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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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트피플은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해로를 통해 탈출한 난민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1975년 공산주의 세력이 인도차이나를 장악하면서 발생했으며, 정치적 박해, 경제적 어려움, 중월 전쟁 등으로 인해 탈출 시도가 증가했다. 보트피플은 폭풍, 질병, 해적의 위협에 시달렸으며, 국제 사회는 난민 캠프를 설치하고 재정착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대응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보트피플의 수는 감소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의 난민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보트피플의 고통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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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교 - 프리퀀트 윈드 작전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 남베트남에서 미국 시민과 우방국 국민을 대피시키기 위해 미국이 실행한 군사 작전으로, 헬기 대피를 주된 방식으로 떤선녓 공군 기지 공격 이후 진행되었으며 미 해군 제76기동부대와 에어 아메리카 헬리콥터가 동원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
보트피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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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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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보트피플 베트남 난민 |
베트남어 명칭 | Thuyền nhân Việt Nam (트웬 년 비엣 남) |
배경 | |
원인 | 베트남 전쟁 이후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책 변화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 (특히 화교) |
주요 출발 시기 | 197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
여정 | |
주요 탈출 경로 | 남중국해를 통한 주변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홍콩) |
위험 요소 | 해적, 폭풍, 식량 및 물 부족, 선박 고장 |
선박 유형 | 어선, 소형 화물선 등 |
난민 수용 | |
주요 수용 국가 |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독일 기타 서유럽 국가 |
난민 캠프 |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
결과 및 영향 | |
정착 | 수용 국가에서의 정착 및 사회 통합 |
문화적 영향 |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 및 기존 문화 유지 |
경제적 영향 | 노동 시장 참여 및 경제 기여 |
인도적 지원 | 국제 사회의 난민 지원 노력 |
추가 정보 | |
관련 용어 | 인도차이나 난민 |
참고 자료 | 창, 아이리스 (1999).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뉴욕: 기본서적. 브라운, 데이비드 (2013년 7월 7일). "Saigon's Chinese—going, going, gone". *Asia Sentinel*. |
2. 역사적 배경
'보트피플'은 본래 배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나 배를 이용해 비공식적으로 국외로 탈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들은 주로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목적지로 삼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이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보트피플이 급증하면서, 이 용어는 주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배를 타고 탈출하는 난민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보트피플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이 곧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주의 체제로 통일되자, 통일 베트남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 정부에서 일했던 정치인, 군인, 관료, 교사 등을 '반동분자'로 규정하여 탄압했다.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절 프랑스 정부에 협력했던 이들이나 부유층 역시 탄압 대상이 되었다. 북베트남 주도로 통일된 정부는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고 경제 활동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주요 당직과 행정직은 북베트남 공산당원이 독점했다. 종교 활동도 억압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탄압과 인권 유린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감행했다.[75]
특히 1978년부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의 국경 분쟁으로 인해 베트남 내 화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화교들이 보트피플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75]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3년부터 1988년 사이에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위험한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트피플의 수는 베트남 통일 직후인 1975년에서 1978년 사이에 정점에 달했으며, 이후 점차 감소했다. 1988년 이후 베트남 정부가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한 경제 개혁 정책인 도이 머이 정책(Đổi mới)을 추진하면서 경제가 안정되자 보트피플의 발생은 크게 줄어들었다.
보트피플 현상은 베트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역시 공산화되면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라오스에서는 구 라오스 왕국 정권 하에서 활동했던 우익 인사들이 숙청을 피해 탈출하여 보트피플이나 랜드피플(육로 탈출 난민)이 되었다.[76]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의 대량 학살을 피해 많은 이들이 보트피플 또는 랜드피플이 되었다.
2. 1. 베트남 전쟁과 공산화
베트남 전쟁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베트남 인민군에 함락되면서 끝났다. 전쟁 직후, 미국이나 구 남베트남 정부와 관련이 깊었던 13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들이 급히 베트남을 떠났다. 이들 대부분은 뉴 라이프 작전과 뉴 어라이벌 작전을 통해 미국에 재정착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항공기와 선박으로 베트남 난민들을 수송하여 괌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이후 미국 본토의 지정된 장소로 이주시켰다.[3] 같은 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역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면서, 이 세 나라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난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4] 1975년, 당시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인도차이나 이주 및 난민 지원법에 서명하여,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난민 약 13만 명에게 교통, 의료, 숙소 등을 지원하기 위해 약 4.55억달러의 예산을 배정했다.[5]사이공 함락 이후에도 베트남을 떠나는 사람들의 수는 1978년 중반까지는 비교적 적었으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난민 위기로 번졌다. 베트남의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베트남, 중국, 캄보디아 간의 전쟁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또한, 통일 베트남 정부는 구 남베트남 정부 및 군대와 관련된 사람들을 최대 30만 명까지 재교육 캠프로 보냈다.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고문, 굶주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6] 뿐만 아니라, 주로 도시에 거주하던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농지를 개간하고 정글을 개척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하는 "신 경제 구역"으로 강제로 보내졌다.[7]


북베트남 주도로 통일된 베트남에서는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고 집단화하는 등 경제 활동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었고, 주요 당 조직과 행정 조직은 북쪽 출신 공산당원들이 거의 독점했다. 종교 활동은 표면적으로 허용되었으나, 공산주의 유물사관에 따라 종교인들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가 '반동분자'로 규정한 과거 남베트남의 정치인, 군인, 관료, 교사 등 이른바 '특권 계층'은 수용소에서 사상 개조를 받거나 평생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 유린이 발생했다.
특히 베트남 내 화교인 화족에 대한 억압이 심했다.[8][9]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결국 중월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에서, 베트남 정부는 화족을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간주했다.[10] 또한 화족은 과거 남베트남 소매 상업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공산 정부는 이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상업 활동을 제한하며 사업체를 몰수했다. 1978년 5월부터 화족들은 대규모로 베트남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향했다. 중월 전쟁의 여파로 1979년 말까지 약 25만 명의 화족이 중국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며, 수만 명은 배를 타고 탈출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홍콩 등지로 흩어졌다.[11]
베트남 정부와 관리들은 난민 유출 과정에서 이익을 얻기도 했다. 특히 부유한 화족의 경우, 베트남을 떠나기 위한 출국 허가서, 서류, 그리고 종종 낡은 배를 구하는 대가로 성인 1인당 약 3,000달러, 어린이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대가는 주로 금괴로 지불되었다. 반면, 돈이 없는 많은 베트남인들은 서류 없이 허술한 배를 타고 몰래 탈출을 시도했으며, 이들은 항해 중 해적의 습격이나 폭풍우에 가장 취약했다.[12]
베트남 시민들이 국외로 탈출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대부분 밤에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정부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주기도 했다.[13] 어떤 사람들은 수백 명을 태울 수 있는 큰 배의 자리를 돈으로 샀고, 다른 이들은 어선(베트남에서 흔한 생업 수단)을 이용해 탈출했다. 한 가지 방법으로는, 위조 신분증을 가진 사이공 출신의 중산층 난민들이 약 1100km를 육로로 이동하여 다낭에 도착한 뒤, 안전 가옥에서 며칠간 숨어 지내다가 어선이나 트롤선에 옮겨 타 공해상으로 나가는 방식이 있었다. 이러한 탈출 계획은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리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겨우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13]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탄압과 인권 유린의 결과로 1973년부터 1988년 사이에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하려 시도했다. 보트피플은 1973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베트남 통일 직후인 1975년에서 1978년 사이에 그 수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이후 점차 감소했다. 1988년 이후 베트남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경제 개혁 정책인 도이 머이 정책(Đổi mới)을 추진하면서 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보트피플의 발생은 크게 줄어들었다.
보트피플은 베트남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공산화된 후에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라오스에서는 구 라오스 왕국 정권 하에서 파테트라오( ປະເທດລາວ|파테트라오lo )를 탄압했던 우익 인사들이 숙청당하면서 많은 이들이 육로나 해로를 통해 탈출하여 랜드피플 또는 보트피플이 되었다.[76]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민주 캄푸치아)이 극단적인 마오이즘에 기반하여 지식인, 부유층, 중산층, 상공인, 구 정권 관리 등 소위 '반동분자'들을 대량 학살(킬링필드)하면서, 이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보트피플이 되었다.
2. 2. 인도차이나 난민 위기
베트남 전쟁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베트남 인민군에 함락되면서 종전되었다. 이후 미국 또는 구 남베트남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13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들이 뉴 라이프 작전과 뉴 어라이벌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우선 대피했다.[3] 미국 정부는 이들을 항공기와 선박으로 괌에 임시 정착시킨 후 미국 본토 내 지정된 거주지로 이동시켰다. 같은 해 공산주의 세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장악하면서, 이들 세 나라 모두에서 난민이 꾸준히 발생하기 시작했다.[4] 1975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인도차이나 이주 및 난민 지원법에 서명하여 약 4.55억달러의 예산을 책정,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난민 13만 명에게 교통, 의료, 숙소 등을 지원했다.[5]사이공 함락 이후 베트남을 떠나는 사람의 수는 1978년 중반까지 비교적 적었으나, 경제적 어려움과 베트남, 중국, 캄보디아 간의 전쟁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난민 수가 급증했다. 특히 북베트남 주도의 통일 이후 생산수단 국유화, 집단화 등 강력한 경제 통제가 시행되었고, 주요 당 조직과 행정 조직은 북쪽 공산당원이 거의 독점했다. 구 남베트남 정부 및 군대와 관련된 최대 30만 명이 재교육 캠프로 보내져 고문, 기아, 질병 속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6] 대부분 도시 거주자인 100만 명 이상이 농지를 개간하고 생존해야 하는 "신 경제 구역"으로 사실상 강제 이주되었다.[7] 종교 활동은 표면적으로 허용되었으나, 공산주의 유물사관에 따라 종교인들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 심각한 인권 유린으로 인해 1973년부터 1988년 사이에 약 100만 명의 베트남인이 해로를 통한 탈출을 시도했다.
억압은 베트남 내 화교인 화족에게 특히 심했다.[8][9] 베트남과 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결국 1979년 중국의 베트남 침공으로 이어지면서, 베트남 정부는 화족을 안보 위협으로 간주했다.[10] 또한 남베트남 소매 무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던 화족은 공산 정부로부터 과도한 세금 부과, 무역 제한, 사업체 몰수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8년 5월, 화족은 처음에는 육로로 중국으로 베트남을 대거 떠나기 시작했다. 중월전쟁의 결과로 1979년 말까지 25만 명의 화족이 중국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수만 명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홍콩에 흩어져 있는 베트남 보트피플에 포함되었다.[11] 베트남 정부와 관리들은 특히 부유한 화족에게 출국 허가, 서류, 그리고 종종 낡은 배나 선박을 얻는 대가로 금품(성인의 경우 금괴로 약 3000USD, 어린이의 경우 절반)을 받아 이익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지불은 종종 금괴 형태로 이루어졌다.[12]
베트남뿐만 아니라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공산화된 후에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라오스에서는 구 라오스 왕국 정권 하에서 파테트라오(ປະເທດລາວlo)를 탄압했던 우익 인사들이 숙청당하면서 보트피플이나 랜드피플(육로 탈출 난민)이 되었다.[76] 캄보디아의 경우,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 정권인 민주 캄푸치아가 마오이즘을 기치로 내걸고 부유층, 중산층, 상공업자, 지식인 등 소위 반동분자들을 대량 학살하면서 많은 이들이 보트피플 또는 랜드피플이 되었다.
베트남 시민들이 국외로 탈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대부분은 비밀리에 밤에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 포함되었다.[13] 어떤 이들은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대형 보트에 자리를 샀고, 다른 이들은 어선(베트남에서 흔한 직업)을 타고 떠났다. 한 가지 방법은 위조 신분증을 소지한 사이공 출신의 중산층 난민들이 약 1100km를 도로로 이동하여 다낭으로 간 뒤, 어선이나 트롤선을 타고 공해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탈출 계획에는 여러 달 또는 심지어 여러 해가 걸렸으며, 시도 과정에서 자원이 고갈되고 실패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13] 서류 없이 엉성한 배를 타고 몰래 조국을 떠난 더 가난한 많은 베트남인들은 해상에서 해적과 폭풍에 가장 취약했다.[12]
보트피플이 쏟아져 나오자, 국제적 지원을 받은 인접 국가들은 해안과 작고 고립된 섬에 난민 캠프를 설치했다. 1979년 초 보트피플의 수가 매달 수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그들의 수는 지역 정부, 유엔 난민 기구(UNHCR), 그리고 인도주의 단체가 음식, 물, 주택, 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섰다. 가장 큰 난민 캠프 두 곳은 말레이시아의 비동 섬과 인도네시아의 갈랑 난민 캠프였다.
- 비동 섬 (Pulau Bidong, 말레이시아): 1978년 8월 말레이시아의 주요 난민 캠프로 지정되었다.[30] 말레이시아 정부는 도착하는 난민들을 모두 이 섬으로 보냈다. 면적이 약 2.59km2(260ha) 미만인 비동은 본래 4,500명의 난민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1979년 6월까지 4만 명 이상의 난민이 453척의 배로 도착하여 극심한 과밀 상태에 놓였다.[31] 난민들은 배의 목재, 비닐 시트, 납작해진 깡통, 야자 잎으로 조잡한 쉼터를 만들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섬이었기에 기반 시설이 전무하여, 식수는 1인당 하루 1gal로 배급되었고, 음식 배급은 주로 쌀, 통조림 고기 및 채소였다. 혼잡한 환경에서의 위생 문제가 심각했으며, 제대로 된 하수 처리 시스템이 없어 빠르게 오염되었다.[32] 캠프 내에서의 삶은 많은 난민에게 "무의미하고, 무력하며,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33] 미국과 다른 정부들은 재정착을 위해 난민을 인터뷰하기 위해 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1979년 7월 제네바 회담 이후 재정착 대상자의 수가 확대되면서 비동의 인구는 서서히 감소했다. 마지막 난민은 1991년에 떠났다.[34]
- 갈랑 난민 캠프 (Galang Refugee Camp,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리아우 제도의 풀라우 갈랑 섬에 위치했으며, 면적이 16km2로 비동보다 훨씬 넓었다.[35] 1975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되는 동안 17만 명 이상의 인도차이나인, 즉 보트피플의 대다수가 갈랑에 임시 거주했다. 잘 정착된 후, 갈랑과 비동 및 기타 난민 캠프는 해외로 재정착될 보트피플에게 교육, 언어 및 문화 훈련을 제공했다. 난민들은 일반적으로 재정착되기 전에 몇 달, 때로는 몇 년 동안 캠프에서 생활해야 했다.[36]
- 필리핀 난민 처리 센터 (PRPC): 1980년 필리핀의 바탄 반도에 설립되었다. 초기 수용 인원은 7,000명이었으나 최대 5만 명까지 확장 가능했으며, 캠프의 최대 인구는 약 17,000명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난민 캠프의 과밀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이후 난민 수가 감소하면서 임시 피난처 제공에서 미국 등 재정착 국가 적응을 위한 교육 및 처리 센터로 초점을 변경했다.[37]
보트피플 수는 1975년에서 1978년 사이에 정점을 찍다가 그 이후부터는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1988년 이후부터는 베트남의 자본주의화 개혁 정책인 도이 머이 정책(Đổi mới)에 의해 베트남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보트피플 발생은 크게 줄어들었다.
2005년, 풀라우 비동과 풀라우 갈랑에서 수천 명의 난민이 재정착된 후, 전직 보트 난민들이 캠프에서의 경험을 기념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들의 여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고, 지역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정부 간의 논쟁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 섬들은 테렝가누의 관광 산업 성장에 따라 21세기 초까지 일반에 영구적으로 폐쇄되었다.[38]
3. 보트피플의 탈출과 위험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을 떠나려는 난민, 즉 보트피플은 탈출을 위해 배를 구해야 했으나, 보트 대여상들은 종종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주요 탈출 시도 지역 중 하나는 부유층과 중산층이 밀집했던 상업도시 다낭이었다. 이들의 탈출은 주로 보트를 이용해 홍콩 등 인접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더 멀리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직접 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특히 중산층 이하 난민들은 기약 없는 항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77]
본격적인 보트피플 탈출은 1978년 9월 이후 급증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난민을 태운 대형 선박들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등지에 도착하려 했으나, 수용 국가들의 저항에 부딪히면서[14][15][16] 많은 난민들이 작은 보트를 타고 위험한 항해에 나섰다. 이들은 망망대해에서 폭풍, 질병, 기아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잔인한 해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21][22] 해적들은 약탈, 강간, 살인을 서슴지 않았으며, 많은 보트피플이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엔 난민 기구(UNHCR)는 해상에서 사망한 보트피플 수를 20만에서 6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21] 주변 국가들은 종종 해안에 도착한 난민선들을 다시 바다로 밀어내는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난민들은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표류해야 했다.[17]
1979년 6월 한 달에만 54,000명의 보트피플이 도착하는 등 난민 수가 급증하자,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17] 이에 국제 연합은 1979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임시 망명을 제공하고, 베트남은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ODP)을 통해 합법적 이주를 장려하며, 서방 국가들은 난민 재정착을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18] 이 합의는 보트피플 수를 일시적으로 감소시켰으나, 탈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20] 1980년대 후반 다시 보트피플 수가 증가하자, 1989년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포괄적 행동 계획'(CPA)이 마련되어 난민 심사를 강화하고 비자격자는 베트남으로 송환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44] CPA 시행 이후 보트피플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1992년에는 거의 사라졌고, 베트남 보트피플 시대는 막을 내렸다.[45]
3. 1. 탈출 경로와 방법
베트남을 떠나려는 난민들은 배를 구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트 대여상의 가격 폭리가 발생하기도 했다. 주요 탈출 시도 지역 중 하나는 베트남 최대 상업도시이자 부유층과 중산층이 밀집했던 다낭이었다. 안전한 탈출 경로는 주로 두 가지였다. 첫째는 보트를 타고 홍콩으로 이동한 뒤 다른 수단을 이용해 신속히 제3국으로 가는 방법이었고(이 경우 위조 신분증 및 여권이 필요했다), 둘째는 배를 타고 직접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향하는 것이었다. 다낭에서 홍콩까지의 거리는 약 1100km, 남아시아나 오세아니아까지는 약 2000km에 달했다. 부유층은 비교적 홍콩을 경유하여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 등으로 탈출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중산층은 별다른 방법 없이 장기간 보트 위에서 표류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해적의 습격 등으로 목숨을 잃은 난민이 약 5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77]1975년부터 1978년 중반까지 수천 명이 보트를 이용해 베트남을 탈출했지만, 대규모 탈출은 1978년 9월부터 본격화되었다. 선박 ''사우스 크로스(Southern Cross)''가 인도네시아의 한 무인도에 1,200명의 베트남인을 내려놓은 사건이 발생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으나, 서방 국가들이 난민 재정착을 약속하면서 사태가 진정되었다. 1978년 10월에는 ''하이 홍(Hai Hong)'' 호가 말레이시아에 2,500명의 난민 상륙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고, 배는 해안에 정박한 채 제3국 재정착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후 수천 명의 난민을 태운 대형 선박들이 홍콩 영해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휘 퐁(Huey Fong)'' (3,318명), 1979년 2월 ''스카이럭''(Kylu)으로 위장한 배 (2,651명), 1979년 5월 ''센 청(Seng Cheong)'' (Sen On)으로 위장한 배 (1,433명) 등이 대표적이다.[14][15] 이들 선박의 승객은 대부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한 베트남계와 화교들이었다.[16]
대형 선박의 상륙이 어려워지자, 수많은 베트남인들은 작은 보트를 이용해 인접 국가 해안으로 몰래 상륙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거친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도착 국가들은 해안에 접근하는 보트를 다시 바다로 밀어내는(push-back) 정책을 펴기도 했고, 이로 인해 보트피플은 상륙할 곳을 찾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바다를 헤매야 했다. 이러한 위험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보트피플의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79년 6월 한 달에만 54,000명이 도착했으며, 동남아시아와 홍콩의 난민 캠프에는 총 35만 명이 수용되었다. 결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며 더 이상 새로운 난민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공동으로 선언했다.[17]
이에 국제 연합(UN)은 1979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를 소집하여 "수십만 명의 난민으로 인한 동남아시아의 심각한 위기"를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월터 먼데일 당시 미국 부통령이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할 정도로 국제적 관심이 높았다. 회의 결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난민에게 임시 망명을 제공하고, 베트남은 무분별한 탈출 대신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Orderly Departure Program, ODP)을 통해 합법적인 이주를 장려하며, 서방 국가들은 재정착 속도를 높이기로 합의했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베트남인들은 위험한 보트피플이 되는 대신,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다른 나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18] 이 합의로 베트남을 떠나는 보트피플 수는 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고, 재정착 규모는 1979년 초 월 9,000명에서 월 25,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재정착은 주로 미국, 프랑스, 호주,[19] 캐나다 등지로 이루어졌다. 인도주의적 위기의 최악 국면은 넘겼지만, 보트피플의 탈출은 이후 10년 이상 계속되었고, 많은 이들이 바다에서 사망하거나 난민 캠프에 장기간 갇히는 고통을 겪었다.[20]
1980년부터 1986년까지는 베트남 탈출자 수보다 다른 국가로 재정착하는 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1987년부터 보트피플 수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이번에는 주로 홍콩과 태국을 목적지로 삼았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늘어나는 난민 유입으로 인한 경제, 안보, 사회적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39] 1987년 초, 홍콩 홍콩 입국 관리국의 도움을 받아 출항한 베트남 난민선 한 척이 대만의 진먼에 도착하여 망명을 요청했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후 이 배는 3월 7일 례위에서 탑승자 전원이 학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다. 중화민국 군 당국은 배를 불태우고 증거를 인멸하려 했으며, 중화민국 국방부는 언론 보도와 국회 질의에 대해 사건 자체를 거듭 부인했다. 이 사건은 위축 효과를 낳아 이후 북쪽으로 향하는 난민선의 흐름을 끊는 결과를 가져왔다.[40][41][42]
1988년 한 해에만 18,000명 이상의 베트남 난민이 도착하자, 홍콩 당국은 6월 15일부로 모든 신규 도착자를 재정착될 때까지 구금 센터에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보트피플은 감옥과 유사한 환경에 갇혔고, 교육 및 기타 프로그램도 중단되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새로 도착하는 베트남 보트피플 수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망명 및 재정착 국가들은 새로 도착하는 보트피플 중 상당수가 정치적 박해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난민 자격 부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43]
1989년 6월, 제네바에서 다시 열린 국제 난민 회의에서는 포괄적 행동 계획(Comprehensive Plan of Action, CPA)이 마련되었다. 이 계획은 모든 신규 도착자를 심사하여 진정한 난민인지 여부를 엄격히 판별하고, 난민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베트남으로 송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CPA는 보트피플의 이주를 신속하게 줄이는 데 효과를 보였다.[44]
1989년에는 약 70,000명의 인도차이나 반도 출신 보트피플이 동남아시아 5개국과 홍콩에 도착했지만, 1992년에는 그 수가 41명으로 급감했다. 이로써 베트남 보트피플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을 통한 베트남인의 재정착은 계속되었는데, 특히 전직 재교육 수용소 수감자, 아메라시안 자녀, 그리고 가족 재결합을 위한 이주가 주를 이루었다.[45]
3. 2. 해상에서의 위험
보트피플은 베트남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주로 작은 보트에 의존해야 했으며, 이는 망망대해에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이 사용한 보트는 먼바다 항해에 적합하지 않았고, 당시 베트남 상황에서 무기를 구하기 어려워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도 거의 없었다.[22] 더욱이, 인접 국가들은 해안에 도착한 난민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바다로 밀어내는 경우가 많아, 보트피플은 상륙할 곳을 찾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위험한 표류를 해야만 했다.[17]해상에서 보트피플은 예측 불가능한 폭풍, 질병, 그리고 기아와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해적의 잔인한 공격이라는 인위적인 위협에도 끊임없이 노출되었다.[21] 특히 태국 만을 횡단하는 경로는 해적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해적들은 난민선에 침입하여 귀중품을 약탈하고, 배에 탄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납치했으며,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 때로는 배 자체를 침몰시키기도 했다.[24][25]
1982년, 레 푸억이라는 남성이 겪은 일은 당시 보트피플이 처했던 참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를 포함한 18명의 난민은 약 7.01m 길이의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태국 남부나 말레이시아를 향해 약 약 482.80km 거리의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진이 고장 나 표류하게 되었고, 식량과 물도 바닥났다. 17일간의 표류 기간 동안, 그들은 세 차례나 태국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성 4명이 강간당했고 그중 한 명은 목숨을 잃었으며, 다른 남성 한 명은 해적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그들이 탄 보트는 침몰했지만, 운 좋게도 태국 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난민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24] 이 외에도 해적에 의해 배가 침몰되어 75명 중 단 한 명만 살아남은 비극적인 사건[25], 배에 타고 있던 여성 대부분이 해적에게 납치되고 지나가던 50척 이상의 상선이 구조 요청을 외면했던 사건[26] 등 끔찍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해적 행위의 증가가 난민 유입을 막으려는 주변 국가들의 암묵적인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27] 1979년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이 난민에 대한 공식적인 보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것은[27] 사실상 해적의 활동을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국 만의 해적 행위는 단순히 생계형 어부들의 일탈을 넘어, 여러 척의 배가 조직적으로 난민선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형태로 발전하기까지 했다.[27]
이러한 비인도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 난민 기구(UNHCR)는 1981년부터 해적 행위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했다. UNHCR의 기록에 따르면, 1981년 한 해 동안 태국에 도착한 15,479명의 난민을 태운 452척의 베트남 보트피플 선박 중 349척이 평균 세 차례의 해적 공격을 경험했으며, 이 과정에서 228명의 여성이 납치되고 881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28] 이에 미국, 프랑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덴마크,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영국 등 12개국은 1982년 6월, 국제적인 반(反)해적 캠페인을 공동으로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시행 첫해에 해적 공격 건수를 67%나 감소시키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다시 해적 행위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28]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은 보트피플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UNHCR은 그 수가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1] 다른 연구에서는 전체 보트피플의 10%에서 많게는 70%가 해상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9] 초기에는 지나가는 화물선에 의해 구조되는 경우도 있었으나(1983년 이전 약 20%),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구조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23][22] 운이 좋게 1~2주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보트피플은 굶주림, 갈증, 질병, 그리고 끊임없는 해적의 위협 속에서 몇 달 동안이나 위험천만한 항해를 계속해야만 했다.[22]
4. 국제사회의 대응과 노력
1978년 중반 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피플이 급증하며 국제적 문제로 부상했다. 초기에는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인접국들이 난민을 수용하려 했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난민이 몰려들자 점차 입항을 거부하거나 상륙을 제한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4][15][16] 특히 작은 보트를 이용한 위험한 탈출 시도가 늘면서 해상에서의 비극이 속출했고, 일부 국가는 도착한 보트를 다시 바다로 밀어내는 비인도적인 대응을 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동남아시아와 홍콩의 난민 캠프 수용 인원이 35만 명을 넘어서는 등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자, 관련국들은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공동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17]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 연합 주도로 1979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임시 망명 제공, 베트남 정부의 질서 있는 출국 협조, 서방 국가들의 재정착 확대 등 국제적 협력 방안이 합의되었다.[18] 이 합의는 보트피플의 무분별한 해상 탈출을 일정 부분 억제하고 미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등으로의 재정착을 늘리는 성과를 거두었으나[19],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여 보트피플 문제는 이후 10년 이상 지속되었다.[20]
1980년대 중반 잠시 감소했던 보트피플 수는 1987년부터 다시 증가 추세를 보였으며, 특히 홍콩과 태국으로 난민 유입이 집중되었다.[39] 이 시기에는 대만 군대에 의한 례위 학살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40][41][42] 급증하는 난민 문제에 직면한 홍콩 정부는 1988년, 새로 도착하는 모든 보트피플을 심사 완료 시까지 구금하는 강경책을 도입했으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서방 국가들 역시 난민 수용 및 인정에 점차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43]
결국 1989년 6월, 제네바에서 다시 열린 국제 회의를 통해 포괄적 행동 계획(CPA)이 채택되었다. CPA는 도착하는 모든 이들을 심사하여 정치적 박해를 피해 탈출한 '진정한 난민'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고, 후자의 경우 베트남으로 송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44] 이 계획의 시행으로 보트피플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1992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로써 대규모 해상 탈출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다만, 베트남 정부와의 합의에 따른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을 통한 합법적인 이주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45]
4. 1. 난민 캠프 설치와 운영
보트피플의 수가 급증하자, 국제적 지원을 받은 인접 국가들은 해안과 외딴 섬에 난민 캠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1979년 초에는 보트피플의 수가 매달 수만 명으로 늘어나, 지역 정부, 유엔 난민 기구, 그리고 인도주의 단체들이 제공할 수 있는 음식, 물, 주거, 의료 지원 능력을 넘어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대규모 난민 캠프로는 말레이시아의 비동 섬과 인도네시아의 갈랑 난민 캠프가 있었다.베트남 전쟁 이후 난민이 증가함에 따라, 말레이시아 정부와 적신월사는 말레이시아의 비동 섬 Pulau Bidong|풀라우 비동ms을 난민 캠프로 전환했다.[30] 비동 섬은 1978년 8월 말레이시아의 주요 난민 캠프로 지정되었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도착하는 모든 난민을 이 섬으로 이송했다. 섬의 면적은 260ha 미만으로 약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으나, 1979년 6월까지 453척의 배를 타고 도착한 난민은 40,000명을 넘어섰다.[31] 말레이시아는 해안으로 들어오는 난민들에게 중요한 도움과 지원을 제공했지만, 일본,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미국 등 다른 많은 국가들도 피난처 제공에 참여했다.
유엔 난민 기구와 다수의 구호 단체들이 난민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섬을 수천 명의 보트피플을 수용하도록 개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섬에서 거주 가능한 유일한 지역은 해변이었으며, 난민들은 쉼터와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섬의 식물을 베어냈고, 얕은 우물을 파서 식수를 확보해야 했다.[32] 열악하고 혼잡한 환경 속에서 위생 문제는 특히 심각했다. 하수 처리 시설은 미비했고, 설치된 하수 탱크나 수도꼭지는 도난당하거나 부식되기 일쑤였다. 배수관은 빠르게 폐기물로 막혔고 쥐가 들끓었다. 음식과 식수는 바지선으로 운반해 와야 했으며, 물은 1인당 하루 1gal로 배급되었다. 음식은 주로 쌀과 통조림 고기, 채소 위주였다. 난민들은 배의 목재, 비닐 시트, 납작하게 편 깡통, 야자 잎 등을 이용해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캠프 내 생활은 거주자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남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이나 일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단순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작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캠프마다 상황은 달랐지만, 많은 거주자들은 캠프에서의 삶이 "무의미하고, 무력하며, 시간 낭비"라고 느꼈다.[33]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정부는 재정착 대상자를 심사하기 위해 섬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1979년 7월 제네바 회담 이후 재정착 대상자가 늘어나면서 비동 섬의 인구는 점차 감소했고, 마지막 난민은 1991년에 섬을 떠났다.[34]
인도네시아의 갈랑 난민 캠프 역시 인도네시아 정부, 적신월사, 그리고 유엔 난민 기구의 노력으로 섬에 조성되었으며, 비동 섬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가졌다. 인도네시아 리아우 주에 위치한 갈랑 섬 Pulau Galang|풀라우 갈랑ms은 면적이 16km2에 달했다.[35] 1975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되는 동안, 170,000명 이상의 인도차이나 난민, 즉 보트피플 대다수가 갈랑 캠프에 임시로 거주했다. 캠프가 안정화된 후, 갈랑과 비동 등 여러 캠프는 해외 재정착을 앞둔 보트피플에게 교육, 언어 및 문화 적응 훈련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난민들은 재정착이 결정되기 전까지 보통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캠프에서 생활해야 했다.[36]
1980년에는 필리핀 바탄 반도에 필리핀 난민 처리 센터(Philippine Refugee Processing Center, PRPC)가 설립되었다. PRPC는 처음에는 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이후 최대 50,000명까지 수용 가능하도록 확장되었다. 실제 최대 수용 인원은 약 17,000명 수준이었다. PRPC는 초기에 다른 난민 캠프들의 과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난민 수가 감소하면서 점차 임시 피난처 제공보다는 교육 및 재정착 처리 센터로서의 기능에 집중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으로 재정착하는 난민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 준비를 돕는 역할을 했다.[37]
4. 2. 국제회의와 협력
1978년 중반 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피플의 수가 급증하면서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1978년 9월, 선박 ''사우스 크로스''는 1,200명의 베트남인을 인도네시아의 한 무인도에 내려놓았고, 10월에는 ''하이 홍''이 2,500명의 난민을 태우고 말레이시아 해안에 도착했으나 입항이 거부되었다.[14][15] 이후 ''휘 퐁''(3,318명), ''스카이럭''(2,651명), ''센 청''(1,433명) 등 수천 명을 태운 대형 선박들이 홍콩에 도착했다.[14][15] 이 배들의 승객들은 대부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한 베트남계와 화교였다.[16]대형 선박의 입항이 어려워지자,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작은 보트를 이용해 인접 국가로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해안에 도착한 보트를 다시 밀어내는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979년 6월에는 한 달 동안 54,000명이 넘는 보트피플이 도착했고, 동남아시아와 홍콩의 난민 캠프에는 총 35만 명이 수용되는 등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결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난민을 수용할 수 없다고 공동으로 선언했다.[17]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 연합은 1979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은 월터 먼데일 부통령을 대표단 단장으로 파견하는 등 국제 사회는 이 문제 해결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회의 결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난민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베트남은 무분별한 탈출을 막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한 이주를 장려하는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 시행에 합의했다. 서방 국가들은 난민 재정착 속도를 높이기로 약속했다.[18] 이 합의 덕분에 보트피플의 월간 탈출 규모는 1,000명 수준으로 크게 줄었고, 미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등을 중심으로 한 재정착 규모는 월 25,000명까지 증가했다.[19] 급한 위기는 넘겼지만, 보트피플의 탈출과 그로 인한 비극은 이후 10년 이상 계속되었다.[20]
1980년대 중반까지는 재정착 수가 탈출 수를 넘어서며 상황이 다소 안정되는 듯했으나, 1987년부터 다시 보트피플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로 홍콩과 태국이 목적지가 되었다. 특히 홍콩 정부는 급증하는 난민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부담과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했다.[39] 1987년 초에는 홍콩을 떠나 대만 진먼으로 향했던 베트남 난민선 한 척이 대만 군대에 의해 망명 신청이 거부되고, 이후 례위에서 탑승자 전원이 학살당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만 당국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 사건은 북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경로를 사실상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40][41][42]
늘어나는 난민 유입에 부담을 느낀 홍콩 당국은 1988년 6월 15일, 새로 도착하는 모든 보트피플을 재정착될 때까지 구금 센터에 수용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보트피플은 열악한 환경에 오랫동안 갇히게 되었고, 교육 등 지원 프로그램도 중단되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추가 수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망명 및 재정착 대상국들도 새로 도착하는 보트피플 중 상당수가 경제적 이유로 탈출한 것으로 보고 난민 자격 인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43]
결국 1989년 6월, 제네바에서 다시 국제 난민 회의가 열렸고, 포괄적 행동 계획(CPA)이 채택되었다. CPA는 새로 도착하는 모든 사람들을 심사하여 정치적 박해를 피해 탈출한 '진정한 난민'인지 판별하고,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베트남으로 송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이 계획은 보트피플의 이주 흐름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데 기여했다.[44]
1989년 한 해 동안 약 7만 명에 달했던 동남아시아 및 홍콩 도착 보트피플 수는 CPA 시행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92년에는 41명에 불과했다. 이로써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피플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와의 합의에 따른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을 통한 이주는 계속되어, 전직 재교육 수용소 수감자, 아메라시안 아동, 그리고 가족 재결합을 원하는 베트남인들의 해외 재정착은 이후에도 이어졌다.[45]
4. 3. 대한민국과 인도차이나 난민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이 예상되자 미국은 1972년 캘리포니아주에 베트남 공화국 망명자들을 위한 임시 사령부를 구축했다. 1974년 이후 동남아시아에 공산화 물결이 거세지면서 반공 성향의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인들이 이 임시 망명정부로 피신했다. 이 조직은 1995년 자유 베트남 정부로 확장되었고, 호주, 체코, 프랑스, 독일, 캄보디아, 캐나다 등지에 지부를 설립했다.대한민국에도 한때 베트남인들의 임시 망명정부 지부 캠프가 운영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정부는 이를 호주 지부로 통폐합했다.[78] 국내에 있던 베트남 난민 수용소는 1993년에 폐지되었으며, 당시 수용되어 있던 난민들은 뉴질랜드 등지로 이주했다.
5. 보트피플의 재정착과 송환
198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을 떠나는 보트피플의 수가 다시 증가하면서, 특히 홍콩과 태국 등 인접 국가들의 부담이 커졌다.[39] 각국 정부는 늘어나는 난민 유입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섰으며, 일부 국가는 강경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43]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만 군대에 의한 례위 학살 사건과 같은 비극도 발생했다.[40][41][42]
국제 사회는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1989년 제네바에서 포괄적 행동 계획(Comprehensive Plan of Action, CPA)을 채택했다. CPA는 신규 도착자에 대한 난민 심사를 강화하고,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이들을 베트남으로 송환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44] 이 계획의 시행으로 보트피플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1990년대 초반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Orderly Departure Program, ODP)을 통한 합법적인 이주는 계속되었다.[45]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수십만 명의 베트남인이 UNHCR을 통해 해외로 재정착했으며, 상당수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47] 보트피플 외에도 ODP 등 다른 경로를 통해 재정착한 인원을 포함하면, 이 기간 동안 120만 명 이상이 베트남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았다.[46] (자세한 통계 및 국가는 #재정착 국가, #본국 송환 참조)
5. 1. 재정착 국가
베트남 출신으로 해외로 망명한 사람의 수는 약 1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주로 미국과 호주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주요 재정착 국가 및 추정 인원은 다음과 같다.국가 | 추정 인원 |
---|---|
미국 | 1,002,000 |
호주 | 107,000 |
프랑스 | 96,000 |
체코 | 80,000 |
독일 | 40,000 |
캐나다 | 30,000 |
노르웨이 | 22,658 |
네덜란드 | 21,435 |
벨기에 | 14,000 |
키프로스 | 12,000 |
보트피플이 급증하자, 국제적 지원을 받은 인접 국가들은 해안과 작은 섬에 난민 캠프를 설치했다. 1979년 초, 매달 수만 명으로 보트피플 수가 늘어나면서 지역 정부, 유엔난민기구(UNHCR), 인도주의 단체의 지원 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가장 큰 난민 캠프 두 곳은 말레이시아의 비동 섬과 인도네시아의 갈랑 난민 캠프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난민이 증가하자, 말레이시아 정부와 적신월사는 비동 섬을 난민 캠프로 만들었다.[30] 비동 섬은 1978년 8월 말레이시아의 주요 난민 캠프로 지정되었고, 도착하는 난민들은 모두 이 섬으로 보내졌다. 면적이 260ha 미만인 비동 섬은 본래 4,500명을 수용할 예정이었으나, 1979년 6월에는 453척의 배로 도착한 40,000명 이상의 난민이 머물렀다.[31] 말레이시아 외에도 일본,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미국 등 여러 국가가 피난처를 제공했다.
UNHCR과 여러 구호 단체가 난민을 지원했지만,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섬을 수천 명의 난민을 수용하도록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섬에서 거주 가능한 유일한 지역은 해변이었고, 사람들은 쉼터와 땔감을 위해 식물을 베어냈으며, 얕은 우물을 파 식수를 확보했다.[32] 혼잡한 환경 속에서 위생 문제가 심각했으며, 하수 처리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음식과 식수는 배로 운반해야 했고, 물은 1인당 하루 1gal로 배급되었다. 난민들은 보트 목재, 비닐 시트, 깡통, 야자 잎 등으로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캠프 내에서 남성들은 전통적인 일 대신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거주자들은 캠프 생활을 "무의미하고, 무력하며, 시간 낭비"라고 느꼈다.[33] 미국과 다른 나라 정부들은 재정착 심사를 위해 섬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1979년 7월 제네바 회담 이후 재정착 대상자가 늘면서 비동 섬의 인구는 점차 감소했고, 마지막 난민은 1991년에 섬을 떠났다.[34]
갈랑 난민 캠프는 인도네시아 정부, 적신월사, UNHCR의 노력으로 조성되었으며, 비동 섬보다 훨씬 넓은 면적(16km2)을 가졌다.[35] 1975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되는 동안 17만 명이 넘는 인도차이나인, 즉 보트피플 대다수가 갈랑에 임시 거주했다. 캠프가 안정된 후, 갈랑과 비동 등 여러 난민 캠프에서는 해외 재정착을 앞둔 보트피플에게 교육, 언어, 문화 훈련을 제공했다. 난민들은 보통 재정착되기 전까지 캠프에서 몇 달, 때로는 몇 년을 보내야 했다.[36]
1980년에는 필리핀 바탄 반도에 필리핀 난민 처리 센터(PRPC)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최대 50,000명까지 수용 가능하도록 확장되었다. 실제 최대 인원은 약 17,000명이었다. PRPC는 초기에는 다른 캠프의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이후 난민들이 미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및 처리 센터로 역할이 바뀌었다.[37]
보트피플은 1975년부터 20세기 말까지 해외로 재정착한 베트남 난민의 일부였다.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총 12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재정착했으며, 이 중 70만 명 이상이 보트피플이었다. 나머지는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ODP)이나 중국, 말레이시아를 통해 재정착했다. (자세한 통계는 인도차이나 난민 위기 참조).[46]
1975년부터 1997년까지 UNHCR 통계에 따르면, 839,228명의 베트남인이 동남아시아와 홍콩의 UNHCR 난민 캠프에 도착했다. 대부분 배를 이용했지만, 42,918명은 육로로 태국에 도착했다. 이 중 749,929명이 해외로 재정착했고, 109,322명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97년 말 기준, 베트남 보트피플 잔류자는 2,288명이었으며, 그중 2,069명이 홍콩에 있었다. 베트남 보트피플과 육로 도착자를 가장 많이 재정착시킨 4개 국가는 미국(402,382명), 프랑스(120,403명), 호주(108,808명), 캐나다(100,012명)였다.[47]
1979년부터 1994년까지 시행된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ODP)은 난민들의 미국 및 다른 서방 국가로의 재정착을 도왔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난민들은 베트남으로 돌아가 심사를 기다렸고, 미국 정부 기준에 따라 재정착 자격이 인정되면 이민이 허용되었다.
ODP 내 '인도적 운영'(HO) 프로그램은 이전 남베트남 정권에 연루되었거나 미국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들은 1975년 이후 공산 정권에 의해 박해받았다면 미국 이민이 허용되었다. 베트남에 있는 혼혈 미국인 아이들도 어머니나 양부모와 함께 이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유한 베트남 부모들이 실제 어머니나 양부모로부터 이민 권리를 사들여 혼혈 미국인 아이들을 자신들의 양육권으로 옮긴 뒤 미국 비자를 신청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혼혈 아이들 다수는 미군과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나 차별, 빈곤, 학대 등에 시달렸다. 2005년 11월, 미국과 베트남은 1994년 HO 프로그램 종료 전에 이민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추가 이민을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사실상 이 새로운 협정은 HO 프로그램의 연장이자 마지막 단계였다.
홍콩은 1979년 7월 '최초 망명 항구 정책'을 채택하여 1980년대 후반 이주가 절정에 달했을 때 1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을 수용했다. 많은 난민 캠프가 홍콩 영토 내에 세워졌으나, 캠프 내 보트피플과 보안군 간의 잦은 충돌은, 특히 많은 캠프가 고밀도 주거 지역과 가까웠기 때문에, 1990년대 초 대중의 항의와 우려를 낳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서유럽, 미국, 호주는 베트남 난민 수용 규모를 줄였고, 난민들이 해당 국가의 비자를 얻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수십만 명이 육로나 배를 통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탈출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최초 도착 국가들은 계속되는 난민 유입과 제3국의 재정착 기회 축소에 직면했다. 이들 국가는 망명 신청자들을 돌려보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1989년 6월, 인도차이나 난민을 위한 포괄적 행동 계획이 채택되었다. 난민 인정 마감일은 1989년 3월 14일로 설정되었다. 이 날짜 이후 도착한 인도차이나 보트피플은 더 이상 자동으로 ''일차적 증거''(prima facie) 난민으로 간주되지 않고,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개별 심사를 받아야 하는 망명 신청자로 분류되었다. 심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질서 있고 감시되는 송환 프로그램에 따라 베트남과 라오스로 보내졌다.
난민들은 캠프에서 수년간 머물며 결국 베트남으로 송환될 가능성에 직면했고, 경제적 난민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베트남 탈출 난민 수는 크게 줄었고 많은 난민 캠프가 폐쇄되었다. 교육 수준이 높거나 명확한 난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수용 국가에 정착한 상태였다. 서방 국가들은 재정착 심사 시 몇 가지 암묵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혼 부부, 젊은 가족, 18세 이상 여성에게 우선권을 부여하여, 미혼 남성과 미성년자들은 캠프에 더 오래 머물러야 했다. 이들 중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UNHCR 직원의 추천을 통해 서방 국가에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홍콩은 캠프에 남은 인원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일부 난민만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베트남의 시장 개혁, 1997년 홍콩 주권 반환, 그리고 자발적 귀환에 대한 재정적 지원 등은 1990년대 많은 보트피플이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배경이 되었다. 남아있던 망명 신청자 대부분은 자발적 또는 강제로 베트남으로 송환되었지만, 소수(약 2,500명)는 2002년 홍콩 정부로부터 거주권을 부여받았다. 2008년, 필리핀에 남아있던 약 200명의 난민이 캐나다, 노르웨이, 미국에서 망명을 허가받으면서 베트남 보트피플의 역사는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2005년, 비동 섬과 갈랑 난민 캠프에서 재정착했던 전직 보트피플들이 돌아와 캠프 경험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들은 여정 중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고 지역 정부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두 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정부 간의 이견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 섬들은 관광 산업 개발과 함께 21세기 초 일반인의 접근이 영구적으로 제한되었다.[38]
5. 2. 본국 송환
1980년대 중반까지 잠시 주춤했던 베트남 탈출 보트피플의 수는 1987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로 홍콩과 태국이 주요 목적지가 되었다. 늘어나는 난민 유입에 부담을 느낀 영국령 홍콩 정부는 경제적, 안보적,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39]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7년 초, 홍콩을 떠나 항해를 계속하려던 한 척의 베트남 난민 보트가 진먼 섬에 도착하여 망명을 신청했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후 이들은 3월 7일 례위 섬에서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이 사건은 1987년 례위 학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화민국 군 당국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북쪽 항로를 이용하려는 난민들의 시도를 위축 효과를 가져왔다.[40][41][42]1988년 한 해에만 18,000명 이상의 베트남 난민이 도착하자, 홍콩 당국은 같은 해 6월 15일, 모든 신규 도착자를 구금 센터에 수용하여 재정착 심사가 끝날 때까지 구금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보트피플은 감옥과 유사한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고, 교육 및 기타 지원 프로그램도 중단되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새로 도착하는 베트남 보트피플 수용에 점차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더 나아가 망명 신청을 받거나 재정착을 지원하던 국가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보트피플 중 상당수가 정치적 박해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들의 난민 자격 인정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커졌다.[43]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89년 6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난민 회의에서는 포괄적 행동 계획(Comprehensive Plan of Action, CPA)이 마련되었다. CPA는 모든 신규 도착자에 대한 심사를 통해 진정한 난민인지 여부를 판별하고,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베트남으로 송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계획은 보트피플의 이주 흐름을 줄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44]
CPA 시행 이후 보트피플의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1989년 약 7만 명에 달했던 인도차이나 반도 출신 보트피플 도착자 수는 1992년에는 41명으로 크게 줄어들며, 베트남 보트피플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Orderly Departure Program, ODP)을 통한 베트남인의 해외 이주는 계속되었는데, 특히 전직 재교육 수용소 수감자, 아메라시안 아동, 그리고 가족 재결합 대상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재정착 기회를 얻었다.[45]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유엔난민기구(UNHCR) 통계에 따르면, 총 839,228명의 베트남인이 동남아시아와 홍콩의 UNHCR 난민 캠프에 도착했다. 이들 대부분은 배를 이용했지만, 일부(42,918명)는 육로를 통해 태국으로 입국했다. 이 중 749,929명이 해외 국가로 재정착했으며, 109,322명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형태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97년 말 기준으로 여전히 캠프에 남아있던 베트남 보트피플은 2,288명이었고, 그중 대다수인 2,069명이 홍콩에 있었다. 베트남 보트피플 및 육로 도착자들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국가는 미국(402,382명), 프랑스(120,403명), 호주(108,808명), 캐나다(100,012명) 순이었다.[47] 보트피플은 1975년부터 20세기 말까지 해외로 재정착한 전체 베트남 난민의 일부이며, ODP나 중국 또는 말레이시아를 경유한 경우를 포함하면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총 12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재정착했다. (인도차이나 난민 위기 참조).[46]
6. 보트피플의 현재와 기념
베트남 전쟁 이후 공산 정권을 피해 탈출한 수많은 베트남인들은 '보트피플'로 불리며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이들은 망명지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베트남계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또한, 목숨을 건 탈출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 기념비와 추모 시설이 세워져 그들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
6. 1. 각국의 베트남계 공동체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 국적을 가진 해외 망명자 수는 약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미국과 호주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각국에 정착한 베트남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6. 2. 기념비와 추모




베트남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위험과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여러 국가에 기념비와 기념관이 세워졌다. 주요 기념 시설은 다음과 같다.
국가 | 도시/지역 | 건립 연도 | 특징 및 설명 |
---|---|---|---|
캐나다 | 오타와, 온타리오 | 1995년 | "난민 어머니와 아이" 기념비 (프레스턴 스트리트와 서머셋 교차로)[48] |
스위스 | 그랑사코네 | 2006년 2월 | [49] |
미국 | 산타아나, 캘리포니아주 | 2006년 2월 | [50] |
벨기에 | 리에주 | 2006년 7월 | [51] |
독일 | 함부르크 | 2006년 10월 | [52][53] |
독일 | 트로이스도르프 | 2007년 5월 | [54][55] |
오스트레일리아 | 풋스크레이, 멜버른 | 2008년 6월 | 젠슨 파크 보호구역[56] |
프랑스 | 바뉴, 오드센 | 2008년 5월 11일 | [57][58] |
미국 | 웨스트민스터, 캘리포니아주 | 2009년 4월 | 비비 보 훙 키에트 作[59][60][61] |
독일 | 함부르크 | 2009년 9월 | 란둥스브뤼켄 항구[62][63] |
인도네시아 | 갈랑섬 | - | 철거됨 |
말레이시아 | 비동섬 | - | |
미국 | 워싱턴 D.C. | - | |
스위스 | 제네바 | - | |
프랑스 | 마른라발레 | 2010년 9월 12일 | "Rond Point Saigon" 로터리 (부시-생 조르주 코뮌). 조각가 부 딘 람의 조각상.[64][65] |
오스트레일리아 | 뱅크스타운, 시드니 | 2011년 11월 | 사이공 플레이스. 조각가 테렌스 플로라이트의 3톤 이상 청동 조각상.[66] |
인도네시아 | 타렘파, 아남바스 | - | [67] |
오스트레일리아 | 브리즈번, 퀸즐랜드 | 2012년 12월 2일 | 필립 피페리데스 作[68] |
오스트레일리아 | 퍼스, 서호주 | 2013년 11월 1일 | 웨이드 스트리트 파크 보호구역. 조각가 코랄 로우리의 5.5m 높이 기념비.[69] |
캐나다 | 몬트리올, 퀘벡주 | 2015년 11월 18일 | 유니액션 作. 캐나다 내 베트남 보트피플 정착 40주년 기념 공동 작품.[70] |
네덜란드 | 알메레, 플레볼란트주 | 2016년 4월 30일 | Cộng Đồng Việt Nam Tỵ Nạn Cộng Sản Tại Hòa Lan (네덜란드의 베트남 난민 연합) 제작. {{lang|nld|Monument voor Vietnamese bootvluchtelingen|} | } (Tượng Đài Thuyền Nhân Việt Nam tại Hòa Lan|vie)으로 불리며, 현지 불교 사찰인 반 한 사원에 제막됨.[7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