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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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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이상은 1917년 통영에서 태어난 한국의 작곡가이다. 1950년대 유럽으로 건너가 20세기 작곡 기법을 배우고, 동양적인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1963년 북한 방문 이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국제적인 음악가들의 탄원과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서독으로 귀화하여 활동했으며, 하노버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한국과 북한 모두에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1995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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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윤이상
윤이상
이름윤이상
한자尹伊桑
로마자 표기Yun Isang
출생일1917년 9월 17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산청
사망일1995년 11월 3일
사망지독일 베를린
국적대한민국, 독일
활동 시기1935년–1995년
직업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기타 연주자, 첼로 연주자
장르한국 전통 음악, 아방가르드 음악, 현대 음악
종교불교
배우자이수자
가족아버지 윤기현, 어머니 김순달, 슬하 2녀, 남동생 1명, 누이동생 3명
모교베를린 예술대학교
음악 활동
악기첼로, 바이올린, 기타
관련 활동현대 음악 작곡
기타 정보
문화상 수상1969년 킬 문화상 수상
외부 링크

2. 생애

윤이상은 1917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통영으로 이사했다. 13세에 바이올린을 배우며 작곡을 시작했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성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35년 오사카에서 첼로, 음악 이론, 작곡을 공부한 후 통영으로 돌아와 작곡 활동을 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귀국하여 한국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 윤이상은 전쟁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고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6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 음악원과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수학하며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음악 여름 강좌에 참가하여 《7중주를 위한 음악》을 초연하면서 유럽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9년부터 크레펠트,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쾰른 등지에서 거주하다 1964년 포드 재단의 지원을 받아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며, 간첩 혐의를 자백하도록 강요받았고,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4]

루이지 달라피콜라, 한스 베르너 헨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약 200명의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윤이상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 결국 윤이상은 1969년 석방되어 서베를린으로 돌아왔고, 1971년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그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73년부터 윤이상은 대한민국 민주화와 통일을 촉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하노버 국립음대(1969~71)와 베를린 예술대학교(1977~85)에서 작곡을 가르쳤으며, 강석희, 백병동 등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1979년 이후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윤이상은 1982년 평양에서 첫 번째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했고, 1984년에는 평양에 윤이상 음악원이 설립되었다. 1990년에는 남북한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평양에서 개최되는데 기여하였다.

1982년 서울에서 윤이상의 작품으로 구성된 콘서트가 열렸고, 1994년에는 한국에서 열린 자신의 음악 축제에 초청되었으나, 갈등으로 인해 방문이 중단되었다.

한국 당국은 윤이상에게 귀국하려면 "회개"에 대한 서면 자백을 제출해야 한다고 통보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1995년 11월 3일, 윤이상은 베를린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1996년 2월 베를린에서 국제 윤이상 협회가 설립되었다.

윤이상은 "친북 활동"과 김일성 정권과의 관계로 인해 종종 비판을 받았다. 오길남은 윤이상이 자신과 그의 가족을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설득했다고 주장했다.[5]

윤이상의 음악적 주요 관심사는 서구 아방가르드 음악 기법을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을 융합하는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글리산도, 피치카토 등 한국 전통 음악과 관련된 기법들과 다성적인 선율을 사용했다. 그의 정치적 목표는 한국반도의 평화와 화해였다. 윤이상은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따랐다고 말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윤이상은 1917년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기현은 선비 출신이었고, 어머니 김순달은 농가 출신이었다.[23] 윤이상의 어머니는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23]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서양 음악을 접했다.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에 바이올린기타를 배우고 작곡을 시작했다.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24]

보통학교 졸업 후,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화성학을 배우고, 도서관에서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의 상업학교에 입학,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출판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池内友次郎)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1944년 조선가곡 악보가 발각되어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서울에서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 김춘수 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음악부문을 맡았다.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기도 했다. 1950년 1월 30일 이수자와 결혼, 같은 해 8월 딸 윤정이 태어났다.

2. 2. 유럽 유학과 동백림 사건

1956년 파리 음악원과 1957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보리스 블라허, 요제프 루퍼 등에게 사사하며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습득했다.[4]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으며, 여기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하면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3]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 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4]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4]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5]

2. 3. 독일 정착과 활동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21]

강석희, 백병동 등 한국인 제자를 비롯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특히 강석희, 백병동은 동백림 사건 당시 옥중에서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25]

1971년 서독에 귀화한 후,[21]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1982년부터 북한에서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남북 합동 음악회를 일본에 제안하여,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 개최에 기여했다.

2. 4. 사망과 사후

1994년 9월 서울, 부산, 광주광역시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하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을 거절함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26]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사망 후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보내졌으며 북한에서 국가적 차원의 음악회가 열렸다고 한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3. 음악 세계

윤이상은 서양 음악의 기법과 동양적 사상, 한국 전통 음악의 요소를 융합한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12음 기법을 실험한 후, 자신만의 음악적 개성을 발전시켰다. 특히, 한국 전통 음악과 관련된 기법들(예: 글리산도, 피치카토, 포르타멘토, 비브라토)을 사용하여 매우 풍부한 장식 어휘를 구사했다. 윤이상은 이러한 기법들을 통해 "주요음(Haupttonde)"이라 불리는 다성적인 선율을 만들어냈다.[27]

그의 관현악 작품은 동질적인 음향 평면이 명료하게 제시되고 다듬어지는 "음향 작곡"으로 시작되었으며, 《바라》(1960)부터 《서곡》(1973, 개정 1974)까지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후, 비올론첼로 협주곡(1975–76)으로 시작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1981)으로 절정에 이르는, 담론적으로 구성된 기악 협주곡 시대로 이어졌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다양한 5개의 교향곡 시리즈를 작곡했다.

윤이상은 자유와 평화를 추구했으며, 이는 넬리 자크스(Nelly Sachs)의 시를 사용한 고음 바리톤과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관현악곡 《광주여 영원히!》(1981),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의 분단 현실과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표현했다. 윤이상 자신은 종종 자신이 정치적인 작곡가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따랐다고 말했다.[6]

그는 도교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경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으며,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 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독창적인 작곡 기법인 주요음(Haupttonde) 기법과 주요음향(Hauptklangde) 기법을 개척했다.[27]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윤이상은 한국 전통 음악 기법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는 아방가르드 음악 작곡가로서 굳건한 명성을 쌓았다. 그의 매우 정교하고 장식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 기술적, 양식적 어려움은 엄청난 것으로 여겨진다.[6]

3. 1. 주요 작품


  • 오페라
  • * 《류퉁의 꿈》(Der Traum des Liu-Tungde, 1965)
  • * 《나비의 미망인》(Die Witwe des Schmetterlingsde, 1967, 1968)
  • * 《심청》(Sim Tjong) (1971, 1972)
  • **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 공연 작품이다.
  • 성악곡
  • *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Om mani padme humde, 1964)
  • * 혼성 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 *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1987)
  • ** 경련 스님, 박두진, 김남주, 고은 등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칸타타이다.
  • 관현악곡
  • *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藝樂)》(1966)
  • *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
  • * 《교향곡 제1번》(1982, 1983)
  • * 《교향곡 제2번》(1984)
  • * 《교향곡 제3번》(1985)
  • *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1986)
  • *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
  • 협주곡
  •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1976)
  • * 플루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7)
  •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1번》(1981)
  • *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1)
  •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2번》(1983-1986)
  •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3번》(1993)
  • 실내악곡
  • * 실내 앙상블을 위한 《로양》(1962)
  • *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1968)
  • * 현악 사중주 제3번(1959)
  • 독주곡
  • *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 * 오보에를 위한 《피리》(1971)

4. 평가 및 영향

윤이상은 20세기 현대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작곡가로 평가받는다.[3] 동서양 음악의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그의 음악은 한국 전통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3]

그는 서구 아방가르드 음악 기법을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을 융합하는 데 주요한 음악적 관심을 두었다. 12음 기법을 실험한 후, 1960년대 초 후기 연재주의적 "음향 작곡"부터 자신만의 음악적 개성을 발전시켰다. 그의 음악은 글리산도, 피치카토, 포르타멘토, 비브라토와 같은 한국 전통 음악 관련 기법들과 매우 풍부한 장식 어휘를 사용했다. 윤이상이 "Haupttöne"(중심음 또는 주요음)라고 불렀던 다성적인 선율이 필수적이다.

1970년대는 전위음악의 침체기였고 선율의 부활이 여러 곳에서 요구되었기 때문에, 윤이상의 작풍은 그 시대의 흐름에 부합했다. 그는 한국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한 “주요음(主要音)”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12음 기법에서는 모든 음이 동등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윤이상은 “주요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12개 음 중 하나에 무게를 줌으로써 하나의 선율에 개성을 부여했다.

1980년대에는 “전 인류에게 호소하기 위해” 옥타브와 완전 화음도 주저 없이 사용했지만, 작곡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과 같은 만년의 작품에서도 한반도에서 유래한 강렬한 선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자음악은 일절 남기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12음 기법으로 주어진 편성으로, 한계까지 자신의 소리로 써오라"고 지시하는 등 서양 음악의 전통에 대한 존경심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고, 이후 북한과의 관계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북한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김일성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비판을 받았다.[5] 오길남은 윤이상이 자신과 그의 가족을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설득했다고 주장했다.[5]

2006년 노무현 정부는 동백림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윤이상의 정치적 명예 회복을 이루었다.[13]

그의 고향 통영에서는 1999년 '윤이상 음악의 밤'을 시작으로 그를 기리는 음악제가 꾸준히 개최되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 통영국제음악재단을 통해 '통영국제음악제'와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고 있다.[14]
주요 작품

제목연도비고
바라(Bara)1960년소규모 오케스트라
교향적 정경1960년
소리의 콜로이드(Colloïdes sonores)1961년현악기
플럭투아치오넨(Fluktuationen)1964년
광주여, 영원히1981년
옴 마니 파드메 훔1964년
나비의 꿈1968년
나의 조국, 나의 민족이여!1987년한국 시인들
불꽃에 휩싸인 천사1994년


4. 1. 긍정적 평가

윤이상은 20세기 현대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작곡가로 평가받는다.[3] 동서양 음악의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3] 그의 음악은 한국 전통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3] 민주화 운동과 남북 화합에 대한 그의 노력은 음악 외적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

윤이상은 서구 아방가르드 음악 기법을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을 융합하는 데 주요한 음악적 관심을 두었다. 12음 기법을 실험한 후, 1960년대 초 후기 연재주의적 "음향 작곡"부터 자신만의 음악적 개성을 발전시켰다. 그의 음악은 글리산도, 피치카토, 포르타멘토, 비브라토와 같은 한국 전통 음악 관련 기법들과 매우 풍부한 장식 어휘를 사용했다. 윤이상이 "Haupttöne"(중심 또는 주요 음)라고 불렀던 다성적인 선율이 필수적이다.

그의 관현악 작품은 《바라》(1960)부터 《서곡》(1973; 개정 1974)까지 동질적인 음향 평면이 명료하게 제시되고 다듬어지는 "음향 작곡"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비올론첼로 협주곡(1975–76)으로 시작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1981)으로 절정에 이르는, 담론적으로 구성된 기악 협주곡 시대가 이어졌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그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다양한 5개의 교향곡 시리즈를 작곡했다.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넬리 자크스(Nelly Sachs)의 텍스트를 사용한 고음 바리톤과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에 나타난다. 1984년에는 실내악에서 새롭고 친밀한 "음색"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 당시 그의 정치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였다. 그의 고향과 문화에 대한 평생의 관심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관현악곡 《광주여, 영원히》(1981),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그리고 관현악을 위한 《불꽃 속의 천사》와 소프라노, 여자 합창, 5개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1994)를 포함한 여러 작품에 표현되었다. 그러나 윤이상 자신은 종종 자신이 정치적인 작곡가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따랐다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윤이상은 한국 전통 음악 기법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는 아방가르드 음악 작곡가로서 굳건한 명성을 쌓았다. 그의 매우 정교하고 장식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 기술적, 양식적 어려움은 엄청난 것으로 여겨진다.

1970년대는 전위음악의 침체기였고 선율의 부활이 여러 곳에서 요구되었기 때문에, 윤이상의 작풍은 그 시대의 흐름에 완전히 부합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50세를 넘긴 나이였다. “상처 입은 용” 등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 한국의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한 “주요음(主要音)”이라 불리는 기법이다. 12음 기법에서는 모든 음이 동등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동일하게 유지된다. 윤이상은 여기에 “주요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12개 음 중 하나에 무게를 줌으로써 하나의 선율에 개성을 부여했다.

1980년대에는 “전 인류에게 호소하기 위해” 옥타브와 완전 화음도 주저 없이 사용했지만, 작곡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과 같은 죽기 직전의 작품에서도 한반도에서 유래한 강렬한 선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미학적인 이유로 전자음악은 일절 남기지 않았다. 원래 현대음악의 전위적인 측면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제자들에게는 "12음 기법으로 주어진 편성으로, 한계까지 자신의 소리로 써오라"고 지시하는 등 서양 음악의 전통에 대한 존경심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1970년대 무렵, 전위 운동의 침체가 보이기 시작하자 "확실히 신선함을 추구하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작가성은 회복되었으므로 나에게는 편리했다"고 말했다. 그 후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 서양 전통을 의식한 걸작들을 잇달아 발표했고, 명성을 확립한 것은 1980년대이며, 60세를 넘어서 대작곡가로 인정받은 점이 두드러진다.

4. 2. 부정적 평가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고, 이후 북한과의 관계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그는 북한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김일성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비판을 받았다.[5] 오길남은 윤이상이 자신과 그의 가족을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설득했다고 주장했다.[5]

또한, 그의 음악이 난해하다는 평가도 있다. 1970년대는 전위음악의 침체기였고, 윤이상은 한국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주요음(主要音)"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였으나, 일각에서는 여전히 그의 음악이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4. 3. 영향

윤이상의 음악은 서구 아방가르드 음악 기법과 한국 전통 음악의 융합을 통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글리산도, 피치카토, 포르타멘토, 비브라토 등 한국 전통 음악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활용하고, 다성적인 선율을 중시하는 그의 음악은 "음향 작곡"이라는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했다.[23]

그의 음악은 유럽과 미국에서 아방가르드 음악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곡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연주되고 있으며, 특히 1982년에는 하인츠 홀리거, 우르술라 홀리거, 프랜시스 트래비스 등이 서울에서 윤이상의 작품으로 구성된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윤이상은 김일성과의 대담 영상이 남아있을 정도로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11] 1994년에는 모든 정치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12]

2006년 노무현 정부는 동베를린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윤이상의 정치적 명예 회복을 이루었다.[13]

그의 고향 통영에서는 1999년 '윤이상 음악의 밤'을 시작으로 그를 기리는 음악제가 꾸준히 개최되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 통영국제음악재단을 통해 '통영국제음악제'와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고 있다.[14]
주요 작품

제목연도비고
바라(Bara)1960년소규모 오케스트라
교향적 정경1960년
소리의 콜로이드(Colloïdes sonores)1961년현악기
플럭투아치오넨(Fluktuationen)1964년
광주여, 영원히1981년
옴 마니 파드메 훔1964년
나비의 꿈1968년
나의 조국, 나의 민족이여!1987년한국 시인들
불꽃에 휩싸인 천사1994년


5. 기념 사업

대한민국에서는 윤이상 평화재단이 운영되고 있으며, 통영시에서는 통영국제음악제와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개최되고 있다.[14]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생가터에는 윤이상 기념관과 윤이상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윤이상관현악단이 활동하고 있으며, 1984년 9월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매년 윤이상음악회가 개최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국제윤이상협회가 1996년 2월 베를린에서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6. 수상 내역


  • 서울시 문화상한국어 (1956)[6]
  •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회원 (1968), 공로상 (1992)[8]
  •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원 (1973)[6]
  • Kultur- und Wissenschaftspreis der Stadt Kielde (키일시 문화과학상) (1969)[7]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훈장 사령관 십자장 (1988)[8]
  • 괴테 메달 (19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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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Grove Yun, Isang
[2] 웹사이트 Isang Yun: Biography https://boosey.com/p[...] 2021-09-23
[3] 웹사이트 Ein grenzüberschreitender Nomade https://www.goethe.d[...] 2017-12-01
[4] 서적 The Oboe Works of Isang Yun https://books.google[...] 2009
[5] 뉴스 Tongyeong split over composer Yun https://www.koreatim[...] 2011-10-31
[6] 웹사이트 Yun https://www.adk.de/d[...]
[7] 웹사이트 Träger*innen des Kieler Kultur- und Wissenschaftspreises https://www.kiel.de/[...]
[8] 웹사이트 Isang Yun Timeline https://boosey.com/p[...] 2021-09-23
[9] 웹사이트 Boosey & Hawkes Composers, Classical Music and Jazz Repertoire https://boosey.com/c[...] 2021-09-23
[10] 뉴스 (12)「尹伊桑」は何者? 北の文化工作員か 統一の旗手か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22-01-12
[11] 문서 북朝鮮に行ったとき金日成と一緒の写真を気づかぬうちに撮られたがそれは宣伝用で、共産主義に同調したわけではない、と尹は『傷ついた龍』で述べている(p181-183)。
[12] 문서 前年に北朝鮮初の弾道ミサイル「ノドン」が日本海方向へ打ち上げられており、これに配慮した発言である。
[13] 간행물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위원회 보고서 총론 (I) http://news.chosun.c[...] 국가정보원 2007
[14] 웹사이트 통영국제음악재단 소개 http://www.timf.org/[...]
[15] 웹사이트 Yun, Isang: String Quartet No.1 (1955) 35' https://www.boosey.c[...] www.boosey.com 2018-09-14
[16] 문서 サントリーホール国際作曲委嘱シリーズ委嘱作品
[17] 웹사이트 윤이상 평화재단 공지사항 http://www.yunisang.[...] 2015-06-09
[18] 서적 Der verwundete Drache : Dialog über Leben u. Werk d. Komponisten https://ci.nii.ac.jp[...] S. Fischer 1977
[19]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オンライン National Diet Library Online https://ndlonline.nd[...]
[20]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オンライン National Diet Library Online https://ndlonline.nd[...]
[21] 웹사이트 Isang Yun http://www.boosey.co[...]
[22] 웹인용 ‘윤이상의 옥중 제자’ 강석희 명예교수 별세 http://www.hani.co.k[...] 2020-08-17
[23] 웹인용 상처입은 용 윤이상 http://www.changgo.c[...] 2004-02-06
[24] 웹인용 통영을 빛낸 예술가 http://art.tongyeong[...] 2015-10-29
[25] 웹인용 ‘윤이상의 옥중 제자’ 강석희 명예교수 별세 http://www.hani.co.k[...] 2020-08-17
[26] 웹인용 윤이상 http://columnist.org[...] 대한매일 2001-02-17
[27] 웹인용 TIMF 통영국제음악재단 https://timf.org/kr/[...]
[28] 뉴스 윤이상이 받았던 `괴테메달`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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