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블라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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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리스 블라허는 만주에서 태어나 중국과 러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독일계 작곡가이다. 베를린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음악 작곡 혐의로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2차 세계 대전 이후 복귀하여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오페라, 발레, 관현악,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가변 박자를 사용하는 독창적인 작곡 기법을 사용했다. 블라허는 윤이상, 이시이 마키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며 20세기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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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블라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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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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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보리스 블라허 |
원어 이름 | Boris Blacher |
출생일 | 1903년 1월 19일 |
출생지 | 뉴좡, 펑톈, 청나라(현재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 |
사망일 | 1975년 1월 30일 |
사망지 | 동베를린, 동독(현재 독일) |
직업 | 작곡가 및 대본가 |
음악가 정보 | |
악기 | 바이올린 |
장르 | 클래식 음악 |
직업 | 작곡가 |
2. 생애
블라허는 중국 만주(현재 중국 동북부) 영구의 우장]에서 태어났다. 1919년 하얼빈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에 학교를 졸업한 후 베를린으로 건너가 수학과 건축을 공부한 뒤 작곡가로 전향했다.
그의 경력은 나치즘에 의해 중단되었다가, 1945년 이후 재개되었다.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하였고,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재즈풍의 신고전주의 틀 안에 있었지만, 이후 전위 시대에는 "가변 박자"[5]라는 독자적인 리듬 기법을 선보였다.
피아니스트 게르티 블라허-헤르초크와 결혼하여, 여배우 타티아나 블라허와 바이올리니스트 콜야 블라허를 포함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75년 베를린에서 사망했고, 발트프리트호프 첼렌도르프의 명예묘지에 묻혔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블라허는 독일-에스토니아계 및 러시아계 배경을 가진 부모가 만주(滿洲)의 우장진) 마을의 러시아어 사용 공동체에서 살던 때 태어났다. 그의 출생 기록에는 율리우스력이 사용되었다. 그는 초기 몇 년을 중국과 러시아 아시아 지역에서 보냈고, 1919년에는 하얼빈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에스토니아 출신의 발트 독일인이다.1922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처음에는 건축과 수학을, 그 후에는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1] 2년 후 그는 음악으로 전향하여 프리드리히 코흐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는 대중음악과 영화음악 편곡 일을 하였다.[1]

2. 2. 나치 시대의 활동 중단
그의 경력은 나치즘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퇴폐음악을 작곡했다는 혐의를 받고 드레스덴 국립음대의 교수직을 잃었다.2. 3. 전후 활동과 교육자로서의 업적
1945년 이후 블라허는 경력을 재개했고, 나중에는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으며, 오늘날 그의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5] 그의 제자로는 아리베르트 라인만, 윤이상, 이시이 마키, 프리츠 가이스러, 기젤허 클레베, 하이모 에르브제, 리차드 아커 트리할,[2] 클라우스 후버, 프랜시스 버트, 고트프리트 폰 아이넘, 칼레비 아호, 리처드 웨르닉, 카이 세쓰소, 요시자키 키요토미, 헬베르트 케겔, 루돌프 케텔본, 파울 구타마 수기요 등이 있다.그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재즈풍의 신고전주의 틀 안에 있었지만, 이후 전위 시대에는 "가변 박자"라는 독자적인 리듬 기법을 선보였다. 박자가 체계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은 바르토크의 메트릭을 응용한 것이었지만, 총체적 직렬주의의 부상과 함께 완전히 밀려나 전면에서 사라졌다.[5]
그 후에도 전위 시대에서 태어난 이디엄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이며, 의미 없는 리브레토로 작곡된 "추상 오페라 제1번"이나, C장조 음계를 풍자한 서두가 인상적인 "24개의 전주곡" 등, 작곡 활동은 말년까지 계속했다.[5]
2. 4. 개인적인 삶과 죽음
블라허는 피아니스트 게르티 블라허-헤르초크(1922년 ~ 2014년)와 결혼했다. 슬하에 여배우 타티아나 블라허(1956년 ~ )와 바이올리니스트 콜야 블라허(1963년 ~ )를 포함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75년 72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 사망했으며, 베를린 발트프리트호프 첼렌도르프의 명예묘지에 묻혔다.[5]3. 주요 작품 및 음악적 특징
보리스 블라허는 오페라, 발레, 오라토리오, 협주곡, 실내악, 전자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성격과 독특한 리듬, 그리고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진다.
블라허는 특히 '가변 박자(variable Metren)'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자신의 음악에 적용했는데, 이는 곡의 진행에 따라 박자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변 박자는 그의 작품에 독특한 리듬감과 긴장감을 부여한다. 대표적인 예로, 가변 박자를 사용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1952)이 있다.
블라허는 파울 데사우, 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 한스 베르너 헨체, 루돌프 바그너레게니와 함께 Jüdische Chronik|유대 연대기|유대인의 연대기de를 공동 작곡하기도 했다.[4] 또한 고트프리트 폰 아이넘의 오페라 단통의 죽음(1947)과 재판(1953)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3. 1. 다양한 장르와 양식
및합창 음악
및
기타
(소프라노, 알토 색소폰, 파곳)
메이저 쿠퍼는 지구를 공전한다
현악사중주 제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