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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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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지수적(本地垂迹)은 불교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때 토착 신앙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으로, 신불(神佛)이 현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의 경지인 '본지'는 우주의 진리인 법신(法身)을, 자취를 드리운다는 '수적'은 부처가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불교와 토착 신앙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신을 부처의 화신으로 여기는 본지수적설이 발전했으며, 9세기에는 각 신에게 권현호(權現號)가 붙여지고, 12세기에는 본지불(本地佛)이 정해졌다. 이 사상은 곤겐 신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반대로 신이 주(主)이고 부처가 종(從)이라는 신본불적설(神本佛迹說)이 등장하기도 했다.

2. 개념 및 역사

'''본지'''(本地)란 본래의 경지나 존재 방식을, '''수적'''(垂迹)이란 자취를 드리운다는 뜻으로, 신불(神佛)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인 본지는 우주의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이며, 이를 '''본지법신'''(本地法身)이라고 한다. 곤겐의 '''권'''(權)은 "임시", "가짜"라는 의미로, 부처가 신의 모습을 취해 '''가짜로 나타난''' 것을 뜻한다.[2]

본지 사상은 불교가 각 지역에서 포교될 때 토착 종교를 포섭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불교 천부의 신들은 대부분 인도 힌두교에서 유래했으며, 후기 대승불교에서는 '''본지불''' 대일여래의 화신이 부동명왕 등 '''가지신'''(加持身)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수적''' 사상은 중국 장자 천운편의 '''적'''(迹, 교화의 자취)과 '''소이적'''(所以迹, 교화를 성립시키는 도)에서 유래한다. 곽상은 장자주에서 이를 성왕(내성외왕) 설명에 적용하여, "적"을 왕의 통치, "소이적"을 본질적인 성인으로 인용했다. 후진 시대 승려 승조는 이를 불교에 도입하여, 왕필 등의 "본말"(本末) 사상을 인용하고 "소이적"을 "본"으로, "본"을 보살의 해탈, "적"을 보살이 중생 교화를 위해 시현한 방편으로 사용했다.

9세기 경에는 각 신의 권현호(權現號)가 나타났고,[23] 12세기 경에는 각 신의 본지불(本地佛)이 정해져 갔다.[23]

아타고 곤겐 (『불상 도집』)


류조지 (단바사사야마시) 아타고도에 모셔진 쇼군 아타고 지장존

2. 1. 불교의 수용과 토착 신앙과의 융합

일본에서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고분 시대의 모노노베씨소가씨가 대립하는 등, 불교와 토착 신앙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 융합되는 과정을 거쳤는데, 불교 측에서는 신(神)을 헤매는 중생의 일종으로 천부의 신들과 같다고 보았다. 신을 불교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납경이나 도승이 행해졌고, 불법의 공덕을 회향하여 신의 몸을 벗어나는 것이 신탁에 나타나기도 했다.[19]

7세기 후반, 덴무 천황 시기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천황의 씨족신이었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한 주요 신들이 민족신으로 격상되었다. 불교는 이러한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호법선신으로 해석하고, 나라 시대 말기부터 헤이안 시대에 걸쳐 신에게 보살호를 붙이는 등 융합을 시도했다.[24]

한편, 사령 등 소규모 민족신은 본지수적설에서 배제하고 권화신(權化神)과 실류신(實類神)으로 구분하여 차별했다. 불교 측에서는 권화신에게는 경의를 표했지만, 실류신은 신봉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는 불교의 일선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2. 2. 본지수적설의 전개와 영향

본지수적설은 불교가 각 지역에 전파되면서 토착 신앙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사상이다. 곤겐(權現) 신앙, 본지수적화(本地垂迹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24] 곤겐은 부처가 일본인에게 가미(神)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2]

가마쿠라 시대 중후기에는 문학에서 본지물(本地物)이라는 작품이 창작되었다. 본지물은 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본지수적 이론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14]

센고쿠 시대에는 천도(天道)사상의 영향으로 "제종(諸宗)은 하나"라는 통일적인 틀이 형성되었다.

불교의 신과 그들의 ''가미''의 대응을 보여주는 만다라


초기 불교 승려들은 가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부처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6] 그러나 불교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저항에 부딪혔고, 승려들은 가미를 불교 체계에 통합하여 이를 극복하려 했다.[6]

본지수적이라는 용어는 원래 중국에서 개발되었으며,[7] 텐다이 불교도들이 절대적 진실과 그것의 역사적 현현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6][2] 10세기와 11세기에는 불교의 신과 가미를 연결짓는 많은 예가 나타났으며, 관음, 약사여래, 아미타, 석가여래 등이 가미와 연결되었다.[6]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이러한 연결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6]

본지수적 패러다임은 에도 시대 말기까지 일본 종교 생활의 특징으로 남아 있었으며, 사회, 문화, 예술, 경제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10] 예를 들어, 불교에서 금지된 어업, 사냥, 농업 등의 행위가 가미에게 바치는 행위로 간주되어 허용되기도 했다.[11]

2. 3. 말법 사상과의 관계

말법(末法) 사상은 본지수적설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인도 중심 세계관에서는 말법 시대의 일본인은 타락하여 구제받기 어렵다고 여겨졌고, 정당한 교화 방법으로는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가 신의 모습을 취해 나타나 엄벌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구제를 지향했다는 것이 본지수적설의 논리였다.[24] 이러한 종말 의식은 정토 신앙의 유행과 전통적인 신기 신앙(神祇信仰)의 변용을 가져왔다. 신들은 공동체의 신에서 개인을 구제하는 신으로 변모하였다.

2. 4. 반본지수적설(신본불적설)의 등장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는 불교에 대한 반발로 신토 측에서 신이 주(主)이고 부처가 종(從)이라는 '''신본불적설'''(神本佛迹說)이 등장했다. 이는 본래의 본지수적설을 뒤집은 주장이다.[16] 이세 신궁외궁의 신관인 와타라이 씨는 신화와 신사를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신도 오부서』를 저술하고 이세 신도(와타라이 신도)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세 신도에서는 현실을 긍정하는 본각 사상을 가진 천태종 교리를 활용하여 신도를 이론화했고, 구카이에게 의탁한 여러 이론서도 재편하여 와타라이 유키타다와 이에유키가 체계화했다.

반본지수적설은 몽골의 침략 이후 일본이 신에게 보호받는 '신의 나라'라는 신국 사상이 고조되는 가운데 더욱 발전했다.[20]

남북조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반본지수적설은 더욱 널리 주장되었고, 천태종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지헨은 『구사본기현의』와 『토요아시하라신풍화기』를 저술하고 신도로 개종했으며, 료헨은 『신대권사견문』과 『천지려기기문서』를 저술하여 이 설을 지지했다. 요시다 가네토모는 이들을 받아들여 『유일신도명법요집』을 저술하고 이 설을 대성시켰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의 신불교는 여전히 본지수적설을 지지했다.

3. 수적신과 본지불

불교가 각 지역에 전파되면서 토착 신앙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이 나타났다. 불교의 천부 신들은 대부분 인도힌두교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후기 대승불교에서 대일여래의 화신이 부동명왕 등 '가지신(加持身)'이라는 개념을 낳았다.[24]

한편, '수적(垂迹)'은 중국의 『장자』 천운편에 나오는 '적(迹, 교화의 자취)'과 '소이적(所以迹, 교화를 성립시키는 도)'에서 유래한다. 서진의 곽상은 『장자주』에서 이를 성왕(내성외왕) 설명에 적용하여, '적'을 왕의 통치, '소이적'을 본질적인 성인으로 보았다. 후진 시대의 승려 승조는 이를 불교에 도입하여, '소이적'을 '본(本)', '본'을 보살의 해탈, '적'을 중생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해석했다.

일본에서는 불교 전래 초기 모노노베씨소가씨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와 토착 신앙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불교는 신을 중생의 일종이자 천부의 신과 같다고 보며 포용했고, 신을 부처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7세기 후반 덴무 천황 시기 천황 중심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정점으로 하는 민족신이 부상했다. 불교는 이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호법선신으로 해석하고, 나라 시대 말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신에게 보살호를 붙였다.[19]

그러나 사령(祠靈) 등 소규모 민족신은 본지수적설에서 제외되어 권화신(權化神)과 실류신(實類神)으로 구별되었다. 불교는 권화신을 존중했지만, 실류신 숭배는 경계했다.

본지수적설은 곤겐 신앙, 본지수적화(本地垂迹畵), 본지물(本地物) 문학 등을 낳았다. 센고쿠 시대에는 천도사상의 영향으로 "여러 종교는 하나"라는 통일적 관점이 형성되었다. 신의 정체로 여겨지는 부처를 '''본지불'''(本地佛)이라 하며, 종파, 신앙, 사찰, 신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하치만 대보살아미타여래이다.

3. 1. 주요 신과 본지불의 대응 관계

일본에서 신(神)과 불교의 부처를 연결 짓는 '본지수적' 사상에 따라, 여러 신과 그에 대응하는 본지불(本地佛)이 존재한다. 주요 신과 본지불의 대응 관계는 다음과 같다.

본지불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대일여래, 십일면관세음보살
하치만 신, 오진 천황아미타여래
구마노 곤겐아미타여래, 선재왕과 그 비, 왕자신(구마노만다라)
히요시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대일여래)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벤자이텐
가스가 곤겐불공견삭관음, 약사여래, 지장보살, 십일면관음
아타고 곤겐지묘곤겐 (승군지장보살)
아키바 곤겐관음보살
스사노오우두천왕 (약사여래)
오쿠니누시노카미다이코쿠텐
도쇼 다이곤겐, 도쿠가와 이에야스약사여래
마츠오약사여래
구니노토코타치노카미약사여래
도요우케비메노카미금강계대일여래
스사노오노미코토구마노 곤겐, 아미타여래
쓰쿠요미노 미코토아미타여래
기쿠리히메십일면관음
오오아나무치노카미아미타여래
이자나기노 미코토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이자나미노 미코토천수관음
히노카구츠치노카미천수관음
니니기노 미코토석가여래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센겐 대보살, 아미타여래
야마사치히코문수보살
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미륵보살
아메노타지카라오노미코토부동명왕, 성관음
아메노오모이카네노미코토석가여래, 허공장보살
스코나비코노미코토금강장왕권현
신변대보살성관음
미우바손대일여래
시치멘텐뇨길상천, 벤자이텐
산포코진대성환희천
이나리 신십일면관음, 성관음, 다키니텐
히노무스히노미코토이즈산 곤겐, 천수관음
청룡세이류 곤겐[21] (준제관음, 여의륜관음)
호쿠토(북신) 신앙, 태일묘견보살
에비스비사문천, 부동명왕
쿠나토카미, 도조신, 경신 신앙, 사루타히코청면금강, 지장보살, 마두관음
야마노카미, 금정신마두관음
텐만 다이지자이텐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대자재천, 대위덕명왕 (십일면관세음보살, 부동명왕, 석가금륜, 약사여래, 애염명왕, 지에 대사, 아미타여래, 비사문천, 대성환희천, 변재천, 천수관음, 대일여래, 지장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22]



이러한 대응 관계는 종파, 신앙, 사원, 신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26] 일본 신의 불호(佛號)는 보살이 많은 경우가 흔하며, 하치만 대보살아미타여래인 것과 같이 본지불의 불호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9세기 무렵에는 신의 곤겐호(權現號)가 나타나기 시작했고,[27] 12세기 무렵에는 각 신의 본지불이 정해져 갔다.[28]

3. 2. 곤겐(權現) 신앙

9세기경부터 각 신에게 곤겐호(權現號)가 붙여지기 시작했다.[23] 곤겐(權現)의 '권(權)'은 '임시', '가짜'라는 의미로, 부처가 신의 모습을 빌려 가짜로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12세기경에는 각 신의 본지불(本地佛)이 확정되었다.[23] 예를 들어, 히에의 산노곤겐(山王権現)이 있다.[6] 텐다이 불교와 수험도의 영향으로, 이와키산과 관련된 종교적 믿음에서 여성 가미(神)인 구니야스타마히메는 십일면 관음보살과, 가미인 오쿠니누시는 약사여래와, 쿠니토코타치노 미코토는 아미타여래와 연관되었다.[9]

4. 한국 불교와의 비교 및 영향

본지수적설은 일본 불교에서 토착 신앙과의 융합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이다. 한국 불교 역시 삼국시대부터 토착 신앙과 융합되어 왔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일본의 본지수적설과 같이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왕실과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삶에도 깊숙이 스며들었고, 이 과정에서 불교는 토착 신앙과 자연스럽게 융합되었으며 민간 신앙의 요소들을 흡수하며 발전했다.

4. 1. 한국 불교의 토착 신앙 수용

한국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토착 신앙과 융합되어 왔으며, 산신각, 칠성각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왕실과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삶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토착 신앙과 자연스럽게 융합되었고, 민간 신앙의 요소들을 흡수하며 발전했다.

5. 현대 사회에서의 의의

본지수적은 일본 종교 생활의 특징적인 패러다임으로, 신(神)과 불교의 신이 동등하다는 료부 신토 사상으로 이어졌다.[6] 이는 사회, 문화, 예술,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10] 예를 들어 불교에서 금지한 어업, 사냥, 농업은 본지수적 개념을 통해, 잡은 물고기를 부처의 화신인 신에게 바치는 행위는 죄가 아닌 것으로 해석되어 허용되었다.[11] 이러한 해석은 다른 경제 활동에도 적용되어 대중의 반대를 통제하는 데 활용되었다.[11]

남북조 시대(1336-1392)에 쓰인 『신토슈』는 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본지수적 이론을 설명하며,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14][15]

5. 1. 문화적 다양성과 정체성

에도 시대 말기까지 ''혼지스이쟈쿠'' 패러다임은 일본 종교 생활의 특징이었다. 그 사용은 신뿐만 아니라 구카이쇼토쿠 태자와 같은 역사적 인물에게까지 확장되었다.[6] 이들은 부처의 화신인 신의 화신이라고 주장되었다.[6] 때로는 관련된 신이 불교 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6]

''혼지스이쟈쿠''는 중세 시대의 종교적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6] 신은 무지한 외부인에서 중요한 신의 실제 형태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는 불교 신과 ''신''이 동등하다는 료부 신토로 이어졌다.[6]

''혼지스이쟈쿠'' 패러다임은 사회, 문화, 예술,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10] 예를 들어, 불교는 어업, 사냥, 농업을 금지했지만, ''혼지스이쟈쿠''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금지를 무효화할 수 있었다.[11] 잡은 물고기를 부처의 화신인 ''신''에게 바치면 죄가 아닌 행위로 여겨졌다.[11] 이러한 해석은 모든 주요 경제 활동에 적용되어 대중의 반대를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다.[11]

중세 및 근세 초기에 지역 현상이 신성한 대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었다.[10] 사찰 토지는 불교 극락의 화신으로, 장인의 작업은 인도 부처의 신성한 행위와 같다고 여겨졌다.[10]

남북조 시대(1336-1392)에 쓰인 『신토슈』는 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혼지스이쟈쿠'' 이론을 설명한다.[14] 이 이야기들은 영혼이 지역 수호신으로 환생하기 전 인간으로 태어나 겪는 고통을 다루며,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14][15]

참조

[1] 문서 Breen and Teeuwen (2000:95)
[2] 문서 Satō Masato (2007)
[3] 문서 Basic Terms of Shinto
[4] 문서 Satō Makoto
[5] 서적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6] 문서 Bernhard Scheid
[7] 문서 Sueki (2007:24)
[8] 문서 Teeuwen, Rambelli (2002:6)
[9] 문서 Breen, Teeuwen (2000:194)
[10] 문서 Teeuwen, Rambelli (2002:1-2)
[11] 문서 Breen and Teeuwen (2000:88-89)
[12] 문서 Songyō Mandara
[13] 문서 Sōgyō Hachiman
[14] 사전 Kōjien Iwanami 2008
[15] 백과사전 Shintōshū http://100.yahoo.co.[...] Yahoo Japan 2011-06-15
[16] 문서 Teeuwen, Rambelli (2002: 35-36)
[17] 문서 Shirayama Yoshitarō
[18] 문서 Breen and Teeuwen (2000:119)
[19] 문서 八幡神を八幡大菩薩とするなど。
[20] 서적 必携日本史用語 実教出版 2009-02-02
[21] 서적 修験道の本 学習研究社 1999-01-15
[22] 문서 天神信仰には、主神である天満大自在天神が、衆生を救うため様々な神仏へ分身したのだとする思想がある。
[23] 서적 日本史B用語集―A併記 山川出版社 2009-03-30
[24] 문서 八幡神を八幡大菩薩とするなど。
[25] 서적 必携日本史用語 実教出版 2009-02-02
[26] 문서 天神信仰には、主神である天満大自在天神が、衆生を救うため様々な神仏へ分身したのだとする思想がある。
[27] 서적 日本史B用語集―A併記 山川出版社 2009-03-30
[28] 서적 日本史B用語集―A併記 山川出版社 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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