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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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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학세는 1912년, 1913년 또는 1914년 연해주 포시에트 인근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 정보 기관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소련군 대위로 한국에 파견되어 북조선에서 활동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장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후 내무성 부상, 사회안전상, 내무상을 역임하며 공안 업무를 담당했다. 8월 종파 사건 이후에도 김일성을 지지했으며, 이후 중앙재판소 부소장, 소장을 역임하며 법조계에서 활동했다. 1992년 사망했으며, 김일성 훈장과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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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방학세
출생1914년 게이쇼쿠호쿠 주, 일제강점기
사망1992년 7월 18일, 평양, 북한
정당조선로동당
직책
내무상1952년 10월 - 1960년 11월
수상김일성
전임자박일우
후임자석산

2. 생애

방학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912년,[1] 1913년,[2] 또는 1914년[3] 등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그는 소련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전문 교육을 받았으며, 내무인민위원회(NKVD) 및 정보 기관에서 근무했고 검사로도 활동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5년 10월, 소련군 대위로 한반도 북부에 파견되었다.[4] 1947년 5월부터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4]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김일성 내각에서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4]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3월, 내무성에서 분리 신설된 사회안전성의 초대 사회안전상이 되었으나, 1952년 10월 사회안전성이 다시 내무성에 통합되면서 내무상으로 임명되었다.[4] 그는 8월 종파 사건 이후에도 김일성을 계속 지지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소련파 인물들이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한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4]

이후 법조계로 자리를 옮겨 1960년 11월 중앙재판소 부소장이 되었고,[4] 1966년 11월부터는 조선로동당 연락국 정보부장을 겸임했다.[4] 1972년 12월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2년 4월과 1986년 12월에 재임명되었다.[4] 중앙재판소 소장 재임 중이던 1982년에는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1] 1984년 3월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1]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48년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 포함)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여러 차례 선출되었다.[4]

방학세는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2년 7월 18일에 사망했으며,[1] 장의위원장은 박성철이 맡았다.[1]

2. 1. 초기 생애 및 소련에서의 활동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912년,[1] 1913년,[2] 또는 1914년[3] 등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1914년 연해주 포시에트 인근 빈농 가정 출생 설과 1913년 출생 설 등이 있다.

1931년 크라스키노(당시 노보키예프스크)의 9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가을 소련의 우랄 국립 대학교(당시 스베르들로프스크 국립 대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같은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여 1937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소련에서 전문 교육을 받았으며, 내무인민위원회(NKVD) 및 정보 기관에서도 근무했다.[4]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크즐오르다로 이주했다. 이후 크즐오르다 시 검찰소 예심원(2년), 지구 검찰소 예심원( ~1940년), 지구 부검사(1940~1942년)를 역임했다. 1942년 10월 탈디코르간 주 책임 검사(단, 탈디코르간 주는 1944년 설치됨), 1944년 10월 크즐오르다 주 책임 검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5년 10월, 소련군 대위로 한반도 북부에 파견되어[4] 소련군 제25군 행정 사령부에서 활동했다. 1947년 5월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 국장(또는 정보처장)을 맡았다.

2. 2. 북한에서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10월 소련군 대위로 한반도 북부에 파견되었다.[4] 그는 소련군 제25군 행정 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1947년 5월부터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 국장[4] (또는 정보처장[4])을 역임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선포와 제1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이후,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김일성 내각에서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4]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 내무성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사회안전성의 사회안전상으로 임명되었다.[4] 이는 전시 상황에서 치안 유지 및 반체제 세력 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내무성 정치보위국장이었던 방학세가 강력히 주장하여 창설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년 7개월 뒤인 1952년 10월, 사회안전성은 다시 내무성에 통합되어 사회안전국이 되었다. 통합 이유로는 사회안전성과 내무성의 병립으로 인한 치안 업무 혼란 해소와 더불어, 내무상으로 내정된 방학세가 사회안전성까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같은 달 그는 내무상으로 임명되었다.[4]

방학세는 8월 종파 사건 이후에도 김일성을 계속 지지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소련파 반대 세력이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한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4]

이후 법조계로 자리를 옮겨 1960년 11월 중앙재판소 부소장이 되었다.[4] 또한 1966년 11월부터는 조선로동당 연락국 정보부장을 겸임했다.[4] 1972년 12월에는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2년 4월과 1986년 12월에 재임명되었다.[4] 1982년 재임 시에는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고,[1] 1984년 3월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1]

그는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2년 7월 18일에 사망했으며,[1] 장의위원장은 박성철이 맡았다.[1]

방학세는 당과 국가의 주요 직책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주요 당직 및 대의원 선출 기록
구분시기비고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48년 3월[4]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56년 4월[4]
1970년 11월[4]
1980년 10월[4]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제1기 (1948년 8월)[4]
제2기 (1957년 8월)[4]
제4기 (1967년 11월)[4]
제5기 (1972년 12월)[4]
제7기 (1982년 2월)[4]
제8기 (1986년 11월)[4]


2. 3. 정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 제25군 행정 사령부 소속으로 북한에 파견되어 활동을 시작했다.[4] 1947년 5월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장을 맡았다.[1]

1948년 3월,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김일성 내각에서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1]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 내무성 내 정치보위국 등이 분리되어 사회안전성이 창설되자 초대 사회안전상에 취임했다.[1] 이는 전시 하에 반체제 세력 대응 등 공안 업무가 증대됨에 따라 방학세가 공안 전담 조직 창설을 강력히 주장한 결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52년 10월, 사회안전성은 다시 내무성에 통합되어 사회안전국이 되었고, 방학세는 내무상으로 임명되었다.[1] 이는 사회안전성과 내무성의 병립으로 인한 치안 업무 혼란 해소 목적 외에, 방학세가 사회안전성까지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는 8월 종파 사건 이후에도 김일성을 계속 지지했으며, 대부분의 소련파 반대파들이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돌아간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한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1960년 11월 법조계로 자리를 옮겨 중앙재판소 부소장이 되었고,[4][1] 1966년 11월부터는 조선로동당 연락국 정보부장도 겸임했다.[1] 1972년 12월에는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1982년 4월과 1986년 12월에 재임명되었다.[1] 중앙재판소 소장 재임 중이던 1982년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4년 3월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1]

그는 오랜 기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주요 직책 및 활동
연도직책비고
1947년 5월북조선 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장[1]
1948년 9월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
1951년 3월사회안전상초대 사회안전상[1]
1952년 10월내무상사회안전성 통합 후[1]
1960년 11월중앙재판소 부소장[4][1]
1966년 11월조선로동당 연락국 정보부장겸임[1]
1972년 12월중앙재판소 소장1982년, 1986년 재임명[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선출 연도
1948년 3월 (북조선 노동당) [1]
1956년 4월 [1]
1970년 11월 [1]
1980년 10월 [1]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출
선출 연도기수
1948년 8월제1기 [1]
1957년 8월제2기 [1]
1967년 11월제4기 [1]
1972년 12월제5기 [1]
1982년 2월제7기 [1]
1986년 11월제8기 [1]



방학세는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2년 7월 18일에 사망했다.[1] 장의위원장은 박성철이 맡았다.[1]

3. 평가

안드레이 란코프에 따르면 방학세는 조선의 "베리야"이며, "소련파 전체에서 의심스럽고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다. 하지만 방학세는 소련의 예조프나 베리야와 같은 부류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김일성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

장학봉은 방학세가 김일성의 신봉자로서 수많은 숙청을 실행했기 때문에, 전 세계에 분포해 있는 북한계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무도한 학살자로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장학봉에 따르면, 이상조는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방학세를 즉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처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 각주


  • 테르치츠키, 표도르 (2024년 6월 14일). 〈방학세: 북한 비밀 경찰의 창시자〉. 《잊혀진 북한 정치 엘리트: 패배자에게 불행이 있으라》. 애빙던온템스: 루틀리지. 82–99쪽. ISBN 9781032745473.

참조

[1] 웹사이트 Encyclopaedia Britannica: 방학세 http://premium.brita[...] ブリタニカ・オンライン 2018-01-31
[2] 서적 岩波小辞典 現代韓国・朝鮮 岩波書店
[3] 웹사이트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http://www.loc.gov/r[...] アメリカ合衆国議会図書館 2018-01-31
[4] 웹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01-31
[5] 뉴스 북한중앙 재판소장 방학세 사망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2-07-20
[6] 뉴스 납북인사거의비참한최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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