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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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천보 습격은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6사가 만주국 국경 근처의 조선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이다. 김일성이 이끄는 것으로 알려진 이 습격으로 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등이 공격받았고, 일본인과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의 중요한 사건으로 북한에서 널리 선전되었으며, 김일성의 우상화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규모와 김일성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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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6월 - 1937년 6월 8일 일식
1937년 6월 8일 일식은 영국령 길버트 및 엘리스 제도와 페루에서 개기일식으로 관측되었으며, 7분 이상 지속된 긴 개기 지속 시간과 라디오 방송을 통한 관측 상황 전달로 기억되는 현상이다.
보천보 습격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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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명칭 | 보천보 전투 |
관련 분쟁 | 일본의 한국 통치 제2차 중일 전쟁 |
시기 | 1937년 6월 4일 |
장소 |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현재의 북한 량강도) |
결과 | 항일 세력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동북항일연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김일성 최현 박달 박금철 |
지휘관 2 | 남지로 |
부대 규모 | |
규모 1 | 150–200 |
규모 2 | 33 |
사상자 | |
사상자 1 | 20명 사망 |
사상자 2 | 민간인 2명 사망, 경찰 7명 사망 |
관련 정보 | |
기타 | '' '' '' '' |
2. 전투의 배경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 지구에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2세 딸)이 사망했다. 6월 5일에는 30명의 경찰 추격대가 파견되어 동북항일연군과 충돌,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 추격대 중에서는 7명이 사망, 14명이 부상당했다. 이때 불에 타 없어진 재산 피해액은 5만엔이라고 보도되었다.[33]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지낸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여 북한 1인 체제를 만들기 위한 날조라고 비판했다.[34]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보천보 습격으로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2세 딸)이 사망했고, 조국광복회 조직원 739명이 검거되었으며,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35][36][37]
- 보천보 사건 당시 신문 기사 보기 Wikimedia Commons
2. 1. 일제강점기 조선의 상황
1937년 6월,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2세 딸)이 사망했다.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소한 총피해액은 5만엔이라고 보도되었다.[33]
일본은 이 사건으로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2세 딸)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35][36][37]
2. 2. 동북항일연군의 결성과 활동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 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으며,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 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다. 일본 경찰 추격대 30명 중에서는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으며,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JPY이라고 밝혔다.[33]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 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34]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35][36][37]
2. 3. 조국광복회와의 연계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 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하였고,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35][36][37]
3. 전투의 전개
1937년 6월 5일, 혜산 경찰서장 시오야 다케오 경시는 비상 소집을 실시하고, 오카와 슈이치 경부가 이끄는 경찰관 27명(경기관총 2정, 실탄 1000발, 각자 실탄 80발 장비)이 자동차로 출발했다. 이어 서장과 서원 11명, 도립 병원 의관 2명, 전신 공작 3명도 자동차로 출발했다. 오카와 부대는 도중에 주재원 6명을 추가하고 가림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이동 중, 맞은편 고지에서 총격을 받았다. 가림 주재소에 도착한 시오야 서장도 총성을 듣고 증원군을 보냈으나, 자신은 이미 약탈당한 보천보에 도착했다. 오카와 부대는 30분간 교전 후 침묵했다.
날이 밝은 후, 경찰대는 구스미 미즈에 언덕길에서 매복 중이던 제6사로부터 경기관총 사격과 투석 공격을 받았다. 오전 11시, 제6사의 돌격으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나팔 신호와 함께 제6사는 갑자기 철수했다. 증원 부대가 후방을 차단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18]
이 전투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으며, 경기관총 1정, 소총 6정, 권총 1정, 제복 2벌을 빼앗겼다. 이후 다른 부대와 합류하여 부상자를 수용하고 오후 7시에 철수했다. 제6사의 피해는 사망 20명, 부상 30명 정도로 추정된다.[37]
3. 1. 보천보 습격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조선친선협회(Korean Friendship Association)에 따르면, 이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인에게 전례 없는 파시즘적 폭정을 자행하던" 시기에 일본의 한국 강점의 잔혹성에 대한 보복이었다.[5]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다.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고, 전소한 총피해액은 5만엔이라고 밝혔다.[33]
북한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김일성이 이끄는 약 150~200명의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소규모 부대가 1937년 6월 3일 압록강을 건너 관창 언덕에 도착했다. 밤 10시에 김일성이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경찰서, 우체국, 임업 사무소, 지방 초등학교, 소방서가 파괴되었다.[1][5] 김일성은 지역 주민들에게서 4천엔을 갈취하고, 1.6만엔 상당의 피해를 입혔다. 그는 마을을 점령했지만 불과 몇 시간 또는 하루 동안 점령한 후 만주로 후퇴했다.[1]
전투 이후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한국인들이 "성스러운 항일 전쟁에 하나 되어 나설 것"을 언급했다.[5]
金日成|김일성중국어은 자신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보천보 전투는 제국주의 일본이 쓰레기처럼 분쇄되고 불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국 보천보의 밤하늘을 뒤덮은 불길은 어둠 속에 파묻혔던 조선 해방의 새벽을 알렸다.
> 보천보 전투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조선 인민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싸우면 민족 독립과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역사적인 전투였다.
하지만, 일본 신문과 같은 일부 동시대 기록은 반군이 실제로는 최현이 이끌었다고 주장한다.[2]
1937년 6월 4일 오후 10시경, 만주국 국경 부근에 있는 조선의 함경남도 (현재는 량강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구 명칭, 보천보)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김일성이 이끌었다고 여겨지는 부대)를 자칭하는 공산주의자 무장 집단이 습격했다.
제6사 90명은 6개 대로 나뉘어 보천보 근처까지 침입한 후, 조선령 갑산군 내에서 박달 등에 의해 조직된 '조국광복회' 소속 갑산공작위원회의 호응 공작원 80명과 합류했다. 16개 대로 나뉘어 오후 10시에 면(마을) 보전 주재소에 대한 습격을 시작했다. 별동대는 면사무소, 시험장, 영림서, 산림보호구역 사무소, 소방서를 습격했다.
주재소에는 7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근무자는 5명(그 중 2명이 조선인)이었으며, 습격 당일 당직 근무는 망루와 소내 근무 2명이었다. 오후 10시, 경비 전화선을 절단한 후 수십 명이 경기관총 2정으로 총격을 가해 사무실 숙소에 살포했다. 경찰관은 응전할 틈도 없이 전원이 퇴피하여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정 순경의 어린 아이 1명이 어머니와 함께 피난 중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조선인 경찰관 1명이 부상당했다. 제6사는 주재소에서 총기와 탄약을 빼앗았다. 경찰관 1명이 가림 주재소로 도망쳐 혜산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이후 제6사는 면사무소, 우체국 건물, 서류 등에 방화했다. 보통학교도 불에 탔다. 이어서 상점 및 주택도 습격하여, 지역 주민으로부터 현금 4천엔(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6000만엔 전후) 및 면 등 의류 물품을 빼앗았다.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지만, 요리점 경영자였던 일본인 1명이 거실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습격대는 4종류의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습격으로 인한 피해 총액은 당초 3만엔~5만엔[16]으로 보도되었지만, 경찰청 경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15692JPY(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2.4억엔 전후)으로 결론지어졌다.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 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34]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35][36][37]
3. 2. 일본 경찰 및 군경과의 교전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 관공서와 산림보호구를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이 과정에서 민간인 2명(일본인 요리사와 일본 순사부장의 2세 딸)이 사망했다.[33][35][36][37]6월 5일, 일본 경찰은 추격대를 파견하여 동북항일연군과 교전을 벌였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교전으로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 추격대 30명 중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33] 전소된 총 피해액은 50000JPY이었다.[33]
조선친선협회(Korean Friendship Association)에 따르면, 이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인에게 전례 없는 파시즘적 폭정을 자행하던" 시기에 일본의 한국 강점의 잔혹성에 대한 보복이었다.[5]
1937년 6월 4일 오후 10시경, 동북항일연군 제6사는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했다. 당시 주재소에는 7명의 경찰관이 있었지만, 근무자는 5명(그 중 2명이 조선인)이었고, 당일 당직 근무는 망루와 소내 근무 2명뿐이었다.[37] 오후 10시, 경비 전화선을 절단한 후 수십 명이 경기관총 2정으로 총격을 가해 사무실 숙소에 살포했다. 경찰관들은 응전할 틈도 없이 전원이 퇴피하여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정 순경의 어린 아이 1명이 어머니와 함께 피난 중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조선인 경찰관 1명이 부상당했다. 제6사는 주재소에서 총기와 탄약을 빼앗았다.[37]
이후 제6사는 면사무소, 우체국 건물, 서류 등에 방화했고, 보통학교도 불탔다. 이어서 상점 및 주택도 습격하여 지역 주민으로부터 현금 4000JPY(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6000만엔 전후) 및 면 등 의류 물품을 빼앗았다.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지만, 요리점 경영자였던 일본인 1명이 거실에서 살해되었다.
습격으로 인한 피해 총액은 15692JPY(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2.4억엔 전후)이었다.
오후 11시 25분, 혜산 경찰서 서장 시오야 다케오 경시는 비상 소집을 실시하고, 다음날인 6월 5일 0시 5분, 오카와 슈이치 경부가 이끄는 서원 27명이 자동차로 출발했다.[37] 경기관총 2정, 실탄 1000발, 각원 실탄 80발을 장비했다.
오카와 부대는 맞은편 고지에서 총격을 받았고, 30분간 교전을 계속했지만, 맞은편 고지는 침묵했다. 오전 8시쯤, 구스미 미즈에의 언덕길에서 매복하고 있던 제6사로부터 경기관총에 의한 총격과 투석을 받아 큰 손해를 입었다. 오전 11시, 제6사는 돌격을 시작하여 백병전이 되었지만, 산 위에서의 나팔 신호에 의해 갑자기 철수했다.[37]
경찰관대는 사망자 7명・부상자 14명을 냈다. 또한, 경기관총 1정, 소총 6정, 권총 1정, 제복 2벌이 빼앗겼다.[37] 제6사의 손해는 사망자 20명, 부상자 30명 정도로 추정되었다.[37]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조선 영내에 알려졌고, 일본 측 관헌은 2000JPY, 나중에는 20000JPY(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3억엔 전후)의 현상금을 걸었다.
3. 3. 민간인 피해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는 일본 요릿집 주인과 일본 순사부장의 2세 딸이었다.[33] 이 사건으로 조국광복회 조직원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35][36][37]동북항일연군의 습격으로 보천보 지역 주민들은 현금 4000JPY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6000만 엔 전후) 및 면 등 의류, 물품을 빼앗겼다.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지만, 요리점 경영자였던 일본인 1명이 거실에서 살해되었다.[35]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조국광복회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 관공서와 산림보호구를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이 사건으로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은 조선 내에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 측 관헌은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겨 처음에는 2000엔, 나중에는 2만 엔의 현상금을 걸었다.
당시 혜산선 철도가 개통을 앞두고 있었고, 혜산진은 그 종착역이 될 도시였다. 보천보는 작은 면(마을)이었지만, 근처에 혜산진이 있다는 점에서 습격은 일본 측에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습격 후, 공포로 인해 주민들은 잇따라 이 지역을 떠나 보천보 주변은 과소화되었다.
현재 이 일대는 북한 정부에 의해 "보천보 혁명 전적지"로 정비되어, 보천보 혁명 박물관, 보천 마을사무소, 우체국, 소방회관, 탄흔이 남은 경찰관 주재소 등이 복원되어 있다. 조선인민군과 학생들은 매년 혁명 전적지 답사 행군을 실시하며, 이곳은 백두산 지구의 혁명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6월 5일, 혜산 경찰서장 시오야 다케오 경시는 비상 소집을 실시하고 경찰대를 파견했다. 오카와 슈이치 경부가 이끄는 부대는 가림에서 상류로 향하던 중 총격을 받았고, 시오야 서장도 총성을 듣고 증원 부대를 보냈지만 이미 약탈이 끝난 후였다. 오카와 부대는 30분간 교전을 계속했지만, 맞은편 고지는 침묵했다. 이후 구스미 미즈산 정상에서 매복하고 있던 제6사로부터 총격과 투석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경찰대는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을 냈고, 경기관총 1정, 소총 6정, 권총 1정, 제복 2벌을 빼앗겼다. 제6사의 피해는 사망자 20명, 부상자 30명 정도로 추정되었다.[18][19][20]
4. 1. 국내외의 반향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는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31][32]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으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2세 딸)이 사망했다.[33] 또한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일본 경찰 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 경찰 추격대 30명 중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소된 총 피해액은 5만엔이었다.[33]이 사건으로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35][36][37]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 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34]
이 전투 소식은 소련, 중국, 일본, 프랑스를 포함한 전 세계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7]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동료와 일본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일본 제국 육군의 추적으로 1940년 소련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김일성은 대일 승리의 날(1945년 8월 15일)에 고국으로 돌아와 소련의 도움으로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당 북부 파벌의 수장이 되었고, 보천보 영웅으로서의 명성은 그가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북한 정부는 보천보 전투의 중요성과 김일성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2003년 한국 역사 교과서에 이 전투가 처음 실렸으며, 김일성의 항일 노력을 비교적 신중하게 다루었다.
보천보 전자 중주단은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따왔다.
4. 2. 조국광복회 조직의 궤멸
일본은 보천보 습격으로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 딸 2세 여아)이 사망했으며, 이 사건으로 조국광복회 조직원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35][36][37]4. 3. 김일성의 역할 논란
1937년 11월 18일 경성일보에는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당시 36세)이 만주국군 토벌대에 사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보천보 습격의 공범으로 여겨지는 박금철, 박달 (후일 조선로동당 갑산파의 주요 인물) 등은 체포 당시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 당시 36세였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모순과 증언을 바탕으로,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과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 되는 김일성(당시 25세)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이명영, 박갑동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을 지도하던 중국 공산당 측 인물들의 증언과 기타 중국어 자료가 공개되면서,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과 소련으로 피신한 김일성(김성주)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그러나 항일 운동가에 대한 기술에 차이가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며, 정보 혼란을 목적으로 하거나 게릴라 상호 간 정보 차단으로 인해 체포된 게릴라가 잘못된 진술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점, 최종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취조와 재판 과정에서 다른 정보나 진술을 배제하고 "본명 김성주, 당 29년"이라고 확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와다 하루키는 보천보 습격 당시의 김일성과 후일의 김일성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서대숙, 김일성#항일 빨치산 활동 및 김일성#주석 참조).
5. 전투에 대한 다양한 평가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는 보천보 사건을 자세히 보도했다.[31][32] 당시 기사에 따르면, 보천보 습격으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와 일본 순사부장의 2세 딸)이 사망했고, 이후 일본 경찰 추격대와 동북항일연군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5만엔이었다.[33]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지낸 이상조는 중공군의 지시를 받았으나 김일성 부대를 찾지 못했으며, 북한이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날조라고 비판했다.[34]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35][36][37]
시게무라 토모아키는 보천보 전투가 북한의 선전보다 훨씬 소규모였으며, 동북항일연군도 중국 항일군과의 연합군이었다고 지적한다.[25]
이기동은 보천보 전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객관적인 위치를 인식해야 하며, 사건 자체가 보잘것없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사건이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하부 조직이었던 김일성이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일한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같은 순수한 한민족의 독립운동과는 차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6]
5. 1. 북한의 시각
북한에서는 보천보 습격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며,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선전한다.[2] 북한은 이 전투가 무장 투쟁을 통해 민족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8]북한의 학교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이 이끈 일본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2] 북한 정권은 이 사건을 통해 김일성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주민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2]
북한은 김일성이 귀국하여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북조선 노동당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보천보의 영웅으로서의 명성이 인정을 받고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선전한다.[7] 이러한 북한의 관점은 연구자 및 인권 운동가 가토 켄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는 김일성의 정당성이 보천보 전투로 상징되는 항일 투쟁 선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2]
그러나, 시게무라 토모아키는 보천보 전투가 북한의 선전보다 훨씬 소규모였으며, 동북항일연군도 중국 항일군과의 연합군이었다고 지적한다.[25] 이기동은 보천보 전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객관적인 위치를 인식해야 하며, 사건 자체가 보잘것없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사건이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하부 조직이었던 김일성이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일한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같은 순수한 한민족의 독립운동과는 차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6]
5. 2. 대한민국의 시각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는 보천보 사건을 자세히 보도했다.[31][32]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다.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 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 추격대 30명 중 7명이 사망, 14명이 부상당했다. 전소한 총피해액은 5만엔이었다.[33]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 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34]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고,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다.[35][36][37]
이 전투는 2003년 처음으로 한국 역사 교과서에 실렸으며, 김일성의 항일 노력을 비교적 신중한 서술로 다루었다. 이는 학생들이 북한 정권을 우상화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한국 역사 교육이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는 신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11]
이기동은 "보천보 전투는 사건 자체가 보잘것없다. 당시 김일성의 조직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하부 조직이었다. 중국이 자신들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조선인인 김일성에게 일을 맡기고 분담한 것이다", "이 사건을 크게 기술할 필요가 있는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같은 순수한 한민족의 독립운동 조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독립운동과는 차별화해야 한다. 한국을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에 의한 사건을 거대한 사진까지 곁들여 소개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한국에 수치를 주려는 허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을 집필한 대학교수는 한국에서 상위 5%에 들어가는 특권층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26]
5. 3. 일본의 시각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으며,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 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일본 경찰 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으며,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JPY이라고 밝혔다.[33] 일본은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35][36][37]시게무라 토모아키는 보천보 전투는 북한이 선전하는 것보다 훨씬 소규모였으며, 동북항일연군도 중국 항일군과의 연합군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25]
이기동은 "보천보 전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차지하는 객관적인 위치를 인식해야 한다. 보천보 전투는 사건 자체가 보잘것없다. 당시 김일성의 조직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하부 조직이었다. 중국이 자신들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조선인인 김일성에게 일을 맡기고 분담한 것이다", "이 사건을 크게 기술할 필요가 있는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같은 순수한 한민족의 독립운동 조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독립운동과는 차별화해야 한다. 한국을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에 의한 사건을 거대한 사진까지 곁들여 소개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한국에 수치를 주려는 허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을 집필한 대학교수는 한국에서 상위 5%에 들어가는 특권층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26]
6. 역사적 의의와 교훈
보천보 습격은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가 백두산 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들은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1][32]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요리사, 일본 순사부장의 2세 여아)이 사망했다.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 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 추격대 30명 중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JPY이었다.[33]
이 사건으로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35][36][37] 한편,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 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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