뜻은 높고 행실은 돈독하도다.

:지금 것을 단절하고 옛 것을 배워 뛰어나게 저속되지 아니하도다.

:골짜기에 나무가 푸르니 송목임을 알겠도다.

:사람과 지역이 서로 걸맞으니 여기를 가려 건축하였네.

:혹시라도 이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떨어진 우리 도가 다시 회복하리라.

:경산 이종익

3. 건축적 특징

후송재는 1900년대 창녕 조씨 봉강 조상 선생의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로, 당시 건립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2] 3량가 팔작집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3. 1. 상부 가구

대청 상부 가구는 3량가 팔작집에서 추녀서까래를 걸기 위한 기법이 세련되며 독특하다.[2]

3. 2. 초석 및 디딤돌

거북 모양으로 조각된 초석과 3개의 조각 문양이 있는 디딤돌은 후송재만의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치이다.[2]

4. 주변 유적

후송재는 재실을 넘어 조상 선생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을 함께 간직한 공간이다. 좌측에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조성좌의 유허비가 있고, 우측에는 조상의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학산 조을환의 추모비가 있다.

4. 1. 조성좌 유허비

후송재 좌측에는 조상의 9대조이자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던 조성좌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昌寧曺公諱聖佐遺墟碑|창녕조공휘성좌유허비중국어

4. 2. 조을환 추모비

후송재 우측에는 조상의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의 추모비가 있다. 조을환은 조상의 가장(家狀)을 쓴 인물이다.

5. 문화재 지정

후송재는 1900년대 창녕 조씨 봉강 조상 선생의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2] 특히, 3량가 팔작집에서 추녀와 서까래를 걸기 위한 대청 상부가구의 기법이 세련되며 독특하다.[2] 거북 모양으로 조각된 초석, 3개의 조각 문양이 있는 디딤돌 등은 매우 재미있는 장치이다.[2]

참조

[1] 문서 조선후기, 서원이나 서당들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인사하고 배운 바를 점검하는 의식이다.
[2] 간행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지정고시 고령군수 2012-08-01
[3] 문서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서 큰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벼슬을 내린 소나무를 말한다.
[4] 문서 공자(孔子)께서 수제자(首弟子) 안자(顔子)가 별세하니 공자께서 하늘이 나를 잃게 하셨다 하시며 애통(哀痛)한 고사(故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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