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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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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 휘종(徽宗, 1082년 ~ 1135년)은 북송의 제8대 황제이다. 그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정치적 실정과 외교적 실패로 인해 정강의 변을 겪고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휘종은 화가, 서예가, 시인, 음악가로서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쇄금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그는 예술 활동을 장려하고, 고려에 악기를 보내는 등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그러나 채경 등 간신을 등용하고, 과도한 토목 공사와 세금 징수로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금나라와의 외교 실패로 북송은 멸망의 위기를 맞았다. 결국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금나라의 침략으로 흠종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금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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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휘종
기본 정보
송 휘종의 궁중 초상화
송 휘종의 궁중 초상화, 족자,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조길(趙佶)
묘호휘종(徽宗)
시호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존호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
출생일1082년 6월 7일
출생지송나라 변량 (현재의 카이펑, 허난, 중국)
사망일1135년 6월 4일
사망지금나라 오국성 (현재의 이란 현, 헤이룽장성, 중국)
매장일1142년
매장지영우릉 (현재의 사오싱, 저장)
아버지신종
어머니흠자황후
로마자 표기Song Huizong
황제 즉위
재위 기간1100년 2월 23일 – 1126년 1월 18일
즉위일1100년 2월 23일
선대 황제철종
후대 황제흠종
태상황제 즉위
재위 기간1126년 1월 18일 ~ 1135년 6월 4일
후대 황제고종
연호
연호건중정국(建中靖國; 1101)
숭녕(崇寧; 1102–1106)
대관(大觀; 1107–1110)
정화(政和; 1111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배우자
황후현공황후 왕씨 (1108년 사망)
현숙황후 정씨 (1131년 사망)
명달황후 유씨 (1113년 사망)
명절황후 유씨 (1121년 사망)
현인황후 위씨 (1135년)
후궁여러 후궁
작위
단왕1096년 4월 16일 ~ 1100년 2월 23일
수녕군왕1085년 4월 23일 ~ 1096년 4월 16일
영국공1083년 11월 13일 ~ 1085년 4월 23일
가족
자녀조환 조구 외 다수
가문조씨
왕조 (북송)
기타
다른 이름혼덕공(昏德公)
로마자 표기 (한어병음)Zhào Jí
로마자 표기 (한어병음)Sòng Huīzōng
로마자 표기 (한어병음)Hūndé Gōng

2. 생애

신종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1100년 2월 형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채로 25세의 일기로 붕어하자, 황제로 즉위한다.[11] 중신들은 다른 황태자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바랐지만, 황태후 상씨(欽聖憲肅皇后)의 뜻에 따라 휘종에게 권좌가 넘어갔다.[11] 치세 초에는 온건한 신법파로 황태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증포를 중용했고, 증포는 신법과 구법 양파로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신법과 구법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점진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휘종(趙佶)은 원부 3년(1100년)에 형 철종이 25세로 후계자 없이 승하함에 따라 황제에 즉위하였다. 재상 장돈 등 중신들은 휘종의 황제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품고 다른 황자(간왕 조사 등)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황태후 향씨의 의향에 따라 휘종이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

향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장돈·채변 등 철종 시대의 급진적인 신법파를 물리치고, 구법파의 한충언과 온건 신법파의 증부를 등용하였다. 그들은 신법·구법 양파에서 인재를 등용하여 신법구법의 다툼을 수습하고, 복지 정책을 충실히 하는 등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휘종 자신도 예술가의 혼이라 할 만큼 붓을 꺾고 정치에 대한 의지를 보였고, 성인이 된 황제가 있는데 수렴청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받은 향태후가 7월에 정무에서 물러나자, 스스로 정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증부와 이청신의 신법파 간의 대립에 구법파까지 휘말리면서 정세는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휘종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급진 신법파의 채경이다. 휘종 즉위 후 향태후의 신임을 배경으로 중앙에 복귀한 그는 일단 휘종과 한충언·증부의 경계를 받아 다시 좌천되었다. 그러나 중앙 정세의 변화를 타고 계략을 써서 한충언·증부를 실각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휘종(徽宗)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지지하는 개혁파를 편들어 국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사랑한 교양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전대의 그림, 서예, 골동품을 수집하여 각 분야에 방대한 컬렉션을 만들었다. 그는 직접 시를 짓고 열렬한 화가로 알려졌으며,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었고, 건축과 정원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의학과 도교에 관한 논문까지 썼다. 그는 궁중 화가로 임명되기 전에 시험을 통해 사전 심사를 거친 화가들을 모았고, 궁중 음악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당대 많은 학자들처럼 그는 다방면에 능한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문화, 종교, 예술적 수단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통성을 선포했다. 1106년에는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상징적인 구족(九鼎)을 새로 주조하게 했다.[1]

휘종은 뛰어난 화가, 시인, 서예가였다.[6] 그는 거문고(古琴) 연주에도 능했는데, 궁궐 안에 "만금당(萬琴堂)"을 두었으며 그의 그림 「聽琴圖」(청금도, 聽琴圖)에서 묘사되었다.[6] 황제는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한림화원(翰林畫院, 한림황실화원)"을 설립하여 중국 전역의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공유하도록 하였다. 그의 그림 소재는 주로 새와 꽃이었으며, 대표작으로 「오색앵무와 살구꽃(五色鸚鵡杏花圖)」이 있다. 장선의 그림 「궁녀들이 새로 짠 비단을 준비하는 모습」을 모사하기도 했는데, 휘종이 재현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사본이다.

송나라 휘종, 「聽琴圖」(청금도, 聽琴圖)


휘종은 "쇄금체(瘦金體)"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창안했다.[6] "쇄금체"는 금실이 꼬이고 도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유의 서체 "금으로 장식한 칼(金錯刀)"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서체는 추수량, 학적, 황정견의 서예 작품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6] 그의 연호 중 하나인 선화(宣和)는 두루마리 그림 걸이 방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휘종의 쇄금체(瘦金體) 양식으로 쓴 "숭녕통보(崇寧通寶)"


1114년, 고려 예종의 요청에 따라 휘종은 개성의 고려 궁궐에 왕실 연회 음악에 사용할 악기를 보냈고, 1116년에는 야악 악기 총 428개를 보내 고려 아악 전통의 시작에 영향을 주었다.[7] 휘종은 다도에도 열정적이어서, 송나라의 정교한 다례 양식을 상세히 설명한 「다경」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외교 정책 처리(그가 받은 조언에 따른)에 대한 결정으로 인해 영원히 오점을 남기게 되었는데, 그의 치세 말기는 송(宋)나라에 재앙의 시대를 알리는 전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휘종은 재위 기간 동안 채경 등 간신을 중용하고, 과도한 세금 징수와 대규모 토목 공사(화석강 등)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11] 특히 정원 조영에 필요한 자재를 남쪽에서 운하를 통해 운반하고(화석강),[11] 예술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였다.[11] 토지 측량 시에는 정규 자보다 짧은 '낙척'이라는 자를 사용하여 여유 토지를 강제로 국고에 편입시키거나, 매매 계약서가 불명확한 토지를 몰수하는 등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11]

외교적으로는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했으나, 이는 오히려 금나라의 침입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했다.[2] 1122년, 송나라는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를 공격하여 오랜 숙적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2] 그러나 이 군사 행동은 송나라와 요나라 국경의 방어림을 훼손했고, 몇 년 후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방어가 허술해진 국경을 통해 금나라 군대가 수도 개봉(開封)을 빠르게 포위하는 결과를 야기했다.[2]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결국 정강의 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폭정으로 민심은 흉흉해졌고, 방랍의 난을 비롯한 민중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11] 이러한 반란 지도자들 중 산동에서 활동한 송강은 강담에서 발전하여 탄생한 소설 『수호전』의 모델이 되었다.[11]

1121년,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맹약에 의해 요나라를 공격했지만, 송나라는 방랍의 난 진압과 휘종의 결단력 부족으로 출병이 지연되었다.[12] 이듬해 송나라는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연경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송군 지휘관 동관은 금에 원군을 요청했다.[2] 해상의 맹에 의해 금나라는 장성 이남에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송나라의 요청에 의해 출병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연운16주 중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었지만, 금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세수를 징수할 수 없었다. 또한 금은 연경 출병의 대가로 막대한 양의 은, 비단, 돈, 군량을 요구했고, 북송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12]

1125년, 송나라는 연운16주의 일부 반환에는 성공하였지만, 금에 점령된 나머지 주의 탈환을 계획하고, 요나라의 패잔군과 몰래 금을 합공 하기로 획책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금에 발각되어 금나라 태종 오기매가 송나라로 출병하는 사태를 초래한다.[12] 당황한 휘종은 죄기조를 내어 퇴위하고, 장남인 황태자 조환(흠종)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12] 휘종은 금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봉에서 탈출했지만, 흠종에 의해 되돌아 오게 되었다.

1126년, 금나라는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은 동시에 금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정강의 변).[13][14][15]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13][14][15] 한편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고종)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남 임안에 남송을 건국하여 송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 부자는 오국성에 보내졌다. 1128년, 두 전직 송나라 황제는 상경(上京, 회녕부)의 금나라 조상 제단에서 상복을 입고 금나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휘종은 1135년에 생을 마감하고[13][14][15] 그 아들 흠종은 116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2. 1. 즉위 초

신종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1100년 2월 형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채로 25세의 일기로 붕어하자, 황제로 즉위한다.[11] 중신들은 다른 황태자에 의한 황위 계승을 바랐지만, 황태후 상씨(欽聖憲肅皇后)의 뜻에 따라 휘종에게 권좌가 넘어갔다.[11] 치세 초에는 온건한 신법파로 황태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증포를 중용했고, 증포는 신법과 구법 양파로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신법과 구법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점진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휘종(趙佶)은 원부 3년(1100년)에 형 철종이 25세로 후계자 없이 승하함에 따라 황제에 즉위하였다. 재상 장돈 등 중신들은 휘종의 황제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품고 다른 황자(간왕 조사 등)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황태후 향씨의 의향에 따라 휘종이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

향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장돈·채변 등 철종 시대의 급진적인 신법파를 물리치고, 구법파의 한충언과 온건 신법파의 증부를 등용하였다. 그들은 신법·구법 양파에서 인재를 등용하여 신법구법의 다툼을 수습하고, 복지 정책을 충실히 하는 등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휘종 자신도 예술가의 혼이라 할 만큼 붓을 꺾고 정치에 대한 의지를 보였고, 성인이 된 황제가 있는데 수렴청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받은 향태후가 7월에 정무에서 물러나자, 스스로 정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증부와 이청신의 신법파 간의 대립에 구법파까지 휘말리면서 정세는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휘종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급진 신법파의 채경이다. 휘종 즉위 후 향태후의 신임을 배경으로 중앙에 복귀한 그는 일단 휘종과 한충언·증부의 경계를 받아 다시 좌천되었다. 그러나 중앙 정세의 변화를 타고 계략을 써서 한충언·증부를 실각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2. 2. 예술적 재능과 사치

휘종은 뛰어난 화가, 시인, 서예가였다.[6] 그는 거문고(古琴) 연주에도 능했는데, 궁궐 안에 "만금당(萬琴堂)"을 두었으며 그의 그림 「聽琴圖」(청금도, 聽琴圖)에서 묘사되었다.[6] 황제는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한림화원(翰林畫院, 한림황실화원)"을 설립하여 중국 전역의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공유하도록 하였다. 그의 그림 소재는 주로 새와 꽃이었으며, 대표작으로 「오색앵무와 살구꽃(五色鸚鵡杏花圖)」이 있다. 장선의 그림 「궁녀들이 새로 짠 비단을 준비하는 모습」을 모사하기도 했는데, 휘종이 재현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사본이다.

휘종은 "쇄금체(瘦金體)"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창안했다.[6] "쇄금체"는 금실이 꼬이고 도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유의 서체 "금으로 장식한 칼(金錯刀)"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서체는 추수량, 학적, 황정견의 서예 작품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6] 그의 연호 중 하나인 선화(宣和)는 두루마리 그림 걸이 방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1114년, 고려 예종의 요청에 따라 휘종은 개성의 고려 궁궐에 왕실 연회 음악에 사용할 악기를 보냈고, 1116년에는 야악 악기 총 428개를 보내 고려 아악 전통의 시작에 영향을 주었다.[7] 휘종은 다도에도 열정적이어서, 송나라의 정교한 다례 양식을 상세히 설명한 「다경」을 저술했다.

2. 3. 실정과 외교적 실패

휘종은 재위 기간 동안 채경 등 간신을 중용하고, 과도한 세금 징수와 대규모 토목 공사(화석강 등)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11] 특히 정원 조영에 필요한 자재를 남쪽에서 운하를 통해 운반하고(화석강),[11] 예술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였다.[11] 토지 측량 시에는 정규 자보다 짧은 '낙척'이라는 자를 사용하여 여유 토지를 강제로 국고에 편입시키거나, 매매 계약서가 불명확한 토지를 몰수하는 등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11]

외교적으로는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했으나, 이는 오히려 금나라의 침입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했다.[2] 1122년, 송나라는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를 공격하여 오랜 숙적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2] 그러나 이 군사 행동은 송나라와 요나라 국경의 방어림을 훼손했고, 몇 년 후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방어가 허술해진 국경을 통해 금나라 군대가 수도 개봉(開封)을 빠르게 포위하는 결과를 야기했다.[2]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결국 정강의 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폭정으로 민심은 흉흉해졌고, 방랍의 난을 비롯한 민중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11] 이러한 반란 지도자들 중 산동에서 활동한 송강은 강담에서 발전하여 탄생한 소설 『수호전』의 모델이 되었다.[11]

2. 4. 정강의 변과 몰락

1121년,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맹약에 의해 요나라를 공격했지만, 송나라는 방랍의 난 진압과 휘종의 결단력 부족으로 출병이 지연되었다.[12] 이듬해 송나라는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연경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송군 지휘관 동관은 금에 원군을 요청했다.[2] 해상의 맹에 의해 금나라는 장성 이남에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송나라의 요청에 의해 출병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연운16주 중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었지만, 금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세수를 징수할 수 없었다. 또한 금은 연경 출병의 대가로 막대한 양의 은, 비단, 돈, 군량을 요구했고, 북송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12]

1125년, 송나라는 연운16주의 일부 반환에는 성공하였지만, 금에 점령된 나머지 주의 탈환을 계획하고, 요나라의 패잔군과 몰래 금을 합공 하기로 획책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금에 발각되어 금나라 태종 오기매가 송나라로 출병하는 사태를 초래한다.[12] 당황한 휘종은 죄기조를 내어 퇴위하고, 장남인 황태자 조환(흠종)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12] 휘종은 금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봉에서 탈출했지만, 흠종에 의해 되돌아 오게 되었다.

1126년, 금나라는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은 동시에 금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정강의 변).[13][14][15]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13][14][15] 한편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고종)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남 임안에 남송을 건국하여 송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 부자는 오국성에 보내졌다. 1128년, 두 전직 송나라 황제는 상경(上京, 회녕부)의 금나라 조상 제단에서 상복을 입고 금나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휘종은 1135년에 생을 마감하고[13][14][15] 그 아들 흠종은 116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3. 예술가로서의 휘종

문인, 음악가, 화가로서 휘종의 재능은 높게 평가되며, 송대를 대표할만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휘종은 수금체(瘦金體)라고 칭해지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고, 광초(狂草)라는 초서체에도 능했다.[20] 회화로는 사실적인 원체화(院體畫)를 완성하여 풍류천자라고 칭해졌다. 특히 산수화와 화조화에 정통했으며 인재의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휘종 대에 송나라 회화는 크게 발전했다.[24] 휘종은 도화박사원(圖畵博士院)을 설립하고 당시에서 따온 구절로 그림을 그리게 하여 궁중화원을 뽑았으며 그 규모도 크게 늘렸다.[25] 또한 진궁(眞宮), 오악관(五岳觀)을 짓고 용덕궁(龍德宮)을 개축하여 화원들에게 그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25] 현재 휘종의 친필은 극히 귀중한 문화재가 되어 있으며, 일본에 있는 도구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음악에 있어서는 대악에 큰 뜻을 품고 쇠퇴한 아악(雅樂)을 정비하기 위하여 음률에 밝은 위한진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제례음악인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창시하였다. 더불어 악제개혁을 단행하여 태상시에서 관장하던 예와 악을 분리시키고 악은 새로이 설립한 대성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이러한 대성아악을 고려 예종에게 전해주기도 하였다. 그 외 희곡, 바둑, 축국 등에도 능했다.[20]

휘종은 뛰어난 화가, 시인, 그리고 서예가였다. 그는 또한 거문고(古琴) 연주자이기도 했는데 궁궐 안에 "만금당(萬琴堂, 만 개의 거문고가 있는 궁전)"이 있었다.

황제는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 전역의 최고 화가들이 최고의 작품을 공유하는 "한림화원(翰林畫院, 한림황실화원)"을 설립했다.

그의 그림의 주요 소재는 새와 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오색앵무와 살구꽃(五色鸚鵡杏花圖)」이 있다. 그는 또한 장선의 그림 「궁녀도(宮中繡像)|궁녀들이 새로 짠 비단을 준비하는 모습」을 모사했는데, 휘종이 재현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사본이다.

휘종은 "수금체(瘦金體)"라는 서체를 창안했다. "수금체(瘦金體)"라는 이름은 황제의 글씨가 금실이 꼬이고 도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남당(南唐)의 이유(李煜)가 자신의 서체를 "금으로 장식한 칼(金錯刀)"이라고 부른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떤 이론에서는 그의 기법이 추수량(褚遂良), 학적(薛稷), 또는 황정견(黃庭堅)의 서예 작품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6]

황제의 연호 중 하나인 선화(宣和)는 두루마리 그림 걸이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 방식에서는 일부 비단 부분 사이에 검은 테두리가 추가된다.

1114년, 고려의 지배자 예종의 요청에 따라 휘종은 고려 수도 개성의 궁궐로 왕실 연회 음악에 사용할 악기를 보냈다. 2년 후인 1116년, 그는 고려 조정에 훨씬 더 많은 악기(총 428개)를 보냈는데, 이번에는 아악(雅樂) 악기였으며, 이것이 고려아악(雅樂) 전통의 시작이었다.[7]

휘종은 또한 열렬한 다도 애호가였다. 그는 「다경(茶經)|다경」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송나라의 정교한 다례 양식에 대한 가장 상세하고 뛰어난 설명을 담고 있다.

휘종의 유명한 후손으로는 그의 딸 조금락(趙金籙)을 통해 조맹부(趙孟頫)가 있다.

, 송나라 휘종의 중국 비단 그림, 12세기 초.]]

『주례』를 기반으로 고대의 예제 부활을 도모하기 위해 『정화오례신의』를 편찬하고, 스스로도 집필에 참여하였다. 또한, 『선화서보/宣和書譜중국어』『선화화보』『선화박고도록/宣和博古图录중국어』과 같은 서화 골동품의 도록을 칙선하였다.[16] 그 외에도 다서인 『대관다론』을 저술하였다.

3. 1. 회화

휘종은 뛰어난 화가, 시인, 서예가였다.[6] 산수화, 화조화에 능했으며, 궁중 화원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송나라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표작으로는 〈도구도〉, 〈매화와 새〉 등이 있다.

황제는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 전역의 최고 화가들이 최고의 작품을 공유하는 "한림화원(翰林畫院, 한림황실화원)"을 설립했다. 그의 그림의 주요 소재는 새와 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오색앵무와 살구꽃(五色鸚鵡杏花圖)」이 있다. 그는 또한 장선의 그림 「궁녀들이 새로 짠 비단을 준비하는 모습」을 모사했는데, 휘종이 재현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사본이다.[6]

휘종은 "쇄금체(瘦金體)"라는 서체를 창안했다. "쇄금체"라는 이름은 황제의 글씨가 금실이 꼬이고 도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이유가 자신의 서체를 "금으로 장식한 칼(金錯刀)"이라고 부른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떤 이론에서는 그의 기법이 추수량, 학적, 또는 황정견의 서예 작품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6]

3. 2. 서예

휘종(徽宗)은 뛰어난 서예가였다.[6] 그는 "쇄금체(瘦金體)"라는 서체를 창안했는데, "쇄금체"라는 이름은 황제의 글씨가 금실이 꼬이고 도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6] 이는 이유가 자신의 서체를 "금으로 장식한 칼(金錯刀)"이라고 부른 것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6] 어떤 이론에서는 그의 기법이 추수량, 학적, 또는 황정견의 서예 작품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6]

3. 3. 음악 및 기타

휘종(徽宗)은 뛰어난 화가, 시인, 서예가였다.[6] 그는 거문고(古琴) 연주자였으며, 궁궐 안에 "만금당(萬琴堂, 만 개의 거문고가 있는 궁전)"이 있었다.[6] 황제는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한림화원(翰林畫院, 한림황실화원)"을 설립하여 중국 전역의 최고 화가들이 최고의 작품을 공유하도록 하였다.[6]

그의 그림은 주로 새와 꽃을 소재로 하였으며, 「오색앵무와 살구꽃(五色鸚鵡杏花圖)」등의 작품이 있다.[6] 또한 장선의 그림 「궁녀들이 새로 짠 비단을 준비하는 모습」을 모사했는데, 휘종이 재현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사본이다.[6]

휘종은 "쇄금체(瘦金體)"라는 서체를 창안했다.[6] "쇄금체"라는 이름은 황제의 글씨가 금실이 꼬이고 도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으며, 이유의 서체 "금으로 장식한 칼(金錯刀)"에서 영감을 받았다.[6] 그의 기법은 추수량, 학적, 또는 황정견의 서예 작품을 바탕으로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6]

황제의 연호 중 하나인 선화(宣和)는 두루마리 그림 걸이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된다.[6]

1114년, 고려 예종의 요청에 따라 휘종은 고려 수도 개성의 궁궐에 왕실 연회 음악에 사용할 악기를 보냈고, 1116년에는 아악 악기(총 428개)를 보내 고려 아악 전통의 시작에 기여했다.[7]

휘종은 또한 열렬한 다도 애호가였으며, 송나라의 정교한 다례 양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은 「다경」을 저술했다.[6]

휘종의 유명한 후손으로는 그의 딸 조금락(趙金籙)을 통해 조맹부가 있다.

4. 정치적 평가

4. 1. 실정

4. 2. 외교적 실패

5. 역사적 교훈

휘종의 몰락은 예술적 재능과 정치적 역량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8] 더불어민주당은 지도자의 자질과 도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탐욕과 무능은 국가와 백성에게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특히,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서 휘종의 예술적 업적만을 부각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의 정치적 실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화가 증번지는 '금강산도(聽琴圖)'를 "송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여기며, 10년 넘게 그 그림 속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관찰해 왔다고 알려진다.[8]

6. 가족 관계

현공황후(顯恭皇后) 왕씨(王氏)는 1084년에 태어나 1108년에 사망했으며, 조환(趙桓)과 금노(金奴)를 낳았다.[27] 현숙황후(顯肅皇后) 정씨(鄭氏)는 1079년에 태어나 1131년에 사망했으며, 조유반(趙玉盤), 연왕(兗王) 조택(趙檉), 금라(金羅) 등을 낳았다.[27] 이 외에도 명달황후(明達皇后) 유씨(劉氏), 명절황후(明節皇后) 유씨(劉氏), 현인황후(顯仁皇后) 위씨(韋氏) 등이 있었다.

의숙귀비(懿肅貴妃) 왕씨(王氏)는 조식(趙植), 조환환(嬛嬛) 등을 낳았다. 귀비(貴妃) 왕씨(王氏)는 조개(趙楷) 등을 낳았다. 귀비(貴妃) 조씨(喬氏)는 경왕(景王) 조기(趙杞) 등을 낳았다. 귀비(貴妃) 최씨(崔氏)는 삼금(三金) 등을 낳았다. 귀비(貴妃) 왕씨(王氏)는 조액(趙㮙) 등을 낳았다. 현비(賢妃) 양씨(楊氏)는 조식(趙栻)을 낳았다. 완용(婉容) 왕씨(王氏)는 조주주(趙珠珠) 등을 낳았다. 완용(婉容) 염씨(閻氏)는 조주(趙柱)를 낳았다. 조원(昭媛) 정씨(鄭氏)는 조탄(趙檀)을 낳았다. 수용(修容) 한씨(韓氏)는 조견(趙楗) 등을 낳았다. 제여(婕妤) 왕씨(王氏)는 조상(趙相)을 낳았다. 재인(才人) 조씨(喬氏)는 조교운(巧雲)을 낳았다.

휘종은 아들 31명, 딸 34명을 두었다.[27] 조환은 휘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조구남송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27] 조옥반(趙玉盤), 금노(金奴), 금라(金羅), 조복금(趙福金), 조부금(趙富金) 등은 금나라에 끌려가 여러 남자들에게 재가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27] 조환환(嬛嬛)은 금나라에서 여러 번 혼인 관계를 맺었다. 조주주(趙珠珠)는 금나라에서 완안사보(完顏斜保)와 혼인했다. 조교운(趙巧雲), 조금주(趙金珠), 조불보(趙仏保) 등은 금나라의 세탁원에 들어갔다.[27] 조금인(趙金印), 조새월(趙賽月), 조금고(趙金姑) 등은 완안단(完顏亶)의 후궁이 되었다.[27]

6. 1. 황후

현공황후 왕씨는 1100년부터 1108년까지 황후로 재위했으며, 1084년에 태어나 1108년에 사망했다.[28] 아버지는 영국공 왕조, 어머니는 위국태부인 여씨이다. 능묘는 유릉이다. 현숙황후 정씨는 1111년부터 1125년까지 황후로 재위했으며, 1079년에 태어나 1131년에 사망했다.[29] 아버지는 남양군희정왕 정신이다. 능묘는 영우릉이다. 이외에도 명달황후 유씨, 명절황후 유씨, 현인황후 위씨 등이 추존되었다.[30][32][34]

봉호시호이름(성씨)재위년도생몰년도비고
황후(皇后)현공황후
(顯恭皇后)
왕씨(王氏)1100년 ~ 1108년1084년 ~ 1108년
황후(皇后)현숙황후
(顯肅皇后)
정씨(鄭氏)1111년 ~ 1125년1079년 ~ 1131년
귀비(貴妃)명달황후
(明達皇后)
유씨(劉氏)(추존)? ~ 1113년[31]
귀비(貴妃)명절황후
(明節皇后)
유씨(劉氏)(추존)1088년 ~ 1121년[33]
현비(賢妃)현인황후
(顯仁皇后)
위씨(韋氏)(추존)1080년 ~ 1159년[35]


6. 2. 후궁

휘종은 귀비, 빈, 첩여, 재인, 귀인, 미인 등 다수의 후궁을 두었다.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귀비(貴妃)의숙귀비
(懿肅貴妃)
왕씨(王氏)평창군군(平昌郡君)? ~ 1117년
귀비(貴妃)왕씨(王氏)수창군군(壽昌郡君)
숙비(淑妃)
대귀비(大貴妃)
귀비(貴妃)왕씨(王氏)평창군군(平昌郡君)
덕비(德妃)
소귀비(小貴妃)
1092년 ~ 1127년
귀비(貴妃)교씨(喬氏)의춘군군(宜春郡君)
덕비(德妃)
1081년 ~ ?
귀비(貴妃)숙비(淑妃)최씨(崔氏)평창군군(平昌郡君)
덕비(德妃)
1091년 ~ 1130년폐서인 되나 숙비로 복원.
수용(修容)현비(賢妃)양씨(揚氏)영가군군(永嘉郡君)? ~ 1115년



빈(賓)으로는 숙의 금롱옥(淑儀 金弄玉), 숙용 배월리항아(淑容 裴月裏嫦娥), 숙용 진교자(淑容 陳嬌子), 충의 신관음(充儀 申觀音), 충의 좌보금(充儀 左寶琴), 충용 신유랑(充容 新劉娘), 충용 진회산(充容 秦懷珊)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충원 석주주(充媛 席珠珠), 충원 해교방(充媛 奚巧芳), 귀의 금추월(貴儀 金秋月), 귀의 주계림(貴儀 朱桂林), 소의 하씨(昭儀 夏氏), 소의 주소휘(昭儀 朱素輝), 소용 이주원(昭容 李珠媛), 소용 왕삼보노(昭容 王三寶奴), 소원 정미랑(昭媛 鄭媚娘), 수의 육교노(修儀 陸嬌奴), 수의 장경신(修儀 蔣敬身), 수용 황보금(修容 黃寶琴), 수용 모주영(修容 毛朱英), 수용 진대화(修媛 陳大和), 순의 조용(順儀 曹柔), 순용 서산화(順容 徐散花), 순용 주경추(順容 周鏡秋), 완의 임월자(婉儀 林月姉), 완용 왕월궁(婉容 王月宮), 완용 임금노(婉容 任金奴), 완용 염보슬(婉容 閻寶瑟) 등이 있었다.

세부(世婦)로는 신첩여 왕씨(新婕妤 王氏), 소첩여 왕씨(小婕妤 王氏), 첩여 해불불(婕妤 奚拂拂), 첩여 배보경(婕妤 裴寶卿), 첩여 관운향(婕妤 管芸香), 첩여 사영서(婕妤 謝詠絮), 첩여 강봉우(婕妤 江鳳羽), 첩여 구교운(婕妤 邱巧雲), 첩여 유봉요(婕妤 劉蜂腰), 첩여 곽소노(婕妤 郭小奴), 첩여 유국선(婕妤 劉菊仙), 첩여 염월미(婕妤 閻月媚) 등이 있었다.

재인으로는 재인 교씨(才人 喬氏), 재인 주류요(才人 朱柳腰), 재인 막청련(才人 莫靑蓮), 재인 엽소홍(才人 葉小紅), 재인 주춘도(才人 周春桃), 재인 조소불노(才人 曹小佛奴), 재인 이철적(才人 李鐵笛), 재인 적금노(才人 狄金奴), 재인 소원노(才人 邵元奴), 재인 방조운(才人 方朝雲), 재인 형심향(才人 邢心香), 재인 요소교노(才人 姚小嬌奴), 재인 나취양비(才人 羅醉楊妃), 재인 정운선(才人 程雲仙), 재인 고요운(才人 高曉雲), 재인 금소금계(才人 金小金雞) 등이 있었다.

귀인으로는 귀인 형소금(貴人 邢小金), 귀인 노요요(貴人 盧嫋嫋), 귀인 주하남(貴人 周河南), 귀인 경앵도(貴人 景櫻桃), 귀인 하수금(貴人 何羞金), 귀인 신향노(貴人 辛香奴), 귀인 위불면(貴人 衛佛面)이 있었다. 미인으로는 미인 서계계(美人 徐癸癸), 미인 주봉운(美人 朱鳳雲), 미인 풍보옥아(美人 馮寶玉兒), 미인 예춘운(美人 芮春雲), 미인 조관주(美人 曹串珠), 미인 고묘아(美人 顧貓兒), 미인 유소련(美人 兪小蓮)이 있었다.

그 외에도 법외(法外)의 어처(御妻)로 외명부 작위를 이용한 복국부인 형불미(福國夫人 邢佛迷) 등이 있었다.

6. 3. 황자

휘종은 흠종 조환, 남송 고종 조구를 포함하여 31명의 아들을 두었다.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황태자(皇太子)조환(趙桓)1100년 ~ 1161년현공황후 왕씨한국공(韓國公)
경조군왕(京兆郡王)
정왕(定王)
북송 제9대 황제 흠종.
2연왕(兗王)충희(沖僖)조정(趙檉)1101년현숙황후 정씨요절함.
3운왕(鄆王)조해(趙楷)1101년 ~ 1130년대귀비 왕씨위국공(魏國公)
고밀군왕(高密郡王)
가왕(嘉王)
4형왕(荊王)도민(悼敏)조즙(趙楫)1102년 ~ 1103년초국공(楚國公)
낙안군왕(樂安郡王)
요절함.
5숙왕(肅王)조추(趙樞)1103년 ~ 1130년오국공(吳國公)
건안군왕(建安郡王)
6경왕(景王)조기(趙杞)1104년 ~ 1138년기국공(冀國公)
문안군왕(文安郡王)
7제왕(濟王)조허(趙栩)1106년 ~ ?귀비 교씨노국공(魯國公)
안강군왕(安康郡王)
8익왕(益王)조역(趙棫)1107년 ~ 1137년명달황후 유씨양국공(楊國公)
제양군왕(濟陽郡王)
9강왕(康王)조구(趙構)1107년 ~ 1187년현인황후 위씨촉국공(蜀國公)
광평군왕(廣平郡王)
남송 초대 황제 고종.
10빈왕(邠王)충목(沖穆)조재(趙材)1107년 ~ 1116년위국공(魏國公)요절함.
11기왕(祁王)조모(趙模)1107년 ~ 1138년명달황후 유씨진국공(鎮國公)
낙안군왕(樂安郡王)
12신왕(莘王)조식(趙植)1108년 ~ 1148년의숙귀비 왕씨오국공(吳國公)
신도군왕(信都郡王)
13의왕(儀王)조박(趙樸)1109년 ~ 1123년옹국공(雍國公)
화원군왕(華原郡王)
14서왕(徐王)조체(趙棣)1109년 ~ ?서국공(徐國公)
고평군왕(高平郡王)
15기왕(沂王)조악(趙㮙)1110년 ~ 1132년소귀비 왕씨기국공(冀國公)
하간군왕(河間郡王)
16운왕(鄆王)충의(沖懿)조공(趙栱)1110년 ~ 1112년정국공(定國公)요절함.
17화왕(和王)조식(趙栻)1111년 ~ 1128년현비 양씨광국공(廣國公)
남강군왕(南康郡王)
18신왕(信王)조진(趙榛)1111년 ~ 1139년명달황후 유씨복국공(福國公)
평양군왕(平陽郡王)
19한왕(漢王)충소(沖昭)조춘(趙椿)1112년 ~ 1113년숙비 최씨경국공(慶國公)
20안강군왕(安康郡王)조악(趙楃)1112년 ~ ?위국공(衛國公)
운국공(鄆國公)
21광평군왕(廣平郡王)조건(趙楗)1112년 ~ ?한국공(韓國公)
22진왕(陳王)도혜(悼惠)조기(趙機)1114년의숙귀비 왕씨진국공(陳國公)요절함.
23상국공(相國公)조천(趙梴)1114년 ~ 1137년대귀비 왕씨
24영국공(瀛國公)조월(趙樾)1115년 ~ 1131년
25건안군왕(建安郡王)조앙(趙柍)1115년 ~ 1127년명절황후 유씨혜국공(惠國公)
26가국공(嘉國公)조의(趙椅)1118년 ~ 1130년명절황후 유씨
27온국공(溫國公)조동(趙棟)1119년 ~ ?
28영국공(英國公)조사(趙楒)1120년 ~ ?명절황후 유씨
29의국공(儀國公)조동(趙桐)1121년 ~ 1148년
30창국공(昌國公)조병(趙柄)1122년 ~ 1132년
31윤국공(潤國公)조종(趙樅)1123년 ~ ?
32한국공(韓國公)조상(趙相)1125년 ~ ?[36]
33조극(趙極)1127년 ~ ?소첩여 왕씨[37]
34조주(趙柱)1130년 ~ ?완용 염보슬[38]
35조단(趙檀)1131년 ~ ?소원 정미랑[39]



장남 조환은 휘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으며, 9남 조구는 남송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조재, 조식, 조박, 조굉, 조식, 조춘, 조기, 조의는 요절하거나, 금나라에서 사망하였다. 조월은 금나라의 오국성에서 자살하였고, 조괴는 정강의 변 무렵 사망하였다. 조극, 조주, 조단은 금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 외에도 기록되지 않은 황자들이 있었다.

6. 4. 황녀

휘종은 34명의 딸을 두었다.[40][41][42][43] 이들 중 가덕제희(嘉德帝姬) 조옥반(趙玉盤)은 현숙황후 정씨(顕粛皇后鄭氏) 소생으로, 송나라에서 증인(曾夤)에게 시집갔다가 금나라에서 완안종반(完顔宗磐)에게 재가했고, 이후 금 희종(熙宗)의 후궁이 되었다. 영덕제희(榮德帝姬) 조금노(趙金奴)는 현공황후 왕씨(顕恭皇后王氏) 소생으로 흠종(欽宗)의 동복 누이이다. 송나라에서 조성(曹晟)에게 시집갔다가 금나라에서 완안창(完顔昌)과 습고왕(習古国王)에게 차례로 재가했으며, 금 희종의 후궁이 되었다. 안덕제희(安徳帝姬) 조금라(趙金羅)는 현숙황후 정씨 소생으로, 송나라에서 송방광(宋邦光)에게 시집갔다가 금나라에서 완안자모(完顔闍母)에게 재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무덕제희(茂徳帝姬) 조복금(趙福金)은 명달황후 유씨(明達皇后劉氏) 소생으로, 송나라에서 채견(蔡鞗)에게 시집갔다가 금나라에서 완안종망(完顔宗望)에게 재가했다. 순덕제희(洵徳帝姫) 조부금(趙富金)은 명달황후 유씨 소생으로, 송나라에서 전비(田丕)에게 시집갔다가 금나라에서 완안설야마(完顔設野馬)에게 재가했다.

순숙제희(順淑帝姬)는 현비 양씨(賢妃楊氏) 소생으로 요절했다. 수숙제희(寿淑帝姫)는 현숙황후 정씨(顕粛皇后鄭氏) 소생, 혜숙제희(恵淑帝姫)는 의숙귀비 왕씨(懿粛貴妃王氏) 소생[17], 안숙제희(安淑帝姫)는 명달황후 유씨(明達皇后劉氏) 소생[18], 강숙제희(康淑帝姫)는 의숙귀비 왕씨 소생[19], 영숙제희(栄淑帝姫)는 현숙황후 정씨 소생, 보숙제희(保淑帝姫)는 귀비 왕씨(貴妃王氏) 소생으로 모두 요절했다. 숭덕제희(崇徳帝姫)는 귀비 왕씨 소생으로 조식(曹湜)에게 시집갔고 송나라에서 사망했다. 성덕제희(成徳帝姬) 조호아(趙瑚児)는 현숙황후 정씨 소생이다. 현덕제희(顕徳帝姫) 조교운(趙巧云)은 재인 조씨(才人喬氏) 소생으로, 송나라에서 유문언(劉文彦)에게 시집갔다가 금나라 세탁원(洗衣院)에 들어갔다. 희숙제희(熙淑帝姫)는 귀비 왕씨 소생이다. 둔숙제희(敦淑帝姫) 조삼금(趙三金)은 숙비 최씨(淑妃崔氏) 소생으로 요절했다. 순덕제희(順徳帝姫) 조영락(趙纓絡), 유복제희(柔福帝姫) 조다부(趙多富)는 의숙귀비 왕씨 소생이다. 혜복제희(恵福帝姫) 조주주(趙珠珠)는 완용왕씨(婉容王氏) 소생으로 금나라에서 완안사보(完顔斜保)에게 시집갔다. 보복제희(保福帝姬) 조선랑(趙仙郎)은 수용 한씨(修容韓氏) 소생으로 정강의 변(靖康の変) 무렵에 사망했다. 현복제희(賢福帝姬) 조금아(趙金児)는 의숙귀비 왕씨 소생으로 정강의 변 무렵에 사망했다. 녕복제희(寧福帝姫) 조천주(趙串珠)는 숙비 최씨 소생으로 금나라에서 완안종준(完顔宗雋)에게 시집갔다. 인복제희(仁福帝姬) 조향운(趙香雲)은 숙비 최씨 소생으로 정강의 변 무렵에 사망했다. 화복제희(和福帝姬) 조금주(趙金珠)는 명절황후 유씨(明節皇后劉氏) 소생으로 금나라 세탁원에 들어갔다. 영복제희(永福帝姬) 조불보(趙仏保)는 숙비 최씨 소생으로 금나라 세탁원에 들어갔다. 령복제희(令福帝姬) 조금인(趙金印), 화복제희(華福帝姫) 조새월(趙賽月), 경복제희(慶福帝姫) 조금고(趙金姑)는 금 희종의 후궁이 되었다. 의복제희(儀福帝姬) 조원주(趙円珠)는 금나라에서 완안종필(完顔宗弼)에게 시집갔다. 순복제희(純福帝姫) 조금령(趙金鈴)은 금나라에서 왕성제(王成棣)에게 시집갔다. 공복제희(恭福帝姫) 조소금(趙小金)은 남송(南宋)에서 요절했다. 전복제희(全福帝姫)는 금나라에서 태어나 서하(西夏)의 이둔복(李敦復)에게 시집갔다.

휘복제희(徽福帝姬) 조금선(趙金仙)은 숙비 최씨 소생으로 요절하였다. 신복제희(申福帝姫)는 현비 왕씨(賢妃王氏)의 딸이다.

이상의 내용은 『송사(宋史)』, 『금사(金史)』, 『송회요집고(宋会要輯稿)』, 『정강패사전증(靖康稗史箋證)』,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会編)』을 근거로 한다.

7. 연호

휘종은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7년), 중화(重和, 1118년 ~ 1119년), 선화(宣和, 1119년 ~ 1125년)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휘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서력
(西曆)
1101년1102년1103년1104년1105년1106년1107년1108년1109년1110년
간지
(干支)
신사(辛巳)임오(壬午)계미(癸未)갑신(甲申)을유(乙酉)병술(丙戌)정해(丁亥)무자(戊子)기축(己丑)경인(庚寅)
연호
(年號)
건중정국
(建中靖國)
원년
숭녕(崇寧)
원년
2년3년4년5년대관(大觀)
원년
2년3년4년
휘종11년12년13년14년15년16년17년18년19년20년
서력
(西曆)
1111년1112년1113년1114년1115년1116년1117년1118년1119년1120년
간지
(干支)
신묘(辛卯)임진(壬辰)계사(癸巳)갑오(甲午)을미(乙未)병신(丙申)정유(丁酉)무술(戊戌)기해(己亥)경자(庚子)
연호
(年號)
정화(政和)
원년
2년3년4년5년6년7년8년
중화(重和)
원년
2년
선화(宣和)
원년
2년
휘종21년22년23년24년25년
서력
(西曆)
1121년1122년1123년1124년1125년
간지
(干支)
신축(辛丑)임인(壬寅)계묘(癸卯)갑진(甲辰)을사(乙巳)
연호
(年號)
3년4년5년6년7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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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서 정강의 변 이전 출생
[37] 문서 금나라 압송 중 출생
[38] 문서 금나라 출생
[39] 문서 금나라 출생
[40] 문서 금나라 끌려감 후 남송 환국
[41] 문서 정강의 변 당시 미압송
[42] 문서 금나라 압송 중 출생
[43] 문서 금나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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