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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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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도 (고구려)는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인물에 대한 논쟁과 관련 사료를 다루는 문서이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가 372년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는 동진의 담시가 먼저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고구려의 불교 수용 배경, 소수림왕의 불교 장려, 낙랑군·대방군과의 관계,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 등 다양한 논쟁과 학설을 제시하며, 고구려 불교의 특징과 한반도 불교 전파에 미친 영향 등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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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고구려)
기본 정보
법명순도
출생지중국전진
사찰소문사 (肖門寺) (성문사)
생애
활동순도(順道)는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승려이다. 372년(소수림왕 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에서는 동쪽에 사찰을 지어 그를 머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초문사 (肖門寺)이다. 일설에는 성문사(省文寺)라고도 한다.
관련 정보
관련 인물부견, 아도
참고 자료
참고 문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역사적 배경

고구려소수림왕불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었다. 낙랑군, 대방군중국식민지를 통해 한(漢) 문화고구려 사회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9]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이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2] 소수림왕전진에 사신을 보내 입공했고[2], 삼국사기는 이를 "해동 불법의 시작"이라 기록하고 있다.[2]

소수림왕 4년 (374년)에는 승려 아도고구려에 왔고, 이듬해 소수림왕순도를 위해 초문사(省文寺)를, 아도를 위해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한다.[2]

고려 고종 2년(1215년)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전진이 아니라 동진에서 고구려로 왔다는 설도 있다. 일연삼국유사에서 담시를 언급했지만, 삼국사기 기록을 채택하여 담시아도, 묵호자, 마라난타가 동일 인물일 수 있다고 보았다.[3]

2. 1. 초기 전래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황제 부견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전을 보내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2]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승려 아도가 고구려에 왔으며, 이듬해 소수림왕은 순도를 위해 초문사(省文寺)를, 아도를 위해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한다.[2]

일연삼국유사에서 동진담시가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을 언급하지만, 삼국사기 기록과의 모순 때문에 아도, 묵호자, 마라난타 중 한 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3]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는 순도가 전진이 아닌 동진에서 고구려로 왔다는 설도 소개되어 있다.

최치원은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서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것은 순도가 아니라 동진의 담시라고 주장했다.[6] 순도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며, 그 이전 기록이나 중국 사료의 뒷받침이 없다.[4] 반면, 담시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삼국사기보다 오래되었고, 혜교고승전 등 중국 사료에서도 확인된다.[7] 고승전에는 담시가 태원 말년에 요동으로 가서 백성을 교화하고 삼귀의 오계를 설한 것을 "고구려 개도지시야"라고 기록하고 있다.[7] 또한 신청의 북산록과 법원주림에도 담시가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8]

고구려소수림왕대에 태학을 설치하여 유교 교육을 실시했는데,[9] 이처럼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낙랑군, 대방군중국식민지를 통해 한 문화고구려 사회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9]

2. 2. 소수림왕의 불교 장려

372년, 전진의 부견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하고, 순도를 보냈다. 소수림왕은 답례로 전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2]삼국사기는 이를 "해동 불법의 시작"이라 기록하고 있다.[2]

374년에는 승려 아도고구려에 왔다. 이듬해 소수림왕순도를 위해 초문사(성문사)를, 아도를 위해 이불란사를 창건했다고 한다.[2]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전진이 아닌 동진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2. 3. 낙랑군·대방군과의 관계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불상과 경전을 순도와 함께 고구려에 보내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 전진조공했다.[2]。 『삼국사기』는 이를 "해동 불법의 시작"이라 기록하고 있다.[2]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승려 아도고구려에 왔다. 소수림왕은 이듬해 순도를 위해 초문사를, 아도를 위해 이불란사를 창건했다고 한다.[2]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담시라는 승려가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을 언급했지만, 이것이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시초는 아니라고 보았다.[3]일연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서, 담시아도, 묵호자, 마라난타의 행적이 비슷하므로 이들 중 한 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 추정했다.[3]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전진이 아닌 동진에서 고구려로 왔다는 설도 있다.

3. 관련 사료

일연은 『삼국유사』 권3에서 "원위 석담시(一云혜시)전을 살펴보니, 시는 관중 사람이다. 출가한 이후로 기이한 자취가 많았다. 진 효무 대원 연말에 경률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교화하고, 삼승을 설하여 귀계를 세웠으니, 이는 고구려가 도를 들은 시작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 그러나 일연은 이 "전운"이 혜교의 『고승전』이 아니라 각훈의 『해동고승전』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사』에서는 담시설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담시설을 부정했다. 대신 『동사』인 『삼국사기』를 채택하여 담시, 아도, 묵호자, 마라난타를 동일인으로 추정했다.[3]

최치원은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서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것은 순도가 아니라 동진의 담시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옛날, 조선 삼국이 서로 마주보고 있을 때, 백제에서 소도지 의식을 행한 것은 마치 중국에서 금인(불상)을 감천궁에 모신 것과 같다. 그 후 서쪽의 동진의 담시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하기 위해) (고구려)에 간 것은 마치 (서쪽의 천축의) 가섭마등이 동쪽의 중국에 들어가 (불교를 전한) 것과 같다. 또 고구려의 아도가 남쪽의 우리나라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하여) 중생을 가르친 것은 중국에서 강남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강승회와 같다"[6]。 순도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12세기에 나타난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고 있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중국 사료에 의해 뒷받침되지도 않는다. 반면 최치원의 담시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삼국사기』보다 오래되었으며, 중국 사료에 의해 뒷받침된다.[7]

3. 1. 삼국사기

삼국사기』 권18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조항에 따르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의 황제 부견이 사신을 통해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전을 고구려에 보냈고, 소수림왕은 답례로 사신을 보내 전진에 입공했다.[2]。 『삼국사기』는 이를 "해동 불법의 시작"이라 기록하고 있다.[2]

374년(소수림왕 4년)에는 승려 아도가 고구려에 왔으며, 이듬해 소수림왕은 순도를 위해 초문사(省文寺)를, 아도를 위해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한다.[2]

1215년(고종 2년)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는 순도가 전진이 아닌 동진에서 고구려로 왔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러나 기무라 노리아키는 4세기 고구려 불교에 대한 기록이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만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순도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낸 "날조담"[4]", "일종의 사물 기원 설화로 가탁"[5]된 것이라 주장한다.

3. 2. 해동고승전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서는 순도전진이 아니라 동진에서 고구려로 건너갔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2]

해동고승전』 권1에서는 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3]

위의 내용을 간략하게 번역 및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순도는 출신을 알 수 없으나, 덕망이 높고 자비로운 승려였다. 그는 불교를 널리 알리고자 중국 각지를 다녔으며,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사신과 함께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고구려에 왔다. 소수림왕과 신하들은 그를 초문사(省門寺)에서 맞이하고 크게 기뻐하며,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쳤다. 일설에는 순도가 동진에서 왔다고도 한다. 순도는 서역의 가르침을 전하고 백성들을 교화했으며, 200여 년 뒤 아도고구려에 온 뒤에는 소수림왕이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무르게 하였다.

3. 3. 기타 사료

혜교의 『고승전』에는 "석담시(釋曇始)는 관중 사람으로, 출가한 이후 기이한 자취가 많았다. 진 효무제 태원 말년에 경률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교화하고, 삼귀의 오계를 설하였으니, 고구려에 도(道)가 시작된 시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7]。 『고승전』은 담시가 태원 말년에 관중을 떠나 요동으로 갔고, 그 후 의희 연간에 고구려에서 관중으로 돌아와 장안 근처에서 교화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혜교도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한 발언으로 보인다[7]。 고구려와 멀리 떨어져 교류가 적은 강남에서 편찬된 『고승전』이 굳이 담시에 의한 고구려 교화를 기록한 것은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최치원의 주장과 일치한다.

신청의 『북산록』에도 "진(晉)의 담시(曇始)는 효무제 말년(동진 효무제는 즉위하여 불법을 깊이 받들었고, 부견의 군대가 이르자, 사현(沙門)을 파하였다.)에 요동에 유배되었는데, 고구려에 도(道)가 시작된 시초이다. 후에 삼보(三輔, 함양현)로 돌아왔는데, 삼보 사람들은 그를 종앙(宗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담시에 의한 고구려 교화를 기록하고 있다.

담시가 처음으로 불교를 고구려에 가져왔다는 것은 『법원주림』에도 인정된다[8]

4. 논쟁과 학설

고구려불교 전래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과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황제 부견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전을 보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수림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전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2], 『삼국사기』는 이를 "해동 불법의 시작"이라고 특별히 기록하였다[2]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승려 아도고구려에 왔으며, 이듬해 순도를 위해 초문사(省文寺)를, 아도를 위해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한다[2]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각훈이 저술한 『해동고승전』에는 순도가 전진이 아닌 동진에서 고구려로 건너갔다는 설도 소개되어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담시라는 승려가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을 언급했지만,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의 기록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았다. 일연은 담시설을 부정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채택하여, 담시, 아도, 묵호자, 마라난타의 행적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이들 중 한 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3]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태학을 세워 유교 교육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태학유교와 함께 발전한 불교전진의 순도가 고구려에 들어옴으로써 전래된 것처럼, 고구려의 태학 정비에도 중국계 이민들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9]。 하지만, 중국계 이민들의 역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학과 유교 교육이 가능했던 것은 중국조선에 설치한 식민지낙랑군·대방군의 영향이 컸다. 즉, 고구려가 태학과 유교 교육을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발전했고, 장기간 중국 왕조의 지배를 경험한 낙랑군·대방군을 고구려가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9]。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태학 설치는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순도가 고구려에 온 지 3년 후, 고구려는 소문사와 이불란사를 건립하여 각각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했다. 신라에서 불교 수용 과정에서 이차돈과 같은 순교자가 나오는 등 갈등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불교를 믿었던 낙랑군·대방군을 통해 불교 수용의 기반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귀족 자제 교육을 통해 관리를 양성하는 태학 설치 역시 고구려 사회의 한 문화 수준이 높아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낙랑군·대방군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9]

4. 1. 순도 vs 담시

최치원은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서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것은 동진의 담시라고 주장했다[6]혜교는 『고승전』에 "석담시는 관중 사람으로, 출가한 이후로 기이한 자취가 많았다. 동진 효무제 태원 말년에 경률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백성을 교화하고, 삼귀의 오계를 설한 것을 '고구려 개도지시야'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했다[7]

신청은 『북산록』에서 담시에 의한 고구려 개도를 언급했고, 『법원주림』에도 담시가 처음으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내용이 있다[8]

반면, 『삼국사기』는 372년 전진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가져온 것을 고구려 불교의 시작으로 본다[4]。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동국통감』 등 조선의 사료들도 『삼국사기』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순도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만 근거하며, 그 이전 기록이나 중국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기무라 노리아키는 이를 날조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4]。 반면 최치원의 담시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삼국사기』보다 오래되었고, 중국 사료에서도 뒷받침된다[7]

4. 2.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 전진부견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전한 것을 고구려 불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4] 그러나 기무라 노리아키는 4세기 고구려 불교에 대한 언급이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순도에 의한 불교 전래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날조담'이며, 12세기에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만들어진 일종의 기원 설화라고 주장한다.[4][5]

5. 고구려 불교의 특징

고구려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 강화에 활용하였다. 고구려의 불교는 국가의 보호 아래 성장하였으며,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불교의 특징은 국가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호국불교적인 성격을 띄게 하였다.

6. 영향

죄송합니다. 이전 답변에서 원문 소스가 없다는 점을 명시했지만, 여전히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원문 소스가 제공되어야만 내용을 작성하고 지시사항에 따라 검토 및 수정할 수 있습니다.

참조

[1] 서적 인도 불교문화의 우리나라 전래 https://ko.wikisourc[...]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2] 뉴스 東アジアにおける仏教の伝来と受容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1989-03
[3]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4]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5]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6]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7]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8] 서적 曇始と高句麗仏教 大谷大学佛教学会 1980-05-30
[9] 뉴스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http://contents.nahf[...] 국사편찬위원회
[10] 서적 삼국사기 1145
[11] 서적 삼국사기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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