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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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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렌가리우스 1세는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낸 인물이다. 프리울리 후작을 거쳐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으나, 마자르족의 침입과 경쟁자들의 반란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프로방스의 루이,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 등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배하고, 결국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외손자인 베렌가리오 2세가 그의 지위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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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베렌가리오 1세의 인장
베렌가리오의 황제 인장
이름베렌가리오 1세
로마자 표기Berengarius, Perngarius
이탈리아어 표기Berengario
작위
작위신성 로마 황제
통치 기간915년–924년
선임자루트비히 3세
대관식915년 12월, 로마
후임자오토 1세
작위이탈리아 왕
통치 기간888년 - 924년
선임자카를 3세
후임자루돌프 2세
작위프리울리 변경백
통치 기간874년–890년
선임자운로우크 3세
후임자발트프레드
가문
가문운루오흐 가문
개인 정보
출생845년경, 치비달레델프리울리, 중프랑크 왕국
사망924년 4월 7일, 베로나, 이탈리아 왕국
가족 관계
아버지에버하르트
어머니기젤라
배우자베르틸라, 안나 디 프로방스
자녀베르타, 기젤라, 이브레아 백작 부인

2. 생애

베렌가리우스 1세는 프리울리의 에버하르트와 경건왕 루이의 딸 질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를 통해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874년 형 운루오흐 3세가 사망하자 프리울리 변경백령을 계승하여 카롤링거 제국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그는 변경백으로서 크로아티아인과 슬라브족의 위협에 맞서 싸웠으며, 프리울리 교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5][6][7]

875년 황제 루이 2세가 사망하고 서프랑크의 샤를 2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베렌가리우스는 독일왕 루이의 아들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을 지원했다.[8][9] 883년 스폴레토의 가이 3세가 반역죄로 고발되자, 비만왕 샤를은 베렌가리우스에게 군대를 보내 스폴레토를 제압하게 했으나, 전염병으로 인해 퇴각했다.[10] 886년 베르첼리의 리우트와르트 주교가 베렌가리우스의 누이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불화를 겪었으나, 887년 화해했다.[11][12]

887년 비만왕 샤를이 폐위된 후, 베렌가리우스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되었다.[17][18][19] 그러나 스폴레토의 가이 3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889년 트레비아 전투에서 가이에게 패배한 후에도 프리울리에서 그의 권위를 유지했다.[24] 893년 카린티아의 아르눌프와 협력하여 가이를 몰아내고 파비아와 밀라노를 점령했다.[26] 896년 아르눌프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베렌가리우스는 롬바르디아로 돌아가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토 2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에 휩싸였으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26] 이후 베렌가리우스는 프리울리에서 제거되었으나, 이탈리아의 라톨드가 독일로 돌아간 후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되찾았다.[27][29]

898년 이탈리아의 람베르토가 사망하자 베렌가리우스는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나,[30] 899년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브렌타 전투에서 패배하여 권위에 타격을 입었다.[32] 900년 프로방스의 루이가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되고 901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902년905년 루이를 격파하고 왕위를 지켜냈다.[33]

915년 교황 요한 10세의 주도로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사라센을 격파한 후, 베렌가리우스는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했다.[36] 그러나 마자르족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리에주 교구 주교 선거에 개입하여 갈등을 빚기도 했다.[37][38]

말년에 베렌가리우스는 아내 베르틸라의 부정 혐의와 독살, 안나와의 재혼 등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39][40][41] 921년 이탈리아 귀족들이 상 부르군디의 루돌프 2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923년 피오렌주올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베렌가리우스는 사실상 폐위되었다.[45][48] 924년 베렌가리우스는 베로나에서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46][47]

2. 1. 젊은 시절

베렌가리우스는 경건왕 루트비히와 벨프 공작 구엘프 1세의 딸 유디트의 딸인 기셀라와[56] 이탈리아의 프리울리 후작인 에버하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프리울리 지역의 영주였으며, 아버지 에버하르트 역시 카를로만의 외손으로 희미하게나마 카롤링거 왕실의 왕위계승권자였다.[56] 또한 할머니 인겔트루드는 샤를마뉴의 딸 아델라이드의 딸이었다. 840년프리울리 후작에 임명된 할아버지 헤른로히 2세가 그의 직계 조상 중 이름이 확인된 인물이다. 그의 출생지는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로 추정된다.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운루오흐 2세의 이름을 따서 운루오힝이라고 불렸다. 베렌가리우스는 프리울리의 에버하르트와 질라의 아들이었는데, 질라는 경건왕 루이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유디트의 딸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 쪽으로 카롤링거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874년 형 헤른로히 3세가 사망하자 그는 프리울리 후작직을 계승하였다. 그는 곧 카롤링거 제국의 변경백으로 파견되어 슬라브 족 및 마자르 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이 무렵 그는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의 군사사령관도 겸하여,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슬라브 족과 해적들을 격퇴하는 한편, 이탈리아 북부에 영향력을 쌓았다.

874년 그의 형 운루오흐 3세가 사망하자,[5] 베렌가리우스는 프리울리 변경백령을 계승했다.[6] 이를 통해 그는 카롤링거 제국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었는데, 변경백령은 크로아티아인과 이탈리아 반도에 끊임없는 위협이 되는 다른 슬라브족의 경계에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북동 이탈리아의 여러 군을 지배하는 영주였다. 그는 프리울리의 사람들이 황제에게 접근하고 황제가 프리울리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는 심지어 프리울리의 교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884년-885년, 베렌가리우스는 하이모 벨루노 주교를 위해 황제에게 개입했다.[7]

875년, 이탈리아 왕이기도 했던 황제 루이 2세가 독일왕 루이와 합의하여 독일 군주의 장남인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이 이탈리아에서 계승하게 된 후 사망하자, 서프랑크의 샤를 2세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스스로 왕이자 황제로 즉위했다.[8] 독일왕 루이는 먼저 막내 아들 비만왕 샤를을, 그다음에는 카를로만 자신을 베렌가리우스가 이끄는 이탈리아 영주들과 함께 이탈리아 왕국을 차지하도록 보냈다.[8][9] 이것은 877년 샤를 2세가 죽을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베렌가리우스의 변경백령이 카를로만이 아버지 아래에서 이미 통치하고 있던 바이에른과 가까웠다는 것은 그들의 협력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883년, 새로 즉위한 스폴레토의 가이 3세는 5월 말 노난툴라에서 열린 제국 시노드에서 반역죄로 고발되었다.[10] 그는 스폴레토 공작령으로 돌아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었다. 당시 황제였던 비만왕 샤를은 베렌가리우스를 군대와 함께 보내 스폴레토를 빼앗게 했다. 베렌가리우스는 성공했지만, 전염병이 이탈리아 전체를 휩쓸어 황제와 그의 측근, 베렌가리우스 군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10]

886년, 베르첼리의 리우트와르트 주교는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수녀원에서 베렌가리우스의 누이를 데려와 친척과 결혼시켰다. 강제로 그랬는지, 수녀원과 샤를 3세의 동의를 얻었는지는 불확실하다.[11] 베렌가리우스와 리우트와르트는 그 해에 불화를 겪었고, 이는 그가 베르첼리를 공격하고 주교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으로 이어졌다.[12] 베렌가리우스의 행동은 그의 누이가 주교에게 납치된 경우 설명이 되지만, 만약 주교의 행동이 정당했다면 베렌가리우스가 불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주교와 변경백은 리우트와르트가 887년 궁정에서 해고되기 직전에 화해했다.[12]

리우트와르트와의 짧은 전쟁으로 인해 베렌가리우스는 사촌인 황제의 호의를 잃었다. 베렌가리우스는 887년 5월 초 바일블링겐에서 열린 황제의 회의에 참석했다.[13] 그는 황제와 화해하고 전년도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선물을 제공했다.[13] 6월 또는 7월, 베렌가리우스는 프로방스의 루이가 황제의 아들로 입양되었을 때 다시 키르헨에서 황제를 보좌했다.[14] 베렌가리우스가 샤를의 후계자로 지명되기를 갈망했고 실제로 그 해 11월(887년) 동프랑크의 귀족들이 샤를을 폐위시킨 직후 이탈리아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5] 반면에, 그의 존재는 단지 샤를의 사생아 베르나르를 그의 후계자로 확정하기 위해 필요했을 수 있는데 (바일블링겐), 교황이 참석을 거부하여 실패했고, 대신 루이를 확정했다 (키르헨).[16]

부인은 스폴레토의 베르틸라(Bertila of Spoleto)였지만 귀도나 람베르트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들은 베르틸라의 친정아버지인 카메리아와 스폴레토공작 아델히스 1세(Adelchis I of Spoleto) 사후 황제 루트비히 2세로부터 스폴레토 공작에 임명된 낭트의 람베르토 1세의 후손들로, 배다른 외삼촌인 로타르 1세의 처가 일족이었다.

2. 2. 이탈리아 왕위 분쟁

874년 형 운루오흐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프리울리 후작직을 상속받은 베렌가리우스는, 887년 뚱보왕 카를이 폐위된 후 이탈리아 왕위를 둘러싼 분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머니 기젤라가 프랑크 왕녀였기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888년 파비아에서 열린 제후 및 주교 특별 회의에서 베렌가리우스는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폴레토 공 귀도 역시 왕위를 주장하며 대립하였다. 귀도는 서프랑크 왕위에도 도전했으나 실패한 후, 889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베렌가리우스와 트레비아 강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베렌가리우스는 정식으로 퇴위하지 않고 왕위를 주장하며, 891년 귀도가 교황에게 강요하여 황제로 즉위한 것을 계기로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북부 이탈리아에서 독립적인 통치를 이어가던 베렌가리우스는 893년 아르눌프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회복하고, 896년 아르눌프가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의 봉신으로서 이탈리아 통치권을 얻었다. 그러나 아르눌프가 류머티즘으로 케른텐으로 돌아가고, 898년 람베르토가 사망하면서 베렌가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되었다.

899년,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베렌가리우스는 브렌타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는 그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같은 해 아르눌프의 죽음 이후, 900년 프로방스 왕 루이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베렌가리우스는 다시 위기를 맞았으나, 902년905년 두 차례에 걸쳐 루이 3세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왕위를 지켜냈다.

2. 3. 마자르족의 침입

899년 마자르족 군사 5천 명이 여러 분대로 나뉘어 이탈리아 곳곳을 점령, 약탈했다. 이들은 포강변을 노략하였으며 이후 베네치아에서 집결하려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1만 5천 명의 이탈리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 브렌타 강변에서 마자르 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마자르족은 이들에게 군대를 물러달라고 간청했고, 베렌가리오는 이들을 거의 무찔렀다고 보고 만만하게 봤다. 이탈리아 병사들이 갑옷을 벗고 편히 쉬던 중, 숲에 숨어있던 나머지 마자르족 군사들이 이탈리아 군을 급습하였다. 급습당한 이탈리아 군사들 중에는 식사 중 입에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군은 크게 궤멸되었고 마자르족은 되돌아가 판노니아 일대를 공략하게 된다.[31]

899년 혹은 900년 베렝가리오 1세는 스폴레토의 구이도 가문을 몰아내고 스폴레토 공작이 된 스폴레토의 알베리크 1세를 자신의 대리인이자 로마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내정과 외정 등에 신경써야 했던 베렝가리오는 자신을 대신할 대리인으로 구이도 가문을 몰아낸 알베리크를 선정한 것이다. 이후 베렝가리오 1세를 반대하는 귀족들이 다른 군주를 초청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하는 등 이탈리아의 혼란기가 계속되자 알베리크와 그의 처 마로치아, 아들 알베리크 2세 등이 군주가 아님에도 로마 시내와 주변 지역의 실권자가 되고 교황청 인사까지 개입하는 일이 발생한다.

899년 다시 마자르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마자르족은 베렝가르나 아르눌프가 고의로 불러들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렌가르의 군대는 이들 마자르족 군대에게 휴전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베렌가르는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899년 아르눌프는 케른텐과 헝가리, 바이에른 등을 침략하는 마자르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 쓸 수가 없었고, 아르눌프 사후 그는 다시 영주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다. 마자르족의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계곡으로 침략해오자, 베렌가르는 군사를 이끌고 마자르족과 교전했지만 크게 패하고, 남부 브렌에서 많은 몸값을 주고 포로가 된 병사들을 석방시켜야 했다. 899년 9월 24일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북부를 쳐들어온 헝가리 마자르족과 싸웠으나 브렌타 강가에서 패배했다.[32] 마자르족은 베렝가리오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했고, 그대로 들어주어 되돌려보냈다.

904년 마자르족이 이끄는 군대가 베르가모 성벽을 넘어 베르가모를 점령했다. 베렌가르는 군사를 이끌고 베르가모의 주교와 시민들을 신속하게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한다. 남부 해안가로 들어오는 해적들은 베렌가리오의 치세 기간 내내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고민이자 골칫거리였다.

2. 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

904년 베르가모를 점령한 무슬림들을 추방하였다. 토스카나 후작 아달베르토 2세와 카메리노의 후작 알베리코는 베렝가르를 지지하였으나, 이들은 베렝가르 지지 대신 자신의 도시에 대한 자치권을 요구했고, 베렝가르는 이를 수용하였다.

915년 1월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한 무슬림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사라센을 염려하여 베렌가르를 맹주로 하는 이탈리아 제후, 귀족들의 동맹을 주선하였다. 베렌가리오는 일부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 등, 많은 군사를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으나, 라치오와 캄파니아에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가리야노(Garigliano)에서 기적적으로 격퇴하였다.(가리야노의 전투)[36] 그해 11월 교황 요한네스 10세에 의해 로마에서 정식으로 축성받고 대관식을 올렸다.

황제로서 베렌가르는 이탈리아 내 주교좌, 대주교좌의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 920년 리에 교구의 대주교인 스테판 대주교가 죽자, 베렌가르는 로트링겐 출신 쾰른 대주교 헤르만 1세를 리에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이는 동프랑크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을 세우려 든다며, 리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37]

915년 12월에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마자르 족을 설득, 매수하여 신속하게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 취임 이후 베렌가리오의 영도력에 대해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의 정치적 무능력과 통치 기간 중의 혼란, 해안가로 들어오는 이민족과 해적의 침략을 제대로 방어, 격퇴하지 못한 혐의로 수시로 소환하려 하였다.

2. 5. 반란과 암살

899년 마자르 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베렌가르의 군대는 휴전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899년 9월 24일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헝가리 마자르 족과 싸웠으나 브렌타 강가에서 패배했다.[32] 마자르 족은 베렝가리오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했고, 베렌가르는 이를 수용하여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 패배는 베렌가르가 이탈리아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지 귀족들에게 의심받는 계기가 되었다.[31]

그 결과 이탈리아의 일부 귀족들은 프로방스부르고뉴를 다스리던 맹인왕 루트비히를 이탈리아 국왕 후보로 선택했다. 900년 10월 5일 프로방스의 루트비히 왕이 베렝가리오를 반대하는 이탈리아 남부 귀족들에게 초빙되어 이탈리아로 왔다. 루트비히는 롬바르드 왕이 되었고, 901년 2월 22일 교황 베네딕투스 4세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902년 베렌가리오는 마자르 족 용병을 고용하여 군사력을 키운 뒤 로마로 진격하여 루트비히를 격파했다. 루트비히는 베렝가르에 의해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받은 뒤 쫓겨났지만, 이후 이탈리아 남부 일부 귀족들의 지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맹인왕 루트비히는 로타르 1세의 혈통이라는 점을 내세워 정통성을 주장했다. 베렌가르는 경건왕 루트비히의 딸인 기셀라가 자신의 어머니이며, 샤를마뉴와 루트비히의 혈통이라는 점을 내세워 반박했다. 905년 7월 21일 베로나에서 루트비히를 생포하여 투옥시킨 뒤 7월 22일 그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프로방스로 추방하였다.[33] 프로방스로 추방된 루트비히는 자신의 지위와 황제관 권리를 프로방스의 위그에게 양도하였다.

904년 마자르 족이 이끄는 군대가 베르가모 성벽을 넘어 베르가모를 점령했다. 베렌가르는 군사를 이끌고 베르가모의 주교와 시민들을 신속하게 구출해내는데 성공했다.

베렌가리오 1세 시대의 동전, 905~915년 무렵 주조, 통용


베렌가리오 1세


루트비히 3세의 패망 후 베렌가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905년 7월 12일 루트비히는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7월 21일 베렌가리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쫓겨났으며, 베렌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과 황제의 지위를 받았다. 904년에는 베르가모를 점령한 무슬림들을 추방하였다.

베렝가르는 915년 1월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한 무슬림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베렌가르를 맹주로 하는 이탈리아 제후, 귀족들의 동맹을 주선하였다. 베렌가리오는 라치오와 캄파니아에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가리야노(Garigliano)에서 격퇴하는데 성공한다.(가리야노의 전투)[36] 그해 11월 교황 요한네스 10세에 의해 로마에서 정식으로 축성받고 대관식을 올렸다.

920년 리에 교구의 대주교인 스테판 대주교가 죽자, 베렌가르는 로트링겐 출신 쾰른 대주교 헤르만 1세를 리에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이는 동프랑크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을 세우려 든다며, 리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37] [38]

베렌가리오는 915년 12월 베르틸라를 독살하고, 914년 또는 915년 12월 비잔틴 제국의 공주 안나와 재혼했다.[40] [41] 안나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6세와 황후이자 후일 여제가 되는 조에 차우차이나의 딸이었다. 915년 12월에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마자르 족을 설득, 매수하여 신속하게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 취임 이후 베렌가리오의 영도력에 대해 이탈리아 귀족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900년대 이후 그는 마자르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탈리아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등은 마자르 용병을 고용해서 돈을 지불하느라 보조금을 중단한 것에 불만을 품고 921년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를 이탈리아로 초청했다.[45] 922년 봄, 베렝가리오에 반대하던 귀족들은 부르고뉴 출신 루돌프 2세 왕을 불러들였다. 922년 피올렌차의 피오랑주올라 다르다에서 루돌프 2세와 교전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시체들 사이에 덮여서 기적적으로 탈출했다. 923년 7월 17일 피아첸차에서 루돌프 2세와 교전하였으나 패배하고 베로나로 퇴각하였다.[48]

923년 7월 29일, 루돌프, 아달베르토, 이부레아의 베렌가리오의 군대는 베렌가리오의 군대와 만나 피아첸차 근처 피오렌주올라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48] 이 전투는 결정적이었고 베렌가리오는 "사실상" 폐위되어 루돌프가 그를 대체했다.

898년에 베렝가리오의 부계쪽 먼 친척이기도 한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와 결혼했던 그의 딸 기셀라는 913년에 사망했고, 아달베르토는 바로 재혼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외손자 베렌가리오 2세가 태어났다. 베렌가르는 아달베르토 일족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재혼한 후의 아달베르토는 그의 내부 정적 중 한 사람으로 돌변했다. 924년 초, 베렌가르는 파비아에 머무르면서 다시 이탈리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924년 마자르 족이 파비아를 약탈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베렝가르는 마자르 족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가 마자르 족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알려지면서 소수의 지지자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924년 4월 7일 새벽, 전쟁 중 피아첸차의 막사에서 기도하던 중, 뒤에서 기습한 자객에 칼에 맞고 살해당했다. 일설에는 베로나에서 칼에 찔렸다는 설도 있다. 그를 살해한 이는 루돌프가 보낸 자객으로 추정되지만, 루돌프에게 매수당한 그의 측근들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후 38년 동안 황제의 자리는 사실상 공석이 된다.[58] 962년에야 동프랑크 국왕 오토 1세가 제위에 올랐다.

헝가리에서 발견된 베렌가르의 동전, 마자르족 습격자 또는 용병에게 지불된 것일 수 있음


12세기 필사본에 황제로 묘사된 베렌가르(''Berengarius Imperator'')


베렌가리우스는 권력과 영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이브레아 변경백 아달베르토 1세와 딸 기젤라를 결혼시켜 이브레아와 화해했다. 현실적으로 그의 권력은 이탈리아 북부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중앙 이탈리아의 유력한 변경백인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2세나 스폴레토 공작 알베리코 1세는 독립적인 통치를 하고 있었다.

황제위로의 기회는 교황 요한 10세에 의해 주어졌다. 로마 시를 위협하던 갈리리아노 강 근처의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내기 위해 교황은 군사적 지원을 베렌가리오에게 요청했고, 그 대가로 황제위를 수여할 것을 약속했다. 갈리리아노 전투에서 베렌가리우스는 승리했고, 915년 12월, 베렌가리우스는 로마로 가서 황제로 즉위하여 제후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았다.

평화로운 시대는 922년에 끝났다. 이브레아 변경백 등이 부르군트 왕루돌프 2세를 이탈리아 왕위에 앉히려고 음모를 꾸몄다. 이탈리아의 혼란 속에서 루돌프 2세는 왕으로 선출되어 피오렌초올라 다르다 근처(또는 피덴차 근처)에서 베렌가리우스의 군대와 충돌했다. 베렌가리우스는 패배를 맛보고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시체에 숨어 있었다), 루돌프의 왕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루돌프 2세가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2세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부르군트에 머무는 동안 베렌가리우스는 복수를 생각하고 베로나에 다시 들어갔다. 5,000명의 헝가리 용병 군대를 파견하여 파비아를 점령하고, 루돌프 2세의 부재 중에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되도록 했다. 이 때, 헝가리 용병은 여자아이와 어린이를 포함한 일반 시민들을 대량 학살했고, 이로 인해 베렌가리우스는 많은 가신들에게 비난받았으며, 베렌가리우스를 향한 음모가 꾸며지게 되었다.

924년, 베렌가리우스는 베로나에서 미사 중에 등에 칼을 맞고 살해당했다.

3. 유산

베렝가르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59], 그의 지위는 외손자인 이브레아의 베렌가리오가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직은 금지되었지만, 933년 독일하인리히 1세가 마자르 족을 퇴치하고 잠깐 획득한 바 있다. 이후 이탈리아의 군주를 명목상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간주하기도 한다. 962년 오토 1세가 이탈리아를 정벌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제국 황제관을 받았다. 그러나 962년에 오토 1세가 받은 황제관은 독일에 한정된 제국의 황제관이라 학자에 따라 카롤링거 제국의 연장선으로 보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베렝가리오 1세의 직계 가계는 11세기까지 이어졌다. 베렌가리오는 아들 없이 딸 둘, 베르타와 기젤라만 남겼다.[49]

4. 평가

베렌가리오 1세는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특히 무능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0] 그는 경쟁자들과의 전투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40년간의 군사 작전에서 승리한 기록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51][52]

특히 공공 토지와 방위 사령부(''districtus'')를 개인 소유자, 그 중에서도 주교에게 양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53]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사적 방어 계획"을 더 긍정적으로 보고 일관된 선물 증여 정책을 발견하기도 한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후 수십 년 동안의 ''incastellamento''(성곽 건설)을 시작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다.[55]

5. 가족 관계

베렌가리우스 1세는 880년경 베르틸라와 결혼했다. 베르틸라는 아스티 백작 스포네 2세(스폴레토 공작 아델키 1세의 아들)의 딸이었으며, 베르틸라의 이모는 황제 루도비코 2세의 왕비 엥겔베르가였다.[56]

이름출생-사망비고
베르타?-952년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수도원장
지젤라882년-910년이브레아 변방백 아달베르토 1세와 결혼, 베렌가리오 2세의 어머니



915년 베르틸라 사후, 안나와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안나는 루이 3세의 딸이라고도 한다.

베렌가리우스 1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할아버지 : 헤른로히 프리울리(Hunroch or Henrok)
  • 할머니 : 파리의 인겔트루드(Engeltrude de Paris) - 샤를마뉴의 외손녀
  • 아버지 : 에버하르트 드 프리울리(Eberhard) - 프리울리 후작(805/810? ~ 866)
  • 어머니 : 프랑크의 기셀라(Gisele or Gisela, ? ~ 874) - 경건왕 루트비히의 딸
  • * 누이 동생 : 프리울리의 유디트(Judith de Friuli)
  • * 누이 동생 : 헤드비가 드 프리울리(Hedwig de Friuli)
  • 부인 : 스폴레토의 베르틸라(Bertila of Spoleto)
  • 외조부 : 경건왕 루트비히
  • * 외삼촌 : 카를 2세

참조

[1] 서적 Rosenwein
[2] 간행물 AF(M)
[3] 서적 Rosenwein
[4] 서적 Rosenwein
[5] 간행물 Annales Fuldenses
[6] 서적 MacLean
[7] 서적 MacLean
[8] 간행물 AF
[9] 서적 MacLean
[10] 간행물 AF(B)
[11] 간행물 AF(M)
[12] 간행물 AF(B)
[13] 간행물 AF(B)
[14] 서적 MacLean
[15] 서적 Reuter
[16] 서적 MacLean
[17] 서적 Reuter
[18] 웹사이트 Representing Royal Authority at San Michele Maggiore in Pavia https://www.academia[...] 2022-07-30
[19] 간행물 AF(B)
[20] 간행물 AF
[21] 간행물 AF(B)
[22] 간행물 AF(B)
[23] 간행물 AF(B)
[24] 간행물 AF(B)
[25] 간행물 AF(B)
[26] 간행물 AF(B)
[27] 간행물 AF(B)
[28] 서적 Reuter
[29] 서적 Reuter
[30] 서적 Reuter
[31] 서적 Reuter
[32] 간행물 AF(B)
[33] 서적 Previté Orton
[34] 서적 Previté Orton
[35] 서적 Wickham
[36] 서적 Llewellyn
[37] 서적 Rosenwein
[38] 서적 Daris
[39] 서적 AF(B)
[40] 서적 Rosenwein
[41] 서적 Previté Orton
[42] 서적 Rosenwein
[43] 서적 Rosenwein
[44] 서적 Previté Orton
[45] 서적 Rosenwein
[46] 서적 Rosenwein
[47] 서적 Rosenwein
[48] 웹사이트 Britannica http://www.britannic[...]
[49] 서적 Arnaldi
[50] 서적 Rosenwein
[51] 서적 Rosenwein
[52] 서적 Wickham
[53] 서적 Rosenwein
[54] 서적 Rosenwein
[55] 서적 Rosenwein
[56] 문서 서프랑크의 국왕 대머리왕 카를 2세는 그의 친외삼촌이었다.
[57] 문서 딸 이르멘베르가의 모후가 된다. 맹인왕 루트비히에게는 외할머니.
[58] 문서 학자에 따라서는 이후의 이탈리아의 왕들을 명목상의 황제로 보기도 한다.
[59]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Preview.br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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