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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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법진은 부풍군 미현 출신으로, 전국 시대 제나라 왕 전법장의 후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산시성과 간쑤성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법진은 한나라 정부의 관직 제안을 여러 번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188년에 89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그는 명성을 피하려 했지만 명성이 따랐으며, 수백 세대의 스승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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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진 | |
---|---|
기본 정보 | |
이름 | 법진 |
자 | 고경 (高卿) |
존칭 | 현덕선생 (玄德先生) |
출생 | 100년 |
사망 | 188년 |
시대 | 후한 |
국적 | 중국 |
직업 | 학자 |
2. 가계 배경
법진의 본관은 부풍군(扶風郡)의 미현이었으며, 이곳은 현재의 섬서성 바오지시 메이현에 해당한다. 그의 조상은 전법장으로, 전국 시대의 제나라 왕이었다. 전법장의 후손들은 기원전 221년 제나라가 멸망한 후 성씨를 "전"에서 "법"으로 바꾸었다. 전한 시대 한나라 선제 치세 동안, 전법장의 후손들은 수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2,000석의 곡식을 받는 세습 관직을 받았다.[1] 법진의 아버지 법웅은 후한 시대 한나라 안제 치세 동안 남군(현재의 후베이성 징저우시 부근)의 태수를 지냈다.[2]
법진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여러 학파의 글에 정통했다.[3] 그는 박식한 학자로서 산시성과 간쑤성 지역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여러 지역에서 온 수백 명의 제자를 두었다. 그중에는 범연도 있었다.[3]
3. 생애
그는 소박하고 겸손하며 은둔적인 삶을 살았다.[5] 한나라 조정과 지방관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끝까지 은둔 생활을 지켰다.[5][6] 법진은 한 영제 치세인 188년에 89세(동아시아 나이 기준)의 나이로 자연사했다.[6]
3. 1. 일화
''산푸결록주'' (三輔決錄注)에 따르면, 법진은 십 대 시절 아버지 법웅과 그의 부하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모임이 끝난 후 법웅이 아들에게 "(그들 중) 누가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법진은 "호광은 고위 대신의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실제로 호광은 훗날 승진하여 구경과 삼공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법진의 예측은 사실로 증명되었다.[4]
법진은 소박하고 겸손하게 은둔하며 살았다. 그의 명성을 들은 부풍태수가 그를 초청하여 만났다. 법진은 그 자리에서 '부진'(幅巾; 복건과 유사한 종류의 머리쓰개)을 착용하고 있었다. 태수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했던 예를 들며 법진에게 한나라 조정에서 일할 것을 설득하려 했다.[5] 그러나 법진은 "제가 감히 여기에 온 것은 태수께서 손님을 존경하는 태도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를 관직에 참여시키려 한다면, 저는 북쪽 산 너머로 더 멀리, 남쪽 산 너머로 더 멀리 갈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태수는 법진의 대답에 놀라 다시는 그에게 관직을 권하지 못했다.[5]
이후에도 법진은 계속해서 한나라 정부로부터 관직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부풍태수 출신인 전약(田弱)은 법진을 조정에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고, 한 순제가 산시성 지역을 방문했을 때 다시 그를 추천했다. 황제는 법진에게 네 번이나 연이어 관직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보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6] 법진은 "세상에서 자신을 숨길 수 없다면, 세상에 대해 벙어리가 되게 할 물을 마실 수 있을까?"라는 말을 남기며 더욱 깊이 은둔하여 관리가 되기를 거부했다.[6]
법진의 친구인 곽정(郭正)은 그에 대해 "법진에 대한 소문은 쉽게 들을 수 있지만, 그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그는 명성을 피하려 하지만 명성이 그를 따르고, 명성을 피하려 하지만 명성이 그를 쫓는다. 그는 진정으로 수백 세대의 스승이다!"라고 평가했다.[6]
4. 평가
법진은 학문에 깊이 정진하여 여러 학파의 글에 능통했으며, 특히 산시성과 간쑤성 지역에서 박식한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3]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안목을 보였는데, 십 대 때 아버지 법웅과 부하들의 모임에 참석한 후, 아버지의 물음에 호광이 고위 대신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답했다. 훗날 호광이 실제로 구경과 삼공의 자리에 오르면서 법진의 평가는 정확했음이 증명되었다.[4]
성장 후 법진은 소박하고 겸손하며 세상의 명예를 피해 조용히 살아가는 은둔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의 명성을 들은 부풍태수가 만나기를 청하자, 법진은 편안한 차림인 ''부진'' (幅巾)을 쓰고 나아갔다. 태수가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한 예를 들며 한나라 조정에 출사할 것을 권유하자, 법진은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이 손님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벼슬을 권하신다면, 저는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태수는 그의 단호함에 놀라 다시는 관직을 권하지 못했다.[5]
이후에도 법진은 여러 차례 관직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부풍태수였던 전약(田弱)이 조정에 그를 추천하고, 한 순제가 산시 지역을 방문했을 때 다시 추천했지만 소용없었다. 황제는 네 번이나 연이어 관직을 제안했으나, 법진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을 숨길 수 없다면, 세상일에 대해 귀먹고 눈감을 수 있는 물이라도 마셔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더욱 깊이 은둔했다.
법진의 친구 곽정(郭正)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법진에 대한 소문은 쉽게 들을 수 있지만, 그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그는 명성을 피하려 하지만 명성이 그를 따르고, 명성을 피하려 하지만 명성이 그를 쫓는다. 그는 진정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이다!"[6] 이처럼 법진은 명예를 멀리하고 학문과 수양에 힘쓴 고결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삶은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참조
[1]
서적
Houhanshu vol. 38
[2]
서적
Houhanshu vol. 83
[3]
서적
Houhanshu vol. 83
[4]
서적
Sanfu Jue Lu Z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5]
서적
Houhanshu vol. 83
[6]
서적
Houhanshu vo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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