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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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이징 조약은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톈진 조약 비준, 톈진 개항, 외교 사절의 베이징 주재 허용, 배상금 지불, 청나라 국민의 해외 이주 허가 등이 포함된다. 영국은 구룡반도 남부를 할양받았고, 러시아는 아무르 강 이남 지역과 연해주를 획득하여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녹둔도의 영유권을 잃고, 간도 문제 등과 함께 한반도 근대사에 큰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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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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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조약 정보 | |
조약 명칭 | 베이징 조약 |
다른 명칭 | 北京條約 (중국어 간체), Běijīng Tiáoyuē (로마자 표기) |
유형 | 불평등 조약 |
서명일 | 영국-청나라: 1860년 10월 24일 프랑스-청나라: 1860년 10월 25일 러시아-청나라: 1860년 11월 14일 |
서명 장소 | 베이징, 중국 |
서명 당사국 | 청나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
조인자 | 공친왕 엘긴 경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
역사적 맥락 | |
관련 조약 | 톈진 조약 (1858년) |
내용 | 톈진 조약의 비준 교환 및 추가 조약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톈진 조약 비준 외국 공사 베이징 주재 허용 톈진 조약 내용에 대한 재확인 청나라의 추가적인 배상금 지불 약속 영국에게 주룽 반도 할양 프랑스에게 톈진 조약에 더불어 추가적인 이권 부여 러시아에게 연해주 할양 |
결과 | 제2차 아편 전쟁 종결 청나라의 국력 약화 심화 외국 열강의 중국 내 영향력 확대 |
기타 | |
언어 |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
2. 배경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는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연합군은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건축물과 주변을 약탈하였다.[1]
1860년 청나라는 제2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후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러시아 대표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영국 대표인 제임스 브루스, 프랑스 대표인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끼어들었다.[1]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애로호 사건 참조)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는데, 조약 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태웠다.[1]
아편전쟁 이후 톈진 조약이 체결되고 영불 연합군이 철수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 조약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청나라 조정 내부에서는 조약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었고, 청나라는 조약에 규정된 1년 이내의 비준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영불 연합군은 다시 톈진에 상륙했고, 함풍제는 열하로 퇴각했으며, 베이징을 맡았던 공친왕도 영불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은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운 뒤, 공친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에 있던 례부 아문에서 청나라와 영불 연합군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청나라와 영국,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3. 주요 내용
이 조약으로 청나라 국민의 해외 이주 금지 정책이 철폐되고 이민이 허용되었다.
3. 1. 영국과의 조약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는 제2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여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영국 대표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난징 조약(1842년)으로 홍콩섬을 대영제국에 내준 청나라는 이 조약으로 홍콩섬 맞은 편의 구룡반도 지역을 1860년 10월 24일부터 영국에 영구 할양하였다.[3]
중국과 영국 간 조약 제6조는 중국이 현재 경계 스트리트, 주룽, 홍콩( 스톤커터스 섬 포함) 이남의 구룡반도 일부를 영국에 영구적으로 할양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4]
3. 2. 프랑스와의 조약
1860년 청나라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규정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 내 프랑스인의 우위가 인정되었고, 천주교 포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3. 3. 러시아와의 조약
러시아는 청나라와 1858년에 체결된 아이훈 조약을 재확인하여 아무르 강 좌안[12]의 영유권을 확보했다. 더불어 길림성 관할 구역의 일부인 두만강 이남, 한카호~우스리 강 이동 지역(동다타르)을 할양받았다. 아이훈 조약에서는 이 지역이 청나라와 러시아의 공동 관리 지역이었지만, 베이징 조약에 따라 러시아 영토로 확정되었다(제1조). 이후 흥개호계약(1861년), 훈춘동계약(1886년)이 체결되어 국경선이 거의 확정되었다.
러시아는 곧바로 우수리 강 이동 등 광대한 지역을 연해주에 포함시키고, 2년 전부터 청나라에 무단으로 건설했던 하바롭스크의 영유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미 설치했던 아무르주 등과 함께 1884년 연해주 아무르 총독부를 설치하게 된다.
청나라는 일본해로의 출구를 빼앗기게 되었지만, 훈춘의정서(1886년)에서 두만강의 항행권(소위 "출해권")이 인정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국경의 애매한 부분을 둘러싸고 중소 분쟁, 장고봉 사건, 진보섬 사건이 발발했다. 장고봉 사건의 영향으로 중국에게 있어 일본해로의 출구인 두만강이 봉쇄되었지만, 1991년 중소 국경협정으로 다시 인정되었다. 최종적으로 국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에 의한 중러 국경 협정(2004년)으로 확정되었다.
제2조에서 투르키스탄의 경계를 획정하게 되었고, 후에 타르바가타이 조약(1864년 9월)이 체결되어 국경선이 천산산맥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청나라는 이식쿨 호 등 광대한 지역을 할양했다. 더불어 추가 조약으로 1869년 홉드 조약, 오리아스타이 조약 등이 체결되어 탄누우리앙카이 서부도 할양하였다.(외서북). 투르키스탄은 이후 일리 사건을 맞게 된다.
또한 러시아는 캬프타 외에 울란바토르(중국명:庫倫|쿠룬중국어, 러시아명:울가(ru)), 장가구(러시아명:칼간)(제5조), 카슈가르(제6조)에서의 상거래 자유를 얻었다. 러시아는 이리(グルジャ市), 탈바가타이(チョチェク市) 외에 카슈가르와 울란바토르에 영사관을 설치했다(제8조).
소련과 러시아 연방은 이 조약(과 아이군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중국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구 영토 반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말하지만, 국경선은 대략 이 조약에 따라 있으며 러시아 영토는 러시아식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불평등 조약이므로 전부 무효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대륙의 만주 지도에서 러시아식 명칭으로 표기된 지명이, 타이완의 해당 지도에서는 일부 한어 명칭(만주어 명칭)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그 지도에서도 국경선은 큰 차이가 없다.
3. 3. 1. 조선과의 관계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두만강 이북의 간도 지역 귀속 문제가 복잡해졌다. 특히 녹둔도는 러시아와 조선 사이의 영토 분쟁 대상이 되었다.[8] 1860년 청나라가 녹둔도를 포함한 두만강 좌안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지만,[13] 조선 당국은 1883년 청나라가 조선 영토를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문제를 제기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3] 1990년 북한은 소련과의 국경 협정을 통해 녹둔도가 소련 영토임을 인정하였으나,[9] 대한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10]
4. 조약 체결 이후
1860년 10월 18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베이징의 자금성을 점령당했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건축물을 약탈했다.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특히,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는 중재를 핑계로 조약에 참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자금성 방화를 계획했으나, 조약 체결 후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태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 자금성 남쪽 건물에서 체결되었으며,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으로 각각 맺어졌다.
4. 1. 청나라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는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 당하였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건축물과 주변을 약탈하였다.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러시아 대표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영국 대표인 제임스 브루스, 프랑스 대표인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참여하였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애로호 사건 참조)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으나, 조약 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태웠다.
이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에 자금성의 남쪽 건물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약은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의 형식으로 각각 맺어졌다.
4. 2. 영국
난징 조약(1842년)으로 대영제국에 홍콩섬을 내준 청나라는 이 조약의 체결로 홍콩 섬 맞은 편의 주룽까지 1860년 10월 24일부터 1997년 7월 1일까지 영국에 조차하였다. 1984년 영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홍콩 문제에 관한 중영 공동선언을 체결했는데, 이 선언에 따라 난징 조약(1842년)에 따라 할양된 홍콩섬과 경계가(Boundary Street) 이남의 구룡반도를 포함한 임차지역의 주권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양될 예정이었다.4. 3. 러시아
1858년에 체결된 아이훈 조약 조항을 제시함으로써 조약의 효력을 청나라에 확인시켰다. 이로써 아무르 강 좌안[12]의 영유권을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 길림성 관할 구역의 일부인 두만강(이하 "두만강"), 한카호~우스리 강 이동 아무르 강 이남 지역(동다타르)이 할양되었다. 아이군 조약에서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공동 관리 지역이었던 곳이지만,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 영토로 확정되었다(제1조). 이 조약에 따라 흥개호계약(1861년), 훈춘동계약(1886년)이 체결되어 국경선이 거의 확정되었다.러시아는 이후 곧바로 우스리 강 이동 등 광대한 지역을 연해주에 포함시키고, 이미 2년 전부터 청나라에 무단으로 건설했던 하바롭스크의 영유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해삼위'''(하이선웨이)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미 설치했던 아무르주 등과 함께 1884년 연해주 아무르 총독부를 설치하게 된다.
두만강이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었던[13] 점에서, 청나라는 일본해로의 출구를 빼앗기게 되었지만, 훈춘의정서(1886년)에서 두만강의 항행권(소위 "출해권")이 인정되었다.
국경에 대해 20세기에 들어와서 애매한 부분을 둘러싸고 중소 분쟁, 장고봉 사건, 진보섬 사건이 발발했다. 장고봉 사건에서는 그 영향으로 중국에게 있어 일본해로의 출구인 두만강이 봉쇄되었지만, 1991년 중소 국경협정으로 다시 인정되었다.
최종적으로 국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에 의한 중러 국경 협정(2004년)으로 확정되었다. 1860년에 청나라가 록둔도를 포함한 두만강 좌안을 러시아 영토로 하는 것을 인정했지만, 조선 당국은 조선의 영토를 책봉 체제라고는 하지만 청나라가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록둔도 문제가 1883년에 제기되었으나, 러시아 제국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90년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록둔도가 소비에트 연방 영토임이 합의되었고, 소조 양국에서 국경의 재확정이 확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록둔도는 현재도 러시아 연방에 속한다.
4. 4. 한국에 미친 영향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는 1858년 아이훈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에 아무르강(흑룡강) 이북 지역뿐만 아니라 우수리스키 지방(연해주와 남부 하바롭스크 지방)까지 영원히 넘겨주게 되었다.[6] 이로써 러시아는 중국의 일본해 진출을 막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6]이 조약은 조선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녹둔도 또한 러시아에 할양하는 결과를 낳았다.[7] 조선은 20여 년이 지난 1880년대에 와서야 이 사실을 알고 청나라에 공식 항의했으나, 이미 녹둔도는 러시아 땅이 된 뒤였다.[7]
1985년 북한과 소련은 국경 조약을 맺어 두만강 중앙을 국경선으로 확정하고 녹둔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다.[9] 그러나 한국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여전히 녹둔도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10]
참조
[1]
서적
Of Battle and Beauty: Felice Beato's Photographs of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2]
서적
Peking: Temples and City Life, 1400-190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3]
서적
A biographical sketch-book of early Hong Kong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05
[4]
간행물
Hong Kong Government Gazette - "Convention of Peace Between Her Majesty and the Emperor of China, signed at Peking, October 24th, 1860"
https://webb-site.co[...]
Hong Kong Government
1860-12-15
[5]
백과사전
The Church in China
[6]
학술지
Sino-Soviet Border Talks
https://www.jstor.or[...]
2023-09-28
[7]
웹사이트
吴大澂恢复中国图们江出海权再探讨
http://iqh.ruc.edu.c[...]
Institute of Qing History
2024-12-11
[8]
웹사이트
[Visual History of Korea] Do or die naval battles defined Adm. Yi Sun-sin as hero
https://www.koreaher[...]
2023-11-24
[9]
웹사이트
Information on international agreements
http://www.rosgranit[...]
[10]
웹사이트
The problem of the Noktundo island in the media in South Korea
http://ru.apir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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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11]
웹사이트
Republic of China's Diplomatic Archives (English)
http://www.npm.gov.t[...]
[12]
웹페이지
[13]
웹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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