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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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후작은 1711년 빈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1741년 외교 무대에 등장하여 사르데냐 왕국을 오스트리아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으며, 1753년부터 1792년까지 오스트리아 국무 재상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오스트리아 외교 정책을 총괄했다. 카우니츠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외교 혁명을 주도하고 7년 전쟁에 참여했으며, 계몽주의적 개혁과 폴란드 분할에도 관여했다. 그는 18세기 유럽 외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폴란드 분할에 찬성한 점 등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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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후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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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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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각하 |
존칭 접미사 | 카우니츠-리트베르크 공작 |
출생일 | 1711년 2월 2일 |
출생지 | 빈,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794년 6월 27일 |
사망지 | 빈,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
아버지 | 막시밀리안 울리히 폰 카우니츠 |
어머니 | 마리 에르네스티네 프란시스카 폰 리트베르크 |
알려진 업적 | 외교관 정치가 |
직위 | |
직위명 | 합스부르크 군주국 국무총리 |
임기 시작 | 1753년 5월 13일 |
임기 종료 | 1792년 8월 19일 |
군주 | 마리아 테레지아 (1753–1780) 요제프 2세 (1780–1790) 레오폴트 2세 (1790–1792) 프란츠 2세 (1792) |
이전 | 안톤 코르피츠 울펠트 백작 |
이후 | 필리프 폰 코벤츨 |
2. 가문과 초기 생애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후작은 1711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라바로 이주한 독일계 보헤미아 귀족 가문 출신인 제3대 카우니츠 백작 막시밀리안 울리히(1679년–1746년)이며, 어머니는 동프리슬란트 및 리트베르크 백작부인 마리 에르네스틴(1687년–1758년)이다. 그는 부모 슬하의 19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다.[1][12][11]
빈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라이덴 대학교에서 법학과 외교학을 공부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카를 6세의 시종이 되었다.[1] 1735년 황실 궁정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739년에는 레겐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서 황제의 위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1753년 빈으로 돌아온 카우니츠는 1792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재상을 맡아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까지 2대에 걸쳐 봉사했다. 그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직책은 1753년부터 1792년까지 역임한 국무 재상 겸 외무부 장관이었으며, 이 자리에서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이는 여제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임명이었다. 카우니츠는 이 임명을 받아들이면서 Ballhausplatz의 외무부를 재조직할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5]
카우니츠 가문(Kounicovéces)은 유서 깊은 체코 귀족 가문으로, 마르티니츠 가문과 같이 중세 보헤미아 왕국의 브르쇼브치 씨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14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했으며, 초기에는 실레지아의 트로파우 공작령에 기반을 두었으나, 1509년 브르노 인근의 슬라프코프 (Austerlitzde) 성으로 이주했다.[1]
할아버지 도미니크 안드레아스 폰 카우니츠(1655년–1705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추밀고문관(Geheimratde)이자 특사로 활동했으며, 1683년 세습 백작(Grafde) 작위를 받았다. 그의 외교 활동은 루이 14세에 대항한 1686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결성과 9년 전쟁을 종결시킨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1] 아버지 막시밀리안 울리히 백작은 1706년 황실 칙선 회의(Reichshofratde)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제국 특사를 지냈으며 1720년부터는 모라바 총독(Landeshauptmannde)으로 재임했다. 그는 1699년 마리 에르네스틴과의 결혼을 통해 베스트팔렌의 리트베르크 백국을 상속받았다.[1]
벤첼 안톤은 둘째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으며, 13세 때 베스트팔렌 뮌스터 교구에서 참사회 의석을 맡았다.[2] 그러나 형이 사망하자 세속적인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2] 빈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레이던 대학교에서 법학과 외교학을 공부했다.[1] 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의 시종이 되었고, 베를린, 네덜란드, 이탈리아, 파리, 잉글랜드로의 ''그랜드 투어''를 통해 몇 년 동안 교육을 계속했다.[1]
1736년 5월 6일, 황실 회의소 의장이었던 군다커 토마스 폰 스타렘베르크 백작(1663년–1745년)의 손녀인 마리아 에르네스틴 폰 스타렘베르크 백작부인(1717년–1749년)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네 아들을 얻었으며,[5] 그 중에는 오스트리아 장군인 프란츠 벤첼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 백작(1742년–1825년)도 있었다. 벤첼 안톤의 손녀 엘레오노라(장남 에른스트의 딸)는 국무장관 직책의 후임자인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공작과 결혼했다.[1]
빈으로 돌아온 그는 1735년 황실 궁정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 1739년 레겐스부르크의 제국 의회에서 그는 황제의 위원 중 한 명이었다.[1]
3. 외교관 경력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1741년 3월, 피렌체, 로마, 사르데냐 왕국으로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1742년 8월에는 토리노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로 임명되어 사르데냐의 카를 에마누엘 3세 국왕이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44년 10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전권 공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총독이었던 로렌의 카를 알렉산더 공작은 슐레지엔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보헤미아로 떠난 상태였다. 같은 해 12월, 카를 공작의 배우자이자 공동 총독이었던 마리아 안나 대공녀가 사망하자 카우니츠가 사실상 정부 수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2][3] 그러나 1746년, 모리스 드 삭스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브뤼셀을 포위하자 도시를 떠나야 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정부는 안트베르펜을 거쳐 아헨으로 이전했다. 카우니츠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소환을 요청했고, 이는 1746년 6월 받아들여졌다.[4]
2년 후인 1748년, 카우니츠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아헨 회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대표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과 글라츠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조항에 극도로 불만을 품었으나, 결국 1748년 10월 23일 아헨 조약에 마지못해 서명했다.[2]
이 경험을 통해 카우니츠는 새롭게 부상하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절감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외교 정책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1749년부터 카우니츠는 마리아 테레지아 궁정에서 ''게하임라트''(추밀고문)로 활동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의 부상이라는 변화된 국제 정세 속에서 오스트리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문들의 의견을 구했다. 황제의 남편인 프란츠 1세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문들은 영국, 네덜란드 등 해양 강국과의 기존 동맹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카우니츠는 1731년부터 이어진 영-오스트리아 동맹에 강하게 반대하며,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이야말로 "오스트리아의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개신교 국가들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고,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서는 러시아 제국 및 프랑스와의 동맹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우니츠의 견해를 받아들여 그에게 새로운 외교 정책 구상을 맡겼다.[5]
이에 따라 카우니츠는 1750년부터 1752년까지 베르사유 궁전의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프랑스 궁정 및 계몽주의 사상가들, 특히 여러 ''백과사전주의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인맥을 쌓고, 훗날 외교 혁명으로 이어질 부르봉-합스부르크 동맹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4. 외교 혁명과 7년 전쟁
카우니츠는 재상으로서 유럽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외교 혁명(1756년)을 주도했다. 그는 기존의 영국-오스트리아 동맹 대신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1754년 해외에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파리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 대사 게오르크 아담 폰 슈타렘베르크 공에게 프랑스와의 방어 동맹 체결을 제안하도록 지시했다. 1756년 영국과 프로이센 간의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마침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제안을 수락했다.[6][7]
1756년 맺어진 제1차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프랑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새로운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은 외교사의 큰 전환점으로 평가받으며, 카우니츠를 외교 분야의 명실상부한 거장으로 만들었다.[5] 이 동맹은 1757년 제2차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스웨덴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강력한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이는 7년 전쟁의 기본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6][7]
외교 혁명은 곧바로 7년 전쟁(1756년-1763년)으로 이어졌다. 1756년 8월 29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 선제후국을 선제 공격하여 작센군을 제압하고 드레스덴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은 효과적인 공동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카우니츠는 전쟁 수행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주저하는 야전 사령관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백작 대신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을 기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1760년경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모든 참전국이 점차 지쳐가자, 카우니츠는 내부 개혁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오랜 경쟁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하우그비츠 백작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1761년 오스트리아 국무회의(Staatsrat)를 설립하여 행정 및 군사 정책 결정을 중앙 집중화하고 오스트리아 군의 재편을 감독했다.
그러나 1762년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 표트르 3세가 즉위하여 갑작스럽게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전세는 프로이센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결국 카우니츠는 평화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이는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주요 목표였던 슐레지엔 탈환에 실패했다. 하지만 7년 전쟁과 외교 혁명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 사이의 수백 년간 지속된 적대 관계를 완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 개선은 훗날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왕세자(훗날 루이 16세)의 결혼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전쟁 후 카우니츠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Reichsfürst) 칭호를 받았다. 또한, 전쟁 중 해군력의 부재가 오스트리아의 약점임을 인식하고, 지중해에서 국가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소규모 오스트리아 해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이는 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기초가 되었다.
5. 계몽주의적 개혁과 폴란드 분할
카우니츠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가 재상으로서 국내 개혁을 추진했다.[9] 그는 가톨릭 교회를 국가 권력 아래 두고자 국교회 설립을 추진했으며, 교회의 면세 특권과 전통적인 부동 토지 소유권 제도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이러한 개혁은 얀센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또한 평민들의 교육 수준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카우니츠는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적극적인 후원자였다.[9] 그는 저명한 예술품 수집가였으며, 브뤼셀 왕립 아카데미의 창립에 기여했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같은 당대의 중요한 음악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요제프 2세 역시 계몽주의적 개혁 사상을 지지했지만, 그의 개혁 방식은 카우니츠가 보기에는 다소 급진적이고 철저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지속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고, 카우니츠는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 카우니츠는 과거 적대 관계였던 프로이센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그는 1769년과 1770년에 요제프 2세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국왕과 만나는 자리에 동행했다. 이러한 관계 개선 노력은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구체화되었다. 카우니츠는 요제프 2세와 함께 폴란드 분할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적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이 분할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 지역을 확보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실리를 챙겼다.
6. 말년과 유산
카우니츠는 국가 재상으로서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 자유주의적인 후원 활동을 펼쳤다.[9] 그는 저명한 예술품 수집가였으며, 브뤼셀 왕립 아카데미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교회의 면세 혜택과 전통적인 부동 토지 소유권 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얀센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카우니츠는 평민들의 교육 수준 향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은 요제프 2세 황제는 카우니츠와 개혁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공유했지만, 황제의 개혁 속도와 방식이 너무 빠르고 급진적이라고 여긴 카우니츠는 그와 자주 갈등을 빚었고 여러 차례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 카우니츠는 과거의 적대국이었던 프로이센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그는 1769년과 1770년 두 차례에 걸쳐 요제프 2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만나는 자리에 동행했다. 프로이센 국왕은 카우니츠의 다소 거만한 태도를 불쾌하게 여겼지만, 이러한 관계 개선 노력은 결국 1772년 폴란드 분할로 이어졌다. 이 결정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적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우니츠와 요제프 2세가 함께 추진한 것이었다.
1777년, 요제프 2세의 성급한 군사적 판단으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의 입지가 불리해진 상황에서 카우니츠는 독자적으로 평화 협상을 주도했다. 그 결과 1779년 테셴 조약을 체결하여 바이에른의 인피어텔 지역을 오스트리아 영토로 편입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레겐스부르크의 상설 제국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1780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을 쾰른 선제후국과 뮌스터 주교령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여 제국 내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러나 1788년-1791년의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은 요제프 2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우니츠가 시작했지만, 프로이센을 견제하려는 원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막대한 전쟁 비용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다.[10] 요제프 2세가 사망하고 레오폴트 2세가 황제가 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고, 카우니츠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10] 그의 오랜 균형 외교 정책이 흔들리면서 오스트리아는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개신교 제후국들을 모아 ''Fürstenbund'' 동맹을 결성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는 브라반트 혁명이 발발하는 등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6. 1. 권력 약화와 은퇴
요제프 2세의 후계자인 레오폴트 2세는 카우니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그의 권한을 대폭 제한했다. 카우니츠는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여 프로이센과의 추가적인 화해를 거부했는데, 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무능한 통치를 고려한 것이었고, 이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1792년 레오폴트 2세가 사망하고 프란츠 2세가 황위에 오르자, 카우니츠는 같은 해 7월 결국 사임하고 은퇴했다. 그는 2년 후인 1794년 빈의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슬라브코프 묘지에 있는 세례 요한 예배당 아래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6. 2. 평가와 영향
카우니츠는 18세기 유럽 외교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756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오랜 적대 관계였던 프랑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고립시킨 이른바 '외교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11] 이 외교적 전환은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수 세기 동안 지속된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1]
이러한 외교 관계의 변화는 1770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11] 비록 프랑스 내부에서는 7년 전쟁 패배의 원인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으로 돌리며 초기에는 혼사에 소극적이었으나, 카우니츠의 외교적 노력과 신흥 강국 프로이센에 대한 공동 견제 필요성 등이 작용하여 성사될 수 있었다.[11]
카우니츠의 외교 정책은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편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국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실리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부터 요제프 2세에 이르기까지 두 황제를 보좌하며 1753년부터 1792년까지 약 40년간 재상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외교 및 국내 정책을 이끌었다.[11]
6. 2. 1. 비판적 시각
카우니츠의 외교 정책은 때로는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이고 냉혹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 결정은 국제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지적이 있다. 당시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와 함께 분할에 찬성하며, 공동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적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강행했다.[11] 이는 약소국인 폴란드를 주변 강대국들이 임의로 분할하여 영토를 차지한 사건으로, 카우니츠의 현실 정치적 판단이 국제적 도의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참조
[1]
간행물
Kaunitz, Wenzel Anton
Cite AmCyc
[2]
간행물
Wenzel Anton Kaunitz
Cite CE1913
[3]
논문
The roots of policy: Kaunitz in Italy and the Netherlands, 1742–1746
1968
[4]
웹사이트
St. Maria Immaculata
https://www.pr-am-oe[...]
2023-12-06
[5]
간행물
Kaunitz-Rietburg, Wenzel Anton, Prince von
EB1911
[6]
논문
Prince Kaunitz and the Balance of Power
1979
[7]
서적
The Diplomatic Revolution
1957
[8]
문서
Reichsfürst
German title
[9]
간행물
Kaunitz, Wenzel Anton
Cite EB9
[10]
논문
Kaunitz, Joseph II and the Turkish War
1976
[11]
간행물
Kaunitz, Wenzel Anton
Cite AmCyc
[12]
간행물
Kaunitz, Wenzel Anton
https://en.wikisourc[...]
The American Cyclopædia
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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